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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사랑은 한 줌의 재가 되어
뒤늦은 사랑은 한 줌의 재가 되어
Author: 용생

제1화

Author: 용생
강채희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서은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주도현을 자그마치 17년 동안이나 열렬히 사랑해 온 서은아가 제 발로 물러서겠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강채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서은아 씨, 대체 무슨 수작이에요?”

서은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지만, 눈동자에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그저 이런 지긋지긋한 삶을 끝내고 싶어서 그래요. 주도현도, 아이들도 다 나보다 당신을 더 좋아하잖아요. 그럼 내가 비켜줘야지. 나는 빠질 테니까 둘이 잘해봐요.”

강채희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한 채 서은아를 날카롭게 뜯어보았다.

“정말 미련이 없다고요? 지금 사람들이 그 수석 연구원 사모님 자리를 못 가져서 얼마나 안달인데, 그걸 다 포기하겠다고요?”

“알아요.”

서은아는 강채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강채희 씨, 나 그거 안 할 거니까 당신이 다 가져요.”

순간 강채희는 손에 쥐고 있던 컵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언제나 생글생글 웃던 부드러운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어졌다.

“서은아 씨, 누가 양보해 달래요?”

잠시 팽팽한 침묵이 흐른 뒤, 강채희는 비웃음을 흘리며 테이블 위의 이혼 합의서를 낚아챘다.

“뭐, 당신이 알아서 떨어져 주겠다면 저야 수고를 덜어서 좋죠. 서은아 씨, 제법 눈치는 있네요. 분명히 경고하는데, 제 손에 들어온 이상 다시 돌려받을 생각 마세요.”

“걱정하지 말아요.”

서은아가 덤덤하게 웃었다.

“주도현도, 내 자식들도 이제 나한텐 아무 쓸모 없으니까요.”

정말 필요 없었다.

지독했던 전생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억지로 곁에 둔 대가는 비참하고 고독한 죽음뿐이었으니까.

이번 생만큼은 결코 그 지옥을 반복하지 않으리라.

고급스러운 원피스를 입은 강채희가 선글라스를 끼고 돌아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 화려한 웨이브 머리카락을 따라 움직였다.

강채희가 탄 택시가 멀어지는 것을 보던 서은아는, 홀린 듯 다른 택시를 잡아타고 그 뒤를 쫓았다.

연구소 정문 앞.

서은아는 경비원의 극진한 안내를 받으며 대기실로 들어가는 강채희를 지켜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차갑던 주도현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뛰어나와 강채희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서은아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입가에 씁쓸한 자조가 맴돌았다.

평생 아내인 자신은 단 한 번도 발을 들이지 못했던 저 문을, 강채희는 저토록 손쉽게 통과하는구나.

참 우스운 일이었다.

이후 서은아는 친정집에 들러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 긴 시간을 보냈다.

이혼하겠다는 딸의 폭탄선언을 부모님에게 납득시키는 건 쉽지 않았다.

겨우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거실은 불이 환하게 켜진 채 맛있는 음식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채희 이모! 얼른 와서 드세요! 아빠가 요리를 엄청 많이 하셨어요!”

큰아들 주정수가 신이 나서 외치는 소리가 문밖까지 흘러나왔다.

뒤이어 작은아들 주연수도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이모! 저희도 아빠가 요리하는 건 태어나서 처음 봐요. 빨리 와서 같이 먹어요!”

도어록을 열려던 서은아의 손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전생에서 죽는 순간까지, 서은아는 주도현이 해 준 밥을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쌍둥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할 때 며칠간 집안일을 돌볼 사람이 없었을 때도, 주도현은 그저 연구소 식당에서 밥을 가지고 와서 안겨줄 뿐이었다.

안에서는 강채희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현아, 내가 생선 좋아하는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네?”

이에 답하는 주도현의 목소리는 평소의 그 냉정함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한 번도 잊은 적 없어. 잔가시는 다 발라냈으니 편하게 먹어.”

서은아는 문 앞에 선 채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서은아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주도현이 생선을 얼마나 끔찍하게 싫어했는지.

신혼 초, 남편이 좋아하는 줄 알고 정성껏 준비했던 생선찜을 보자, 주도현의 얼굴은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었다.

깜짝 놀란 서은아가 며칠을 달랜 후에야 겨우 알아낸 사실은, 주도현이 생선이라는 존재 자체를 쳐다보기도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그날 서은아는 멀쩡한 생선찜을 쓰레기통에 쏟아버린 뒤에야 주도현을 다시 식탁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그 후 10년 동안 주씨 집안 식탁에는 생선은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결국 주도현이 생선을 기겁했던 건, 생선 자체가 싫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두고 떠나버린 강채희의 빈 자리를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인 것이다.

“아빠, 나 채희 이모가 너무 좋아요. 그냥 이모가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어요!”

“맞아, 아빠. 나 이제 진짜 엄마랑 살기 싫어요. 채희 이모랑 다 같이 살래요.”

자식들의 비수 같은 한마디에 서은아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그대로 돌아서서 도망치듯 그곳을 벗어났다.

타이밍을 맞춘 듯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거센 빗줄기가 마치 억울했던 전생의 기억처럼 서은아의 온몸을 사정없이 때려눕혔다.

지난 생, 주도현과 함께한 60년의 결혼 생활 동안 서은아는 단 한 순간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주도현의 마음속에는 늘 소년 시절의 첫사랑, 강채희가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은아와 주도현은 국방연구소 관사 단지에서 나고 자란 소꿉친구였다.

열세 살,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의 가슴에 처음으로 내려앉은 사랑은 이 단지에서 가장 잘생긴 데다 공부까지 잘하던 옆집 오빠, 주도현이었다.

하지만 당시 주도현의 곁에는 이미 강채희라는 연인이 있었다.

두 사람이 몇 년 동안 불같은 연애를 이어가던 중, 대학을 졸업할 무렵 강채희가 돌연 유학을 떠나버렸다.

주도현이 몇 년을 일편단심으로 기다렸지만 돌아온 건 차가운 이별 통보뿐이었다.

주도현의 나이 스물다섯, 깊은 실의에 빠진 그가 홧김에 결혼하겠다고 선언하자마자 서은아가 달려가서 마음을 고백했다.

그때 주도현이 짓던 그 서늘하고 무덤덤한 표정을 서은아는 평생 잊지 못했다.

“내 마음속엔 다른 사람이 있어. 그래도 상관없다면 잘 생각해 봐.”

서은아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깊은 사랑이라면 언젠가는 그의 닫힌 마음도 열릴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결혼 후 돌아온 것은 지독한 방관과 싸늘한 무관심뿐이었다.

마침내 강채희가 귀국했을 때야 서은아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극명하게 다른지.

전생의 주도현은 끝내 먼저 이혼하자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아내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는 서은아에게 주었지만, 자신의 모든 알맹이와 사랑은 강채희에게 쏟아부었다.

부전자전이라더니, 두 아들 녀석마저 아버지를 쏙 빼닮아서 갈수록 친엄마인 서은아를 마치 남을 보듯 대했다.

서은아는 세 부자가 언젠가 뒤를 돌아봐 주길 바라며 미련하게 평생을 기다렸다.

결국 거동이 불편해진 노년에는 쓸쓸히 요양원에서 보내야 했다.

면회 오는 가족이 한 명도 없자, 요양원 요양보호사들은 서은아를 상습적으로 학대했다.

주도현과 자식들에게 수없이 전화를 걸었지만, 그들은 늘 바쁘다는 핑계를 댔고 나중에는 아예 수신을 차단해 버렸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순간, 서은아는 옆 침대 환자의 휴대폰을 빌려 주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도현이 전화를 받자마자 누군가 그를 불렀는데, 깜빡 잊었는지 통화를 끊지 않은 채 전화를 그대로 방치했다.

서은아는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주도현이 자식들과 손주, 증손주들까지 모아놓고 강채희의 성대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며 행복해하는 소리를.

어찌나 화기애애하고 시끌벅적한지.

이미 흐려지고 메마른 서은아의 눈가에서 기어이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 서은아는 간절히 빌었다.

만약 하늘이 자신에게 단 한 번만 더 기회를 준다면, 그때는 반드시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겠다고.

다시는 주도현이라는 남자에게 제 소중한 인생을 송두리째 바치지 않겠다고.

길가의 벤치에 앉은 서은아는 세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터덜터덜 돌아온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생선 가시와 그릇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서은아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방으로 직행했다.

화장대 위에는 주도현의 거침없는 필체로 사인을 휘갈진 이혼 합의서가 놓여 있었다.

서은아는 완성된 서류를 바라보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해방감을 느꼈다.

60년 동안 온몸을 옭아매고 있던 무거운 쇠사슬이 마침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합의서를 서랍에 넣기가 무섭게,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엄마는 진짜 게을러 터졌어! 식탁이 저 모양인데 왜 안 치우고 가만히 있어?”

큰아들 주정수가 눈을 부릅뜨고 대들었고, 작은아들 주연수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비난을 보탰다.

“엄마는 속이 왜 그렇게 좁아? 우리가 강채희 이모랑 밥 먹는 거 보더니 삐쳐서 그냥 나가버리고, 이젠 일부러 심술부리는 거지?”

남편 주도현 역시 언제나처럼 감정 없는 싸늘한 눈빛으로 서은아를 내려다보며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겨우 밥 한 끼 먹은 거 가지고 왜 이렇게 유난이야? 당신 본분이 뭔지 잊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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