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만독여향: 비단 위에 핀 꽃: Chapter 51 - Chapter 60

100 Chapters

51화

"네, 광목이에요."설아는 종이 위에 또박또박 광목 두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이곳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화려하고 나풀거리는 비단이 아니에요. 당장 거친 수레를 끌고, 땀에 절어도 팍팍 빨아 입을 수 있고, 함부로 굴려도 질긴 옷감이잖아요. 값도 헐하고 질긴 광목이야말로 이곳에서 가장 많이 소모되고, 가장 잘 팔릴 물건이지요.”곡식을 담을 자루도, 장정들이 매일 갈아입을 옷도 죄다 광목이었다. 무엇을 팔아야 할지, 이미 답은 나와있는 셈이었다.차분하면서도 막힘없는 설아의 분석에 연백리의 눈에 깊은 감탄이 스쳤다. 그저 재주만 많은 아가씨인 줄 알았더니, 시장의 흐름을 통째로 꿰뚫고 있었다.연백리는 턱을 괸 채 가만히 듣고 있는 듯싶더니, 몇 마디 조언을 보탰다."흠…… 네 말도 맞지만, 광목을 직접 짜내려면 그걸 만들 공방도 함께 들여야 하지 않을까? 지금 올라가는 뼈대만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그의 말이 맞았다. 매장 뒤편의 창고 터만으로는 베틀을 넉넉하게 들여놓을 자리가 나오지 않았다.설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백리를 바라보았다. 설마, 터를 더 넓혀주시겠다는 뜻인가? "음…… 혹시, 그렇게 지어주실 수 있을까요?"연백리는 설아의 커다란 눈망울에 가득 담긴 간절한 눈빛에 그만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뭐, 필요하다면 당연히 해야겠지. 그거 좀 늘리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정말요? 정말 감사합니다!”방금 전까지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며 원망하던 것은 어디 가고, 설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연백리는 고작 그만한 일에 세상을 다 가진 듯 좋아하는 설아를 바라보며, 어쩐지 제 가슴 한구석이 흐뭇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대신, 투자금 회수는 철저하게 할 거야. 애초에 예복 수선 값으로 약속한 건, 포목점 하나니까 말이야.”하늘을 날 것만 같았던 달콤한 제안 뒤에 훅 들어온 연백리의 현실적인 잇속 계산에 설아의 작은 입이 저절로 벌어지고 말았다.“아……”“왜, 서운한가?”설아의 멍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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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일전에 황상을 찾아왔던 경북후부를 기억하십니까?”태후가 초조한 얼굴 표정으로 캐묻자, 연각은 무덤덤한 눈빛으로 대꾸했다.“예, 기억하지요. 그때, 경무왕이 해명해서 해결된 사건 아닙니까?”“그랬었지요. 그런데, 안녕왕비를 통해 내게 또 연통을 해왔지 뭡니까. 그 둘째 딸을 자의궁에 측근 시녀로 보내고 싶다더군요. 하지만, 이미 경무왕부의 전속 수양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별도리가 없겠다 싶었는데……”“그런데요?”연각은 한 모금 마신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태후는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목소리를 낮췄다.“세상에, 지난번 경무왕의 하지제 예복을 만들어낸 게 바로 그 아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그 말에 연각은 미동도 없이 태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속을 알 수 없는 황제의 얼굴에는 아주 작은 동요조차 일지 않았다.“그게, 그렇게 큰일입니까?”“황상!”태후가 깊이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연각을 질책했다.“그 아이가 앞으로도 계속 경무왕의 예복을 만들어준다고 생각해 보세요!”“그래서요?”“나더러 두 눈 뜨고 그 꼴을 보란 말씀입니까!”태후는 지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가슴속에 가라앉아 있던 오랜 앙금이 튀어나오는 듯했다. 연각은 그런 태후를 향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모후. 벌써 십 년도 더 지나 이제 이십 년에 가까워오는데, 아직도 선황후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신 겁니까.”“이십 년이 뭡니까! 지난 하지제에 사람들이 수군거리던 꼴을 보고도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너 나 할 것 없이 선황폐하를 운운하고, 선황후를 들먹이며 천신이 내려왔다느니 불경한 언사를 다투어 입에 올렸단 말입니다!”태후의 눈에 핏발이 곤두섰다. 그러나 연각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오히려 조금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태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패배자들의 한탄이고, 집착이며, 후회일 뿐이죠. 그들이 그럴수록 모후께서는 굳건히 자리를 지키시며 위엄을 보여주시면 됩니다. 그럼 어쩌겠습니까? 죽은 사람이 무덤에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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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물러나려 뒷걸음질 치는 서공공을 연각이 툭 불러 세웠다. 그의 눈에 묘한 장난기가 스쳤다.“... 이상하지 않은가? 연백리 그놈이 무슨 연유로 소낭자를 계속 붙들고 있는지 말이야.”“…….”“이제껏 국혼도 관심 없는 것처럼 굴고, 측비는커녕 염문 하나 뿌리지 않던 철벽같은 놈이……”연각은 흥밋거리를 찾아낸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제 턱을 매만졌다. 그러다 불쑥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 한복판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승명전의 넓은 바닥에는 험준한 산맥과 굽이치는 대운하, 주요 성곽들이 정교하게 깎인 돌과 흙으로 빚어진 거대한 천하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황제의 발걸음이 스칠 때마다 실제 모습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한 산천이 그의 발끝 밑으로 지나갔다.연각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겨, 대운하의 줄기가 시원하게 뻗어 올라간 북방의 한 지점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거대한 물류를 받아내며 웅장하게 솟아 있는 요충지, 바로 하북 영주였다. 연각은 그 주위를 둘러싼 조그만 성곽 모형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갑자기 그 포목점이 궁금해졌어…… 개점 즈음해서 바람이나 한번 쐬러 다녀오지.”연각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가를 끌어올리며 씩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서공공은 아무 말 없이 읍을 하며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홀로 남은 대전 안, 웅장하게 솟아오른 영주성 성곽을 발끝으로 가만히 지르밟던 연각의 시선이 깊어졌다.‘하북 영주라…….’연각은 음침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정교한 성곽 위로 제 커다란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철벽같던 황형의 마음을 뒤흔든 여인이 얼마나 대단한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작정이었다.*** 경무왕부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한 개인 집무실은 한낮의 햇살로 은은하게 밝아져 있었다.격자창 사이로 쏟아져 들어온 따스한 빛이 널찍한 원목 책상 위를 길게 비추고, 그 아래 앉은 연백리의 수려한 옆얼굴 위로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가볍게 걸친 옅은 색 장포 차림의 그는 평소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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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연백리는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저도 모르게 치기에 사로잡혀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입을 맞춘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연백리는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적어도 소설아는 자신을 밀어내지 않았다. 당황하기는 했어도, 뺨을 때리거나 노골적으로 거부하지도 않았다.그것만으로도 아주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운수현…… 너무 멀리 갔잖아?’연백리는 문득 가슴속 어딘가가 비어버린 듯한 허전함을 느끼며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창밖으로는 한낮의 햇빛 아래 푸른 대숲이 바람을 타고 느리게 흔들리고 있었다.***운수현의 직방 거리는 아침부터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하남 특유의 따뜻하고 습한 바람이 수로를 따라 천천히 흘러들었고, 물가에 늘어선 버드나무 가지들이 옅은 물안개 사이로 느리게 흔들렸다. 하북의 거칠고 메마른 공기와는 전혀 달랐다.이곳의 공기는 부드럽고 느긋했다.수로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작은 배들에는 삶지 않은 목화 자루와 실타래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강가 근처 직방들에서는 타닥타닥 베틀 돌아가는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와…”설아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길게 이어진 거리 양옆으로 크고 작은 직조 공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활짝 열린 공방 안쪽에서는 장인들이 베틀 앞에 앉아 쉼 없이 손을 움직이고 있었고, 천장 가까이 매달린 실타래들이 햇빛 아래 희미하게 반짝였다.베틀이 움직일 때마다 팽팽하게 당겨진 실들이 규칙적으로 떨렸고, 막 짜여 나온 광목 천들이 나무 틀 위에 길게 걸려 바람을 타고 흔들렸다.설아는 어느새 걸음을 늦춘 채 주변을 정신없이 둘러보고 있었다.“광목이 다 똑같은 줄 알았는데…”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이렇게 종류가 많을 줄은 몰랐어요.”송부인이 옅게 웃으며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광목도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짜는 방식이 다르답니다.”설아는 가까운 곳에 걸린 천들을 손끝으로 하나씩 만져보았다.어떤 것은 거칠고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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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설아는 바람 따라 흔들리는 광목 천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손끝을 천천히 움켜쥐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런 풍경 속에 서 있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하북에 포목점을 열 수 있었던 것도, 운수현까지 내려와 직접 공방들을 둘러볼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경무왕 덕분이었다.순간, 어젯밤의 기억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던 깊고 서늘한 눈동자. 가까이 다가왔을 때 코끝으로 느껴지던 고급스러우면서도 서늘한 향취.그리고, 매끄럽게 맞닿아 오던 단단하고 뜨거운 입술의 감촉까지.설아는 자신도 모르게 손끝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엔 정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정신없이 빨려 들듯 그에게 붙들려 있다가, 어느새 허리를 감아오던 단단한 손길을 느끼며 겨우 정신을 차렸었다.살며시 눈을 떴을 때 보였던 것은, 자신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연백리의 뜨거운 시선.그 눈빛에 괜히 숨이 막혀왔던 기억까지 생생하게 떠오르자, 설아의 귓가가 순식간에 뜨끈하게 달아올랐다.“…….”설아는 괜히 작게 고개를 흔들며 어수선한 마음을 털어내려 했다. 그러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염색된 광목 천들을 바라봤다.하지만 바람 따라 흔들리는 천 자락을 보고 있으려니, 조금 전보다 가슴이 괜히 더 두근거리는 것만 같았다.설아는 얼굴을 붉힌 채 가까스로 정신을 붙들려고 노력했지만, 어젯밤의 기억은 그렇게 간단히 잊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연백리에게 붙들려 정신없이 입맞춤에 빠져들던 그때, 잠시 손끝에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 설아는 재빨리 몸을 돌려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설아는 차마 돌아보지 못했다.그대로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방안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쾅.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선 설아의 가슴이 숨 가쁘게 오르락내리락거렸다. 온몸이 전부 뜨겁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문밖은 한동안 조용했다.설아는 괜히 숨까지 죽인 채 가만히 서 있었다.그러다 참지 못하고 아주 조심스럽게 창문 틈 사이로 바깥을 내다봤다.어느새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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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운수현 직조 공방들이 모여 있는 거리는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물레 돌아가는 소리, 베틀 치는 소리, 면사 다발을 옮기는 장정들의 발소리가 골목 곳곳에 가득했다.송부인과 함께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간 곳은 거리 안쪽 깊숙이 자리 잡은 만가직방이었다.홍성직방이나 덕화직방처럼 화려하고 커다란 간판을 내걸지는 않았지만, 두꺼운 목재로 단단하게 지어진 공방 건물은 묵직한 존재감을 풍기고 있었다. 오랜 세월 햇볕에 바랜 듯 낡아 있었지만, 기둥 하나 흐트러진 곳 없이 탄탄하게 서 있었다. 마당 한편에는 수십 개의 면사 다발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고, 그 옆으로 커다란 수레 두 대가 짐을 가득 실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생각보다 훨씬 크네요…”설아의 감탄에 송부인이 옅게 웃었다.“운수현에서도 손꼽히는 직방이랍니다. 하북 쪽으로 올라가는 광목 상당수가 이곳을 거친다고 들었어요.”안으로 들어서자 더욱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탁 트인 넓은 내부 공간 안에는 광목 천과 면사 꾸러미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벽면을 따라 칸칸이 짜여진 매대 위에는 색깔과 굵기에 따라 분류된 면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맞은편으로는 완성된 광목 천이 두꺼운 두루마리 형태로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소매 포목점처럼 화려하거나 예쁘게 진열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질서 있고 군더더기 없이 정리된 공방 안은, 오직 일만을 위한 공간처럼 묵직하게 느껴졌다.설아는 천천히 매대 앞을 걸으며 진열되어 있는 물품들을 살펴보았다. 굵기가 각기 다른 면사 꾸러미들. 딱 보기에도 장인의 솜씨로 깔끔하게 뽑아내어 꾸러미를 지어놓았다. 계산대 쪽에서는 사람들은 도매업자인 듯 보이는 장사치들이 몇 상자, 몇백 꾸러미 단위로 값을 흥정하며 물건을 넘기고 있었다.곳곳에서 장부를 넘기는 소리와 계산하는 목소리가 쉼 없이 오갔다.“삼백 꾸러미 이 가격은 안 됩니다!”“하북까지 올리는 뱃삯만 해도 얼만데 그러시오!”상인들의 거친 목소리와 역부들의 발걸음 소리가 뒤섞인 공간은 정신없을 정도로 활기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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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잠시 뒤, 베틀 사이 안쪽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설아보다 댓 살쯤 많아 보이는 젊은 여인이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실밥이 묻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는데, 희고 가녀린 규수들과는 달리 손끝 여기저기에 붉은 잔 상처가 남아 있었다.“아버지, 무슨 일이세요?”만기삼은 턱짓으로 설아를 가리켰다.“이 소낭자께서 광목을 직접 짜볼 생각이라고 하신다. 직조법도 배우고 싶다 하시니 네가 좀 봐드려라.”그 말을 들은 만수수의 눈길이 천천히 설아에게 향했다. 아무 말 없이 위아래를 훑어본 그녀의 표정은 점점 미묘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티 없이 고운 손, 한 점 흙먼지도 묻지 않은 단아한 옷매무새, 그리고 단 한 번도 고된 일을 해본 적 없어 보이는 맑고 여린 얼굴. 그리고 송부인까지 곁에 붙어 있는 걸 보니, 누가 봐도 귀한 집 출신이었다."소낭자라고 하셨죠?."만수수가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솔직하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네, 말씀하세요.""혹시, 베틀을 직접 만져보신 적이 있으십니까?""……아니요.""그럼 면사를 손수 감아보신 적은요?""그것도…….""목화솜에서 씨를 발라내는 작업은요?"설아가 조용히 고개를 저을 때마다, 만수수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그녀는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결론을 내린 듯 단호하게 말했다."소낭자, 제가 무례한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일은 고귀한 분들이 하실 일이 아니에요. 하루 종일 베틀 앞에 앉아 있으면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고, 손에는 물집이 잡히고, 눈도 침침해집니다. 그렇게 온종일 고생해 봐야 이 정도밖에 안 나와요."만수수가 옆에 있던 천 한 자락을 들어 설아 앞에 펼쳐 보였다."이게 제가 오늘 오전 내내 짠 겁니다. 입고 계신 치맛자락 한 폭 정도 밖에 안 되지요. 괜히 고생만 하시다가 포기하실 바에는, 그냥 원사만 사가시는 게 나으실 것 같습니다."정중하지만 단호한 거절이었다. 만기삼이 옆에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헛기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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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설아는 천천히 발판을 밟았다. 날실이 갈라지며 틈이 생겼다. 조심스럽게 북을 던졌다. 그러나 북은 엉뚱한 방향으로 튕겨나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설아가 허리를 굽혀 북을 집어 들었다. 만수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시 시도했다. 이번엔 북이 날실 사이를 통과하긴 했지만, 씨실을 누르는 힘이 고르지 않아 천의 결이 들쑥날쑥했다.만수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설아의 손놀림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직조실을 빠져나왔다.공방 마당으로 나오자, 만기삼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어떻더냐?""글쎄요.""생전 처음 베틀 앞에 앉는 사람이 포대 자루 하나를 반나절 만에 만들 수 있을 것 같더냐?"만수수는 잠시 마당 한편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못 만들겠죠.""그런데 왜 앉혀놓고 온 거야?""태도를 보는 거예요, 아버지."만수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못 만든다고 해도, 해가 저물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다면…… 내일도 다시 올 수 있겠죠. 가르쳐 준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이건 버티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만기삼은 입을 열려다 그대로 다물었다. 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그는 직조실 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안쪽에서는 여전히 서툴지만 멈추지 않는 베틀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어느덧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기 시작했다.공방 마당에서 설아를 기다리던 송부인은 긴 한숨을 내쉬며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 이미 오래전에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였다. 발걸음을 돌렸다가 다시 멈추기를 수십 번, 결국 그녀는 조심스럽게 직조실 문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았다.설아는 여전히 베틀 앞에 앉아 있었다.두 눈은 침침해져 가고, 손끝은 벌써 빨갛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러나 설아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북실을 좌우로 엮으며 차곡차곡 천을 짜고 있었다. 서툴고 느렸지만, 멈추지 않았다.송부인은 말없이 문을 닫았다.어스름이 내려앉으면서 직조실 안이 점점 어두워졌다. 하나둘씩 공방 여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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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하인이 움찔하며 손을 거두었다.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는지, 연백리가 천천히 마차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하인을 향해 짧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내가 하지."검은 야행 장포 위로 달빛이 엷게 내려앉아 있었고, 붉은 등불 아래 드러난 얼굴은 낮보다 훨씬 깊고 차분해 보였다.하인이 황급히 물러나고, 연백리는 별다른 말 없이 마차 안으로 손을 뻗었다.잠든 설아를 조심스럽게 품 안으로 안아 드는 그의 손길은 놀라울 만큼 자연스럽고 조심스러웠다.설아는 잠결에 작게 몸을 뒤척였지만 깨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그의 옷깃 쪽으로 조금 더 파고들 뿐이었다.그 모습에 송부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연백리는 말없이 설아를 안은 채 그녀의 거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밤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처마 끝 풍경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잠시 뒤. 설아의 거처에 도착한 연백리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부드러운 이불 위에 몸이 닿았는데도 설아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탓인지 고른 숨결만 작게 흘러나왔다.연백리는 침상 곁에 선 채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달빛 아래 드러난 설아의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앳되어 보였다.부풀어 오른 손끝, 살짝 벌어진 입술, 그리고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올.그는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살며시 걷어 올려주다가, 이내 멈칫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그때 뒤따라 들어온 송부인을 향해 낮게 물었다."오늘 뭘 하고 다닌 거야?""포목점을 시작하게 되면 옷감에 대해 알아야 한다면서, 직접 천을 짜는 법을 배우러 직조 공방에 다녀오셨습니다.""자수를 놓아 장사를 하려는 줄 알았더니……""저도 그리 생각했습니다만……"송부인이 잠든 설아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뭔지는 모르겠으나, 소낭자께서는 훨씬 원대한 꿈을 꾸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만 봐도 그렇고요."연백리는 말없이 설아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혼자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가는 설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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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그녀는 얼른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사실 송부인의 걱정이 과한 것은 아니었다.운수현 직방 거리는 상단과 역부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곳이라, 귀한 집 규수가 혼자 돌아다니기엔 다소 거친 분위기이기도 했다.송부인은 오늘 아예 작정이라도 한 듯 작은 도시락 꾸러미까지 챙겨 마차에 올랐다.“점심도 대충 거르실 게 뻔하니 미리 준비해두었어요.”설아는 괜히 웃음이 나왔다.마차는 그렇게 아침 햇살 속 운수현을 향해 천천히 달려가기 시작했다.***다시 도착한 만가직방은 어제와 다름없이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베틀 돌아가는 소리와 사람들 오가는 목소리가 거리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설아는 마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곧장 안쪽 작업장으로 향했다.“만소저!”설아는 직조실 안을 두리번거리며 만수수를 찾았다. 그러자, 한쪽 구석에서 면사 꾸러미를 살피고 있던 만수수가 고개를 들었다.설아는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한 채 다가갔다.“제가 너무 늦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내일은 좀 더 일찍 와볼게요.”만수수는 아무 말 없이 설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안 오는 줄 알았어요.”“예……?”설아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만수수가 성큼 다가와 설아의 두 손을 붙잡아 올려 살펴보았다. 어제보다 붉은기는 가라앉았지만, 대신 손가락 곳곳에 물집이 잡혀 탱탱하게 부어있었다.“보세요. 물집이 잔뜩 잡혔죠?”“네에……”설아가 괜히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이 손으로는 오늘 베틀 못 만져요.”“아, 안 돼요.”설아가 다급하게 손을 움켜쥐었다.“할 수 있어요!”설아는 간절한 목소리로 사정했지만, 만수수는 못 들은 척 몸을 돌려 어디론가 사라졌다.잠시 뒤 그녀는 작은 단지와 얇은 천 꾸러미를 들고 돌아왔다.“손 이리 내봐요.”설아는 얼떨결에 손을 내밀었다.만수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물집 주변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시원한 약초 향이 은은하게 퍼져 코끝 속으로 스며들었다.그 다음엔 얇고 탄력 있는 천을 손가락 마디마다 단단하게 감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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