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플로렌스의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Chapter 111 - Chapter 120

145 Chapters

111화. 교묘한 방문

창밖으로 비치는 오후의 잔광이 응접실 천장의 거대한 수정 샹들리에에 부딪혀 사방으로 흩어졌다.몇 번이나 와본 응접실이었지만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무거운 공기가 클로디아의 숨을 조여왔다.그녀는 공작저의 부드러운 벨벳 소파에 앉아 있었지만, 가시방석에 앉은 듯 몸이 자꾸만 꼿꼿하게 굳었다.손끝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떨려오는 손을 감추기 위해 찻잔을 들려다 이내 그만두었다.찻잔이 떨려 받침대와 부딪히는 소리라도 난다면, 자신의 긴장과 불안이 이 넓은 응접실에 고스란히 울려 퍼질 것만 같아 두려웠다.​오늘 공작저를 찾은 클로디아의 목적은 명확했다.그녀는 자신이 던질 한마디가 공작의 가슴 속에 의구심이라는 독초를 심기를 바랐다.공작 부인이 숨기고 있는 사생활이든, 가문의 뒤편에 감춰진 구린 구석들이든ㅡ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사실 여부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완벽해 보이는 부인의 지위에 아주 작은 균열을 내는 것이었다.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다. 클로디아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그때, 응접실 문이 열렸다.​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문을 열고 들어오는 공작에게서 금방이라도 살얼음이 얼어붙을 것 같은 서늘한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걸어 들어와 응접실 중앙에 멈춰 섰다.그리고는 형식적인 예의를 차리기보다 날 선 시선으로 클로디아를 빤히 응시했다.​“레이먼 백작 영애. 부인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자리를 비운 시각에, 굳이 나를 찾은 연유가 무엇인지 들어야겠군.”사교계의 평범한 ​인사조차 생략된 아르덴의 낮고 단정한 목소리에 클로디아의 심장이 발끝까지 덜컥 내려앉았다.눈앞에 선 그의 수려한 이목구비는 조각처럼 아름다웠지만, 그 차가운 눈 안에 담긴 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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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선의의 제보자

겉으로는 오직 공작 부인의 안위와 결백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척하면서도, 실려 있는 문장의 맥락은 라리엘이 무언가 추악한 비밀을 숨기고 있는 부정한 여인인 것처럼 은연중에 낙인을 찍어버리는 고단수의 화법이었다.클로디아는 자신이 던진 말이 공작의 마음 속에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 잔뜩 기대하며, 숨을 죽인 채 그의 안색을 살폈다.입을 굳게 다문 공작의 시선은 허공의 어느 한 지점을 날카롭게 꿰뚫고 있었다. 정적이 길어질수록, 공작의 의심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짐작한 클로디아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이윽고 아르덴이 시선을 돌려 클로디아를 보았다.순간, 그의 입가에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답고 우아한 호선이 그려졌다. 클로디아가 꿈꿔왔던, 오직 선택 받은 특별한 이에게만 허락될 것 같은 그림 같은 미소였다.​“레이먼 백작 영애, 정말 고맙군. 우리 알브릭 가문을 위해 여린 몸으로 이토록 위험을 무릅써주다니. 나머지는 내가 직접 알아볼 테니 이제 영애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그 눈부신 미소와 다정한 어조에 클로디아는 잠시 숨 쉬는 법조차 잊은 채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목적을 달성했다는 확신이 전율처럼 온몸을 감쌌다.공작 부인을 향한 공작의 의구심을 자극하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뢰까지 얻어냈다는 만족감이 그녀를 취하게 만들었다.​아르덴은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 문 앞까지 그녀의 걸음에 맞춰 다정하게 배웅했다.그 행동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자존감과 허영심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하게 부풀어 올랐다.“클로디아…라고 했던가?”그의 입술 사이에서 마침내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클로디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가 잔뜩 상기되어 붉어진 얼굴로 수줍게 아르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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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계책 모의(1)

벽에 고정된 작은 벽등만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듯 빛을 내고 있는 밤이었다.수도원의 두꺼운 돌벽 사이로 스며드는 겨울 밤공기가 유난히 차고 무거웠다. 기분 나쁜 정적과 적막함이 안개처럼 감도는 수도원 별채의 작은 방 안에는 라리엘과 트리샤가 낡은 목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무겁게 마주 앉아 있었다.“젠장, 분명 뭔가 구린게 하나쯤은 있을텐데…”트리샤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올렸다. 머리카락 가닥들이 마치 현재의 꼬여버린 상황 같아 괜히 그녀의 예민한 신경을 거슬렀다.벌써 며칠째, 숨죽이며 지켜본 지하 수로 주변에는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시종으로 위장한 트리샤가 그림자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내부 서고와 공용 집무실을 몰래 뒤져보았지만, 안셀리온의 꼬리를 잡을 만한 문서는커녕 깨끗하게 세탁된 합법적인 장부들뿐이었다.불안한 듯 무릎을 연신 까닥거리는 그녀의 눈빛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확실하다고 믿었던 지하 수로의 단서도, 수도원장의 치명적인 약점도 —모든 길이 막혀버린 듯한 기분에, 혹시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은 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의심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그때까지 말없이 찻주전자를 기울이던 라리엘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트리샤 씨. 나… 며칠 동안 기도를 핑계로 수도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떠오른 기묘한 기억이 하나 있어요.”축 처져 있던 트리샤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라리엘은 찻잔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일렁이는 등불의 붉은 빛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아주 먼 유년 시절의 파편을 더듬기 시작했다.“어주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왔을 때였죠. 호기심에 수도원 뒤편 구석진 복도를 지나 어느 방 앞에 멈춰 선 적이 있었어요. 문 틈 사이로 묘한 향 냄새와 오래된 종이의 먼지 냄새가 났던 걸 기억해요.”“그래서요? 그 방 안에 대체 뭐가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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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계책 모의(2)

라리엘은 트리샤의 손끝이 머물렀던 허공을 결연하게 바라보며 ‘딱 중간’이라는 말을 작게 읖조렸다.트리샤는 그런 라리엘의 가녀린 옆얼굴을 지켜보다가, 참지 못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솔직한 속내를 흘렸다.“에휴…부인이 과연 그걸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 워낙 속이 유리처럼 투명한 사람이라.”트리샤의 걱정을 읽은 라리엘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기대를 걸어준 동료를 안심시키려는 듯 햇살처럼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트리샤 씨. 저도 명색이 공작가의 안주인으로서, 사교계에서 상대의 기분을 맞추거나 화제를 돌리는 화술 정도는 많이 익혔으니까.”그 말간 웃음에 트리샤는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저렇게 착해 빠진 순진한 얼굴로 수십 년간 권모술수를 부려왔을 노련한 늙은이를 상대로 연기를 하겠다니, 도박도 이런 위험한 도박이 없었다.하지만 그런 그녀의 걱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라리엘은 한층 진지해진 눈으로 단호하게 말했다.“나보다는 트리샤 씨가 더 걱정이에요. 원장님의 품에서 열쇠를 훔치는 것도, 그 금기된 방을 홀로 뒤지는 것도 모두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혹시라도 들킬 것 같으면 절대 무리하지 말아요. 만약 누군가와 마주치면 바로 길을 잃었다고 둘러대고 빠져나와요. 수색은 포기해도 괜찮으니까.”라리엘이 살며시 손을 뻗어 트리샤의 손을 꼭 붙잡았다.따뜻한 온기가 손을 통해 전해지자 트리샤는 순간적으로 손을 움찔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그 따뜻한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대신 어깨를 으쓱이며 평소처럼 능청스럽게 대꾸했다.“참나, 부인. 내 평생 해온 일이 남의 눈 피해서 뒷조사하고 들키지 않게 연기처럼 사라지는 거에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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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거짓 속 진실

“실은 공작님께서 이번 겨울이 지나면 대규모의 종교적인 자선 후원을 계획 중이세요. 그리고 저는 아버지와의 소중한 추억이 깃든 이곳에 그 후원을 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요 며칠 수도원의 낡은 외벽을 돌아보면서 그 생각이 더더욱 굳건해졌죠.”‘후원’이라는 단어가 안셀리온의 고막을 두드리는 순간, 그의 하얗게 센 눈썹이 경련하듯 움찔거렸다.조금 전까지 귀찮은 표정으로 등받이에 기대어 있던 노인은 순식간에 자세를 고쳐 잡으며 똑바로 앉았다.“허허, 부인께서 이토록 수도원을 깊이 생각해 주시니 이 늙은 사제가 참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유서 깊은 수도원이 공작가의 자비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신께서 보시기에 그것만큼 성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그렇죠? 아마 가문의 위신이 걸린 문제라 후원금의 액수가 상당할 거예요. 공작님의 개인적인 신심뿐만 아니라, 알브릭 가문의 종교적 지지 기반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서도 무척이나 상징적인 일이거든요.”라리엘이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넌지시 흘린 미끼는 안셀리온의 심장 박동을 빠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그의 주름진 얼굴 위로 감출 수 없는 탐욕이 파도처럼 서서히 일렁이기 시작했다.그러나 그는 수십 년간 다져온 위선의 내공을 발휘하며, 흥분으로 떨려오는 목소리를 억누르고 최대한 차분하게 대꾸했다.“마땅하고 현명하신 말씀입니다. 신을 향한 공작님의 경외심을 후원금이라는 가시적인 정성으로 표현해 주신다면, 제국 민심뿐만 아니라 하늘의 신께서도 공작님을 더욱 살뜰히 굽어살피실 겁니다. 그 선한 영향력이 이 수도원을 통해 발현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그래, 구체적인 예산은…”“하지만, 아주 큰 문제가 하나 있어요.”라리엘이 안셀리온의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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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비밀 장부

방 안은 예상보다 훨씬 단정하고 정갈했다. 겉으로만 보면 평생을 청빈함과 무소유로 일관해 온 고결한 수도자의 수행방 같았다.한쪽 벽면에는 귀한 성물들이 놓인 진열장과 서랍장이 줄지어 있었고, 방 한가운데에는 낡았지만 고급스러운 나무 책상이 놓여 있었다.밖으로 새 나가는 소리를 차단하듯 문을 조심스럽게 닫은 트리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서랍장으로 다가갔다.‘고결하고 청빈한 성자 같은 얼굴을 하고선, 이런 음침하고 구석진 곳에 대체 뭘 숨겨뒀을까.’그녀의 손길이 가차 없이 서랍의 깊숙한 곳을 하나하나 헤집기 시작했다.*수도원 접견실의 문이 열린 것은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하고도 한참이 지난 뒤였다.안셀리온은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가득 지은 채 라리엘을 배웅했다.“부인, 오늘 이 늙은 사제에게 털어놓으신 가문의 깊은 번민과 고민은 제가 매일 밤 기도로 신께 간절히 전하며 함께하겠습니다. 냉철하신 공작 각하께서도 분명 부인의 그 깊은 효심과 가문을 향한 선한 뜻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겁니다.”안셀리온의 목소리는 한없이 인자했으나, 라리엘은 그의 눈가와 입꼬리에 가느다랗게 핀 경련 같은 흥분을 읽어냈다.오랜만에 만져볼 거대한 금권에 대한 기대가 그를 들뜨게 하고 있었다.라리엘은 평생을 존경해 마지않던 성자 같은 얼굴 뒤에 숨은 이 노골적이고 추악한 탐욕에 소름이 끼쳤다.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곁에서 인자하게 웃어주던 기억 속 원장의 얼굴이 겹쳐 보여 가슴 한구석이 쓸쓸하게 저려왔다.“기도해 주시니 큰 힘이 되네요, 원장님. 조만간 공작저에서 좋은 소식을 가지고 다시 이곳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라리엘이 짧은 인사를 남기고 멀어지자, 안셀리온은 혼자 남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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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원망

이윽고 라리엘이 허탈함이 섞인 무거운 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 트리샤 씨. 장부만 봐서는 녹스의 흔적까지는 알 수 없겠어요. 모든 지출 내역을 ‘성소 유지비’나 ‘외부 구휼 후원금’ 같은 종교적인 명목으로만 적어뒀거든요. 돈이 어디론가 빠져나간 흐름은 분명하지만, 그 종착지에 녹스가 있다는 증거는 장부 어디에도 남겨두지 않았네요.”트리샤는 혀를 쯧 차며 뒤로 몸을 팍 기대었다. 나무 의자가 비명을 지르듯 삐걱거렸다.“역시 장부 하나로 다 해결될 리가 없지. 결국 그 늙은이가 녹스 놈들하고 손잡았다는 물증은, 그쪽 사람이 수로 통로로 드나드는 걸 직접 낚아채는 수밖에 없겠네요.”트리샤가 못내 아쉽고 분하다는 듯 주먹으로 나무 테이블을 가볍게 탕 내리쳤다.어렵게 수도원장의 비밀 장부까지 손에 넣었건만, 결정적으로 수로 주변에서는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그러나 라리엘은 장부 위에 놓인 손을 굳게 쥐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비록 녹스와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아직 못 찾았지만, 이 비밀 장부 하나만으로도 안셀리온 원장님의 범죄와 횡령은 충분히 증명돼요. 이건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에요. 트리샤 씨, 이 장부의 내용은 지체 없이 공작님께 알려야겠어요.”라리엘의 말에 트리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벌써 소매 안에 전갈용 작은 종이를 날렵하게 챙겨 넣고 있었다.“맞아요. 게다가 며칠 만에 간신히 얻은 귀한 수확이니, 공작님 쪽에서도 이걸 보면 판을 짜기 훨씬 수월해지겠죠. 바로 연락책한테 전갈 보낼게요.”트리샤가 다시 소리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자 다시 별채 방 안은 적막에 잠겼다. 홀로 남겨진 라리엘은 한동안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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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추적과 함정 사이(1)

같은 시각, 수도원 본관 구석의 비밀 집무실 안에는 폭풍 전야와 같은 무서운 적막이 내려앉아 있었다.두꺼운 돌벽과 무거운 나무 문이 외부의 소리를 완벽히 차단한 공간에서, 안셀리온은 책상 앞에 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그의 핏발 선 시선은 반쯤 열린 서랍장 안쪽의 텅 빈 바닥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없어. 그럴 리가 없는데.”쇳소리가 섞인 쉰 숨결이 텅 빈 방 안을 울렸다.“사라졌어. 장부가, 내 장부가! 대체 어디로 간 거지?!”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안셀리온은 서랍을 다시 한 번 거칠게 뒤졌다.손가락이 나무 바닥을 긁으며 헛돌았다. 이윽고 그는 주먹으로 서랍장을 세게 내리쳤다. 안셀리온의 온화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눈두덩이와 입가에 깊게 패인 주름마다 분노와 공포가 뒤섞여 꿈틀거리고, 식은땀이 이마에 맺혀 주름 사이를 타고 흘러내렸다.그때,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울리며 그의 심복인 젊은 사제 하나가 눈치를 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원장님, 저… ‘그쪽’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지난번 저희가 넘겨드린 장물 처분 대금의 세탁 건으로 원장님과 급히 상의할 일이 있다고…”그러나 현재 안셀리온의 귀에는 그 말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녹스와 결탁하여 가로챈 장물들, 귀족들에게 협박과 회유로 뜯어낸 돈의 흐름, 그 모든 추악한 진실이 담긴 장부가 사라진 마당에 세탁 대금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안셀리온은 이를 악물고 떨리는 숨을 한 번 거칠게 고른 뒤, 억지로 평정을 되찾으려 노력하며 낮고 느린 목소리로 사제를 향해 명령했다.“난 지금 바빠서 정신이 없네. 그 건은 자네가 알아서 조용히 처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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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추적과 함정 사이(2)

라리엘이 들어서자 안셀리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주름진 얼굴에 익숙한 인자한 미소가 번졌다.너무나도 평소와 같은 표정이라 오히려 섬뜩할 정도였다. 그는 부드러운 손짓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부인. 이리 와서 앉으시지요.”라리엘은 방 안을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긴히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더니, 어째서 이런 음침한 곳으로 저를 부르신 거죠, 원장님?”노인의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 알 수 없는 압박감과 살의가 서서히 숨통을 조여왔다.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차갑고 짧은 금속음이 울렸다.철컥! 스르륵, 탁.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소리였다.*트리샤는 수도원장의 장부를 품에 안고 별채 근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울창한 숲속으로 향했다.빽빽하게 얽힌 나뭇가지들 사이로 기울어지는 햇빛이 갈라져 들어왔다. 바닥에는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눅눅한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그녀는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채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 고요한 주변을 날카롭게 살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 소리조차도 날이 선 그녀의 신경을 사정없이 거슬리게 만들었다.‘여기라면 쉽게 찾지 못하겠지.’속으로 몇 번이고 차분하게 되뇌며,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거대한 고목 밤나무를 올려다보았다.줄기가 우람하고 굵은 데다, 사방으로 뻗은 잔가지가 높이 솟아 있어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사람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완벽한 은닉처였다.트리샤는 망설임 없이 유연한 몸을 움직여 거친 나무 기둥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메마르고 딱딱한 나무 껍질이 손바닥을 긁어댔지만, 그까짓 통증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만약 장부가 사라진 것을 안셀리온이 알아챈다면, 수색의 칼날은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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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위기

라리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녀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안셀리온이 저토록 거세게 화를 내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결정적인 물증은 손에 쥐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쎄게 버텨볼 수 있지 않을까.“고작 그런 터무니 없는 이유로 저를 여기에 가두신 건가요? 원장님께서 아무리 저를 어린 시절부터 보아오셨다 해도, 이건 정도가 너무 지나치군요. 제가 알브릭 공작 부인이란 걸 잊으신 건 아니겠죠?”라리엘의 서늘한 기세에 안셀리온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그는 한순간 망설이는 듯 보였으나, 곧 다시 의자에 느긋하게 몸을 기댔다. 그의 입가에 조소가 다시 피어올랐다.“어디 그 오만한 기세가 얼마나 가는지 지켜보도록 하지. 그렇지 않아도 수도사들이 네 년이 머물던 별채를 샅샅이 뒤지고 있다. 거기서 장부가 나온다면 너도 더는 발뺌할 수도 없겠지.”결코 만만하게 넘어가지 않는 안셀리온의 반응에 아쉬워하면서도, 라리엘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장부를 트리샤의 손에 맡긴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안심할 수도 없었다.아르덴이 도착할 내일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끌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방 안의 촛불이 죽음을 위태롭게 깜빡였다.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트리샤가 장부와 함께 무사히 숨어있기를.*수도원에 가까워 질 수록 트리샤의 눈빛은 점점 굳어졌다.머릿속으로 계산해 보아도 모든 계획이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장부를 숨겼고, 녹스의 흔적도 잡았으며, 아르덴에게 보낼 전갈까지 연락책을 통해 날려보냈다.이렇게까지 모든 일이 순조로울 수 있을까. 불길하고 축축한 예감이 안개처럼 조금씩 심장 속으로 스며들었다.&ls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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