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신부의 카운트다운: Chapter 1 - Chapter 10

20 Chapters

제1화

“몇 번을 설명했어. 조민애는 암에 걸려서 이제 1년밖에 안 남았어. 가족한테 아이를 남겨주고 싶은 게 걔 가장 큰 소원이야. 그때 민애가 내 목숨을 구해줬는데, 이제 내가 그 소원을 들어줘야 해!”이런 말을 나는 이 한 달 동안 수도 없이 들었다. 주경안이 처음 그 요구를 꺼냈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거의 매일같이 같은 말을 꺼냈다.주경안의 태도는 처음에 조심스럽게 동의를 구하던 것에서 이제는 당당하게 나와 싸우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치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천하의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목숨을 구해준 은혜가 아무리 크다 해도 아이를 낳는 것으로 그 은혜를 갚는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러나 한 달에 걸친 다툼은 나를 심신이 지치게 만들었다. 이미 주경안을 설득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나는 5년을 함께 사랑해온 이 남자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주경안, 다음 달이면 우리 결혼식인데 지금 다른 여자랑 아이를 낳겠다는 거야? 그럼 나는? 나를 뭐로 보는 거야?”주경안은 내가 이렇게 기운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게 처음인지 잠시 멈칫했다. 마치 온몸이 먹구름에 휩싸인 것 같은 내 모습에 그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들었다.“세연아, 받아들이기 힘든 거 알아. 근데 지금 조민애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 걔가 아쉬움을 안고 떠나는 걸 그냥 볼 수가 없어.”“게다가 인공수정이잖아,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는 거야.”“나를 사랑한다면 이해해 줄 수 있지?”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심장이 끝없이 가라앉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 주경안은 진작에 어떻게든 조민애와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을 굳힌 것이다. 내 의견 따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주경안이 무언가 더 말하려는 찰나, 핸드폰 벨 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그는 화면을 슬쩍 확인하더니 핸드폰을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띠었다.주경안과 나는 소위 죽마고우라고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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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그것은 산부인과 검사지였다. 산모의 이름란에 적힌 세 글자를 확인하는 순간,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다름 아닌 조민애.임신 주수를 확인하고는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검사지 위에는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임신 3주.즉, 한 달 전에 이미 주경안은 나 몰래 조민애와 인공수정을 진행한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나와 단 한 번도 상의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그렇다면 이 한 달 동안 주경안은 대체 왜 그렇게 집요하게 내게 물어본 걸까?’‘자기 스스로 조금이라도 마음 편하게 있으려고? 도대체 나 박세연을 뭐로 보는 거야?’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심장을 커다란 손이 틀어쥐듯 숨이 막혀왔다.아까 주경안이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했던 것도, 전화를 끊자마자 황급히 자리를 떴던 것도 이제야 비로소 이해가 됐다. 인공수정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조민애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그제야 전해 들은 것이었다.‘지금쯤 병원으로 달려가 조민애와 함께 기뻐하고 있겠지.’나는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끝없는 서글픔이 가슴속에서 번져 나갔다.믿을 수가 없었다.“내가 그토록 오래 사랑한 남자가 이런 식으로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질 줄이야.”불과 두 달 전에 내 프로포즈를 받아줬던 사람이었다. 다음 달로 결혼식 날짜를 잡았고 웨딩드레스와 호텔까지 이미 예약해 둔 상태였다.주경안의 손을 잡고 함께 결혼이라는 문턱을 넘는 그 순간을 나는 얼마나 오래 기다려왔던가.그런데 이제 그 모든 기대가 거품처럼 공중에 흩어져 버렸다.그때 핸드폰이 윙 하고 진동했다. 덕분에 사방으로 흩어졌던 정신이 간신히 돌아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고 곧이어 선배의 맑은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 들어왔다.“세연아, 결혼한다는 거 알면서도 한 번 더 물어보고 싶어서. 우리 실험실로 올 생각 없어? 정말?”“너는 교수님이 제일 아끼는 제자야, 교수님도 계속 네가 와줬으면 하시거든.”“곧 결혼할 거라 생각해서 교수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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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그날 밤 주경안은 돌아오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전화하지 않았다.조민애의 SNS에서 이미 다 봤으니까.오후에 병원에서 나온 두 사람은 곧장 조민애 집에 들러 가족들에게 임신 소식을 전했다.사진 속 조민애의 할머니는 주경안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 뭔가를 말하고 있었고 그는 다른 한 손으로 조민애의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5년을 함께하면서 주경안이 나와 단 한 번 내 집에 간 건 내 프로포즈를 받아준 후였다. 두 집 사이가 차로 30분도 안 되는 거리인데도 그전까지 한 번도 먼저 찾아온 적이 없었다.어른들과 함께 있는 게 불편하다고 어색하다고 했으니까.그 한 번의 방문도 그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는 수준에 불과했다. 저 사진 속에서 조민애의 가족을 대하는 것처럼 따뜻하지는 않았다.나는 마음속에 차오르는 쓴맛을 꾹 삼키고 핸드폰을 껐다.다음 날, 친한 친구들 몇 명을 만나 결혼식이 취소됐다는 사실을 알렸다.원래 주경안은 결혼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의미 없는 형식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내가 끝까지 고집을 부린 끝에 겨우 작은 규모로 하기로 합의를 봤고 가장 친한 친구들과 가족들만 초대하려 했던 터였다.주변 사람들은 내가 주경안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결혼식 취소 소식에 모두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야, 주경안 좋아한 게 몇 년인데 겨우 그 까칠한 사람 손에 넣었더니 놔준다고?”“그 시간들이 아깝지 않아?”가슴 한편이 바늘로 찌르는 듯했다.‘아깝지 않냐고?’당연히 아까웠다.‘20년을 한결같이 그 사람 뒤를 따라다닌 끝에 겨우 얻어낸 대답이었는데 20년의 감정을 내려놓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어.’하지만 사실 이 관계는 처음부터 불균형했다.언제나 내가 주경안을 향해 달려갔고 그는 한 번도 멈춰 나를 기다려준 적이 없었으니까.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20년이 걸려 그를 내 사람으로 만들었으니 결혼 후에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그의 마음속에 진짜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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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내일 웨딩사진 찍으러 가지 마.”탁자 위의 달력을 보니 내일 날짜 아래에 마커로 크게 ‘웨딩사진’이라고 쓰여 있었다.주경안이 왜 취소하려는지 이유는 몰랐지만 어차피 나는 이 결혼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니 그가 말하지 않았어도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취소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먼저 말을 꺼내 줘서 수고를 덜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내가 사진작가한테 전화해서 취소할게.”말이 끝나자마자 주경안이 순간 멈칫했다. 이렇게 순순히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웨딩사진 촬영을 위해 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비용을 따로 더 얹어서 겨우 스케줄을 끼워 넣어달라고 부탁한 사진작가였다.그런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동의해버리자 주경안이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취소하지 않아도 돼.”“조민애가 이번 생에 결혼은 못 할 것 같다면서 나랑 웨딩사진이라도 찍고 싶다는 거야. 결혼식을 올린 것처럼이라도 기억에 남기고 싶대.”“내일 조민애가 나랑 같이 찍으면 되지. 우리는 나중에 다시 찍으면 되고.”주경안은 오늘 뭐 먹을지 정하듯 가볍게 말했다. 한 달 전 인공수정 이야기를 꺼내던 날과 똑같은 태도였다. 표면적으로는 상의하는 척이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드러냈다. 그냥 통보하는 것이었다.나는 시선을 내리깔아 속마음을 감췄다.‘나중에?’주경안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도시에서 이제 13일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에게 나중이란 없었다.나는 조용히 알겠다고 대답하고 침실로 들어가 쉬려 했다.어차피 결혼도 하지 않을 거니 주경안이 누구와 웨딩사진을 찍든 나와 상관없었다.주경안은 나의 뒷모습을 보며 묘하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무 말도, 아무 따짐도 없는 내 모습이 너무 조용해서 준비해 뒀던 말들이 쓸데가 없어졌다.하지만 그때 조민애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자 마음속 그 작은 의아함은 금세 사라졌다. 그는 베란다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다음 날 아침, 내가 막 잠에서 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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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그 후 일주일 내내 주경안은 돌아오지 않았다.하지만 SNS에 뭐든 올리기 좋아하는 조민애 덕분에 나는 항상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둘이서 온천을 즐기고 바다를 보고 일출을 배경으로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내 SNS 피드에서 나는 낯선 주경안과 다시 마주쳤다.‘그도 평범한 연인처럼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내 앞에서는 그럴 수 없었던 것뿐이었어.’그들이 매일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오래 들여다볼 마음은 없었다. 한 번씩 쓱 훑고는 바로 넘겨버렸다.그렇다고 나도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었다. 집 안에 짐이 워낙 많아서 다 정리하는 데 며칠이 꼬박 걸렸고 그 사이 시간을 내어 부모님 댁에도 다녀왔다.곧 실험실에 들어가게 됐고 한동안 연락이 어려울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하셨다.“경안이랑 곧 결혼하는데 그러면 떨어져 살게 되는 거 아니야?”어머니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 손을 잡으셨다.“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세연아. 너희 둘이 여기까지 오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데. 네가 실험실에 가면 경안이가 반대할 수도 있고 그러면 결혼식은…”부모님의 마음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수년간 주경안에 대한 내 집착을 두 눈으로 지켜보셨고 그에 비해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도 다 보아오셨다. 프로포즈하기 전에도 완곡하게 말씀하셨었다.“경안이 마음속에 네 자리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구나. 한 번 더 잘 생각해 봐라.”그때 나는 한껏 자신에 차 있었다. 내가 충분히 주경안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언젠가는 그가 온전히 나를 받아들일 거라고 굳게 믿었고 그 믿음이 있었기에 부모님도 결국 두 손을 들어 허락해 주셨던 것이다.지금 부모님이 걱정하시는 건 내가 실험실에 가면 주경안이 반대해서 결혼이 깨질까 봐서였다. 그로 인해 내가 깊이 상처받을까 봐 노심초사하시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결혼을 취소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은 주경안이 아니라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결혼 취소 사실을 말씀드리던 날, 두 분은 한동안 아무 말씀도 하지 못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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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카운트다운 5일째, 나는 학교에 사직서를 냈다.주경안 곁에 있으려고 교수님의 연구실 제안을 마다하고 그를 따라 이 도시의 학교에 자리를 잡은 것이었기에 사직 소식을 들은 동료들이 하나같이 놀랐다.“왜 그만두세요, 박 선생님?”“며칠 전에 결혼하신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전업주부 되시려고요? 주 선생님은 좋겠다.”한 동료가 농담처럼 말했다.나는 짐을 안고 웃으며 대답했다.“아니요, 결혼식이 취소됐어요.”집에 돌아가 문을 열자 일주일 만에 주경안이 조민애와 함께 소파에 앉아 있었다.주경안이 내 손에 든 짐을 보며 물었다.“물건들은 왜 들고 왔어?”나는 대충 둘러댔다.“쓸 일 없는 거라서 가져온 거야.”주경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집 안을 한 번 둘러보고는 미심쩍게 입을 열었다.“일주일 밖에 안 나갔다 왔는데 뭔가 많이 줄어든 것 같은데?”나는 짐을 들고 침실에 넣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필요 없는 거 정리한 거야.”주경안이 뭔가 더 말하려는 찰나, 조민애가 끼어들었다.“세연 언니, 이번에 경안 오빠가 절 여행에 데려가 주시고 고생하셨는데 또 웨딩사진도 찍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제 꿈을 이뤄줬어요.”“제가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어요. 그동안 두 분이 도와주신 것도 있고 앞으로도 한동안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아서요. 제가 불편하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언니.”조민애의 눈빛에 담긴 은근한 승기를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산부인과 검사지를 받은 이후로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 좀 불편하지 않냐고 보는 거겠지.’그런데 나는 지금 그녀와 소모적인 싸움을 할 생각이 없었다. 5일 후면 주경안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 해야 할 건 조용히 마무리를 짓는 것이었다.내가 대답하지 않자 조민애의 눈이 금세 빨개졌다.“경안 오빠, 세연 언니 기분이 안 좋으신 건가요? 하긴 두 분 곧 결혼하는데 제가 이러니...”조민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경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불쾌한 눈빛으로 나를 나무랐다.“조민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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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조민애를 차에 태워주고 돌아서던 주경안이 마지막 몇 마디를 들은 모양이었다.그가 앞부분을 듣지 못했다는 걸 알고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내 친구가 곧 떠난대서.”주경안이 고개를 끄덕이고 더 묻지 않았다.카운트다운 4일째, 주경안이 조민애와 찍은 웨딩사진을 가지고 왔다.한 손엔 핸드폰을 들고 조민애와 영상통화를 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액자를 들어 보여줬다. 눈빛이 온화함으로 가득했다.“민애야, 우리 웨딩사진 나왔어. 내가 찾으러 갔는데 스튜디오 직원들도 다 잘 나왔다고 하더라.”내가 마침 물을 마시러 나오다 그 말을 들었다.주경안의 눈에 잠깐 민망한 빛이 스쳤다.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나는 사진을 슬쩍 보고 솔직하게 한마디했다.“진짜 잘 나왔네.”내가 큰돈을 들여 그 사진작가에게 부탁한 건 주경안과의 가장 사랑스러운 순간을 영원히 담아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진을 받아보는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정장을 입은 주경안은 정말이지 내가 상상했던 것만큼이나 멋있었다. 다만 그의 곁에 선 신부가 내가 아닐 뿐이었다.그래도 내 마음에는 이제 아무런 파문도 일지 않았다. 조민애의 임신을 알게 된 그날부터 주경안에 대한 감정은 남김없이 거둬들인 것이다.오히려 멈칫한 건 주경안 쪽이었다.조민애와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 나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는 걸 그제야 문득 깨달은 것이었다.여행을 가 있던 일주일 동안에도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았던 내가 새삼 낯설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영상통화 속에서 조민애가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가자 그는 내가 결혼 준비로 바빠서 그런 거겠거니 하며 그 작은 불안함을 스스로 밀어냈던 것이다.카운트다운 2일째, 나는 약을 좀 사두려고 병원에 들렀다.그런데 거기서 산전 검사를 마치고 나오는 주경안과 조민애를 마주쳤다. 주경안의 눈에 드물게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조민애가 먼저 나섰다. 그녀는 내 앞으로 성큼 다가오더니 내 손을 꼭 잡고 무릎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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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영문도 모르고 쏟아지는 비난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내가 사과를? 직접 CCTV 확인해 봐. 내가 사과를 해야 하는지 아닌지.”‘CCTV도 확인하지 않고 내가 조민애를 밀었다고 단정 짓다니.’“조민애는 환자야. 게다가 임산부인데 설마 제 몸을 스스로 다치게 하겠어?”조민애의 눈에 순간 당황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됐어요. 세연 언니가 화나서 그런 거잖아요. 우리 이만 가요.”주경안이 물러서지 않았다.“안 돼. 오늘 반드시 사과해야 해.”나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하지 않은 일은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조민애는 더 버티다가 주경안이 정말 CCTV를 확인할까 봐 걱정이 됐는지 슬그머니 배를 감싸 쥐며 속이 안 좋다고 했다. 분노로 가득하던 주경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걱정으로 물들었다.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의사를 찾으러 달려갔다.나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마음속에 끝없이 쓴맛이 번져오는 것을 느꼈다. 20년의 시간과 5년의 나날들, 그런데도 주경안에게서 받은 신뢰는 단 한 조각도 없었다.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직 빠져나올 수 있을 때 정신을 차렸으니까.그날 밤, 주경안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조민애를 돌보느라 바쁘겠지.’떠나기 전 마지막 날, 나는 캐리어 하나만 남겨두고 정리해 둔 짐을 실험실로 미리 부쳤다.저녁에 주경안이 돌아왔다.여전히 얼굴에 화가 가시지 않은 채였다.“조민애가 아직 병원에 누워 있어. 환자인 데다가 뱃속의 아이까지 불안정하다는데 설령 네가 고의가 아니었더라도 조금 더 양보해 줄 수 없어? 왜 그렇게 따져야 했어?”‘양보?’나는 충분히 양보를 했다고 생각했다.내 웨딩드레스와 사진작가를 조민애에게 내줬고 나의 예비 남편이 다른 여자와 아이를 낳는 것도 비켜섰다.이제 주경안 곁의 자리도 조민애에게 내주는 것이었다.주경안이 달력의 빨간 동그라미를 슬쩍 보더니 표정이 조금 풀렸다.“됐어, 내일 결혼식인데 싸우고 싶지 않아.”“결혼식 끝나면 조민애한테 사과해 줘.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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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한편, 주경안은 조민애의 상태가 안정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병원을 나섰다. 걸어가면서 박세연에게 결혼식 준비는 다 됐냐고, 자신은 지금 호텔로 가는 중이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런데 차에 올라탈 때까지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핸드폰을 열어 한 번 더 보내려다가 그들의 마지막 대화가 보름 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주경안이 위로 대화를 천천히 스크롤했다. 화면 가득 하얀 메시지들이 펼쳐졌다. 뭐 먹을지 묻는 박세연의 메시지, 결혼식과 관련해 의견을 구하는 메시지들이 빼곡하게 이어져 있었다.주경안의 답장은 매번 짧았다.[아무거나.][다 괜찮아.][네가 알아서 해.]그래도 박세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같이 메시지를 보내왔었는데 이 보름 동안만큼은 단 한 통의 연락도 없었다.주경안의 마음속에 이상한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왜 이렇게 오래 아무 연락도 없지?’그 생각을 따라가다 보니 한 달 전 인공수정 이야기를 처음 꺼냈을 때 박세연의 눈빛이 떠올랐다.20년을 알고 지냈지만 그때 처음으로 그렇게 고통스러운 표정을 본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그렇게 강하게 반대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박세연은 인공수정 문제만 반대했을 뿐, 다른 건 늘 하던 대로였다.보름 전쯤, 마지막으로 인공수정 이야기를 꺼낸 이후로 연락이 완전히 끊긴 것 같았다. 문자도 없었고 집에 있어도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마음이 점점 불안해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좀처럼 떨쳐지지 않았다. 결혼 준비로 바빠서 그런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면서 기사에게 서둘러 가달라고 했다.핸드폰을 확인하니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호텔에 도착하니 친구들과 가족들이 이미 와 있었다. 다들 모여 무언가를 얘기하다가 주경안의 모습을 보자마자 일제히 달려왔다. 어머니가 눈살을 찌푸리며 헐레벌떡 들어온 아들을 바라봤다.“경안아, 왜 양복도 안 입고 왔어? 세연이는? 같이 안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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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주경안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어떻게 취소할 수가 있지?’두 달 전 프로포즈를 받아줄 때, 박세연의 얼굴에 가득했던 기쁨을 분명히 봤었다.‘세연이가 어떻게 결혼식을 취소한단 말이야?’주변의 친구들과 가족들도 어안이 벙벙했다.“날짜를 잘못 기억한 게 아닌데 왜 결혼식이 취소됐다는 거야...”어머니가 직원에게 세 번이나 박세연이 취소한 게 맞는지 확인하고 나서 분노를 꾹 참으며 주경안을 구석으로 데려갔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결혼 날짜 다 정해놨는데 당일에 나타나지도 않고 취소까지 했다니. 이게 무슨 짓이야?”아들도 방금 알았다는 표정이 역력해지자 김경화의 화가 더욱 치밀었다.20년 지기에 박세연이 아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알았기에 며느리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결혼 당일 신부가 나타나지 않은 것도 모자라 보름 전에 이미 결혼식을 취소했다니, 심지어 자기 아들조차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게 더더욱 믿기지 않았다.“어서 세연한테 전화해. 결혼할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물어봐!”주경안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듯 핸드폰을 꺼내 박세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박세연은 이미 하성행 비행기에 탑승한 후였고 전화는 끝내 닿지 않았다. 수화기에서는 차가운 기계음만 반복해서 흘러나올 뿐이었다.주경안의 마음이 점점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왜 오늘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는 거지?’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문을 열자 집 안은 고요했고 아무도 없다는 것이 문을 여는 순간부터 바로 느껴졌다.시선이 탁자 위로 향하는 순간, 액자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박세연과의 몇 안 되는 사진 중 하나가 담겨 있던, 그녀가 매일 반짝반짝 닦아두던 바로 그 액자였다. 욕실의 화장품들, 옷장 안의 여자 옷들까지 박세연과 관련된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사라져 있었다.조민애와 여행에서 돌아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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