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만독여향: 비단 위에 핀 꽃: Chapter 41 - Chapter 50

100 Chapters

41화

“저희가 포목점 터를 구한 것은 알고 계십니까?”뜬금없는 소리에 설아가 부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자, 진평이 조용히 말을 이어 나갔다.“예복을 수선하는 대가로 포목점을 원하셨던지라, 미리미리 준비를 해놓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꽤 괜찮은 터를 구했지요. 지금 한창 집터를 고르고 있는 중입니다만…… 점포를 어떻게 지을지 미리 생각해 두신 구상이라도 있으십니까?”“네? 그게……” 사실, 설아는 포목점이 마련되고 나면 보연방에 가서 일을 배울 생각이었다. 한 달이며 두 달이며 일을 하다 보면 어떻게 장사를 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하지만, 진평은 머뭇거리는 설아를 보며 가진 밑천이라곤 땡전 한 푼 없을 거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우선은 바로 장사를 시작하실 수 있게 기본 점포부터 깔끔하게 만들어드릴 생각입니다. 그다음 확장할지 말지는 장사가 얼마나 잘되는지 보고 천천히 판단하시지요.”진평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술술 쏟아지는 구체적인 설명에 설아는 어리둥절했다. 설마, 맨손으로 바닥부터 시작하려고 했던 그녀의 계획을 눈치채고 있었던 건 아닐까.“그리고… 살집은 어떻게 구할 생각이십니까?”“그건…… 우선 가게 안에서 자다가, 장사를 시작하고 돈을 좀 모으면, 차차 알아보려고 생각 중이었어요.”설아는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들릴락 말락 속삭이면서 대답했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점포 근처에 지내실 집도 같이 짓고 있습니다. 일하는 곳과 집이 너무 멀면 몸이 고되실 테니, 포목점 뒷마당과 바로 연결해서 짓고 있지요. 마침 내일 아침에 진행 상태를 확인하러 가기로 했으니, 같이 가서 구경이라도 한번 해보시겠습니까?”“네? 정말요?”설아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깜짝 놀라 기어들어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럼요. 직접 지내실 곳인데 주인이 살펴보는 게 당연합니다. 자, 이것을 봐주십시오.”진평은 가져온 두루마리를 풀어 탁자 위에 펼쳐보았다. “이곳이 제가 말씀드렸던 포목점입니다. 사통팔달한 대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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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진평은 그런 설아를 잠시 바라보다가, 마치 상념을 깨는 듯 또 다른 두루마리를 촤라락 펼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 그러면 이제 이 도면을 보시지요.”펼쳐진 누런 종이 위에는 좀 전에 보았던 도면보다 더욱 자세하게 정밀한 먹선으로 방과 문, 기둥의 위치가 빽빽하게 그려져 있었다.“이것은 바로 소낭자께서 일하실 포목점의 내부 건축 도면입니다. 혹, 도면을 보실 줄 아십니까?”“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자수 도안만 볼 줄 알 뿐입니다.”설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냥 있는 가게를 구할 줄 알았지, 누가 새로 지어주는 줄 알았겠는가.“네, 그러면 제가 알기 쉽게 설명해 드리지요.”진평은 손가락으로 먹선을 짚어 가며 포목점의 구조를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손님이 드나드는 정문의 위치부터 비단을 쌓아 둘 창고, 그리고 포목점 뒷마당과 비밀스럽게 연결된 살림집의 구조까지, 그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두터운 향나무 탁자 위로 설아가 살아갈 미래의 공간이 생생하게 그려졌다.한참을 열심히 설명하던 진평이 문득 고개를 들며 물었다.“혹시 소낭자께서 원하시는 특별한 집 구조가 따로 있으십니까? 기둥의 배열이라거나, 방의 크기, 개수 같은 것 말입니다.”“제가 그런 사치를 부릴 염치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그저……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벌어먹고 살 수 있는 포목점과, 고단한 몸을 뉘어 편히 잘 수 있는 작은 집만 있으면 족합니다.”설아는 조심스럽게 도면의 구석진 곳을 어루만지다,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반짝였다.“아, 한 가지 생각났어요! 혹시 집 뒤꼍에 작은 텃밭을 하나 만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청아와 함께 소박하게 채소라도 길러 먹자고 약속을 했거든요.”설아의 뜬금없는 요청에 진평은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텃밭… 말씀이십니까? 소낭자께서 그런 일을 하실 시간이나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시간이 왜 없어요? 장사를 하다가 손님이 뜸한 틈틈이 뒷마당으로 가서 밭을 가꾸면 되지요.”“소낭자께선 텃밭 일을 단 한 번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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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이제는 검은 예복의 수선이 끝나 늘 북적이던 별채도 인적이 끊겨 고요했다. 모든 잡동사니들이 정리되자 별채는 깔끔하다 못해 휑하기까지 했다.한적했던 별채를 찾은 인물은 뜻밖에도 연백리였다. 그는 화려하게 조각된 장목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어 앉아 어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두 벌의 의복이 나란히 걸려 있는 고풍스러운 붉은색 주칠 의가였다.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두 의복을 세심하게 저울질하는 그의 눈매가 마치 매의 눈처럼 날카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 어떤 옷을 입고 가야 코를 납작하게 해줄 수 있을까.”연백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나는 보기만 해도 화려한 위엄이 치솟는 군청색과 백금 빛으로 어우러진 황자 예복이었고, 다른 하나는 늠름한 위용이 돋보이는 현은색 표기대장군 정복이었다. 신분의 벽을 느끼게 해줄 것인가, 아니면 군대의 무서움을 보여줄 것인가.“황자 예복을 입고 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어느새 조용한 침묵을 깨고 다가온 송부인이 살갑게 말을 건넸다. 연백리는 의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툴툴거리듯 중얼거렸다.“기를 팍 죽이려면 무시무시한 대장군 정복도 나쁘지 않은데. 허리엔 귀혈검까지 차고 말이야. 아, 경북후부에서 내 귀혈검에 대해 알고나 있을까?”그 거침없는 소리에 송부인이 연백리를 향해 눈을 흘겼다.“아무리 돌아가신 경북후께서 호국대장군이셨기로서니, 가주도 안 계신 곳을 허리에 칼까지 차고 방문하신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요?”“크흠!”연백리가 못 들은 척 시선을 피하자, 송부인은 깊은 바다를 닮은 묵직한 군청색의 황자 예복이 걸려 있는 의가 쪽으로 걸어가 그 옆에 팔짱을 끼고 섰다. 그러자,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시녀들이 드디어 결정이 났다는 듯 황자 예복을 걷어내리며 연백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빨리 영주나 다녀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너무 잘 알아서 마음대로 하실까 봐 걱정이 돼서 그러죠.”“아, 다 알아서 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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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아니, 그 도둑놈들이 다짜고짜 내 딸을 납치해다가 돌려주질 않으니, 난들 뾰족한 수가 있겠냐고요! 직접 쫓아가서 한판 뒤집어엎었는데도 꿈쩍도 안 하고…… 세상에나, 내가 황제폐하까지 찾아가 눈물로 아뢰었는데도 속수무책이랍니다!”“아니, 대체 무슨 수로 버틴답니까? 황제폐하의 명조차 통하지 않다니요.”“경무왕부 전속 수양이라나 뭐라나! 나이도 열여덟이 넘은 데다가, 왕부에서 이미 상호까지 내주었다지 뭡니까. 본인이 왕부에 머물겠다고 결정하면 법적으로 건드릴 수가 없다잖아요? 세상에, 이런 해괴한 법이 어디 있어요? 대명천지에 이럴 순 없는 겁니다!”씩씩거리며 화를 참지 못하는 경북후부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분이 안 풀리는지 급기야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울화통을 터뜨렸다. 그 답답해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안녕왕비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그녀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슬쩍 말을 건넸다. “언니, 내가 그래서 오늘 좋은 소식 하나를 들고 왔다니까요? 한번 들어볼래요?”“아니, 대체 얼마나 좋은 얘기를 갖고 왔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실까, 그래?”그런 후부인을 바라보며 재밌다는 듯 웃음을 참지 못하던 안녕왕비는 계속되는 후부인의 재촉에 입을 열었다.“얼마 전에 내가 태후마마를 뵙고 왔답니다. 제게 측근 시녀를 하나 구해달라고 하시더군요. 믿을만하고 똑똑한 아이로 말이죠.”“측근… 시녀요?”“네, 태후마마 처소의 아이들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제법 노련해졌다지만, 아무래도 마마의 수발을 들 젊고 신선한 일손이 예전 같지 않다더군요.” 안녕왕비는 목이 마른지 차 한 모금을 마신 뒤,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설아를 태후마마께 보내드리는 건 어때요? 설아처럼 영특한 아이라면 태후마마께서도 무척 흡족해하시지 않겠어요?"“... 우리, 설아를요?”“언니, 요즘 진우 혼사 때문에 머리가 아픈 거 다 알고 있다고요. 오라버니 돌아가셨다고 근양왕 쪽에서 발길을 딱 끊었다면서요? 벌써, 소문이 자자하답니다.”후부인의 안색이 창백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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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경북후부는 경무왕전하를 맞아 속히 예를 갖추시오!”맨 앞에 서 있는 시위의 벼락같은 호통 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후부인과 안녕왕비가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달칵.잠시 침묵이 흐르고, 마침내 마차 문이 열렸다. 은실과 백금 실로 정교하게 짜인 군청색 황자 예복을 입은 연백리가 화려한 부채로 얼굴을 비스듬히 가린 채, 천천히 디딤돌을 밟고 앞마당에 내려섰다. 소문으로만 듣던 표기대장군 경무왕의 압도적인 위세에 정문 앞의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이, 이쪽으로 가시지요…….”이 서슬 퍼런 위용 앞에서 후부인은 온몸을 벌벌 떨며, 가문의 가장 귀한 손님만을 모시는 접객실인 정청으로 그를 서둘러 안내했다.연백리는 아무 말 없이 정청 안으로 걸어 들어가 상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 뒤를 따라 안녕왕비와 후부인이 차례로 그 아래쪽에 마주 보며 자리를 잡았다.시녀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앞을 다투어 화려한 다과 상을 차려 올렸다. 정청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침묵이 길어지자, 안절부절못하던 경북후부인이 마른침을 삼키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드디어 이렇게 저희 경북후부를 찾아주시니, 기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지난번 설아를 되찾으러 왕부에 찾아갔을 때 뵙지 못해서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르실 겁니다.”연백리는 여전히 부채 뒤로 얼굴을 숨긴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긍정의 뜻으로 착각했는지 후부인은 짐짓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그때, 웬 불한당 같은 놈이 감히 우리 설아를 품에 안고 그냥 가버려서 진짜 황당하고 화도 났었는데…… 혹시 오늘 그 일을 사과하러 오신 것인지요?”부채 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불한당 같은 놈이라고?”낮게 가라앉은 연백리의 음성이 정청을 차갑게 울렸다. 등줄기가 서늘해질 법도 하건만, 후부인은 눈치 없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아, 그럼요! 웬 고얀 놈이 말도 없이 설아를 안고 홱 가버리는데, 불러도 듣지도 않고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오죽하면 제가 황제폐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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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후부인은 정말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기함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주변의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어 가까스로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후부인은 넋이 나간 얼굴로 덜덜 떨며 소리를 질렀다.“저, 정비를 제안하셨다니요! 그런 중차대한 일을 왜 어미인 저에게 말 한마디 없으셨던 겁니까!”“당연히, 소설아 본인이 스스로 자유롭게 살고 싶어 했기 때문이지. 당사자가 거절했는데, 내가 굳이 후부에까지 알릴 필요가 있나?”“당연히 알리셨어야죠! 설아는 제 딸입니다! 어서 저희에게 보내주십시오! 당장 혼인 준비를 시키겠습니다!”눈앞의 사내가 첩실이 아닌 무려 경무왕비 자리를 제안했다는 사실에 후부인의 눈에 다시 맹목적인 탐욕이 번들거렸다. 연백리는 그런 후부인의 한심한 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내가 지금 누차 말하는데, 설아가 왕부에 있는 건 본인 스스로의 선택이라니까? 게다가, 지금 그 아이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건 바로 당신네 경북후부일세.”“저희…… 때문이라고요?”“벌써 잊어버렸나? 당신들이 설아의 시녀를 죽도록 두들겨 패지 않았나. 아예 죽으라고 저잣거리 한복판에 내팽개쳤지.”“그, 그건……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청아라는 그 시녀는, 다 죽어가는 몸을 하고도 겨우겨우 버텨가며 왕부로 돌아왔어. 제 주인을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말이지.”연백리의 목소리가 한 층 더 낮고 냉혹하게 가라앉으며 정청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아닙니다, 전하! 그게 아니라……!”“뭐가 아니라는 거지?”연백리가 차갑고도 냉혹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히며 후부인의 말을 단호하게 잘라냈다.“청아를 두들겨 팬 게 아니라는 건가? 아니면 설아를 강제로 끌고 가서 아무 데나 돈 많이 주는 곳에 혼인을 시켜 팔아먹으려고 했던 게 아니라는 건가?”후부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갔다. 연백리는 입꼬리를 뒤틀며 같잖다는 듯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혹은, 이 경무왕 연백리가 우스워서…… 그 아이가 내 왕부에 머물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따위 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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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연백리가 눈썹을 찌푸리며 비스듬히 괴고 있던 자세를 바르게 고쳐 잡았다. 정청의 공기가 한층 더 무겁게 내려앉은 그때, 이때다 싶었던 후부인이 바닥에 엎드린 채 잽싸게 입을 열었다.“저희 어르신인 호국대장군 경북후 나리께서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미리 정혼되어 있던 제 아들 소진우의 결혼까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습니다!”후부인은 숨을 헐떡이며 쉴 새 없이 제 억울한 속내를 털어놓았다.“이런 위기 속에서 태후마마께서 하늘 같은 은덕을 내리시어 설아를 보살펴 주시고, 진우의 혼사까지 직접 돌봐주시기로 약조하셨으니 저희로서는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때가 되면 설아의 혼인 자리까지 알아봐 주실 것이니, 저희 가문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오호라. 나름 열심히 머리를 굴렸군 그래.”연백리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웃음엔 서늘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잘만 하면 승명전 소침실에 밀어 넣어, 육궁의 수많은 전각 중에 한 자리라도 차지할 수 있겠고 말이야.”“헉……!”후부인이 정곡을 찔린 듯 헛숨을 들이켜며 격하게 사래 기침을 해댔다.“황제폐하께서는 참으로 복도 많으시지. 열 첩도 모자라 이렇게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처자가 또 있으니 말이야. 설아를 입궁시켜 일이 잘 안 풀리면, 그때는 또 어느 세도가의 댁으로 순번이 돌아갈까? 응? 안 그런가, 안녕왕비.”연백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고 냉혹하게 변했다. 입가에 머무는 매끄러운 미소조차 보는 이들의 피를 얼려버릴 듯한 살기로 가득했다. 안녕왕비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결코 그런 뜻으로 입궁을 논한 것이 아니 옵니다!”“그럼, 그럼. 당연히 몰라야 할 거야. 아주 진심으로 말일세.”연백리는 잠시 풀어졌던 웃음기를 지우고 정색을 하며 안녕왕비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자, 이제 내가 이곳에 방문한 진짜 이유를 알려주겠다. 두 귀를 열고 똑똑히 듣도록 하라.”연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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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그 말에 후부인이 대경실색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듯 씩씩거리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방금 저 미친놈이 하고 간 말, 벌써 다 잊어버렸어요? 멸문지화라잖아요, 멸문지화! 우리 진우는 아직 관직에 나가지도 못했는데, 지금 아주 망하라고 고사를 드리겠다는 거예요?!”“아니, 그래도 태후마마께서 소식을 기다리고 계실 수도 있는데…….”“기다리고 자시고 지금 우리 경북후부가 풍전등화에 놓였다고요! 저 미친놈을 싹 다 치워줄 자신이 있으면 가서 말을 하든가 말든가!”후부인의 서슬 퍼런 악다구니에 안녕왕비는 똥 씹은 표정이 되어 가만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억울하고 분해서 부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무는 꼴이 가관이었다.“아휴, 더워! 부채질 좀 더 세게 못 하겠느냐!”후부인은 시녀가 급히 떠다 바친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연신 짜증을 부렸다. 다 마신 찻잔을 탁상에 거칠게 내던지며 허공을 향해 이를 갈았다.“망할 년 같으니……! 두고 봐, 내가 네년을 가만히 두나 봐라!”입으로는 설아를 찢어 죽일 듯 저주를 퍼부었지만, 정작 머릿속엔 그 어떤 뾰족한 수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엔 피에 굶주린 귀혈검이 맞아 줄 거야.정청을 가득 채웠던 연백리의 서늘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들려오자, 후부인은 저도 모르게 또 한 번 온몸에 진저리를 치고 말았다. “아휴! 저, 저 지독한 미친놈……!”곁에 선 시녀들의 부채질이 더욱 다급해지면서, 웅성거리던 경북후부에 평화가 찾아왔다. 찬물을 마시던 두 부인들은 부축을 받으며 내실로 돌아가고, 떠들썩하던 대문 밖의 거리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한동안 도성 안에서 경북후부의 소식을 듣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그 무엇보다, 목숨은 중요하니까.***덜컹, 덜컹.일정한 리듬을 타며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마차 바퀴 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경쾌했다. 마차 앞자리에서 마부가 부드럽게 고삐를 당기는 소리와 함께, 창문 너머로는 말을 탄 진평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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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밖으로 보이는 풍안 시장은 설아가 보아왔던 승평 시장과는 규모부터 달랐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길을 따라 늘어선 상가들은 하나같이 집채만 한 규모를 자랑했고, 지붕마다 높이 걸린 상단의 깃발들이 거친 하북의 바람을 맞아 펄럭이며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다.특히 양곡 도매상들이 밀집한 포량가에 접어들자 공기의 무게마저 달라졌다. 사방이 대운하를 통해 올라온 거대한 곡물 궤짝과 삼베 자루들로 거대한 성벽처럼 첩첩이 쌓여 있었다. 길바닥은 마차 수십 대가 엉켜도 남을 만큼 널찍했으나, 전국의 한 해 농사를 좌지우지할 거상들의 대형 수레와 물류를 나르는 장정들로 가득 차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수레 조심해라! 뒤로 물러서!”“동주 상단으로 들어갈 광목 천 필이다! 길을 열어라!”땀에 젖은 장정들이 우렁차게 내지르는 기합 소리가 수레바퀴 굴러가는 굉음과 뒤섞여 사방을 뒤흔들었다. 수많은 양곡 수레 사이로, 질기고 단단한 광목천을 산더미처럼 싣고 가는 도매상들의 움직임이 유독 설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곳은 소소한 흥정이 오가는 장터가 아니라, 전국의 물류를 지탱하는 거대한 요충지로서 그 거대하고 묵직한 세계의 기운이 열린 창을 통해 마차 안까지 전해졌다.심장이 쿵쾅거리는 전율 속에서, 설아의 시선이 드디어 저 멀리 한창 뼈대를 올리고 있는 자신의 포목점 터에 닿았다.‘바로 저곳이구나!’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승평 시장에 있던 작은 가게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규모였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대들보와 사방으로 시원하게 골조를 드러낸 기둥들은, 장차 이 하북 영주를 대표하는 포목점이 되겠다는 듯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도면으로만 보던 거대한 건축물이 실제로 눈앞에 덜컥 나타난 것처럼, 믿기지 않을 만큼 온몸에 전율이 감돌았다.“소낭자, 도착했습니다.”진평의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마차가 포목점 터 바로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설아는 송부인의 뒤를 따라 진평의 도움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마침내 풍안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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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설아가 의아해하는 것을 눈치챈 진평이 그 까닭을 일러주었다.“하북 영주는 요충지이긴 하나, 골목골목 흥정이 오가는 소매보다는 상단들이 대규모로 물건을 떼어가는 도매 산업이 유독 발달한 곳입니다. 상인들이 물건을 통째로 떼어가 버리니 정작 성내에는 이렇다 할 포목점이 드물지요. 그러니 소낭자께서 이곳에 포목점을 여시면 장사가 아주 잘 될 겁니다.”무관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치고는 꽤 정확한 분석이었다. 하지만 설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설아의 장사꾼 다운 직감은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소매 가게가 별로 없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여기서 직접 옷감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뜻이에요.”“예? 그렇다면……”설아의 시선이 바쁘게 움직이는 시장 주민들과 인부들에게 향했다.“이곳 사람들은 비단옷을 화려하게 입고 풍류를 즐기기보단, 당장 몸을 움직여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잖아요. 다들 삼베나 광목 원단을 입고 하루 종일 일을 많이 하니까 소매 포목점이 설자리가 없었던 거예요.”이곳 사람들이 주로 찾는 것은 옷감의 아름다움보다 오로지 실용성에 집중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설아의 날카로운 통찰에 송부인이 흥미롭다는 듯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속삭였다.“좋은 안목이에요. 하지만 광목이나 삼베 같은 소박한 원단은…… 장사를 크게 키우기엔 수익이 많이 나지 않지요.”“맞아요, 부인. 그래서 고민이에요. 도매상에게 비싸게 떼어다 파는 식으로는 마진이 안 남아요. 게다가 도매가에 따라 소매가는 오르고 내리길 반복할 테니, 장사가 안정되기 어렵거든요.”거기까지 말한 설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어쩌면…… 도매로 떼어다 팔 게 아니라, 제가 원단을 직접 제작해야 할 수도 있겠어요.”중간 상인에게 휘둘리지 않고, 직접 옷감을 지어 파는 나만의 길을 연다. 그것은 승평 시장 시절과는 차원이 다른, 그야말로 진짜 거상의 길로 들어서겠다는 뜻이었다.비용 계산, 물류의 흐름, 그리고 앞으로 펼쳐 나갈 원대한 청사진까지. 머릿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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