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10

10 فصول

1화

성당의 천장에 매달린 수십 개의 샹들리에는 단순한 조명 기구가 아니었다.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의 폭포였고, 그 아래 서 있는 라리엘에게는 날카로운 바늘의 군집이었다. 화려하게 세공된 수백 개의 수정 조각들이 빛을 굴절시킬 때마다 성당 내부의 공기는 비현실적으로 일렁였다.대리석 바닥은 거울처럼 매끄럽게 닦여 있었다. 그 위로 부딪혀 산산이 조각나는 빛줄기들은 라리엘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제단으로 향하는 길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수천 송이의 장미에서 떼어낸 꽃잎들이 양탄자처럼 두껍게 깔려 있었다. 막 꺾어낸 꽃 특유의 짙고 달큰한 향기가 진동했다. 사람들은 그 향기를 ‘사랑의 향기’라 칭송했지만, 라리엘에게 그것은 갓 흘린 피의 비릿함과 다를 바 없었다.바스락.꽃잎을 밟을 때마다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라리엘의 자존감이, 그녀의 미래가, 그리고 플로렌스 가문의 명예가 되돌릴 수 없이 짓밟히는 파열음처럼 들렸다. 그녀는 자신의 영혼이 그 붉은 꽃잎들처럼 바닥에 짓이겨지는 환각을 보았다.라리엘 플로렌스. 아니, 이제는 라리엘 폰 알브릭.그녀가 입은 웨딩드레스는 새하얀 실크 위에 은사로 정교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고, 소매 끝마다 달린 진주들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광채를 내뿜었다. 그러나 라리엘에게 이 옷은 옷이 아니라 족쇄였다. 몸을 감싸는 부드러운 레이스는 목을 죄는 밧줄처럼 느껴졌고, 살결에 닿는 차가운 실크의 감촉은 얼음장 같았다.베일 아래 가려진 그녀의 얼굴은 대리석 조각처럼 고요했다. 그러나 그 평온함은 철저히 계산된 가면이었다.설렘도, 기대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거세된 눈이었다. 오직 이 치욕스러운 시간을 견뎌내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만이 그녀를 지탱하고 있었다.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가 멈추고, 성당을 가득 메웠던 소음이 일순간 잦아들었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주례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신랑 아르덴 폰 알브릭 공작은, 신부 라리엘 플로렌스 영애를 아내로 맞아 평생을 사랑하고 아끼겠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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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결혼식은 기괴할 만큼 조용하게 끝났다. 사람들의 박수는 의무적이었고, 던져진 꽃가루는 장례식의 헌화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연회장으로 옮겨온 뒤에도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화려한 음악과 산해진미가 차려졌지만, 공기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아르덴은 라리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연회장의 귀족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훑었다. 그러다 돌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표정 관리 좀 하지.”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를 긁었다. 그의 숨결이 닿는 곳마다 소름이 돋았다.“누가 보면 장례식인 줄 알겠어. 남들이 우리 사이를 의심하길 바라는 건가?”라리엘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내겐 장례식이나 다름없으니까. 네가 죽인 우리 아버지, 그리고 오늘로 완전히 죽어버린 나의 자유를 애도하는 자리지. 이보다 더 적절한 표정이 어디 있겠어?”“사고였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지.”“네 말을 믿느니 차라리 길가에 짖는 개를 믿겠어.”라리엘이 낮게 쏘아붙이자, 아르덴의 푸른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는 마치 연인에게 귓속말을 하듯 다정한 자세를 취하며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착각하지 마, 라리엘. 제안을 한 건 나지만, 그걸 선택한 건 너야. 네 가문의 추락을 막기 위해 네 자신을 팔아넘긴 건 네 의지였다고.”“네가 우리 가문의 모든 보급로를 끊고 고립시키지 않았다면, 내가 그런 선택을 했을 것 같아?”아르덴은 비릿하게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주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환호했지만, 라리엘은 구역질이 나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협박이 아니라 거래지. 나는 그저 갈 곳 없는 어린양에게 울타리를 제공한 것뿐이야. 물론, 그 대가가 평생의 자유라는 점은 변함없지만.”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기계적인 손길이었다. “너는 ‘공작부인’이라는 절대적인 방패를 얻었고, 나는… 성가신 인질 하나를 내 시야 아래 두게 된 셈이니까. 서로 밑질 것 없는 장사 아닌가?”그의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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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라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 역시 그가 설계한 잔인한 연극의 일부일지도 몰랐다. 경계를 늦추게 만든 뒤, 가장 아픈 곳을 찌르기 위한 전조. 그녀는 가운을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몸을 잠식한 한기가 너무도 지독해 결국 그 온기에 기댄 채 몸을 웅크렸다.잠시 후, 욕실 문이 열리고 아르덴이 나왔다. 그는 상체를 드러낸 채 머리칼을 거칠게 털어내며 방을 가로질렀다. 거울을 통해 그의 모습이 라리엘의 시야에 들어왔다.군더더기 없이 탄탄한 근육으로 다져진 상체, 어깨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유려한 선 위로 맺힌 물방울이 보석처럼 빛났다. 그는 라리엘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옷장에 걸린 셔츠를 꺼내 입었다.단추를 하나하나 채우는 그의 손가락은 길고 정교했다. 그 손이 어제 자신의 턱을 잡아 올리며 협박하던 손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우아했다. 마지막 단추를 채우지 않은 채 셔츠 깃을 정리하던 아르덴이 돌연 거울을 통해 라리엘과 시선을 맞췄다."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지? 곧 하녀들이 들어올 거야. 공작부인이 첫날밤을 바닥에서 지새웠다는 소문을 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움직여."그의 시선이 라리엘의 입술로 향했다. 밤새 추위에 떨며 깨문 탓에 핏기가 가신 채 짓눌린 입술. 아르덴의 눈매가 아주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주저앉아 있는 라리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눈높이를 맞췄다."......."라리엘은 숨을 들이켰다. 너무 가까웠다. 그의 셔츠 사이로 미처 다 마르지 않은 물기가 느껴졌고, 갓 씻고 나온 남자의 깨끗하고 서늘한 향이 폐부 깊숙이 침투했다. 아르덴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차가운 손가락 끝이 예민한 귓등을 스쳤다. 라리엘은 전율하며 몸을 떨었다.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지만, 그것은 단순히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협적인 긴장감이 그녀의 목을 조여왔다."얼굴이 엉망이군. 8시에 식당으로 내려와. 내 일과는 정확하니까, 1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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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저기 연못에 무지개가 떴어!”아르덴은 숨을 고르며 달리다가도 그 말을 듣자 속도를 조금 더 냈다.“천천히 가, 라리엘.”그는 애써 침착한 척 말했지만, 심장은 그녀보다 더 빠르게 뛰고 있었다.“무지개는 도망가지 않아.”“도망가면 어떡해! 비가 그친 지 얼마 안 됐단 말이야!”라리엘은 결국 연못가에 먼저 도착해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연못 위에는 햇빛이 굴절되어 일곱 빛깔의 띠가 흔들리고 있었다. 물결이 살짝 일 때마다 색은 부서지듯 흩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라리엘은 숨을 죽인 채 그것을 바라보았다. 마치 눈을 깜빡이면 사라질 꿈처럼 느껴졌다.아르덴은 헐떡이며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살폈다. 젖은 흙, 라리엘의 치마 자락, 날카로운 돌멩이.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이 입고 있던 짙은 남색 재킷을 벗어 바닥에 깔았다.“앉아.”그의 말은 짧았지만 단정했다.“흙 묻으면 백작님께 혼날 거야.”라리엘은 눈을 크게 뜨더니 금세 웃음을 터뜨렸다.“아빠는 안 혼내!”그녀는 일부러 재킷 위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아르덴이 더 걱정이지? 너희 집사 아저씨 무섭잖아.”라리엘은 장난스럽게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르덴은 못 이기는 척 그녀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두 아이의 어깨가 살짝 맞닿았다. 그 순간, 아르덴은 이유 없이 숨을 멈췄다. 소녀의 체온이 얇은 옷감 너머로 전해졌다.소년의 몸에서는 갓 베어낸 풀냄새와 공작저 서재에서 오래된 책들이 풍기는 종이 냄새가 섞여 났다. 라리엘은 그 냄새가 좋았다. 안정되는 냄새였다. 언제나 이곳으로 돌아오면 안전하다는 기분이 들었다.“있지, 아르덴.”라리엘은 연못을 바라본 채 말했다.“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너희 집이랑 우리 집은 아주 오래전부터 특별한 사이였대.”아르덴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우리 아버지도 말씀하셨어.”그는 연못에 비친 무지개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알브릭과 플로렌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래. 서로 등을 맡길 수 있는… 그런.”라리엘은 그 말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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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식당에 남겨진 것은 차갑게 식은 커피 향기와 라리엘의 떨리는 숨소리뿐이었다. 그녀는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정돈했다. 이제부터는 슬픔이나 분노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알브릭 공작저라는 거대한 괴물의 뱃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우선 이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해야 했다.식당 문을 열고 나가자, 어제 연회장에서 보았던 중년의 남자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빳빳하게 다려진 연미복, 차가운 은테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예리한 눈매. 알브릭 가문의 가신이자 대대로 공작저를 관리해 온 수석 집사, 베르너였다.“정확히 8시 30분이군요. 공작부인.”베르너는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릴 때 공작저를 드나들며 보아온 집사 베르너는 깍듯한 예의에서 왠지 모를 엄격함이 느껴지던 사람이었다. 지금의 그는 예의를 갖춘 몸짓이었으나, 그 음성에는 신임 안주인에 대한 환영보다는 평가하는 듯한 서늘함이 서려 있었다.“공작님께 지시받았습니다. 오늘부터 부인께서 관리하셔야 할 공작저의 업무와 고용인들의 명단을 확인시켜 드리라고 말입니다.”라리엘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안내해 주세요, 베르너.”그녀는 베르너의 뒤를 따라 공작저의 긴 복도를 걸었다. 복도 양옆으로는 역대 공작들의 초상화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들의 눈동자는 마치 이 불청객 같은 여자가 알브릭의 성을 쓸 자격이 있는지 감시하는 것 같았다.베르너는 가장 먼저 중앙 홀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곳에는 이미 수십 명의 고용인이 줄을 맞춰 서 있었다. 하녀장부터 시작해 정원사, 마부, 요리사들까지. 그들은 라리엘이 나타나자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인사하십시오. 오늘부터 알브릭의 안주인이 되신 라리엘 폰 알브릭 부인이십니다.”베르너의 소개가 끝나자, 고용인들의 인사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라리엘은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고개 숙인 정수리 아래로 흐르는 묘한 기류를. 망해버린 백작 가문의 영애, 빚 대신 팔려 온 신부, 그리고 주인이신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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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의회에서 돌아온 아르덴의 마차가 저택 정문에 들어선 것은 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였다.아르덴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망토를 하인에게 넘겼다. 차가운 밤공기를 뚫고 저택으로 들어온 그의 모습에는 금실이 수놓인 어깨 장식과 단정한 칼집, 그리고 하루 종일 그를 조여 왔을 격식과 피로가 한데 엉겨 있었다. 예복도 채 벗지 않은 채 그는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라리엘은 이미 식탁 앞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기다렸다기보다는 도살장에 끌려온 짐승처럼 그가 올 시간만을 헤아리며 경직되어 있었다. 촛불은 이미 반쯤 녹아내렸고, 식탁 위의 음식은 손도 대지 않은 채 식어가고 있었다.문이 열리고 아르덴이 들어섰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긴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하녀가 조용히 다가와 와인을 따랐다. 아르덴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촛불에 비친 그의 얼굴은 낮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 푸른 눈동자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깊고 차가운 침묵을 머금고 있었다.“베르너에게 들었어.”그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 그 평온함이 오히려 라리엘의 신경을 더 날카롭게 만들었다.“저택 안의 업무를 익히기 시작했다고.”라리엘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녀는 재빨리 은색 포크를 내려놓았다. 금속이 접시에 닿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알브릭의 법도를 익히는 건 내 의무라며. ‘그림자’로서 쓸모가 있으려면 말이야.”그녀는 일부러 ‘의무’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그 말은 스스로를 비하하는 동시에, 그가 그녀에게 부여한 역할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도발이었다.“이해가 빨라서 좋군.”아르덴은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의 시선은 라리엘의 얼굴에서 시작해, 목선을 따라 내려가 하얗게 굳은 손가락 끝에 머물렀다. 그 시선은 집요했지만 노골적이지 않았다. 마치 물건의 상태를 점검하듯, 혹은 상대의 허점을 재는 장군처럼.“일과는 어땠지? 내 서재까지 가보려 했다던데.”그는 잔을 돌리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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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하아…… 하…….”거칠게 몰아쉬는 숨이 방금 전 아르덴이 서 있던 공간의 잔열을 집어삼켰다. 심장이 늑골을 부수고 나올 것처럼 뛰었다.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뺨을 타고 흐르던 그의 서늘한 숨결, 얇은 잠옷 너머로 전해졌던 손바닥의 지독한 열기, 그리고 찰나의 순간 자신을 꿰뚫었던 눈빛. 그 모든 감각이 사슬처럼 그녀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라리엘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그의 숨결이 닿았던 자리가 여전히 화끈거렸다. 마치 낙인이 찍힌 것 같았다.‘자극하지 말라고?’그녀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조롱이었다. 가문의 원수이자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용의자, 그 괴물 같은 남자에게 본능적인 전율을 느꼈다는 사실이 그녀를 구역질 나게 했다. 증오해야 마당한 남자에게서 느낀 그 짧은 긴장감은, 라리엘에게 있어 그 어떤 모욕보다도 치욕스러웠다.그의 품 안에서 잠시나마 숨이 멎었던 것은 분명 생존 본능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머릿속은 배신감 섞인 의문들로 어지러웠다.‘너는 내게 관심조차 없다더니…….’아르덴이 보인 그 찰나의 갈증. 그것은 사랑도, 애정도 아니었다. 그것은 소유물을 향한 지독한 갈구이자, 언제든 무너뜨릴 수 있다는 오만한 포식자의 경고였다. 라리엘은 그가 남긴 ‘인내심’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그는 자신을 안는 것이 아니라, 짓밟는 것을 참아내고 있는지도 몰랐다.만약 방금 그가 멈추지 않았다면?그 질문은 독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그가 정말로 자신을 굴복시키려 들었다면, 나는 그를 밀어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숨이 막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차가운 바닥에 짓이겨졌을까.라리엘의 호흡이 가빠졌다. 이미 끝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몸은 뒤늦게 그 가능성에 반응하고 있었다. 심장은 여전히 제멋대로 뛰었고, 손끝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비참함은 기어이 그녀를 삼켰다. 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피부를 찢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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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그것으로 족했다. 어차피 자신이 죽인것과 다름 없었다. 자신이 더 깊이 파헤치지만 않았더라도, 백작에게 그런 것을 요청하지만 않았더라도 백작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더구나 그녀가 진실을 알게 되면 분명 더 깊이 파헤치려 들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그녀 또한 표적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백작을 죽인 세력의 실체가 아직 안개속에 있다는 사실이 그의 피를 말리게 했다.그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오해한 채 증오하는 편이 나았다. 친구이자 스승의 딸에게 씌워진 비극적인 연극. 그 모든 비난과 저주는 자신 하나로 충분했다. 아르덴은 그녀의 환한 웃음을 다시는 볼 수 없더라도, 적어도 그녀의 목숨만은 지켜내야 했다. 그것이 그가 백작에게 바치는 마지막 충성이자, 소년 시절부터 남몰래 품어온 연심에 대한 유일한 속죄였다.그는 비어버린 술잔을 내려놓고 침대에 몸을 뉘였다. 예복 상의만 벗어던진 채 셔츠 차림 그대로였다.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정신은 이상하리만치 맑았다.옆방에서 들려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빗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지금쯤 울고 있을까. 아니면… 나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을까.’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녀가 이 저택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이, 그에게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는 눈을 감으며 라리엘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천천히 되뇌었다.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점점 더 거세졌다. 6개월 전의 그날처럼, 하늘은 모든 진실을 씻어내려는 듯 무심하게 쏟아져 내렸다. 아르덴은 그 비릿한 물비린내를 맡으며 서서히 의식의 저편으로 가라앉았다.꿈속에서라도, 그녀가 다시 그 황금빛 정원에서 자신을 향해 웃어주기를 바라는 지독하게도 쓸쓸한 소망과 함께.*****어제의 폭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공작저의 아침은 눈이 시릴 만큼 찬란한 태양 빛과 함께 시작되었다. 밤새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시달렸던 라리엘은 커튼 틈새로 쏟아지는 날카로운 햇살에 눈을 떴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싱그러웠지만, 그녀의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아르덴이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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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라리엘은 서신을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아버지는 죽기 직전까지도 아르덴을 ‘아들과 다름없는 친구’로 믿고 있었다. 자신의 가문이 가진 위험한 비밀까지 공유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다.그런데 아르덴은? 그는 이 서신을 받은 직후에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가문을 파멸시킨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와 함께 아르덴이 집어삼켜진 것일까?라리엘은 서신을 소중하게 접어 품 안 깊숙이 숨겼다. 지금은 이것을 들고 아르덴을 추궁할 때가 아니었다.그녀는 창고를 나오며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밖으로 나오자 다시 찬란한 햇살이 그녀를 맞이했다. 하지만 라리엘의 눈앞에 펼쳐진 공작저의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다운 안식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화려한 금빛 안개로 뒤덮인, 언제 어디서 가시가 튀어 나올지 모르는 위험한 미로와 같았다.“부인, 공작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하녀의 보고가 들려왔다. 그녀는 품 안의 서신이 닿은 살결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창밖의 남자를 내다보았다. 아르덴은 마차에서 내려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자네가 요청한 플로렌스의 고대 문헌 사본…….’아르덴은 왜 우리 가문의 금기된 역사를 원했던 걸까. 아버지는 그것을 ‘우리 가문’의 역사라고 칭했지만, 동시에 아르덴에게 조심히 다뤄달라고 당부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두 사람이 공유했던 그 ‘금기’는 무엇이었을까.아르덴이 그 문헌을 손에 넣기 위해, 혹은 그 안에 담긴 진실이 밖으로 새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가장 믿음직한 친구였던 아버지를 제거한 것이라면? 그녀는 가슴을 짓누르는 서신의 무게를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아르덴이 요청한 금기, 그리고 아버지가 마주했던 죽음. 그 사이를 잇는 핏빛 연결고리가 바로 이 저택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맑은 하늘 아래, 알브릭 공작저에는 화려한 음악 소리가 예행연습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천장에 매달린 수십 개의 크리스털 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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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교묘한 비아냥이었다. 아르덴의 ‘자비’와 라리엘의 ‘처지’를 동시에 건드리는 말에 라리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때, 아르덴이 그녀의 허리를 자기 품으로 더 깊숙이 끌어당기며 여유롭게 대답했다.“자비라니요, 백작. 나는 그저 내게 어울리는 가장 고귀한 꽃을 내 화원에 옮겨두었을 뿐입니다. 라리엘은 이제 플로렌스가 아니라 알브릭의 이름으로 빛날 테니까요.”아르덴은 말을 마친 뒤, 보란 듯이 그녀의 목덜미 근처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 넘겼다. 손끝이 민감한 피부를 스치자 라리엘은 소름이 돋아 몸을 떨었다. 그는 그 떨림조차 즐기는 듯 라리엘을 내려다보며 마치 사랑스러운 보물을 보듯 미소 지었다.“그렇지, 부인?”“……네. 공작님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 이제 제 몫이겠죠.”라리엘은 기계적으로 대답했다.‘이게 네가 원한 연극이야, 아르덴?’라리엘은 품 안 깊숙이 숨겨둔 아버지의 서신을 떠올렸다. 이 화려한 조명 아래서 웃고 있는 이 남자와, 어두운 서고에 가문의 금기를 숨겨둔 남자는 과연 같은 사람인가.시간이 흐르고, 아르덴이 잠시 의회 의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라리엘은 홀 가장자리에 홀로 남겨졌다. 천천히 연회장을 둘러보는 그녀의 귀에 귀족들의 은밀한 조롱이 들려왔다.“보라고, 저 꼿꼿한 고개. 가문은 망했어도 백작 영애 자존심은 남았나 보지?”“말이 좋아 결혼이지, 사실상 빚 대신 넘겨진 인질이잖아요. 공작께서도 그냥 장식품 정도로 생각하시는 것 같던데.”“어머, 그래도 아까 허리를 감싸 쥐는 손길 보셨어요? 공작님이 의외로 저런 ‘가련한 타입’을 취향으로 두셨을 줄이야.”라리엘이 숨을 고르기도 전에, 이번에는 화려한 부채를 든 여인이 다가왔다. 사교계의 자선가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타인의 불행을 전시하기 좋아하는 벨몬트 후작부인이었다.“오, 가여운 라리엘.”후작부인이 슬픈 연극을 하듯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백작님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몰라요. 그렇게 명예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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