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뒤늦은 사랑은 한 줌의 재가 되어: Chapter 1 - Chapter 10

22 Chapters

제1화

강채희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서은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주도현을 자그마치 17년 동안이나 열렬히 사랑해 온 서은아가 제 발로 물러서겠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강채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서은아 씨, 대체 무슨 수작이에요?” 서은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지만, 눈동자에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그저 이런 지긋지긋한 삶을 끝내고 싶어서 그래요. 주도현도, 아이들도 다 나보다 당신을 더 좋아하잖아요. 그럼 내가 비켜줘야지. 나는 빠질 테니까 둘이 잘해봐요.”강채희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한 채 서은아를 날카롭게 뜯어보았다. “정말 미련이 없다고요? 지금 사람들이 그 수석 연구원 사모님 자리를 못 가져서 얼마나 안달인데, 그걸 다 포기하겠다고요?” “알아요.” 서은아는 강채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강채희 씨, 나 그거 안 할 거니까 당신이 다 가져요.” 순간 강채희는 손에 쥐고 있던 컵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언제나 생글생글 웃던 부드러운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어졌다. “서은아 씨, 누가 양보해 달래요?” 잠시 팽팽한 침묵이 흐른 뒤, 강채희는 비웃음을 흘리며 테이블 위의 이혼 합의서를 낚아챘다. “뭐, 당신이 알아서 떨어져 주겠다면 저야 수고를 덜어서 좋죠. 서은아 씨, 제법 눈치는 있네요. 분명히 경고하는데, 제 손에 들어온 이상 다시 돌려받을 생각 마세요.” “걱정하지 말아요.” 서은아가 덤덤하게 웃었다. “주도현도, 내 자식들도 이제 나한텐 아무 쓸모 없으니까요.”정말 필요 없었다. 지독했던 전생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억지로 곁에 둔 대가는 비참하고 고독한 죽음뿐이었으니까. 이번 생만큼은 결코 그 지옥을 반복하지 않으리라.고급스러운 원피스를 입은 강채희가 선글라스를 끼고 돌아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 화려한 웨이브 머리카락을 따라 움직였다. 강채희가 탄 택시가 멀어지는 것을 보던 서은아는, 홀린 듯 다른 택시를 잡아타고 그 뒤를 쫓았다. 연구소 정문 앞. 서은아는 경비원의 극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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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서은아는 평온한 어조로 받아쳤다.“먹은 사람이 치워. 앞으로 당신들 수발 드는 일은 없을 테니까, 자기 일은 각자 알아서 해.”주도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비난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당신은 직장도 없잖아. 집에 있으면서 가정을 돌보는 게 당신 본분이야.”주정수는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고함을 질러댔다.“우리가 치우면 될 거 아냐, 우리도 치울 수 있다고! 엄마는 일도 안 하면서 게으름만 피우니까, 아빠가 금방 엄마 버리고 채희 이모랑 결혼할 거야!”주연수 역시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맞아! 채희 이모는 예쁘고 다정한 데다 춤도 잘 추잖아. 이모가 우리 새엄마가 되면, 엄마는 아무도 안 데려갈 거야, 그렇지?”“나중에 엄마가 늙어도 우리 절대 보러 안 가고 안 돌봐줄 거야!”악에 받쳐서 독설을 내뱉은 쌍둥이는 쿵쾅거리며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갔다. 이내 아래층에서 그릇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비명이 들려왔다.하지만 서은아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있을 뿐이었다.주도현은 억지를 부리는 이방인을 보듯 무심한 시선으로 서은아를 가볍게 훑어보았다.“서은아, 당신은 어머니이자 아내야. 세 살 먹은 어린아이가 아니라고.”말을 마친 주도현은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겨 들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프로젝트가 긴박해서 이틀 동안은 못 들어와.”서은아는 멀어지는 주도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란 속에서, 그녀는 끝내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문고리를 꽉 쥐고 있던 서은아는 마침내 온 힘을 다해 방문을 쾅 닫아 버렸다.그놈의 본분 따위, 개나 줘버리라지.어머니니 아내니 하는 굴레도 이제 전부 벗어던지기로 했다.이제부터 서은아는 누구의 엄마도, 누구의 아내도 아닌,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것이다....다음 날 아침 일찍, 서은아는 구청을 찾아가 이혼 서류를 접수했다.“서류에는 문제없습니다. 일주일 뒤에 오셔서 이혼 확인서 받아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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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서은아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두 아들을 바라보았다.아이들은 서은아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는 숨기지 못한 혐오감이 가득했다.“엄마 같은 사람이 우리 엄마라니, 진짜 창피해 죽겠어!”“아빠, 나 저런 사람 우리 엄마로 인정 안 해요. 이런 엄마가 있다는 건 우리한테 수치예요!”주도현은 온몸에서 싸늘한 살기를 뿜어내며 강채희의 곁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그 눈빛이 서은아에게 닿았다. 주도현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당신, 더 변명할 말이라도 있어?”세 사람의 눈빛은 이미 서은아를 진범으로 낙인찍고 있었다.서은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가슴 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들끓었다. 따져 묻고 싶었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이를 악물고 간신히 한 마디만 뱉어낼 뿐이었다.“나 안 그랬어.”그러자 강채희가 홱 주도현의 소맷자락을 붙잡아 늘어졌다.“도현아, 그만해. 팔찌도 찾았는데 뭘 그래. 은아 씨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야.”강채희가 가련하게 편을 들면 들수록, 주도현의 눈에 서린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주도현의 가슴이 거칠게 들썩거리더니 이내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서은아! 잘못을 저지르고도 끝까지 발뺌을 해? 애들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아! 오늘은 반드시 당신 버릇을 고쳐놔야겠어!”주정수와 주연수는 기다렸다는 듯 회초리를 가져와 주도현의 눈앞에 내밀었다. 아이들의 눈빛은 잔인한 흥분으로 번뜩거렸다.“아빠! 어서 가법으로 다스려요!”주도현은 회초리를 받아 들고 서은아에게 한 걸음씩 다가왔다.서은아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당장이라도 뒤를 돌아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주정수와 주연수가 사납게 달려들어 그녀의 양팔을 단단히 붙잡아 고정하는 순간, 서은아는 온몸의 힘이 탁 풀려버렸다.해일처럼 밀려오는 아득한 무력감이었다.서은아는 순순히 손바닥을 폈다. 이윽고 매서운 힘이 실린 회초리가 그녀의 손바닥 위로 사정없이 내리쳤다.화끈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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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서은아는 점차 지독한 암흑에 적응해 가면서 마음속에 도사린 공포를 이겨냈다.그녀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천천히 시간을 세어 나갔다.주도현은 주정수와 주연수를 데리고 강채희의 짐을 집 안으로 옮겨 날랐다.세 부자는 함께 주방으로 들어가 요리를 하고, 강채희의 입성을 환영하는 케이크까지 사 들고 왔다.이윽고 주도현의 다정함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채희야, 내가 연구소에 이틀 휴가를 냈어. 요 며칠 네가 적응할 수 있게 같이 있어 줄게.”참 눈물겹도록 우스운 일이었다.서은아가 쌍둥이를 낳았을 때, 제발 휴가를 내고 출산을 지켜달라고 애원했을 때 주도현은 도리어 차갑게 굳은 얼굴로 쏘아붙였었다.‘내 업무는 성격상 특수해서 마음대로 휴가를 낼 수 없어. 당신이 나와 결혼하기로 선택했다면 이런 상황쯤은 예상했어야지. 서은아, 좀 독립적으로 굴어.’밖에서는 두 아들이 서로 식탁을 치우겠다며 앞다투는 소리가 이어졌다.“채희 이모, 이모 손은 이렇게 고운데 이런 거친 일을 하시면 안 돼요. 저희도 이제 다 컸으니까 저희가 치울게요.”빨래를 하려는 강채희를 한사코 소파에 앉히는 소리도 들렸다.“채희 이모, 일하지 말고 여기 앉아 계세요. 더러운 옷 냄새가 이모한테 배면 안 된단 말이에요.”녀석들은 빨래를 하면서도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엄마는 진짜 게으르고 너무해. 채희 이모 손가락 하나만도 못하다니까!”주도현 역시 흐뭇하게 웃으며 거들었다.“채희야, 애들도 이제 다 컸으니 자립심을 길러줄 때가 됐어. 앞으로 이런 궂은일은 네가 손댈 필요 없어.”얼마나 우스운가?정말 우스워 미칠 지경이었다.사람이 어떻게 이런 이중 잣대를 들이대며 위선을 떨 수 있단 말인가!그녀가 이 집구석에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피땀 흘려 일해온 가치는, 강채희의 손가락 한 마디조차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서은아는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씹으며, 자학하듯 밖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화기애애한 소음들을 삼켰다.결국 참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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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엄마, 미쳤어? 지금 뭐 하는 거야!”주정수와 주연수가 마당으로 부리나케 뛰어 들어왔다. 화로 속으로 자신의 옷가지들이 팽개쳐지는 모습을 본 쌍둥이는 서은아를 거칠게 밀쳐내고는, 그녀의 손에 들고 있던 옷을 빼앗았다.“진짜 너무해!” 주정수가 악에 받쳐 고함을 질렀다. “우리가 채희 이모가 사 준 옷이 더 예쁘다고 칭찬했다고, 지금 심술 부리느라 우리 옷을 다 태워버리는 거야?”주연수 역시 비명을 지르며 대들었다. “엄마처럼 속 좁은 사람은 우리 엄마도 아냐! 채희 이모가 사 준 옷이 예쁜 건 팩트잖아! 진짜 예쁘단 말이야!” “엄마가 구질구질하게 만들어 준 옷들보다 천 배, 만 배는 훨씬 더 예뻐!”뒤따라온 강채희가 서둘러 두 아이를 품에 안으며 눈물을 글썽였다.“미안해요, 은아 씨. 내가 애들한테 옷을 사 주는 게 아니었는데.”주도현의 턱관절이 팽팽하게 굳어졌다. 그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고, 이내 손을 뻗어 강채희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주었다.“채희야, 너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사과할 필요 없어.”주도현이 서은아를 서늘하게 쏘아보았다.“서은아, 당장 사과해!”붉게 타오르는 노을과 화로의 불꽃이 서은아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오직 녹지 않는 만년설 같은 한기만이 가득할 뿐이었다.서은아는 네 사람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내 조소 섞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녀는 허리를 숙여 마당에 남아 있던 마지막 옷가지들까지 모조리 화로 속으로 처넣었다. 그리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문밖에서 주정수와 주연수의 자지러지는 비명이 끊임없이 들려왔다.“어? 내 침대에 있던 쿠션 어디 갔어?”“내가 어릴 때부터 가지고 놀던 인형이 없어졌어!”“우리 목마랑 모래주머니! 팽이랑 대나무 헬리콥터까지 전부 다 없어졌어!”두 아이의 찢어질 듯한 울음소리가 집 안이 떠나가라 울려 퍼졌다.“우리 장난감이랑 옷이 다 사라졌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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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다음 날 오후, 서은아는 자신의 짐을 대충 꾸려서 정리했다. 친정집에 내려가 하루 신세를 진 뒤, 곧장 구청으로 가 이혼 확인서를 받을 생각이었다.그런데 주도현이 강채희를 데리고 별안간 집 안으로 거칠게 들이닥쳤다. 주도현의 얼굴에는 서은아가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급함이 서려 있었다.“담임 선생님이 그러는데, 당신이 점심때 정수랑 연수를 데려갔다면서?”“뭐라고?” 서은아는 순간 멍해졌다. “아닌데. 나 그런 적 없어.”주도현은 다짜고짜 그녀의 손목을 옥죄듯 움켜쥐었다. 눈빛이 칼날처럼 매서워졌다.“선생님이 그러시는데, 당신이 점심때 학교로 전화를 걸어서 애들을 집으로 보내라고 했다더군. 녀석들이 지금까지 학교에 돌아오지 않고 있어!”강채희가 앞으로 자지러지며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은아 씨, 내가 오늘 아침에 도현이랑 같이 애들 학부모 총회에 가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상하신 건 알아요. 그렇다고 애들을 숨겨 버리시면 어떡해요...”“서은아!” 주도현의 손귀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서은아의 손목뼈에 으스러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애들이 채희를 좋아하고 따르는 거, 그래 봐야 당신 자리에 아무런 영향도 안 가! 대체 왜 이딴 치졸한 수작을 부리는 거야?!”“애들 어디다 숨겼어? 당장 말해!”“나는 정말 아니야.” 서은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덜컥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자 그녀의 목소리도 덩달아 급해졌다.“나는 학교에 전화한 적도 없고, 애들을 데려오지도 않았어. 설마 애들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 아냐?”주도현은 서은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진심으로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고서야, 주도현은 거칠게 손을 뿌리쳤다.“지체할 시간 없어, 당장 애들부터 찾아야 해! 내가 파출소에 신고하러 가겠어.”그는 강채희의 손을 잡고 부리나케 아래층으로 뛰어내려 갔다. 대문 앞에 세워둔 그의 차에 올라탄 뒤 두 사람은 이내 굉음을 내며 멀어졌다.서은아 역시 사색이 되어 집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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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서은아의 눈동자에 새빨갛게 핏발이 섰다. 문틀을 꽉 쥔 손가락 끝이 하얗게 바래다 못해, 손톱이 나무 문틀마저 파고들 기세였다.수분기 없이 바짝 메마른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거칠었지만, 그 안에 실린 서슬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너희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기나 해? 당장 사실대로 바르게 말해!”서은아의 광기 어린 기세에 겁을 먹은 주정수와 주연수는 곧바로 강채희의 뒤로 머리를 처박으며 숨어버렸다.“그만해!” 주도현이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서은아의 손목을 무자비하게 낚아채 거실 안으로 거칠게 끌고 들어왔다. 뼈가 으스러질 듯한 힘이었다.그의 매서운 눈빛에는 깊은 혐오감이 서려 있었다.“서은아, 당신이 그러고도 엄마야? 고작 그깟 질투심 때문에 친자식들을 가둬 놓고, 이제는 애들한테 거짓말을 하라고 협박까지 해?”“난 정말 안 그랬어!” 서은아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비명을 질렀다. 새빨게 충혈된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순간 숨을 들이마신 주도현은 불에 덴 듯 흠칫 놀라더니, 서서히 힘을 풀고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그때 강채희가 가련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도현아, 은아 씨가 너무 놀란 것 같아.”그제야 주도현은 홱 정신을 차린 듯,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서은아를 쏘아보았다.“끝까지 발뺌이군. 서은아, 애들은 고작 열 살이야. 열 살짜리 아이들이 자기 엄마를 모함하려고 일부러 거짓말을 지어낸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당신은 어머니라는 이름을 달 자격도 없어.”어머니라는 이름을 달 자격도 없다.서은아는 순간 세상이 무너지는 듯 중심을 잃고 크게 비틀거렸다. 그녀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서서히 두 눈을 감았고, 뚝뚝 떨어진 눈물방울들이 거실 바닥을 적셨다.“아빠...” 주정수와 주연수가 돌연 서럽게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 창고 너무 어둡고 추웠어요. 우리 진짜 무서웠단 말이에요.”주도현은 즉시 몸을 돌려 아이들을 가슴에 안고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 했다.“무서워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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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이른 아침, 첫 새벽빛이 창고 바닥을 은은하게 비출 무렵 주도현이 문을 열고 걸어 들어왔다.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서은아를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가차 없이 냉담한 눈빛은 거대한 빙산과도 같았다.“당신, 이제 잘못을 알겠어?”서은아의 목소리는 가늘고 힘이 없었다.“어, 이제 알았어.”그녀는 정말로 뼈저리게 깨달았다.주도현이라는 남자를 사랑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와의 결혼을 고집했던 그 모든 시작 자체가 인생 최대의 잘못이었다는 것을.서은아의 힘없는 대답에 주도현의 험악했던 안색이 그제야 조금 누그러졌다. 그는 먼저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툭 내뱉었다.“나와. 집까지 태워다 줄 테니.”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는 그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주도현은 집 대문 앞에 차를 세우고 그녀를 내려주었다.서은아가 차 문을 열고 내리려는 찰나, 주도현이 별안간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앞으로 대거리하며 집 안을 시끄럽게 하는 무의미한 짓은 그만둬. 서은아, 내가 당신에게 약속했던 것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아.” “당신은 그저 내 아내로서, 애들 엄마로서 제 본분에만 충실해. 그러면 그 누구도 당신 자리를 넘보지 못할 테니까.”“알았어.”서은아의 목소리는 한없이 덤덤했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터덜터덜 걸어 올라가 주정수와 주연수의 방 앞을 지나칠 때, 닫힌 문틈 사이로 아이들의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채희 이모, 우리 계획이 정말 성공할까요? 엄마가 진짜 집에서 나가서, 앞으로 우리 일거수일투족을 사사건건 간섭하지 않게 되는 거 맞죠?”“채희 이모! 엄마가 집에서 나가기만 하면 나 이제 숙제 따윈 절대 안 할 거예요!” “불량식품도 엄청 많이 사 먹고, 밤새도록 온종일 텔레비전만 볼 거란 말이에요!”서은아의 발걸음이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조용히 자기 방으로 향했다.그녀는 미리 꾸려둔 캐리어를 챙겨 들고 곧장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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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그 시각, 병실 침대 맡에 엎드려 강채희의 곁을 지키던 주도현은 문득 짧은 꿈을 꾸었다.꿈속의 서은아는 결연한 뒷모습만 남긴 채, 뒤돌아보지 않고 멀어지고 있었다.소스라치게 놀라며 꿈에서 깨어났지만, 가슴 한쪽에서 이유를 모를 공허함과 서늘한 기운이 왈칵 밀려들었다.멍하니 시선을 돌린 주도현은 세상 모르게 단잠에 빠져 있는 강채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조금 더 옆으로 돌려 간이침대를 보았다.강채희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도 병실을 지키겠다며 떼를 쓰던 주정수와 주연수 역시 나란히 누워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이 모습은 과거 자신이 강채희와 미래를 약속하던 시절, 수없이 머릿속으로 그리며 대리 만족했던 바로 그 풍경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해 토끼 같은 아이들을 낳고, 온 가족이 서로를 지극히 아끼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단란한 가정.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가슴 가득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뇌리 구석에서 다시금 서은아의 잔상이 불쑥 치고 올라왔다. 주도현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대형 교통사고가 났을 때 서은아 역시 뒷좌석에 동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떠올린 것이다. 그녀는 어디 다치지 않고 무사한 걸까?‘별일 없겠지.’오후에 비서가 찾아와 사고 현장 수습 상황을 보고할 때도, 서은아에 대한 이야기나 부상 언급은 따로 없었다.어쩌면 혼자 멀쩡하게 차에서 내려 자기 발로 처가에 내려갔을지도 모른다.최근 들어 강채희의 등장으로 질투심에 눈이 멀어 가당치 않은 짓을 골라 하더니, 처가에 내려가 혼자 머리를 식히며 자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마음을 돌린 서은아가 다시 현숙한 아내이자 다정한 어머니의 본분으로 돌아온다면 그때 못 이기는 척 데리러 갈 생각이었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도현의 마음은 비로소 완벽하게 안정을 찾았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이틀 뒤, 강채희의 퇴원일이 되었다.그녀의 팔에 감긴 붕대를 풀어주던 젊은 간호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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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다음 날.주도현이 돌아왔다는 걸 안 강채희는 오랜만에 직접 주방으로 들어가 상다리가 부러지게 아침 상을 차려냈다.일주일 만에 아빠를 본 주정수와 주연수는 신이 나서 주도현의 주변을 맴돌며 재잘거렸다.“아빠, 엄마 이제 안 돌아오는 거죠? 그냥 채희 이모를 우리 새엄마로 삼아요!”“맞아요, 아빠. 우리는 채희 이모랑 같이 사는 게 훨씬 더 좋아요.”순간 젓가락을 쥔 주도현의 손이 멈칫했다.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들은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이번만큼은 가슴 한쪽에서 묘한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다.강채희가 얼른 고기만두 하나를 집어 주도현의 밥공기에 올려놓으며 부드럽게 거들었다.“애들이 철이 없어서 하는 소리니까 너무 진지하게 듣지 마.” “은아 씨가 심술을 부려 집을 비운 동안 집안일은 내가 다 알아서 챙기고 있으니까, 당신은 아무 걱정 말고 연구에만 집중해.”주도현은 물기를 가득 머금은 강채희의 다정한 눈동자를 마주하자,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고마워, 고생이 많네.”그는 묵묵히 아침 식사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머릿속은 온통 서은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서 터질 것만 같았다.어젯밤 귀가한 순간부터 뭔가 계속 아귀가 맞지 않고 삐걱거렸다.침대 시트는 왠지 모르게 눅눅하고 지저분했고, 이불에서는 포근한 햇살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옷가지에서도 늘 은은하게 풍기던 특유의 맑은 향취가 사라져 있었다.심지어 식탁과 식기들조차 서은아가 살림을 도맡았을 때처럼 정갈하고 깨끗하지 않았다.강채희가 손을 댄 모든 곳이 전부 엉망이었다.주도현의 시선이 거실 장 위를 향했다가, 돌연 멈칫했다.그곳에 놓인 액자 때문이었다. 원래는 서은아와 찍은 웨딩 사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지금은 뻔뻔하게 강채희의 독사진이 끼워져 있었다.주도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목소리에는 자신조차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짙은 노기가 서려 있었다.“거실 장에 있던 웨딩 사진은 다 어디 가고 이게 여기 있는 거야?”강채희는 순간 온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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