네 남자와 어쩌다 여름이의 모든 챕터: 챕터 41 - 챕터 50

52 챕터

제41화: 핏빛 오마카세, 그리고 꺾인 독사의 이빨

주말 오후,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최고급 프라이빗 오마카세 레스토랑."여기, 서명하시면 됩니다."법무사의 안내에 따라 윤의경이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옆에 앉은 이태준은 그 모습을 보며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군더더기 없이 떨어지는 고급스러운 버버리(Burberry) 트렌치코트와 네이비 수트는 평소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그의 아우라를 돋보이게 했다."축하합니다, 윤의경 씨. 아니, 이제 윤여름 양의 법정대리인 건물주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아휴, 놀리지 마세요. 도장 찍으면서도 손이 다 떨렸단 말이에요." 의경이 얼굴을 붉히며 서류를 품에 안았다."여름이 명의로 된 거지만, 의경 씨가 원한다면 언제든 처분해서 마음대로 써도 됩니다. 당신과 아이가 평생 돈 때문에 고개 숙일 일 없게 만들어주고 싶었어요."태준의 올곧고 깊은 눈빛에 의경의 심장이 다시 한번 쿵, 내려앉았다. 대건 로펌이라는 지옥에서 자신들을 꺼내주고, 완벽한 울타리까지 쳐주는 이 남자. 그 묵직한 진심에 의경은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애써 고개를 돌렸다.예약된 VVIP 전용 룸으로 안내를 받은 두 사람. 방 안에는 최고급 편백나무 향이 은은하게 퍼져 있었고, 한구석에 놓인 빈티지 턴테이블에서는 비틀스(The Beatles)의 고풍스러운 명곡이 흘러나오며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하지만, 태준이 자리에 앉아 의경의 외투를 받아주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찌기기기긱-!!!평화롭게 돌아가던 턴테이블의 바늘이 거칠게 튀며, 기괴한 소음과 함께 음악이 뚝 끊겼다."……."순간, 태준의 안경 너머로 서늘한 이성이 번뜩였다. 최고급 오마카세 레스토랑의 생명은 접객이다. 턴테이블이 고장 나 귀를 찢는 소음이 나는데도, 룸 안으로 들어와 사과를 하는 직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태준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의경의 앞을 가로막았다. "의경 씨. 내 등 뒤에 붙어요. 당장.""네? 변호사님, 갑자기 왜…."의경이 당황하며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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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부서진 밀실, 그리고 두 번째 사냥감

"살려주세요… 제발…!!"피투성이가 된 이태준을 끌어안은 윤의경의 처절한 비명이 VVIP 룸을 갈랐다. 그러나 감정을 거세당한 킬러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놈이 허공으로 높이 치켜든 회칼의 끝이,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궤적을 그리며 의경의 목덜미를 향해 내리꽂히려는 찰나였다.콰아아아앙-!!!!육중한 편백나무 미닫이문이 마치 폭탄을 맞은 것처럼 산산조각 나며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이 개새끼들아-!!!!"부서진 나뭇조각과 먼지를 뚫고 벼락처럼 포효하며 뛰어든 사내. 두 눈이 핏발로 붉게 물든 최강태였다.강태는 의경에게 칼을 내리치려던 놈의 손목을 번개처럼 낚아채더니, 그대로 뼈가 으스러질 듯 비틀어 꺾어버렸다."크아아악!" 킬러의 손에서 칼이 떨어지기도 전에, 강태의 거대한 주먹이 놈의 안면을 자비 없이 강타했다. 놈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벽에 처박혀 실신했다."태준이 형!! 의경 씨!!"뒤이어 나유준과 서이수, 그리고 해성그룹의 '블랙' 요원들이 룸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요원들이 남은 두 명의 킬러를 순식간에 제압하고 포박하는 사이, 유준과 이수는 피바다가 된 다다미 매트 위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태준의 등에 꽂혔던 칼은 빠져 있었지만, 상처 부위에서 쉴 새 없이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와 의경의 하얀 원피스를 처참하게 적시고 있었다."형… 태준이 형!! 눈 좀 떠봐, 제발!!" 유준이 사색이 되어 자신의 가디건을 벗어 태준의 상처 부위를 강하게 압박했다.태준의 안경은 피가 튄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그의 호흡은 얕고 불규칙했다. 그 참혹한 광경에 이수는 입을 틀어막고 오열했고, 의경은 태준의 차가워진 손을 얼굴에 비비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나 때문이야… 나 살리겠다고, 나 안아주느라 등을 내줬어요… 흐흑, 변호사님 제발…!!""의료진 불렀어! 헬기 띄웠으니까 조금만 버텨요, 형!!" 유준의 피맺힌 절규와 함께, 구급 대원들이 들이닥쳐 태준을 들것에 실었다. 피비린내로 진동하던 청담동의 밀실 살인극은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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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피 묻은 왕관, 그리고 지하 주차장의 사냥개들

성북동 해성그룹 본가, 나 회장의 서재. 육중한 마호가니 문을 열고 들어선 나유준의 모습은 평소의 화려한 재벌 3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태준의 피가 검붉게 말라붙은 가디건을 그대로 입은 채, 그의 두 눈은 며칠 밤을 새운 야수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태준이는, 고비는 넘겼다고 들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나 회장이 지팡이를 짚은 채 돌아섰다."네. 하지만 언제 깨어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유준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주저 없이 나 회장의 책상 위로 두꺼운 서류 봉투 하나를 내려놓았다."이게 뭐냐.""제 명의로 된 해성물산, 해성건설 등 그룹 계열사 지분 전부를 포기한다는 양도 각서입니다. 할아버지 원하시는 대로, 큰아버지께 넘기시든 재단에 환원하시든 마음대로 하십시오."나 회장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룹 후계자 자리를 포기하겠다는 거냐? 고작 그 여자와 핏덩이 하나 때문에?""아니요." 유준이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나 회장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제 진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더 거대한 칼자루를 쥐려는 겁니다."유준이 피 묻은 두 손을 꽉 쥐었다. "지분 다 내려놓을 테니, 대신 해성그룹의 '마스터 키'인 정보망 접속 권한과 특수 경호팀 '블랙'의 전면적인 지휘권을 제게 주십시오. 대건의 백도훈은 물론이고… 그 쓰레기에게 보안 설계도와 자금을 대주며 제 목을 조이려 한 '큰아버지'까지, 제 손으로 완벽하게 도려내겠습니다."순간, 서재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피를 나눈 혈육인 큰아버지를 직접 치겠다는 막내 손자의 선전포고.나 회장은 지팡이를 꽉 쥔 채 한참 동안 유준의 눈빛을 읽어 내렸다. 예전의 온실 속 화초 같던 유약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사랑하는 이의 피를 뒤집어쓰고 완벽한 포식자로 각성한, 진짜 해성의 핏줄이 거기 서 있었다."…피를 묻힐 각오가 섰느냐." 나 회장의 입가에 아주 미세하고도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내 목숨을 걸고라도, 그들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 넣을 겁니다."나 회장이 품에서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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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굉음 속의 구원자, 그리고 깨어난 독사

부아아아아앙-!!!!미친 듯이 회전하는 타이어 마찰음과 함께, 백도훈의 검은색 SUV가 나유준을 향해 맹렬하게 쇄도했다. 거대한 상향등 불빛이 유준의 시야를 하얗게 집어삼켰다.피할 곳도, 도망칠 시간도 없었다. 블랙 요원들이 유준을 밀쳐내려 몸을 날리는 그 찰나의 순간.콰아아아아앙-!!!!!해성그룹 본사 지하 주차장의 두꺼운 콘크리트 벽이 대포를 맞은 듯 폭발하며 무너져 내렸다. 시멘트 먼지와 철근 잔해를 뚫고 튀어나온 것은, 일반 차량의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육중한 해성건설 소속 장갑형 특수 호송 차량이었다.호송 차량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던 백도훈의 SUV 측면을 자비 없이 그대로 들이받았다(T-bone 충돌).끼기기기긱- 쾅!! 쩌저적!!두 쇳덩어리가 충돌하며 끔찍한 파열음을 냈고, 백도훈의 SUV는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주차장 기둥에 처박혀 반파되었다.뿌연 매연과 먼지가 가라앉은 주차장. 반파된 SUV 운전석에서 피투성이가 된 백도훈이 축 늘어진 채 간신히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에어백이 터졌지만, 엄청난 충격에 온몸의 뼈가 으스러진 듯했다.그때, 특수 호송 차량의 문이 벌컥 열리며 산만 한 덩치의 사내가 쿵, 하고 뛰어내렸다. 최강태였다."하아… 하아…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강태가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씩씩거렸다. 나 회장의 지시로 유준의 뒤를 밟던 강태가, 주차장 입구가 통제되자 아예 공사 중이던 옆 구역 벽을 차량으로 부수고 뚫고 들어온 것이다."관장님!!"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유준이 털썩 주저앉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강태는 구겨진 SUV 문짝을 괴력으로 뜯어내더니, 피범벅이 된 백도훈의 멱살을 틀어쥐고 바닥으로 질질 끌어냈다."누구 맘대로 죽어, 이 짐승 새끼야!! 넌 살아서 죗값 치러야지!!""크윽… 컥… 나유준… 이태준… 찢어죽일…." 백도훈은 피를 토하면서도 독기 어린 눈으로 유준을 노려보았다.유준이 옷먼지를 털어내며 천천히 다가와 백도훈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찢어 죽여? 넌 이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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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제왕의 철학, 그리고 피의 숙청

성북동 해성그룹 본가, 나 회장의 서재. 유준이 티타늄 마스터 카드를 쥐고 서재를 빠져나간 직후, 어둠 속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나 회장의 오랜 심복, 최 비서실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회장님. 아무리 그래도… 장남이신 큰 상무님을 치도록, 막내 도련님 손에 직접 칼을 쥐여주시는 건 너무 가혹하신 처사 아닙니까?"혈육 간의 피바람을 묵인한 주군을 향한 조심스러운 우려였다. 하지만 창밖을 내려다보는 나 회장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동요나 슬픔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거대한 제국을 통치해 온 늙은 제왕의 차갑고도 잔혹한 이성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최 실장. 자고로 사냥개가 제 밥그릇을 지키겠다고 이웃집 늑대 무리를 마당 안으로 끌어들이면, 그건 개가 아니라 당장 때려잡아야 할 미친 짐승일 뿐이다."나 회장이 지팡이로 대리석 바닥을 쾅 내리쳤다."그놈은 그룹의 후계 자리를 탐내어 대건 로펌이라는 외부의 적과 결탁했다. 해성의 보안망을 열어주고, 자금을 댔지. 이건 형제간의 밥그릇 싸움이 아니라 해성그룹의 뿌리를 뽑으려 한 '반역'이야.""…….""게다가 제 핏줄인 지연이를 시궁창에 처박을 뻔한 백도훈 그 쓰레기 새끼와 손을 잡아? 권력에 눈이 멀어 제 자식마저 도구로 파는 놈에게 이 거대한 해성을 넘겨줬다간, 십 년도 안 되어 회사는 갈가리 찢겨 공중분해 될 거다."나 회장의 묵직한 호통에 최 비서실장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늙은 호랑이는 이미 큰아들의 나약함과 비열함에 완벽하게 등을 돌린 상태였다."하지만 유준이는 다르다." 나 회장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번졌다. "수백억의 지분을 미련 없이 던지면서 제 사람을 지키겠다고 이를 드러내더군. 포식자의 눈이었다. 내가 유준이에게 마스터 카드를 준 건, 아들을 죽이라는 뜻이 아니야. 스스로의 힘으로 숙부의 숨통을 끊고, 진정한 해성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지 증명해 보라는 마지막 시험이다."가장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손자에게 사냥터를 열어준 비정한 할아버지. 성북동의 밤이 그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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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6화: 왕관의 무게, 아기 천사의 미소

해성그룹 서초 사옥의 펜트하우스 집무실.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는 고요하다 못해 시릴 정도로 적막했다."이걸로... 전부 끝난 겁니까?"태준이 서류철을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물었다. 그의 눈가에는 며칠 밤을 지새운 피로가 짙게 깔려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유준은 의자에 깊숙이 기댄 채,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 회장에게 전권을 위임받고 시작된 피의 숙청. 큰아버지의 반역을 진압하고 해성그룹의 왕좌에 오르기까지, 지난 일주일은 그야말로 숨 막히는 전쟁이었다."끝이 아니라 시작이겠지."유준이 굳은 목소리로 답했다. 비정하게 큰아버지를 몰아내고 권력을 쥐었지만, 그의 마음은 승리감보다 무거운 책임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피 비린내 나는 재벌가의 암투 속에서 자신들이 지켜내야 할 '진정한 가족'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고생했다, 태준아. 네가 없었으면 이 정도 선에서 수습하지 못했을 거야." "형이야말로요. 나 회장님이 왜 형한테 전권을 맡기셨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태준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유준의 어깨를 툭 쳤다.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차갑고 거대한 해성그룹의 꼭대기. 하지만 두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화려한 밤거리의 불빛이 아니었다. 지금쯤 이 넓고 삭막한 세상 한구석,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작고 따뜻한 집. 그리고 그곳에서 곤히 자고 있을 아기, 여름이의 얼굴이었다."가자. 우리 집으로."유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성그룹의 냉혹한 지배자의 가면을 벗어던지는 순간이었다.도어록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집 안의 따스한 공기가 유준과 태준을 맞이했다.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을 반긴 것은, 엉망진창이 된 거실 바닥과 그 한가운데에서 지쳐 쓰러져 잠든 멤버들의 처절한 모습이었다."어...? 왔냐...?"소파에 구겨지듯 누워 있던 녀석이 부스스 눈을 떴다."기업 인수가 문제가 아니라니까... 이 기습 배변 테러는 차원이 달라..."며칠 동안 회사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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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7화: 회장님의 이중생활

해성그룹의 완벽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지 일주일. 대한민국 재계를 뒤흔든 피의 숙청 뒤에 찾아온 아침은 잔인할 정도로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해성 사옥에만 국한된 이야기였다."야, 김태준! 여름이 손수건 어디다 뒀어?!" "어제 형이 삶아서 건조기에 넣었잖아요! 정신 좀 차려요, 신임 의장님!"새벽 6시. 해성그룹의 최고 권력자가 된 유준은 완벽하게 다려진 수트 바지 차림에, 위에는 앞치마를 두른 기괴한 몰골로 주방을 헤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주식 매매 계약서 대신 유기농 이유식 레시피가 들려 있었다."우부... 바우!"식탁 의자에 앉아 온 얼굴에 단호박 미음을 칠한 여름이가 유준을 보며 숟가락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결재를 재촉하는 엄격한 감사관 같아, 유준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어... 여름 이사님, 잠시만 대기해 주십시오. 온도가 살짝 높아서 식히는 중입니다."수조 원의 프로젝트를 단 5분 만에 승인하던 결단력은 어디로 갔는지, 유준은 미음 한 숟가락을 들고 입으로 후후 부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그때 소파에서 겨우 눈을 뜬 진우가 흐느적거리며 다가와 기가 찬다는 듯 물었다."형, 오늘 해성 본사에서 취임식 겸 첫 이사회 있는 날 아니야? 출근 안 해?" "이유식 먹이고 갈 거야." "와, 진짜 지독하다, 지독해. 나 회장님이 이 모습을 보면 뒷목 잡으시겠네."진우가 혀를 내둘렀지만, 유준의 눈은 오직 여름이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입가에 대어준 미음을 여름이가 꿀떡 받아먹자, 유준의 미간에 잡혀 있던 세상 모든 고뇌가 단숨에 사라졌다."잘 먹네... 우리 여름이, 최고다."지옥 같은 지분 싸움 속에서 유준을 버티게 한 것은 오직 이 순간이었다.오전 10시, 해성그룹 본사 대회의실.조금 전 집에서의 허둥지둥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유준은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과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기며 상석에 앉아 있었다.반역에 가담했던 임원들은 이미 숙청당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유준의 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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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8화: 걸음마의 축복 (부제: 해성가의 특별 기부)

"의장님, 제발 속도 좀 줄이십시오! 신호 걸립니다!" "박 실장, 지금 신호가 문제야? 여름이가 나 없이 두 걸음을 더 걸었으면 어쩌려고 그래!"검은색 세단 뒷좌석에서 유준은 거의 엉덩이를 시트에 붙이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낮에는 냉철한 해성의 구원자, 밤에는 눈물겨운 육아 삼촌. 그의 완벽했던 이중생활은 여름이의 '첫걸음마'라는 역사적 사건 앞에서 완전히 붕괴했다.차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간 유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거실 한복판에서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엉덩이를 씰룩거리고 있는 여름이였다."우부! 바바!"여름이는 거실 매트 위에 당당히 두 발로 서서, 마치 세상을 다 가졌다는 듯 양손을 흔들고 있었다."여름아...!"유준이 털썩 무릎을 꿇으며 양팔을 벌렸다. 평소 같으면 밖에서 입던 수트라며 옷부터 갈아입었을 그였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 따위 없었다.여름이가 유준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그만 맨발로 매트를 야무지게 딛더니, 비틀거리면서도 유준을 향해 한 발, 두 발... 아장아장 걸어오기 시작했다.탁. 네 걸음째에 중심을 잃고 유준의 품으로 툭 쓰러지는 아이. 유준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얼굴로 여름이를 보듬어 안았다."하하... 걸었어. 진짜로 걸었어...""거봐요, 형. 내가 거짓말한 거 아니라니까?" 뒤늦게 주방에서 젖병을 들고나오던 태준이 흐뭇하게 웃었다. 진우는 캠코더를 들고 거의 바닥에 기어 다니며 여름이의 발끝을 촬영하고 있었다."이건 해성그룹 역사관에 보존해야 돼. '여름 이사님, 인류를 향한 첫 도약' 이런 제목으로." 진우의 너스레에 유준은 피식 웃으면서도 여름이의 통통한 종아리를 조심스럽게 주물렀다."고생했어, 우리 아기. 걷느라 힘들었지?"그날 밤, 유준은 집무실 책상에 앉아 결재 서류 대신 다른 문서를 심각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곁에서 커피를 내려놓던 태준이 슬쩍 모니터를 훔쳐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형, 지금 뭘 그렇게 열심히 봐요? ...어? 영유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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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9화: 천사의 첫 감기 (부제: 초보 삼촌들의 비상사태)

여름이가 첫걸음마를 떼며 온 집안을 활기차게 누빈 지 일주일째. 평화롭던 집에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이 찾아왔다."으앙...! 으아앙-!"새벽 3시, 평소라면 세상모르고 곤히 자고 있을 시간인데도 여름이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안방을 가득 채웠다. 유준은 번쩍 눈을 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본능적으로 안아 올린 여름이의 몸이 평소와 다르게 화끈거리고 있었다."어...? 왜 이렇게 뜨거워?"유준의 다급한 목소리에 옆방에서 자던 태준과 거실 소파에 뻗어 있던 진우까지 허둥지둥 안방으로 뛰어 들어왔다."형, 왜 그래요? 여름이 왜 울어요?" "체온계, 체온계 가져와! 빨리!"유준의 서슬 퍼런 외침에 진우가 거실 서랍을 다 뒤집어 체온계를 찾아왔다. 태준이 떨리는 손으로 여름이의 귀에 체온계를 댔다. 삐빅- 하는 기계음과 함께 뜬 숫자는 38.7°C. 빨간색 경고등이 선명하게 들어왔다."38.7도요?! 형, 어떡해요? 여름이 열나요!" 진우가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멘붕에 빠졌다.수조 원의 지분 전쟁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유준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낮에는 해성그룹을 쥐락릾락하는 대기업 의장이었지만, 아픈 아기 앞에서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삼촌일 뿐이었다."물, 물수건...! 손수건 미지근한 물에 적셔와!" 유준은 손을 덜덜 떨며 여름이를 품에 꼭 안았다. 평소의 당당함은 어디로 가고, 여름이의 뜨거운 숨결이 살결에 닿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우우웅... 아파아..." 여름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유준의 멱살을 꼭 쥔 채 끙끙 앓았다.태준이 다급하게 미지근한 물을 적신 손수건으로 여름이의 겨드랑이와 목덜미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진우는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에 '아기 열날 때', '돌치레', '영유아 해열제'를 미친 듯이 검색했다."형, 돌 무렵에 나는 '돌치레'일 수도 있대요! 일단 옷 가볍게 입히고 미지근한 물로 닦아주면서 해열제 먹여야 한대요!" "해열제 어딨어? 우리가 사둔 거 있잖아!" "여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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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폭풍 뒤의 햇살, 그리고 낯선 그림자

"형! 넥타이 삐뚤어졌잖아! 천하의 이태준이 오늘 같은 날 칠칠치 못하게 그게 뭐야!"연희동 셰어하우스의 거실은 아침부터 묘한 긴장감과 활기로 들썩였다. 완벽한 화이트 셔츠에 베이지색 슬랙스를 차려입은 나유준이 투덜거리며 이태준의 넥타이를 정성스럽게 고쳐 매주었다. 오늘은 대건 로펌과 큰아버지 사태를 완벽하게 매듭짓고, 해성그룹 기획조정실장으로서 유준이 공식 취임하는 날이자, 태준의 퇴원 축하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시끄럽다, 유준아. 나 안 죽고 살아 돌아온 게 어디라고 잔소리야." 칼에 찔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태준이었지만, 특유의 까칠하고 서늘한 아우라는 여전했다. 단지 의경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어이구, 우리 천재 변호사님 컴백하셨는데 당연히 축하해야지!" 어깨 근육이 터질 것 같은 네이비색 티셔츠를 입은 최강태가 태준의 등을 팍팍 때리며 호쾌하게 웃었다.그 옆에서는 댄디한 셔츠 차림의 서이수가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연신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자, 다들 여기 봐! 오늘 우리 연희동 식구들 다 같이 찍는 첫 공식 가족사진이니까 활짝 웃으라고!"그때, 안방 문이 열렸다.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윤의경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걸어 나왔고, 그녀의 손을 잡은 여름이는 노란색 멜빵바지를 입고 뒤뚱뒤뚱 걸어오며 "아빠들!" 하고 외쳤다.백도훈은 중신형을 선고받고 평생 독방에서 썩게 되었고, 큰아버지 역시 경영권을 박탈당한 채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폭풍이 완벽하게 걷힌 자리에는, 마침내 온전한 평화가 찾아온 듯했다.몇 달 뒤, 무더운 8월의 어느 주말. 연희동 셰어하우스 앞마당에 설치된 대형 간이 풀장에서 여름이가 물을 첨벙거리며 강태의 목에 매달렸다."오냐, 우리 딸! 백만 불짜리 잠수함 출발한다! 꽉 잡아라!" "형! 여름이 물먹이지 말고 조심해!" 선베드에 앉아 구찌(Gucci) 선글라스를 낀 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던 유준이 잔소리를 퍼부었다.그 옆에서는 이수가 마당 한구석에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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