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플로렌스의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Chapter 121 - Chapter 130

145 Chapters

121화. 부서지는 가면

턱을 쥐어짜는 차가운 손아귀에서 역겨운 힘이 전해졌다.라리엘은 온 힘을 다해 그의 손을 뿌리치며 이를 악물었다. 그런 그녀의 반항을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는 안셀리온의 눈동자가 이제는 완전히 살기등등하게 빛났다.“자, 내 인내심도 이제 바닥이 났다. 어서 말해라, 장부는 지금 어디에 숨겼지? 네 아비 곁으로 가고 싶지 않다면 순순히 부는 게 좋을 거다.”라리엘이 그 살벌한 눈을 쏘아보았다.지금 당장 목숨이 끊어진대도 입을 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차올라 맺힌 눈물이 눈가에서 위태롭게 반짝였다.그러나 이런 순간에 애처롭게 눈물을 흘리며 가련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안셀리온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그때, 또다시 문앞에서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쿵쾅거리며 울려 퍼졌다.“원장님, 원장님! 급히 나와보셔야겠습니다!”안셀리온은 라리엘을 향해 곤두세웠던 서슬 퍼런 기세를 거두며 문 쪽을 홱 돌아보았다.“무슨 소란이야! 장부를 찾아냈느냐?”“그게 아니라… 얼른 나와보십시오! 마차가, 정문에 마차가…!”“무슨 헛소리야! 마차 따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어서 가서 장부나 찾아봐!”​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복도 끝에서부터 규칙적이고 묵직한 구두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울리며 다가왔다.수도사의 비명 섞인 만류 소리가 이어졌지만, 발소리는 단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방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이어 문에 걸린 자물쇠가 육중한 금속음을 내며 철컥거렸다.​문이 열리고, 차가운 겨울 공기가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 차가운 기류를 뚫고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울렸다.“부인과 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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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미끼와 포획

“좋아. 자네가 그토록 그들을 두려워한다면, 이렇게 하도록 하지.”아르덴은 예상했다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안셀리온이 순순히 제이드를 제 손으로 넘겨주리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기에, 그는 곧바로 다음 수순으로 넘어갔다.“지금 즉시, 알브릭 공작이 기사들을 대동하고 수도원에 들이닥쳤다고 탈레스에게 전해. 공작의 목적이 지하에 숨겨진 제이드인 것 같으니, 발각되기 전에 그를 몰래 다른 은신처로 빼돌려야겠다는 이야기도 잊지 말고.”안셀리온은 공작이 ‘탈레스’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의구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자네의 전언을 받은 탈레스가 다급해져서 제이드를 밖으로 빼돌리는 과정에서, 내 기사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그자를 가로챈다면… 그건 자네의 잘못이나 배신이 아니지 않겠나? 자네는 그저 제이드를 지키려고 전언을 보낸 것뿐이니까. 그렇게 되면 ‘녹스’에서도 자네에게 책임을 묻기보다는, 제이드를 안전하게 지켜내지 못한 무능한 탈레스에게 실패의 죄를 묻겠지.”‘녹스’라는 단어까지 아르덴의 입에서 나오자, 안셀리온은 이제 경악을 넘어 공포를 느꼈다.공작의 정보력이 막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제국 깊숙한 곳에서 움직이는 어둠의 이름까지 들추어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이 남자는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가.“대답이 없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아르덴의 재촉에 안셀리온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경우의 수를 치열하게 계산해 보았으나, 들이닥친 칼날 앞에 결론은 오직 하나뿐이었다.“아,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공작님 말씀대로 탈레스에게 전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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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재회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트리샤는 라리엘을 테이블 앞에 앉히고는, 가방을 뒤져 두툼한 숄을 꺼내 그녀의 어깨 위로 꼼꼼히 덮어주었다.그러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화로에 불을 지피고 찻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따뜻한 찻잔이 라리엘의 손바닥 위에 놓였다.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온기에 라리엘의 굳어있던 어깨가 비로소 부드럽게 내려앉았다.라리엘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자신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트리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고마워요, 트리샤 씨. 장부를 끝까지 잘 지켜줘서… 정말로 고마워요.”트리샤는 찻주전자를 내려놓으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사실 그녀는 라리엘이 안셀리온에게 끌려가 있던 그 긴박한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을 자책하는 중이었다.“장부라도 지켜냈으니 다행인 거죠. 공작님이 떠나기 전부터 부인의 털끝 하나 안 다치게 잘 부탁한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노래를 불렀었는데…”말을 잠시 멈춘 트리샤가 죄책감이 섞인 가라앉은 목소리로 낮게 덧붙였다.“미안해요.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어야 했어요.”​트리샤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오는 것을 눈치챈 라리엘이 오히려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전혀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트리샤 씨가 밖에서 완벽하게 대처해 주었기 때문에 공작님이 제때 올 수 있었던 거예요. 게다가 지나고 보니 그렇게 큰 일도 아니었는걸요.”​오히려 자신을 다독이는 라리엘을 물끄러미 보던 트리샤는 왈칵 차오르는 감정을 감추려 마른세수를 하듯 거친 손으로 얼굴을 부벼 문지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아무튼 부인이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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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위태로운 평온

그녀의 솔직한 고백에 아르덴의 눈동자가 잠시 커졌다가, 이내 조용히 흔들렸다.그는 천천히 깊은 숨을 들이쉬고는 한숨처럼 한꺼번에 뱉어냈다. 마치 오랜 기다림과 걱정을 한꺼번에 털어내는 것처럼.“나도 보고 싶었어. 네가 수도를 떠난 후로, 하루도 빠짐없이.”그가 나지막이 대답하며 라리엘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의 입술이 닿은 곳에서부터 따뜻한 온기가 번져나갔다. 조금 뒤, 한결 밝아진 라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도 나, 꽤 잘 버틴 것 같지 않아? 응? 원장님이 아무리 무서운 얼굴로 구슬리고 협박해도, 난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라고 끝까지 눈을 똑바로 뜨고 잡아뗐거든.”눈을 반짝이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천진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아르덴은 흘러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짐짓 모른 체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글쎄. 아까 분명히 얼굴이 사색이 된 채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을 본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용감하게 잘 버텼다고 쳐줄게.”“치, 무섭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라리엘이 뺨을 부풀리며 투덜거리자, 아르덴은 참고 있던 웃음을 낮게 터뜨렸다.두 사람의 미소가 교차했다.잠시 후 아르덴의 시선이 창밖의 어둠으로 향했다. 수로 쪽에서 곧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그는 다시 라리엘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어느새 차가운 이성을 되찾고 있었다.“조금 쉬어. 곧 다시 움직여야 할지도 몰라.”라리엘은 그의 무거운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 역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가까스로 주어진 이 밤의 평온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화로의 불빛이 위태롭게 흔들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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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기습

​라리엘의 떨리는 목소리가 밤안개 사이로 흘러나온 그 순간, 허우적거리던 남자의 모든 움직임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딱딱하게 멈춰 섰다.허공을 정처 없이 헤매던 그의 마른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려왔다.​“이 목소리… 설마, 라리엘 아가씨입니까? 꿈이 아니라, 정말 아가씨의 목소리입니까?”“맞아요. 라리엘이에요. 제이드… 도데체 어쩌다 이렇게…”​말을 잇지 못하는 라리엘을 앞에 두고 제이드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아르덴은 침묵을 지킨 채, 그들의 재회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이윽고 제이드가 고개를 꺾어 검은 하늘을 향했다. 허공을 향한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허, 허허허! 으허하하하!”​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광기에 가까운 웃음소리가 강가에 메아리쳤다.웃음과 통곡이 뒤섞인 기묘하고 슬픈 소리였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그가 비로소 거친 숨을 고르며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하늘을 향해 읊조렸다.​“신께서…버림받아 마땅한 이 죄인의 기도를 끝내 버리지 않으시고 들어주셨군요. 죽기 전에 아가씨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아니, 목소리라도 듣게 해달라고 그토록 빌었는데.”차가운 강바람이 라리엘의 뺨을 서늘하게 스쳤다.가문의 비극적인 진실을 쥐고 있는 마지막 증인이, 마침내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모습은 그녀가 상상했던 어떤 모습과도 달랐다.눈을 잃고, 몸은 망가졌고, 정신마저 한계까지 몰린 채로 겨우 버티고 있는 사람.라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분노, 슬픔, 경악. 수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녀는 그저 떨리는 눈으로 제이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잠시 동안 나루터에는 잔잔히 흐르는 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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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배후의 실체

“플로렌스 백작님은 가문의 부정한 역사를 스스로 끊어내려 하셨습니다. 알브릭 공작님께서도 이미 잘 알고 계시지요? 백작님께서는 직접 법정에 서서 죄를 밝히고 재판을 받으려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플로렌스가 약탈한 금품을 녹스가 차지했다는 사실 또한 세상천지에 까발려지게 됩니다.”마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목이 바싹 말라붙은 듯 메마른 침을 겨우 삼켰다. 강바람이 불어오며 그의 헝클어진 은빛 머리카락을 흔들었다.​“은밀함을 생명으로 하는 그들에게 실체가 드러나는 건 파멸과 같습니다. 그래서 녹스의 수장이 직접 탈레스에게 지시를 내린 겁니다. 무슨 비열한 수를 써서라도 백작이 법정에 서기 전에 그 입을 영원히 막아버리라고 말입니다.”​아르덴은 이를 악물며 입술을 짓씹었다. 구두 끝으로 흙바닥을 짓이기는 그의 눈동자에 서늘한 살기가 어렸다.적의 실체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깊게 제국 구석구석에 뿌리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한 가문의 몰락 뒤에는 거대 조직이 휘두른 잔혹한 생존 본능이 도사리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아르덴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진실을 알고 있는 당신은 왜 살려둔 거지? 증거 인멸과 완벽한 비밀 유지를 위해서라면 당신 역시 진작에 흔적도 없이 죽였어야 했을 텐데.”제이드의 입가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그들은 뼛속까지 철저하고 잔인한 자들입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어 수사망이 자신들의 턱밑까지 좁혀올 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꼬리를 자를 ‘패’가 필요했던 거지요. ‘탐욕에 눈이 먼 집사가 주인을 배신했다’는 시나리오를 완성해줄 살아있는 증거 말입니다. 저는 그들에게 필요할 때 꺼내 쓰고 버릴 카드 한 장인 셈이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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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배신자의 충심

아르덴은 내키지 않는 듯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그에게 최우선은 라리엘의 안위였다.제이드가 스스로 미끼가 되겠다고 자처하는 이상, 이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확실한 방패막이가 될 것임을 그도 알고 있었다.​“…좋아. 당신의 뜻대로 하지.”​라리엘이 불안하고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아르덴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차분한 목소리로 달랬다.“제이드가 말했듯, 녹스는 그를 중요한 카드로 여기고 있어. 이용 가치가 있는 한 그의 목숨은 무사할 거야. 지금은 잠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는 게 최선이야.”​트리샤도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지금 아버지를 데리고 도망친다 해도 녹스의 끈질긴 추적에 둘 다 위험해 질 것이 뻔했다. 이윽고 그녀는 결심한 듯 제이드의 팔을 잡아끌었다.​“알았어. 그럼 아이델까지는 내가 데리고 갈게. 적어도 그놈들 손에 다시 넘어가기 전까지는 내가 지켜야겠으니까.”​트리샤의 시선이 아르덴과 라리엘을 향했다.그 눈에는 평소의 가벼움 대신, 아버지를 사지로 다시 밀어 넣어야 하는 자식의 비장함이 깃들어 있었다.강바람에 묻어오는 물비린내가 더욱 짙어졌다.나룻배를 타기 직전, 제이드가 더듬거리는 손으로 라리엘의 손을 꼭 맞잡았다. 그의 손등에 돋은 굵은 마디가 절박하게 떨리고 있었다.​“아가씨, 떠나기 전에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플로렌스 가문의 고대 역사 자료… 그 금기된 기록의 원본은 아직 무사합니다. 제가 따로 숨겨두었으니까요.”제이드가 말한 플로렌스 가문의 고대 역사 기록은 아르덴이 백작에게 요청하여 함께 조사하던 자료였다.그 기록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백작이 아르덴을 급히 만나러 오다가 변을 당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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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흩어진 별빛

아르덴은 창밖을 주시하던 시선을 돌려 담담히 대답했다.“그들은 이미 임무에 실패했어. 하지만 제이드가 그들의 계획대로 아이델로 향했으니, 그들도 굳이 일을 크게 만들어 상부로부터 문책당하고 싶지는 않겠지. 나루터에서 우리 기사들에게 제압당했다는 굴욕적인 사실만 입 밖에 내지 않는다면, 그들의 목숨줄에는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아주 ‘상세하게’ 타일러서 돌려보냈어.”​“타일렀다니… 너다운 방식이었겠네.”아르덴의 ‘타일렀다’는 말이 결코 부드러운 대화가 아니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라리엘은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마차의 흔들림에 따라 그녀의 눈동자도 잘게 떨렸다.한참의 무거운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하듯 조용히 속삭였다.“제이드는, 그동안 내가 마음속으로 상상하며 원망하던 그런 악인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어.”“어떤 모습을 상상했는데? 가문을 팔아넘기고 어딘가에서 뻔뻔하게 호의호식하는 잔인한 배신자의 모습?”​“그보다는…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좀 더 당당하고 꼿꼿한 위엄을 지킨 모습일 줄 알았거든. 내가 기억하는 제이드는 늘 한 치의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던 엄격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본 모습은 너무… 무력하고 부서져 있어서...”​라리엘은 결국 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리느라 말을 끝맺지 못했다.아르덴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가만히 감싸 안았다.차가운 밤공기에 굳어있던 라리엘의 몸이 그의 온기에 조금씩 녹아내리듯 풀려나갔다.​“아르덴. 나중에라도…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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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어머니의 품

얼굴에 한껏 걱정을 드리운 엘리시아가 질문을 쏟아냈다.그러고 보니 라리엘은 여전히 트리샤에게 빌려 입은 바지와 투박한 외투 차림이었다.라리엘은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다보며 일부러 더 환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아…오는 길에 일이 좀 있었는데, 정말로 걱정할 일은 아니야. 일단 들어가자. 밤바람이 너무 차.”엘리시아는 언니의 하얗게 질린 입술을 보고서야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듯, 차갑게 얼어붙은 언니의 손을 두 손으로 꽉 맞잡고 컴컴한 저택 안쪽으로 따뜻하게 이끌었다.현관문이 닫히자 따뜻한 실내 공기가 훅 끼쳐왔다. 장작불 냄새와 오래된 목재 냄새가 섞인 익숙한 고향집의 향기에 굳어있던 라리엘의 어깨가 비로소 조금 느슨해졌다.​"어머니랑 루시는?"​"루시는 조금 전에 잠들었어. 어머니는 방에 계신데, 아마 뜨개질을 하시느라 주무시지는 않을 거야.”​두 자매는 나란히 계단을 올랐다.평소보다 유난히 크게 울리는 나무 계단의 삐걱거림이 라리엘의 심장 소리처럼 들렸다. 엘리시아는 자꾸만 언니의 안색을 살폈다.무언가 거대한 폭풍을 뚫고 온 듯한 언니의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작고 위태로워 보였다.​"실은 어머니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 그러니까 너무 무서운 표정 짓지 마. 네가 걱정할 일은 없어."뒤에서 느껴지는 집요하고 불안한 시선을 알아챈 라리엘이 가만히 돌아서서 동생의 등을 다독이며 안심시켰다.​마침내 2층 복도 끝, 백작 부인의 방 문 앞에 두 자매가 다다랐을 때, 엘리시아가 걸음을 멈춰 섰다.​"언니, 설마 바로 가는 건 아니지? 그래도 며칠은 머물다 갈 수 있는 거지?"엘리시아의 간절한 물음에 라리엘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미안해, 엘리시아. 내일 아침 동이 트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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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약속

나룻배는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며 미끄러져 내려갔다.오래된 나무 배가 물살을 타고 조용히 흔들릴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강물은 달빛조차 집어삼킨 채 끈적한 먹물처럼 일렁였다.그 적막한 풍경 속에서 트리샤와 제이드는 한동안 서로에게 단 한 마디의 말도 건네지 않았다.뱃머리에 앉은 트리샤는 흘러가는 검은 강물만을 응시하고 있었다.수없이 많은 밤을 거리에서 보낸 그녀였지만, 이토록 마음이 무거운 밤은 처음이었다.먼저 침묵을 깬 것은 제이드의 쉰 목소리였다.“설마 네가 알브릭 공작과 함께 나를 찾아낼 줄은 몰랐구나.”제이드는 허공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눈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마치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보였다.“녹스 놈들이 이 일을 알게 되면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게다.”“알면 아는 거지. 그놈들이 날 어떻게 하든 내가 감당할 일이야.”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주인을 배신한 아버지에게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트리샤는 ‘왜 나를 지키겠다고 그런 짓을 했느냐’는 말을 목구멍에서 겨우 삼키고 다시 강물로 시선을 돌렸다.아버지를 원망하기엔 그 동기가 자신을 향한 일그러진 사랑이었고, 고마워하기엔 그 대가가 너무나도 참혹하고 추악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입을 닫기로 했다.제이드는 트리샤가 아무 것도 묻지 않는 것이 의아했다.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냐며 질책할만도 한데, 여태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저 모르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 역시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그런데 아버지. 왜 이렇게 말랐어?”트리샤가 툭 내뱉듯 물었다. 마른 장작처럼 앙상하게 마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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