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플로렌스의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Chapter 101 - Chapter 107

107 Chapters

101화. 신뢰의 무게

며칠간의 치열한 고뇌 끝에, 아르덴은 결국 라리엘이 수도원으로 향하는 것에 동의했다.사실상 동의라기보다, 끝내 다른 선택지를 찾지 못했다는 쪽이 더 정확했다. 대신, 트리샤가 그녀의 시종으로 위장해 동행하기로 했다.그나마 그 선택이 아르덴에게 허락된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집무실에 모두 모여 그 결정이 내려지는 순간까지도 그의 손은 책상 위에서 한 번도 편히 놓이지 못했다.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책상 너머로 라리엘의 눈을 마주했을 때 그는 애써 담담한 얼굴을 유지했다.베르너는 회의가 끝날 때까지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이내 무겁게 닫기를 반복했다.결국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지만, 굳게 다문 그의 입술과 미간에 잡힌 깊은 주름이 여전히 이 결정에 동의하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하지만 결국 더 나은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회의가 파하고 베르너와 라리엘이 집무실을 빠져나간 뒤, 아르덴은 문가로 향하던 트리샤를 불러세웠다.“또 뭐죠?”문고리를 잡으려던 트리샤가 귀찮다는 듯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아르덴은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단정한 말투 속에 숨기지 못한 긴장감이 배어 나왔다.“수도원과 녹스가 결탁한 흔적을 발견하면 절대 단독으로 행동 하지말고 바로 전갈을 보내. 만약 그 지하에서 당신 아버지, 제이드를 발견하더라도 마찬가지야. 내 허락 없이 움직이지 마.”트리샤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시큰둥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는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그러다 ‘제이드’라는 이름이 언급되자,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와 아르덴에게 꽂혔다.“왜죠? 바로 빼내와도 모자랄 판에 그럴 여유가 어디있어요?”아르덴의 눈매가 단숨에 서늘하게 가늘어졌다. 그는 트리샤를 똑바로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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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망상의 불씨

이 거대한 저택의 안주인이 되면 대체 어떤 느낌일까. 이 모든 것을 소유하는 삶.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위치. 자그마한 망상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마른 장작에 떨어진 아주 작은 불씨처럼 피워오르기 시작했다.그때, 응접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당연히 늦어진다던 라리엘이 들어오는 줄 알고 황급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린 클로디아의 숨이 그대로 멎어버렸다. 문 너머로 나타난 사람은 알브릭 공작이었다.그 역시 응접실에 클로디아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했다. 잠시 걸음을 멈춘 공작은 문가에 서서 클로디아를 무심하게 쳐다보았다.“부인의 손님인가 보군.”“……!”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울리자, 클로디아는 그제야 넋을 잃었던 정신을 간신히 수습했다.그녀는 이내 백작가 영애다운 침착함을 가장하며 우아하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치맛자락을 살짝 쥐고 완벽한 각도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알브릭 공작님을 뵙습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결례를 범했습니다. 레이먼 백작가의 클로디아라고 합니다.”아르덴은 클로디아의 유려한 인사를 받으며 고개를 아주 살짝,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만 까닥였다.그리고는 특유의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눈빛으로 그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천천히 훑어 내렸다.마침내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치자 클로디아의 얼굴 위로 순식간에 뜨거운 열기가 확 피어올랐다.“레이먼 백작의 영애라면 몇 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 백작은 건강하신가? 부친을 뵌 지가 꽤 오래된 것 같군.”“네, 실은 요즘 들어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바깥 출입을 자제하고 계세요.”“그렇군.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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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플로렌스 수도원

클로디아의 눈가가 가느다랗게 휘어지며 걱정 어린 빛을 띠었다.그녀는 이내 가식적인 다정함을 담아 테이블 너머로 라리엘의 하얗고 부드러운 손을 따뜻하게 맞잡았다.“부디 오가는 길에 눈길 조심하시고, 몸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부인.”맞잡은 라리엘의 손은 클로디아의 차가운 야욕과 달리 생각보다 너무도 따뜻했다.클로디아는 그 부드러운 온기를 느끼며 잠시 더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놓았다.응접실 안에는 다시 한동안 귀족 영애들의 전형적이고 일상적인 수다가 가볍게 오갔다.변덕스러운 올해 수도의 겨울 날씨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최근 황실 사교계에서 화제가 된 백작가의 스캔들, 그리고 요즘 영지에서 유행하는 드레스의 화려한 자수 이야기까지.겉으로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오후의 티타임 풍경이었다.그러나 클로디아의 머릿속은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라리엘이 저택을 비운 시간 동안 홀로 남은 공작의 마음을 흔들고, 공작 부인의 입지에 미세한 균열을 만들어 놓을 추악한 시나리오들이 클로디아의 머릿속에서 잔인하고 어지럽게 뒤섞이기 시작했다.찻잔이 바닥을 보일 즈음, 클로디아는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녀는 풍성한 주름이 잡힌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소리 나지 않게 털어내며 정돈하며, 라리엘을 향해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가련한 척 연기하는 데에는 도가 튼 그녀였다.“오늘은 아쉽지만 이만 가봐야겠어요. 당장 며칠 뒤면 먼 고향으로 출발하셔야 해서 준비할 일들로 한창 바쁘실 텐데, 제 방문이 공연히 방해가 될까 봐 마음이 쓰이네요.”“벌써 가려고요? 오랜만의 만남인데 차만 한 잔 나누고 보내게 되어 내가 더 미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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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불편한 동행

마차의 발판이 내려오기도 전, 검은 사제복 위에 두툼하고 고급스러운 털 망토를 덧두른 노인이 황급히 걸어 나왔다.플로렌스 수도원의 최고 권력자이자, 어린 시절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수도원장 안셀리온이었다.오랜 세월로 인해 깡마른 체구에 깊게 팬 이마의 주름, 그리고 성근 백발이 그의 노쇠한 나이를 짐작케 했으나, 가끔씩 코끝에 걸린 돋보기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매서운 눈빛만큼은 세속의 그 어떤 노련한 정치꾼 못지않게 대단히 영민하고 날카로워 보였다.“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플로렌스의 보석, 라리엘 영애… 아니, 이제는 알브릭 공작 부인이시군요.”안셀리온이 주름진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라리엘을 향해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그의 왼쪽 눈가 근육이 아주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며 경련을 일으켰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고위 귀족의 방문에, 내심 감추기 힘든 거대한 당혹감과 초조함이 은연중에 묻어나는 듯했다.“아무런 기별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원장님. 날이 차가워지니 이곳 고향 집과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부쩍 나서요. 며칠간 이곳에 머물며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싶어, 염치 불구하고 무작정 찾아왔습니다.”라리엘이 아버지를 언급하며 슬픈 미소를 짓자, 그제야 안셀리온은 경계심을 조금 허문 듯 안쓰러움이 가득한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세월의 풍파가 묻어난 그의 노안에는 종교인 특유의 자애로움이 가득 넘쳐 흘렀다.“오, 가련한 부인… 백작님의 신심이 워낙 깊고 고결하셨으니,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신다면 분명 마음속에 깊은 평안을 얻으실 겁니다.”​그는 따뜻한 위로를 건네면서도, 슬쩍 눈길을 돌려 라리엘의 뒤에 선 다섯 명의 호위 기사와 화려한 공작가의 마차를 천천히 훑어내렸다.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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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꿍꿍이

트리샤의 말은 날카로운 가시처럼 거칠었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은 솔직했다.라리엘은 예상치 못한 그녀의 고백에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트리샤가 내뿜는 독기 가득한 기운이 오히려 그녀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를 대변하는 것 가슴이 아렸다.라리엘이 이내 천천히 숨을 고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트리샤 씨는 생각했던것보다 훨씬 더 마음이 깊고 사려 깊은 분이네요. 내 걱정은 전혀 하지 말아요. 사실 난… 트리샤 씨가 내 곁에 있는 거, 별로 안 불편하거든요. 정말이에요.”​그 말에 트리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좁아진 미간 사이로 의외의 대답을 들었다는 표정이 역력히 드러났다.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라리엘을 향해 한 걸음 성큼 다가서며 다그치듯 되물었다.“어째서죠? 내 얼굴을 보면 당신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수의 딸이라는 저주스러운 생각이 조금도 안 들어요?”​라리엘이 입을 떼려 하자, 트리샤는 겁이라도 난 듯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가로막았다.“아니, 됐어요. 묻지 않을래. 부인은 무슨 하늘이 내린 성인군자인지 몰라도, 난 엄청나게 속이 뒤틀리고.. 또 불편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말은… ”​라리엘은 매사 당당하던 트리샤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모습이 조금 귀엽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녀는 맑고 투명한 눈으로 트리샤를 응시하며 다정하게 말을 받아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그러니까… 나도 최대한 트리샤 씨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으라고요?”“아아니, 그런게 아니라…!”​트리샤는 날카롭게 반박하려다 라리엘의 순수한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치자 그만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거렸다. 침묵이 흐르는 사이, 라리엘이 한 걸음 더 다가와 망설임 없이 작고 따뜻한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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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위선적인 평온

의자에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안셀리온이 무거운 걸음으로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스테인드글라스 너머의 시커먼 겨울 어둠을 응시하며, 그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플로렌스 백작 영애, 라리엘은 내가 어릴 적부터 보아 와서 잘 알지. 그녀는 심성이 순진하고 영악하지 못해서,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하거나 꿍꿍이가 있으면 곧잘 티가 나거든. 분명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네. 의심보다는 두려움이 느껴지는 눈빛이었지.”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사제를 돌아보며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지금은 조용히 감시만 하게나. 내일 내가 직접 부인을 슬쩍 떠보겠네.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조용히 기도만 하고 곧 수도로 떠날 걸세.”“알겠습니다. 원장님의 뜻대로 대기하겠습니다.”사제는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올린 뒤, 어둠이 짙게 깔린 문 너머로 소리 없이 물러났다.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도 안셀리온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그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밖, 라리엘이 머물고 있는 저 멀리 어두운 별채 방향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이튿날 아침, 초겨울의 창백한 햇살이 수도원의 오래된 회랑 기둥 사이로 길게 조각나 들이쳤다.얼음장 같은 공기 속에서 오랜 세월이 묻어난 퀴퀴한 먼지 냄새와, 성당 특유의 성수 향취가 기묘하게 섞여 사방으로 희미하게 떠돌았다.라리엘은 어제의 긴장을 간신히 지워낸 채, 안셀리온 수도원장과 나란히 서서 푸른 이끼가 두껍게 낀 돌길 화랑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그들의 서너 걸음 뒤편으로 은빛 갑주를 정갈하게 차려입은 알브릭 공작가의 기사 둘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라리엘을 호위하며 뒤따랐다.갑주가 맞부딪히며 내는 규칙적인 금속음이 수도원의 고요함 속에서 유독 또렷하게 울려 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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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지하 수로

같은 시각, 안셀리온 수도원장이 라리엘의 시선을 붙잡고 회랑을 유유히 거닐고 있을 무렵, 별채의 뒷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그림자처럼 미끄러져 나온 트리샤는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까지 손을 떼지 않았다.혹시라도 바람에 밀려 다시 흔들릴까, 그녀는 손바닥으로 나무결을 눌러 마지막까지 확인한 뒤에야 몸을 돌렸다.그녀는 소박한 색감의 옷과 머리를 단정히 묶은, 공작저의 시종 복장 그대로였다.누군가 불쑥 말을 걸어온다면 어깨를 움츠리고 어리숙한 표정으로 길을 잃었다고 둘러댈 생각이었다.숲으로 발을 옮기며, 마차에 앉아 오는 길 내내 익혀두었던 수도원의 도면을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그렸다.‘수로의 끝은 강줄기와 맞닿아 있다고 했지.’조용히 숲을 가로질러 수도원 외벽을 따라 걸어 내려가던 트리샤의 시야에 마침내 강이 나타났다.강가로 다가가자 공기가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문제는 긴 치마였다. 평소라면 단칼에 잘라버렸을 옷자락이 바위와 잡초에 자꾸 걸렸다. 트리샤는 이를 악물고 숨을 죽이며 치마를 한 손으로 걷어 쥐었다.“어휴, 진짜. 이럴 줄 알았으면…”불평이 튀어나오려는 걸 삼키며, 그녀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그녀의 코끝에 어느덧 축축한 이끼 냄새와 얼어붙은 강물의 비린내가 와닿기 시작했다.바위 틈새를 헤매던 트리샤의 눈에 넝쿨로 가려진 둥근 아치형의 석조 구조물이 들어왔다. 지하 수로의 통로였다.트리샤는 넝쿨을 걷어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입구는 굵은 무쇠 창살로 굳게 막혀 있었다.그녀가 품 안에서 날렵한 단검을 꺼내 창살의 이음새에 집어넣었다. 그것을 지렛대 삼아 조심스럽게 힘을 주자, 의외로 창살이 툭 하고 쉽게 빠져나왔다.마치 누군가 여러 번 뺐다 끼웠던 흔적처럼 느껴졌다. 이 통로가 단순한 폐수로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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