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만독여향: 비단 위에 핀 꽃: Chapter 21 - Chapter 30

100 Chapters

21화

소설아의 거처로 향하는 연백리의 걸음은 무겁고 조용했다.하지만, 품 안에서 축 늘어진 설아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 가벼움이 오히려 착잡한 마음을 무겁게 더하고 있었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청아가 벌떡 일어났다."아가씨, 아가씨!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연백리의 품에 혼절하여 늘어진 설아를 본 순간, 청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눈물을 쏟아냈다."엉엉! 아가씨, 아가씨!""진정해라."연백리는 설아를 침상에 조심스럽게 눕히며 짧게 말했다."그냥 울다가 지친 것뿐이야.""예? 울다가요……?""너도 경북후부에서 하인을 했다면, 후부인의 성정을 알 것 아니냐?"연백리의 일침에 청아는 입이 쑥 들어갔다. 할 말을 잃은 채 잠시 설아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몸을 돌려 물수건을 만들러 밖으로 나갔다.방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연백리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침상 곁에 조용히 앉아 한참 동안 설아를 바라보았다.‘친어미가 있어도 이토록 서럽고 고단할 수 있구나.’‘어째서 어미란 존재는 천국과 지옥, 양쪽을 오가는 것인가.’촛불이 조용히 일렁였다. 해쓱해진 설아의 옆모습이 그 옅은 불빛 아래 애처롭게 드러났다.어쩌면 이런 어미를 가진 자신이었기에, 내 모친이 만들어주신 예복을 수선하지 않으려 했던 것일지도 모르지.얼마를 불러도 좋다던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던 이유가, 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말을 했는지, 이제는 조금씩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포목점을 하나 차려주세요.결연한 눈빛으로 또박또박 말하던 설아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눈빛에 담겨 있던 것이 단순한 고집이 아니었음을,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연백리의 시선이 천천히 설아의 얼굴로 내려앉았다.엉망이 된 머리카락이 뺨 위에 어지러이 흩어져, 조금 전의 난장판을 고스란히 짐작하게 해주었다. 연백리는 조용히 손을 뻗었다. 흩어진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조심스럽게 정리해주었다.그러다 손가락이 멈추었다.열꽃이 올라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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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설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럼요, 한참을 앉아 계시다 가셨어요."청아가 옆에서 거들었다. 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송부인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왕야께서 말투가 저러시지만, 속마음은 따듯하시답니다. 황자로 태어나면 모두에게 잘 대해줄 수가 없어요. 아는 사람은 조심해야 하고, 모르는 사람은 더욱 조심해야 하지요. 곁에 있는 사람조차 믿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황자의 자리랍니다."설아는 말없이 그 말을 곱씹었다."그래도, 아가씨께 조금만 따뜻하게 말씀해 주시면 좋을 텐데요."청아가 속 모르는 소리를 하자, 설아는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하하. 그래, 청아 네 말도 맞다."송부인은 잔잔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끝에 긴 한숨이 따라왔다."왕야께서 조금만 따뜻하시면 얼마나 좋겠어. 그랬으면 벌써 혼인하셔서 좋은 짝과 행복하실 텐데……"송부인은 말을 맺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원과 함께 문 쪽으로 걸어가다 돌아보며 부드럽게 말했다."푹 쉬세요, 소낭자."달칵. 문이 닫혔다.조용한 방 안에 설아와 청아만 남았다. 바람이 들을까 걱정하며 주인의 이불자락을 갈무리하는 청아의 분주한 손길에 휘둘려 촛불이 일렁였다.설아는 고풍스러운 천장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그 몇 배로.퉁명스럽게 내뱉은 그 말이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다.***며칠 뒤, 황제의 명령을 전하기 위해 상선 태감이 친히 성지를 들고 경무왕부를 찾아왔다.연백리는 태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얼마 전 1년여간의 염초 정벌을 끝내고 돌아온 터라, 딱히 황제의 부름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한 번 정벌을 마치고 나면 군사 정비가 필요하기에, 지금은 특별히 입궁하지 않고 창랑군의 정비에 힘을 쏟고 있던 참이었으니까.연백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한 얼굴로 태감의 뒤를 따라 궁으로 향했다.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벌리며 과장된 몸짓으로 연백리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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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소낭자는 후부에 돌아가지 않고 독립을 하고 싶어 하고, 걸맞는 상호까지 갖췄으니, 경북후부에서는 재촉할 명분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다만……"황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사람들의 입소문은 어찌 잠재울 생각인지요?""저잣거리의 소문들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황형은 그렇다 쳐도, 소낭자의 입장은 안 그럴 수도 있지요.""그걸 신경 썼다면 왕부에 발을 들여선 안 됐지요.""하하. 일리가 있는 얘기군요."황제는 더 이상 물고 늘어지지 않겠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알겠습니다. 경북후부에도 그렇게 전하지요."잠시 여유로운 침묵이 흘렀다. 황제는 찻잔을 들며 연백리를 바라보았다."그나저나."황제의 목소리가 한결 낮아졌다."정말 혼인할 생각이 없습니까? 황형께서 전장을 떠도는 동안, 도성 안의 괜찮다 하는 이름 있는 영애들은 죄다 시집을 가버렸습니다."연백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이 있다면 말해주세요. 이제 와서 신분 귀천을 따질 필요가 있겠습니까?"세도가와의 정혼을 막후에서 모조리 차단한 장본인 치고는 꽤나 염치없는 제안이었다. 연백리는 씨익,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이러다 홀아비로 늙어 죽는다 해도 제 팔자소관 아니겠습니까."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덧붙였다."저보다도 폐하께서 빨리 황손을 보셔야 할 텐데요."정곡을 찔린 황제는 연백리 쪽으로 기울였던 몸을 천천히 바로 세웠다. 끌끌, 혀를 차는 소리가 났다."황후의 몸이 생각보다 많이 축난 듯 싶습니다. 육궁을 관장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는 하나, 황손을 보는 일보다 중할 수는 없지요."연백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두 손을 맞잡아 예까지 갖추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폐하의 치세에 이르러 지금 나라는 태평성대하니, 황실의 안위를 굳건히 할 수 있도록 후궁을 돌아보는 일에 힘쓰시기를 간청드립니다."순간, 방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되었다.황제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 그러나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예의 가식적인 미소로 표정을 가리며 호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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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연백리는 별 해괴망측한 생각이 다 든다고 스스로를 타박하며 돌아서려는 찰나였다.진평이 그를 발견하고 고개를 숙였다."왕야, 오셨습니까.""어머, 왕야!"송부인이 얼 가득 웃음을 띠며 다가왔다."그렇잖아도 뵈러 가던 참이었답니다. 소낭자가 수선에 필요한 부자재들을 설명해주고 있었어요. 어린 나이에 아는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이 정도면 직물공선에 나가도 충분할 만한 솜씨인 걸요!"송부인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았다. 이렇게 과한 칭찬은 생전 처음인 설아는 경직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연백리는 그런 설아를 바라보다 삐딱한 표정으로 퉁명스레 말했다."어차피 왕부에 등록된 전문 수양이니, 참가 자격은 충분하지. 어때, 황실에서 주최하는 직물공선에 나가볼 생각은 있나?"설아는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아니에요. 전 그럴 만한 실력이 되지 못합니다. 그저…… 조용히 자유롭게 살고 싶을 뿐이에요.""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그러나 돈은 많이 벌면서 말이지?"연백리는 괜히 이죽거리며 말했다."아, 저…… 그게……"사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설아는 난처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었다."왕야께서도 참…… 짓궂기도 하시지."송부인이 눈치를 채고 연백리를 슬쩍 흘겨보았다.설아는 잠시 말을 고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자세한 사정을 말씀드릴 순 없지만……"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황실 경연에 참가하면 할수록 제가 원하는 삶과는 멀어지게 됩니다. 또한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가짓수도 적어지지요. 나중엔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질지도 모르고요."설아는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전…… 그걸 바라지 않아요. 되도록 멀리, 멀리 떠나 자유롭게 살고 싶은 생각뿐입니다."방 안에 잠시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연백리는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이 들어 표정이 침울해졌다. 송부인은 확고한 설아의 결심을 듣고 괜시리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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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청아는 두 눈을 반짝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수선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설아는 최대한 원상태를 살리려 애를 쓰면서도, 오래되어 구식이 된 장식품들 새것으로 조심스럽게 바꾸어 나갔다.빛바랜 영락이나 숨이 죽어 납작해진 매듭 등을 송부인이 가져다준 새로운 장식품으로 바꿔 달자, 한결 예복이 화사해 보였다.자수 방식도 손을 댔다. 평수로 놓여 있던 밋밋한 자수를 뜯어내고, 실을 촘촘히 꼬아 올리는 반수 형식으로 바꾸어 나갔다. 한 올도 끊어지지 않을 듯 견고하게 짜인 수 위로, 틈틈이 섬세한 격사 무늬까지 덧대어지니 그 화려함이 실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설아의 손끝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한 땀, 또 한 땀.마치 오래전 그 자리에서 멈춰버렸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듯이.***늦은 밤까지 별실을 지키며 예복 수선에 여념이 없는 설아에게, 연백리는 매일같이 찾아와 수놓은 부분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타박을 놓았다."이 부분은 수놓은 형태가 풍성하지 않군. 이 부분도 그래. 이쪽은 여유롭게 수놓아져 있는데, 여기는 조금 촘촘해 보여.""이건 여인의 옷이 아니라서, 모자란 듯 수를 놓아야 해요. 예복은 더욱더 절제하는 형태가 필요한데요……""그럼 지금 내가 말한 게 틀렸단 말인가?""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고……""아니면, 변명은 그만하고 다시 하지 그래?"연백리는 휑하니 돌아서 가버렸다.설아는 서운함에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열심히 놓은 수를 풀어내기 시작했다."이렇게 풀어낸 실은 다시 사용할 수가 없는데, 왕야께서는 창고에 억만금의 재산이라도 쌓아두고 계신가봐요."청아는 입이 삐죽 나온 채 볼멘소리로 말했다."어쩔 수 없지. 또 틀린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닌데. 우리가 더욱 열심히 하자꾸나."설아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수놓기를 반복했다.그러기를 며칠째.송부인이 찾아와 미안한 표정으로 다과상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미안해요, 소낭자. 저희 왕야께서 이렇게 잔소리가 심하실 줄은 저도 미처 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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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연백리를 찾아온 송부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번 황실 하지제에 입고 가실 흰색 예복은 늘 맡기시던 운염방에 전갈을 보낼까요?""아니, 그럴 것 없어."연백리는 담담하게 말을 잘랐다."마침 이곳에 딱 적임자가 있으니 그쪽에 맡기면 되겠군.""예? 설마……""그래, 지금 별실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장인이 한 명 있잖나.""하지만 소낭자는 아직 예복 수선 중이라…… 일이 더해지면 힘들지 않을까요?""잠깐 수선을 멈추고 하지제 예복을 만들면 되는 일인데, 힘들 일이 뭐가 있어."송부인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체념하고 돌아섰다."아이 참…… 소낭자가 밤늦게까지 일하느라 눈이 토끼처럼 새빨개졌던데…… 왕야께서도 참……"여간해선 불평하지 않던 송부인도 이번 일은 차마 운을 떼기가 어려운 듯, 별실 문 앞에 서서 망설이고 있었다.때마침 찻물을 가지러 나오던 청아가 송부인과 마주쳤다."어머, 송부인! 여기서 뭘 하고 계세요?""아, 청아. 그게 아니고……""어서 들어오세요. 마침 잘 오셨어요!"청아가 문을 활짝 열었다.별실 안에서 설아는 짧아진 실을 매듭지으며 가위를 집어 들었다."이제 겨우 가슴 부위를 끝냈답니다. 이 부분은 영락까지 교체해야 해서 좀 시간이 더 걸렸어요."설아는 볼 때마다 빨리 끝내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반복했다."제 손끝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해서 일이 더디네요."이렇게 일이 더디게 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고 있는 송부인은 차마 하지제 예복에 대해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소낭자……""예, 말씀하세요, 송부인."송부인은 잠시 망설이다 애써 운을 띄웠다."한 달 뒤에 황실에서 하지제가 열려요. 여름의 시작인 하지에 풍년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죠. 이때 황실 종친분들께서 모두 모이시는데, 다들 흰색 예복을 입으시거든요.""아, 그렇군요.""그래서 말인데…… 예복을 좀…… 만들어줄 수 있을까요?""예복…을 요?""네, 지금 수선 일이 바쁜 것은 잘 알고 있어요.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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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확실한지 안 한지는 오직 삼신할미만 알고 있을 일이건만. 초영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인 양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쯧쯧."연각은 혀를 차며 초영황후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보았다."보화궁의 세월은 혼자서만 더디게 흐르는 모양이군."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 국의는 선황제 시절에나 유행하던 빛깔 아니오? 그대의 안색이 그 탁한 황색에 묻혀 통 보이지가 않으니 말이야."그 말을 들은 초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하지만 연각은 멈추지 않았다."누가 보면 황후의 위엄은 후포 자락의 길이에 달려있는 줄 알겠소. 승명전 바닥을 전부 다 쓸고 다닐 작정이오?"초영황후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옷자락을 움켜쥐며 보이지 않게 바들바들 떨었다."이만, 물러가시오."황제의 축객 명령이 떨어지자, 총관태감인 소공공은 황제와 황후 둘의 눈치를 살피면서 곁에 있던 시녀에게 눈을 깜빡여 빨리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시녀들은 넋이 나간 채 그 자리에 선 황후를 간신히 이끌어 밖으로 나갔다.연각은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또 한 번 혀를 찼다.***시녀들의 부축에 기대어 비틀거리며 간신히 보화궁으로 돌아온 초영황후는 무너지듯 자리에 앉았다.단 한 번도 황제는 자신에게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어떻게서든 꼬투리를 잡아 물고 늘어지는 못된 버릇. 치장하면 화려하게 치장한다고 눈치를 주고, 검소하게 단장을 줄이면 줄였다고 타박을 했다.대체, 어느 하나라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기나 한 걸까.과연, 이 옷을 누가 줬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알면서도 일부러 이러는 걸까.초영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황후마마. 태후마마께서 자의궁으로 들라 하십니다."순간적으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초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자의궁에 들어서자 현정태후가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채 초영을 바라보았다."그래, 황제께 하지제에 대해 이야기는 잘 하였느냐."잘하기는커녕 촌스럽다고 구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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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전… 설영단이 좋아보입니다.”설아는 다시 한번 옷감을 차르르 내려뜨려 보였다. 흰빛이 은은하게 물결치듯 흘러내렸다.“그럼, 그걸로 하지.”연백리는 간단히 대답하더니, 더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성큼성큼 걸어 밖으로 나가버렸다.청아는 멍하니 서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설아를 안타깝게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왕야께서는 너무 제멋대로신 것 같아요.”속마음이란 건 저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와버릴 때가 있다.“그런 소리 말아라. 누가 듣기라도 한다면, 경을 치고 말 것이야.”설아는 혹여나 또다시 그런 말을 할까 두려워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이놈의 주둥이가 말썽이네요.”청아는 자신의 입을 후려치며 경솔함을 뉘우쳤다. “고귀한 황자로 태어난 위엄있는 경무왕 전하신데, 마음대로 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으시겠니. 아마, 운염방이라는 곳에서도 평소 왕야의 취향을 모두 살펴보았을 것이고, 송부인이 계시니, 당연히 왕야께서 사사로이 의견을 더하지 않으셔도 됐을 것이다.”“그럼, 아가씨께서 오늘 물어보신 건……”“난 왕야께 알고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으니까 말이다. 하다못해 좋아하시는 차 종류 하나 아는 게 없지 않니.”“그건, 제가 알려드리죠.”어느새 송부인이 미소지으며 다가왔다.“왕야께서는 이곳에 처음 오셨을 때 같이 마셨던 설아차를 가장 좋아하신답니다.”“오셨어요, 송부인?”설아는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공교롭게도 소낭자와 이름이 같으니 말예요.”송부인이 은근슬쩍 눈웃음을 치며 장난스럽게 설아의 손등을 두드렸다.“송부인, 그런 농담 마세요. 제가 부담스럽습니다.”설아는 난처한 표정으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사이에 부담스러울 게 뭐가 있어요?”송부인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탁자 위에 널려 있는 옷감들을 살펴보았다.“운염방에 있는 모든 흰색 옷감들을 가져오라 시켰답니다. 마음에 드는 감을 찾으셨나요?”“예, 여기 설영단이 제일 좋아보여요.”송부인은 설아가 지목한 옷감을 손끝으로 가만히 만져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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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송부인은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표정을 풀며 입을 열었다.“모두 태후마마 때문이죠. 저희 왕야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니까요. 황실 종친들이 모일 때마다 의관에 대해 타박을 하기 일쑤고, 한 번은 선황폐하의 제사에도 격식에 맞지 않는다는 트집을 잡아 돌려보냈답니다. 옷을 갈아입고 다시 가보니, 이미 제사는 끝나 있었죠.”송부인의 낯빛이 어두워지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왕야께서는 변방 토벌을 다니시며 최대한 황권 다툼에 물러나 계신데도, 태후마마의 견제는 끝이 나질 않아요.”아마도, 죽는 날까지 계속되겠지. 유일하게 살아남은 선황제의 배다른 황자. 그것도 제1황후였던 정경황후 위연하의 막내 아들로서 정통성이 우월하니, 현정태후로서는 눈엣가시만큼 치워버리고 싶은 존재일 것이다. 만인들이 우러러보는 황자로 태어났지만, 치열하게 생을 다투는 것은 일반 서민과 똑같을 지도, 아니 어쩌면 더욱 가혹한 것일까.“왕야의 모친이신 선황후마마께서는 직접 아름다운 옷을 지어입으시기로 유명했어요. 옷을 만드는 것은 고사하고, 직접 멋진 자수 장식까지 수놓으시느라 밤잠을 줄이기 일쑤였죠. 낭자가 수선하고 있는 예복을 보시면 아마 감을 잡으실 수 있을 거예요.”송부인은 옛일을 떠올리는지 가느스름하게 실눈을 뜨며 말했다. “선황폐하께서는 늘 선황후마마의 아름다운 차림새를 칭찬하셨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태후마마께 무슨 위협이 됐었을지… 그 시절에 귀비였을 뿐이었는데.”송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속상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선황후마마를 곁에서 모셨던 건가요?”하지만 송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예의 따뜻한 미소만을 지으며 조용히 별실을 떠났다.“설마, 송부인이 황실 상궁 출신이셨던 걸까요?”청아는 놀랍다는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충분히 가능한 얘기지. 왕야를 지금까지 모시고 있는 걸 보면 말이야.”“태후마마는 그때 일에 앙심을 품고, 지금까지 왕야를 괴롭히시는 걸까요?”설아는 전생에 서슬이 시퍼렇던 현정태후의 얼굴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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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종친들과 대신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는 가운데, 황제와 황후가 나란히 제단 계단을 밟고 올라 금동향로에 향을 꽂으니, 비로소 풍요를 기원하는 하지제의 막이 올랐다.귀빈석에 앉아 이 모습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현정태후의 시야에 종친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연백리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오늘 경무왕의 예복을 어디서 만들었는지 알아보게.”태후는 곁에 바짝 붙어서있던 상궁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명을 받은 상궁은 소리 없이 사라졌다. 태후의 예리한 눈빛이 연백리의 모습을 멀리서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모친께 물려받은 예복 중에 하나인가? 선황폐하의 소싯적 모습이 떠올라 다들 감격했다네.”귀빈석으로 향하는 무리 중에서 용캐 연백리의 옆자리를 차지한 성왕 연정기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럴리가요. 이런 제례복은 물려받은 게 없습니다.”“아니, 그럼 어디서 맞춘 게야? 운염방인가? 나도 이번에 거길 이용했네만, 조카의 예복은 없던걸?”“이번엔 바쁜 일들이 있어서 왕부에서 직접 만들었습니다.”“왕부의 침선방 이렇게 대단하단 말인가? 나도 좀 부탁함세, 나도!”연백리는 약간 피곤했지만, 하나밖에 없는 황숙의 농담이니, 어쩔 수 없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주고 있었다.“천제를 지내는 목적과 의미가 중요한 것이지, 제례복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멀리서조차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현정태후의 목소리에 성왕은 볼멘 표정이 되어 연백리의 어깨에서 슬며시 손을 내리고 말았다. “황실의 어른이라면, 조카에게 오늘 지낸 제례의 은덕에 대해 가르치심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요. 여인네들도 아니고.”쯧. 현정태후는 혀를 차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제례복이 잘 어울리면 어울린다 말할 수 있는 것이지, 굳이 이 사람 많은 자리에서 황숙에게 면박을 주셔야 되겠습니까? 말씀으로는 황실의 어른이라면서요.”어느새 나타난 안평 대장공주가 제 오라비를 두둔하며 나섰다. “말뿐이 아닌 제대로 된 황실 어른의 위엄을 보여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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