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만독여향: 비단 위에 핀 꽃: Chapter 31 - Chapter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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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흥! 벌을 받았는지, 업보를 쌓았는지, 알게 뭐람.”연백리는 막무가내로 모른 척 눈을 감는 대장공주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고모님, 누가 들을까 무섭습니다. 저야 이미 찍힐 대로 찍혔다지만, 고모님은 자신이 있으십니까?”“감히, 안평 대장공주인 나를 그 누가 건드릴 수 있다고!”“예예, 그러시겠지요.”연백리는 누가 들을세라 주위를 둘러본 뒤, 대장공주의 팔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흥은 다 파한 것 같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시지요.”“아니, 왜? 다른 어른들은 만나보지 않는 게냐? 네 혼사 문제로 여러 사람들에게 사람을 보내 말을 넣어놓았단다. 널 기다리고 있을 게야.”“괜한 일 하지 마세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모두 허사가 될 테니까요.”“아니, 아니, 백아! 내 말을 좀 들어보렴!”연백리는 발을 동동거리는 대장공주를 부축하여 공주부 마차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백아, 백아! 그럼, 공주부로 오너라! 알겠지? 약속한 게야!”연백리는 보기 드물게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마차에 오른 대장공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돌아서는 그 순간, 얼음과도 같은 차갑고 냉혹한 표정으로 순식간에 안색이 바뀌어버렸다. 그 누구도 감히 속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고 차가운 얼음 같은 표정으로.***다그닥, 다그닥.수십 겹으로 정교하게 짜 맞춘 두터운 처마 아래 금빛 단청이 촘촘히 아로새겨진 경무왕부의 화려한 대문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가운데.검은 흑단으로 만들어진 경무왕부의 고풍스러운 마차가 그 앞에 천천히 멈춰 섰다. 육중한 마차 문이 열리자, 안에서 흰색 제례복을 입은 연백리가 가볍게 뛰어내렸다.“내집사 마님, 왕야께서 돌아오셨습니다.”“그래? 아니, 벌써 돌아오시다니……”하인들에게 연백리의 귀부 소식을 전해 들은 송부인은 깜짝 놀라 서둘러 마중을 나갔다. ‘하지제가 한창인 시간에 왕야께서 벌써 돌아오시다니.’왕부 저택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연백리를 발견한 송부인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말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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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현정태후는 하지제가 끝나자마자 처소에서 잠시 숨만 돌린 뒤 곧장 아들을 찾아온 참이었다. 낮에 영화대에서 연백리에게 황실 종친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던 모습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탓인지, 평소보다 발걸음이 다소 빨라져 있었다. 곁에서 시녀들이 조심스레 부축하며 보조를 맞추려 애썼으나, 은근하게 성이 난 태후의 빠른 걸음을 온전히 늦출 수는 없었다.문이 열리고 익숙한 향취와 함께 태후가 안으로 들어섰다.상소문을 읽던 황제가 고개를 들어 태후를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태후는 우아하게 손을 내저으며 아들을 만류했다."그냥 앉아 있으시게."태후는 용상 곁으로 다가와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정하게 아들을 바라보는 눈빛 뒤로 불안한 듯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먼저 부드럽게 운을 뗐다."오늘은 대례를 치르느라 고되었을 텐데, 좀 쉬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아닙니다, 모후. 상소문이 좀 밀렸습니다.""하지제를 앞두고 이리 많이 밀렸단 말씀입니까?"연각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읽던 상소문을 가리켰다."여름 장마가 아직도 소식이 없어, 도성 외곽이며 지방에 가뭄이 시작된 곳이 많다고 합니다.""저런……. 큰일이군요.""이렇듯 큰 비용을 들여 하지제를 올렸으니, 비라도 시원하게 한바탕 와줬으면 좋겠군요."아들의 사려 깊은 대답에 태후의 얼굴에 기특함과 동시에 서글픈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황제는 이토록 밤낮없이 나라 걱정뿐인데, 정작 황궁 안의 돌아가는 꼴은 마음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태후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읊조리듯 속내를 털어놓았다."이 나라의 황제는 이토록 백성 걱정뿐인데……."순간, 태후의 미간이 볼썽사납게 구겨졌다. 아들 앞에서만큼은 숨길 필요가 없었다. 평소라면 결코 드러내지 않았을 속내가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황실 종친이라는 작자들은 그놈의 연백리에게만 우르르 붙어서서, 선황폐하의 현신이라는 둥 천신이라는 둥 잡소리나 늘어놓고 있는 꼴이라니! 내참, 기가 막혀서 원."“오늘도 그놈의 경무왕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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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어느새 진정이 된 태후는 더없이 믿음직스럽다는 표정으로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그럼요. 우리 황제께서 다 알아서 하실 일을요. 이 모후가 우둔하여 일을 그르칠 뻔했습니다.""아닙니다."연각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이 모든 것을 알려주신 분은 바로 모후가 아니십니까. 제 하나밖에 없는 스승이자, 사랑하는 어머니."연각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비틀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태후에게는 더없이 사랑스럽고 대견하며 뿌듯한 아들이자, 자랑스러운 황제의 모습일 뿐이었다.***하지제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한숨을 돌린 설아는, 검은 예복 수선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마무리를 위해 더욱 바느질에 열심이었다. 여전히 별실을 찾아와 타박을 놓는 연백리 덕에 자꾸 수를 풀었다 놓았다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우공이산이라고 꾸준함을 당해낼 장사는 없었다. “어머, 휘금사가 또 다 떨어졌네. 아가씨, 제가 침선방에 빨리 다녀올게요.”“아니다, 같이 가자꾸나. 요 며칠 별실에만 있었더니, 밖이 궁금하구나.”이제 한참 초여름으로 접어들 때라 왕부의 모습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했던 설아는 청아를 따라나섰다. 외거 구역의 침선방 장인들은 지난번에 안면을 터둔 덕에 어렵지 않게 실과 부자재를 꺼내주었다. “바쁜 일이 끝나시면 꼭 침선방에 오셔서 저희도 가르쳐 주세요.”“네, 송부인께 여쭤보고 생각해 볼게요.”설아는 체면상 그러마 약속을 하며 청아와 함께 침선방을 나섰다. 외거 구역을 지나 중문을 넘어서자마자, 초여름의 후끈한 바람을 타고 달콤하면서도 진한 치자 꽃 향이 훅 끼쳐왔다. 고개를 돌린 설아의 눈망울이 커다랗게 빛났다.서늘한 돌담을 따라 늘어선 치자나무 위로 눈 설탕처럼 하얗고 탐스러운 꽃송이들이 만개해 있었고, 그 너머 안마당 구석에는 붉은 석류 꽃이 푸른 잎사귀 사이로 장식품처럼 점점이 박혀 피어나 있었다. 햇살을 받아 번쩍이는 초여름의 녹음과 꽃들의 색 대비가 마치 최고급 비단 위에 장인이 오색 실로 수놓아 놓은 풍경화처럼 화사했다.설아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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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기억 안 나? 보연방 뒤꼍에 수십 년 된 비파나무가 있잖니.”“아하!”청아는 그제야 기억난다는 듯 두 손뼉을 쳤다. “최상급은 아니더라도 한 바구니 정도 따 모으면 비슷하게 크고 좋은 비파를 찾을 수 있을 거야.”“그런데, 송부인께서 밖에 함부로 나가지 말라고 하셨는데……”“몰래 잠깐만 나갔다 오는 건 괜찮을 거야. 오랜만에 승평 시장 구경이나 하자꾸나.”설아는 불안해하는 청아를 달래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잠깐의 외출로 비파를 구할 수 있다면, 송부인의 시름을 덜을 수 있는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나도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별실에 들러 가져온 금사 꾸러미를 내려놓은 설아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며시 경무왕부를 나섰다. 마침 선황후마마의 제사 준비로 왕부 전체가 발칵 뒤집힌 듯 분주해진 덕에, 아무도 설아와 청아의 움직임에 신경 쓰지 않아 어렵지 않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두 사람은 바쁜 걸음을 재촉해 승평 시장으로 향했다. 비단을 파는 포목점들로 가득한 골목길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고풍스러운 가게 하나가 나타났다. 보연방이었다."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설아 아가씨 아니십니까!"보연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머리가 희끗희끗한 주인장 노인이 한눈에 설아를 알아보고는 버선발로 뛰어나오듯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만난 설아를 맞이한 노인은 눈을 반짝이며 입이 마르게 칭찬을 늘어놓았다.“그날 그렇게 가시게 돼서 정말 걱정이 많았답니다. 왕부에 들어가셨으니, 저 같은 것들은 소식을 알 수가 없어서 말이지요.”“왕야와 송부인이 신경 써준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답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그렇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혹여 새로운 자수품이나 기가 막힌 도안이 생기면, 언제든지 이 늙은이에게 제일 먼저 보여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지요?"“그럼요. 당연히 그래야지요.”생긋 웃으며 노인의 인사를 받아주던 설아는, 이내 찾아온 목적을 떠올리며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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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골목길을 꺾어 대로변으로 들어서려던 바로 그 순간, 설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커다래지면서 마치 얼어붙은 듯 차갑게 굳어버렸다.아뿔싸. 절대 마주치지 말았어야 할 악연. 마침 시장을 구경하며 모퉁이를 돌던 경북후부인과 정면으로 딱 마주치고 만 것이었다.얼음처럼 굳어 숨조차 쉬지 못하는 설아를 발견한 후부인의 입꼬리가 잔인하게 치켜올라갔다."아니, 이게 누구야? 쥐새끼마냥 경무왕부에 꽁꽁 숨어있던 것도 지겹더냐! 오냐, 잘 만났다. 기어코 제 발로 기어 나오다니! 어서 저 빌어먹을 년을 후부로 끌고 가거라!""아가씨!"후부의 덩치 큰 하인들이 험악한 기세로 들이닥치자, 순간 청아는 소중하게 들고 있던 비파 바구니를 설아의 품으로 밀치듯 밀어 넣었다. 그리고 설아의 등을 사정없이 떠밀었다."아가씨! 어서 도망치세요! 얼른요!""청아야!""어서요!"청아는 설아를 잡으러 달려드는 사내들에게 제 자그마한 몸을 던지며 악착같이 매달렸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지금 잡히면 끝장이었다. 설아는 피눈물을 삼키며 비파 바구니를 품에 꼭 안은 채 죽을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등 뒤로 청아의 비명과 하인들의 고함이 멀어졌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사람들을 헤치고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새 외곽의 한적한 농가들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곳이 나타났다.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설아는 허물어져 가던 빈집 한 채를 발견하고는 안쪽의 낡은 창고 속으로 서둘러 몸을 숨겼다."어디로 갔어! 샅샅이 뒤져라!""너는 이쪽! 넌 저기로 가!"창고 문틈 너머로 자신을 찾는 후부 하인들의 거친 호통이 들려왔다. 설아는 귀를 꽉 막은 채, 온몸을 공처럼 동그랗게 웅크리며 숨을 죽였다. 목에서는 피 냄새가 올라오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청아야……’그 시각, 아가씨를 피신시키기 위해 홀로 사내들을 막아서던 청아는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다. 후부의 하인들에게 붙들려 모진 매질을 당한 청아는 만신창이가 된 채 시장 바닥에 버려졌다."아, 아가씨……."청아는 제대로 걸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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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 소설아! 정신차려!"연백리는 그 자리에서 순간 얼음처럼 굳어버렸다.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놓지 않은 것이 비파 바구니였다. 누군가의 제사상에 올릴 비파를.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참담함과 알 수 없는 감정이 연백리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는 말없이 설아를 품에 안아 들고, 그녀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비파 바구니를 챙겨 든 채 서둘러 왕부로 돌아왔다."아이고, 왕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버선발로 뛰다시피 달려온 송부인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시녀들을 지휘해 설아를 침소에 눕혔다. 연백리는 말없이 들고 온 비파 바구니를 송부인의 품에 안겼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싱싱한 비파들이 바구니에 가득했다."전하, 이게 대체…… 무엇인가요?""모르겠어. 소낭자가 정신을 잃는 순간까지 제 목숨보다 소중하게 품에 안고 있던 건데……."송부인은 그 노랗고 탐스러운 열매들을 보는 순간, 낮에 후원에서 자신이 비파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던 모습을 엿보던 설아의 모습이 번뜩 뇌리를 스쳤다. 모든 정황이 맞춰졌지만, 송부인은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조용히 바구니를 끌어안은 채, 말을 아꼈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코끝이 시큰거렸다.어느덧 사방이 어둑어둑해진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설아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침상 곁을 지키고 있던 송부인은 설아가 눈을 뜨자마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서 왕야께 가서 소낭자가 정신을 차렸다 고하거라. 빨리 오시라고 전해.”얼마 뒤, 연백리는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그 곁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송부인.설아는 면목이 없어 들릴 듯 말듯 모기만 한 목소리로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합니다. 또 저 때문에…… 왕부에 폐를 끼치고 말았습니다……""죄송해? 지금 죄송하다는 말이 나와?!"순간, 평소의 능청스러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연백리가 보기 드물게 서슬 퍼런 화를 내뿜었다. 가슴 속에서 요동치던 공포와 답답함이 거친 분노가 되어 폭발해버렸다."죄송한 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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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설아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송부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송부인은 얼른 대답하지 않고 설아의 슬쩍 설아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 청아는 지금 계속 자고 있는 걸로 알아요. 몸이 상했으니, 계속 자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우선 이따 저녁에 제사부터 잘 치르고 난 뒤에 찾아보셔도 늦지 않으니, 너무 걱정마세요.”"그런가요? 정말…… 괜찮은 거죠?"설아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송부인에게 물었다. "그럼요, 지금 의원과 저희가 달라붙어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청아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소낭자가 빨리 건강해지는 것만을 제일 우선으로 생각하세요. 아시겠지요?""네…… 다행이네요. 말씀대로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송부인의 따듯한 마음 씀씀이와 다정한 말투에 설아는 무거웠던 가슴의 응어리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련히 알아서 잘 해주실까. 왕부의 사람들이 이렇듯 든든하니, 한결 의지가 되었다."그럼, 이따가 다시 올게요. 편히 쉬고 있어요.”송부인은 안심하라는 듯 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며 설아의 거처를 빠져나갔다. 설아는 한결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자리에 누웠으나, 문밖에서 내쉬는 송부인의 한숨 소리는 듣지 못한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부산스러웠던 하룻 나절이 지나고, 설아가 그토록 기다렸던 저녁이 되어 왕부 곳곳에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낮 동안의 소란을 잠재우려는 듯, 경무왕부의 넓은 후원에는 서늘하면서도 다정한 저녁 공기가 기분 좋게 밀려드는 시간이었다.그리고 약속한 대로, 송부인이 설아를 데리러 찾아왔다.송부인은 오전에 설아에게 주고 간 옷과 똑같이 생긴 정갈하고 하얀 예복으로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설아가 같은 예복으로 갈아입은 것을 확인한 그녀는 자연스러운 손길로 길을 안내했다. "소 낭자, 준비되셨겠지요? 이쪽으로 가시지요.”송부인이 앞장서고, 설아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 뒤를 따랐다.사당으로 이어지는 길은 의외로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만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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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설아는 서둘러 송부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린 뒤,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치맛자락을 팔락이며 서둘러 멀어져 가는 설아의 뒷모습을, 송부인은 속내를 알 수 없는 미묘하고도 복잡한 표정으로 오랫동안 바라보았다.거처로 돌아온 설아는 재빨리 문을 닫고 돌아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들켰으면 어떡하지?’미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송부인의 눈길이 떠올라 설아는 그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하지만, 눈을 감으면 감을 수록 훤칠하고 수려한 연백리의 얼굴이 떠올라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설아는 두 손으로 양 뺨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후려쳤다. ‘정신 차려, 소설아! 아직 왕부에서조차 나가지 못했어. 여길 떠나서 어떻게 하면 후부와의 인연을 끊을지도 고민해야 하고. 포목점을 하면서 어떻게 세를 키워나갈 것인지, 나의 원수들에게 어떻게 복수할 것인지! 계획도 세워야 하고, 해야 할 일들이 많아!’설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느새 그녀의 서늘한 눈빛은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전히 가슴속에는 심장을 자르르 흔드는 것만 같은 애틋한 마음이 남아 있었지만, 두 주먹을 모아 쥐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던 것뿐이야. 예복이 잘 어울리셔서, 그래서 바라봤던 것뿐이라고.”설아는 스스로에게 변명이라도 하듯, 입을 열어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누가 물어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면 돼.”설아는 두 팔로 무릎을 감싼 뒤 얼굴을 묻은 채, 두 번 세 번 스스로에게 확인하듯 중얼거렸다.창밖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밤바람에 달콤한 치자 꽃 향이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코끝을 자르르 흔드는 그 농밀하고 짙은 향취에 잠 못 이루는 왕부의 시름이 깊어만 간다.***다음날 아침, 설아는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시녀가 들여온 백합죽을 말끔하게 비워냈다.까다로웠던 예복 수선도 무사히 끝낸 데다, 뜻하지 않게 선황후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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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온몸의 피가 한꺼번에 싹 다 빠져나가는 듯 아찔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밀려오는 죄책감과 충격에 다리에 힘이 풀린 설아는 그만 바닥으로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아직 깨어나지 못한 터라, 지금 찾아가도 소낭자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도록 해요.”송부인이 주저앉은 설아를 달래려 조심스럽게 다가왔으나, 이미 이성을 잃은 설아의 귀에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아뇨. 청아를 만나러 가야겠어요!”설아는 소맷자락으로 흐르는 눈물을 아무렇게나 쓱쓱 훔쳐내며 고집스럽게 몸을 일으켰다.“얼마나 많이 다쳤는지 제가 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제손으로 돌보겠어요. 그래야…… 그래야 나중에 복수라도 해줄 수 있죠!”설아의 마지막 말은 울먹이는 소리에 섞여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제 전담 시녀를 죽을 지경까지 몰고 간 경북후부를 향한 분노가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다.“소낭자……”송부인은 설아가 도저히 고집을 꺾지 않을 것 같아 보이자, 곁에 서 있던 시녀에게 은밀하게 눈짓을 보냈다.상처받은 어린 영애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왕부에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송부인, 가르쳐주세요. 우리 청아는 어디에 있나요? 안 가르쳐주시면 제가 온 왕부를 뒤져서라도 찾아내고야 말겠어요. 제발, 제발 가르쳐주세요!”설아는 송부인의 옷자락을 붙잡고 흔들며 애원했다. 하지만 송부인이 묵묵히 입을 다물자, 더는 매달리는 게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 눈물이나 흘릴 수는 없었다.설아는 눈물을 훔치며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어디로 가야 할까. 왕부의 길을 전부 알지는 못했지만, 청아는 시녀였으니 치료를 받고 있다면 하인들이 머무는 외거 구역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설아는 부자재를 가지러 침선방에 드나들던 익숙한 길을 따라 후들거리는 다리로 허둥지둥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설아의 어깨를 홱 붙잡아 돌려세웠다.“아!”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본 순간, 설아는 숨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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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설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틀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막막했다.“그럼, 대체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는 거죠?”막다른 길에 내몰린 듯한 설아의 질문에, 연백리는 대답 대신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기다려.”“뭐라고요?”설아는 날카로운 말투로 되물었다.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청아가, 사람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 지경인데도 그저 기다리라니.“알아듣지 못하겠나? 기다리라고 했다, 기다리라고!”연백리는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설아 역시 지지 않고 소리를 높였다.“그,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어떻게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가 있어요!”“그러면, 네가 뭘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어? 있으면 말해봐. 청아의 상처가 더 빨리 낫기를 해, 뭐가 더 달라지는데? 아니면 경북후부의 그 잔혹한 마님이 죽어버리기라도 한단 말이야?”설아는 기가 막혀 입을 벌린 채 벙긋거리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단 한 마디도 틀린 말이 없어서, 그래서 더 비참하고 가슴이 찢어졌다.“답답한 거 알아.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겠지. 나도 알아.”“당신이…… 당신이 뭘 알아요!”결국 참지 못한 설아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제 속내를 이 사내가 어찌 안단 말인가. 하지만 이어지는 연백리의 나직한 한마디는 설아의 가슴을 세차게 두드렸다.“나도 많이 당해봤으니까.”“……!”“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서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많이 봐왔으니까.”담담하기에 오히려 날것의 아픔이 느껴지는 고백에, 설아는 순간 당황하여 입을 벙긋거렸다.벌벌 떨리는 두 손을 꼭 쥐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깊은 눈동자 속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무언가가 고스란히 설아의 가슴으로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연백리는 설아의 가녀린 어깨를 천천히 놓아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덧붙였다.“기다려. 기다려야 해. 때론,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기다려야 할 때가 있어. 지금이 바로 네게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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