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결혼식을 한 달 앞두고 남자 친구가 폭탄을 던졌다. “다른 여자랑 아이를 가질 거야.” 나는 이런 황당한 일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는 매일같이 같은 말을 꺼냈다. 그런데 결혼식을 보름 앞두고 산부인과 검사지 한 장이 날아들었다. 임신 3주, 산모 이름은 조민애였다. 처음부터 내 동의 따윈 필요 없었던 거였다. 그 순간, 수년간 쌓아온 감정이 한꺼번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나는 조용히 결혼식을 취소하고 우리의 모든 흔적을 지웠다. 그리고 결혼식 당일 아침, 달력 위에 단 한 줄만 남긴 채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향했다. “우리 헤어져.”
View More그 말을 듣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뻔했다.‘가짜라니. 너를 약 올리려고 내가 굳이 이런 연극을 꾸밀 이유가 있나?’나는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이 없었다.동시에 솔직히 좀 의아하기도 했다. 5년을 사귀는 내내 그는 항상 뜨뜻미지근했고 내가 아무리 잘해줘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그때 나는 주경안의 심장이 혹시 돌로 만들어진 건 아닐까 싶었다. 아무리 품어줘도 끝내 따뜻해지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그런데 조민애가 나타나고 나서야 그에게도 다정한 면이 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됐다. 단지 그 다정함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을 뿐이었다.2년 전, 나는 미련 없이 스스로 물러섰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들에게 조용히 길을 터줬다.‘이제 와서 왜 이렇게 나에게 지극정성인 척하는 건지.’조민애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해도 나에 대한 그의 태도가 이래서는 안 됐다.“미안한데 세훈이는 내 정식 약혼자야.”“결혼식 날짜는 이번 달 18일이야. 10일 남았어.”내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벼락처럼 주경안의 귓가에 꽂혔다. 그의 두 눈이 순식간에 빨개지는 것이 보였지만 나는 이미 그와 엮일 흥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아무 상관 없는 사람 때문에 이 환영 파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자리를 옮기자는 말에 모두가 일어서는 사이 주경안이 옆을 지나가던 내 옷자락을 반사적으로 낚아챘다.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옷자락을 빼내고 한세훈의 손을 잡은 채 그냥 걸어 나갔다. 주경안만 홀로 그 자리에 남아 우리가 떠나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차에 오르자마자 한세훈이 나를 감싸고 있던 팔을 스르르 풀더니 창문 쪽으로 몸을 홱 돌린 채 팔짱을 끼고 입을 다물었다. 코웃음 소리가 작게 새어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그가 질투하는 거 다 보였으니까.사실 남자친구가 이렇게 질투하는 걸 느껴보는 건 처음이었다. 예전에 주경안과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 그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남자 친구와 짜고 같이 출퇴근하고 밥을 먹으며 심지어 슬쩍 SNS에 올리기까지 했지만 일주
주경안은 룸 문 앞에 서기 전, 화장실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기까지 했다. 원래는 그냥 식사를 하러 온 것이었는데 박세연을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어디 있는지 알게 된 이상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 없었다.그는 서둘러 몸을 가다듬고 룸 문 앞에 섰다.문을 열기 전, 박세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여러 가지를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아 용서하지 않으려 할 수도 있고 이미 과거를 내려놓고 그냥 평범한 친구처럼 대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지금 그가 박세연에게 어떤 존재이든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세연을 다시 만나기만 하면 그녀의 마음을 되돌릴 자신이 있었으니까.그런데 단 한 가지, 박세연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걸, 그것도 곧 결혼한다는 것만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약혼자'라는 세 글자를 듣는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거대한 손이 심장을 틀어쥐듯 숨이 막혔다. 제발 다음 순간 박세연이 웃으면서 그냥 농담이라고, 한세훈은 그냥 후배일 뿐이라고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말은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룸 안에서 친구들의 이야기 소리가 점점 커졌다. 들러리 경쟁에서 이제 아이의 대모 자리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로 넘어갈 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말을 내뱉고 나서 주경안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시선이 곧장 박세연과 한세훈이 맞잡은 손에 꽂혔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다정한 분위기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하지만 나는 주경안이 이 광경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2년 전에 이미 헤어졌다. 나에게 주경안은 그저 낯익은 타인일 뿐이었다. 오늘처럼 웃음소리가 가득해야 할 환영 파티에 그가 나타나 분위기를 망쳐놓았고 내가 보기엔 뜬금없기 짝이 없는 말까지 내뱉었다.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 목소리에 귀찮음이 배어 있었다.“여기 왜 온 거야? 우리 2년 전에 이미 헤어졌어.”손바닥이 간지러운 느낌에 고개를 돌리니 눈빛에 원망을 가
2년 후, 공항.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이곳저곳 달라진 것들을 눈에 담았다.첫 번째 실험 연구가 무려 2년이나 걸릴 줄은 정말 몰랐다. 하지만 결과는 완벽했고 교수님은 두 달을 통째로 휴가로 주셨다. 그렇게 나는 드디어 다시 이 도시의 땅을 밟았다.어느덧 2년이라니 새삼스럽게 느껴졌다.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옆에서 혼자 들떠 있는 한세훈의 모습이었다. 그쪽으로 시선이 닿자 나도 모르게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2년 전에는 혼자 떠났는데 2년 후에는 둘이서 함께 돌아왔다.그리고 이번에 돌아온 데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한세훈이 시계를 확인하더니 얼른 내 손목을 잡아채고는 뛰기 시작했다.“선배, 이러다 늦겠어!”내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임지아는 환영 파티를 열자며, 2년 만에 만나는 친구들이니 제대로 모이자고 했다. 오래된 친구들이 보고 싶었던 나도 흔쾌히 수락했고 파티는 우리가 도착하는 날로 잡혔다.식당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약속 시간이 된 후였다. 한세훈이 내 손을 끌고 식당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왠지 낯익은 뒷모습이 스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바쁘게 달려온 탓에 착각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지금은 일단 룸을 찾는 게 먼저였다.한편 주경안은 가슴 위에 손을 얹은 채 눈빛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2년을 기다려온 이 순간, 온몸이 기쁨으로 충만했다.2년이었다. 꼬박 2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나를 다시 보게 됐다. 그 2년을 텅 빈 집에서 어떻게 버텼는지 아무도 몰랐다.처음에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겨우 눈을 붙여도 깨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박세연의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건 텅 빈 적막뿐이었다. 아침밥을 차려줄 사람도 없었고 돌아올 집을 기다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집 안을 구석구석 뒤져봤지만 박세연과 관련된 물건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결국 그 달력만을 머리맡에 두었다. 헤어지자는 통보가 적혀 있는 달력이었지만 그것이 박세연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자신이
주경안은 그날로 수술을 강행했다.조민애의 암 상태상 임신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아이를 지웠다. 조민애 일을 마무리한 후, 그는 박세연의 소식을 이대로 잃고 싶지 않아 다시 임지아를 찾아가 어디로 갔는지 집요하게 캐물었다.한 번에 말해주지 않자 주경안은 매일같이 그녀의 집 앞을 지켰다. 며칠을 버티다 결국 지쳐버린 임지아가 박세연이 실험실에 들어갔고 이미 이 도시를 떠났다는 말 한마디만 내뱉었다. 다만 어느 실험실인지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주경안은 둘이 같은 대학 출신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교수를 수소문하기로 했고 몇 차례 수소문한 끝에 박세연의 지도 교수가 하성에 새 실험실을 차렸다는 것을 알아냈다.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박세연은 하성에 있다고 직감이 말해줬다. 주경안은 망설임 없이 비행기표를 끊고 하성으로 날아갔다.동문이 알려준 주소를 따라가 실험실을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때마침 첫 번째 실험이 아직 시작되지 않아 실험실은 봉쇄 상태가 아니었고 그는 마침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을 붙잡아 박세연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선배에게서 누가 찾아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꽤 놀랐다.‘실험실 주소를 알려준 사람이 몇 명 되지 않는데 나를 이렇게 빨리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지?’의아한 마음을 안고 나갔더니 찾아온 사람이 주경안이었다.주경안은 내 모습을 보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내 높이 솟아 있던 심장이 순간 제자리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앞으로 옮겨졌고 그의 손이 내 손목을 꼭 쥐었다.“왜 나한테 헤어지자고 한 거야, 왜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린 거야? 내가 여기까지 찾아오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주경안을 보고 놀란 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던 나는 쏟아지는 질문에 얼떨결에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주경안은 내가 자신의 손을 거부하지 않자 마음 한편에서 기쁨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어쩌면 아직 자기한테 화가 난 것뿐일 수 있었다. 차분하게 잘 설명하면 분명 용서해 줄 거라 믿었다.하지만 그 기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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