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유서 깊은 플로렌스 백작가에 드리운 갑작스러운 비극. 하나뿐인 아버지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던 날, 라리엘의 세계는 무너졌다. 가문의 몰락과 막대한 채무 앞에 나타난 구원자는 공교롭게도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남자, ‘아르덴 폰 알브릭’ 공작이었다. 하지만 잔인한 조롱을 내뱉으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신중하고 따뜻하게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주는 그의 손길. 가시 돋친 독설 뒤에 숨겨진 지독한 고독과,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가는 애틋한 눈동자. 증오해야 마땅한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이 기묘한 보호 본능은 연기일까, 아니면 속죄일까.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공작이 철저히 숨기려는 진실. 차디찬 겨울의 끝, 두 사람이 마주할 진실은 구원일까, 아니면 또 다른 파멸일까.
View More아르덴은 입을 열기 전에 잠깐동안 고민했다. 클로디아가 떠벌리던 수많은 말들… 그것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모두 잘라버리고 간결하게 대답했다.“응. 조만간 그쪽 사람을 직접 대면할 수 있을 것 같아.”소문이라는 불편한 변수를 감수하는 대신, 직접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손에 넣었다.이것도 수확으로 친다면, 하나를 주고 하나를 얻은 셈이었다. 아르덴은 비릿한 미소로 창밖을 보았다. 곧 라리엘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건 위험하지 않을까?”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르덴은 한결 부드러운 표정으로 라리엘을 보았다.“그 계약서를 들고 법정으로 가기 전에 그들을 한번은 만나야 해. 이럴 땐 지체하지 않는게 가장 덜 위험한 방법이고.”계약서, 법정… 라리엘은 로베르 후작 부인의 말을 가만히 떠올렸다.위험한 건 그것만이 아닐 텐데. 그녀의 눈동자에 깊은 곳에 근심이 내려앉았다. 아르덴은 일부러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짐짓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그건 그렇고, 황궁을 처음 방문한 소감은? 아까 보니까 입을 못 다물던데.”아르덴의 얼굴을 마주한 라리엘은 그에게 들킬새라, 얼른 눈빛에서 근심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괜히 턱을 살짝 치켜들며 새침하게 말했다.“흠, 처음엔 그랬지만, 조금 지나니까 별로 대단한 것도 없던걸?”“오오, 그래?”아르덴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샹들리에도, 화려한 연회장도, 다 알브릭 저택에 있는거잖아. 규모가 커서 조금 놀란것 뿐이야.”“으응, 그렇군.”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사교계의 낯익은 얼굴이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로베르 후작 부인 아니신가요? 무슨 일이시죠?”후작 부인은 주변을 한 번 훑어보더니, 다른 사람들의 귀를 피하듯 라리엘의 팔꿈치를 살짝 감싸 쥐고 커다란 화분 옆으로 그녀를 이끌었다.그녀가 들고 있던 깃털 부채를 반쯤 넓게 펼쳐 자신의 입가를 교묘하게 가리고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부인, 요즘 공공연하게 떠도는 그 끔찍한 소문이 정말로 사실인가요? 어휴, 제 귀로 듣고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말이에요.”“무슨… 이야기를 들으신건가요?”“그게 그러니까, 돌아가신 플로렌스 백작님 말이에요. 사고로 돌아가신게 아니라 그 댁을 모시던 집사에게 살해당하셨다는게 사실이에요?순간, 라리엘은 머리를 거대한 둔기로 얻어맞은 듯 사고가 완전히 정지되며 멍해졌다.차가운 얼음물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다. . 후작 부인은 충격으로 창백하게 질려가는 라리엘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며 흥미진진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실례가 되는 줄은 알고 있지만, 이런 흉흉한 소문은 당사자에게 확실히 확인하는게 무엇보다 중요하잖아요?”밀려드는 당혹감 너머로 라리엘의 머릿속에 제이드가 나루터 앞에서 했던 말이 번뜩이며 스쳤다.‘그들은 뼛속까지 잔인한 자들입니다. 일이 잘못되어 수사망이 좁혀올 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꼬리를 자를 편리한 카드 한 장이 필요했던 거지요.’그들, ‘녹스’가 퍼뜨린 이야기가 분명했다. 살며시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라리엘은 다급히 표정을 정리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후
아르덴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어스름한 테라스로 들어섰고, 뒤따라온 클로디아가 유리문을 닫았다.문이 닫히자 화려한 오케스트라 선율과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마치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잦아들었다.차가운 겨울밤의 공기가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을 더욱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클로디아는 숄을 한 번 여미고는 고개를 숙였다.“은밀히 전해드리고 싶었는데, 연회장에서 이런 자리를 만들게 되어 송구합니다, 공작님.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공작님께서 난처해지실 테니, 서둘러 말씀드릴게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이 대화가 단순한 안부 인사가 아닌,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은밀한’ 대화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했다.뻔히 보이는 그녀의 속내가 자못 불쾌했지만, 아르덴은 기꺼이 그 연극에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괜찮아. 지켜보는 눈은 없으니 편하게 말해봐.”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클로디아는 기다렸다는 듯 한 걸음 더 다가섰다.바닥에 스치는 드레스 자락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저에게 접근한 그 수상한 남자가 부인에 대해 귀띔해주더군요. 플로렌스의 집사가 생전에 돌아가신 백작님과 심각한 마찰이 있었다고 해요. 정확한 내막은 베일에 싸여 있지만, 아마도 지저분한 금전 문제였던 모양이에요.”그녀는 ‘지저분한’이라는 단어에 미묘하게 힘을 주었다.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상대의 혐오를 자극할 수 있는 지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그녀의 눈동자가 은근히 빛났다.“탐욕에 눈이 먼 집사는 결국 백작님을 살해하고 도망쳤고, 저에게 접근한 그 남자는 집사에게 받아낼 돈이 있어 그를 추적하던 중이었대요.”말을 이어가며 클로디아는 손끝으로 자신의 팔을 천천히 쓸어내렸다.이야기가 점점 자극적으로 흐르자, 그녀의 심장도 덩달아 고조되었다.
1월 1일, 황궁에서 치러지는 신년회는 제국에서 가장 큰 행사인만큼 수많은 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었다.황궁 정문 앞은 문장을 새긴 귀족들의 마차 행렬로 끝이 보이지 않았고, 반대편 구석에는 각 가문에서 황실에 바치는 진상품을 실은 수레들이 분주하게 성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그 거대한 소란 속에 섞인 알브릭 공작가의 마차 안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아르덴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자꾸만 무의식적으로 라리엘에게로 흘러갔다.평소 내릴 때가 많았던 그녀의 갈색 고수머리는 우아하게 틀어 올려 섬세한 은핀으로 고정되었고, 그 덕에 고스란히 드러난 새하얀 목덜미가 매끄러운 곡선을 그렸다.가느다란 쇄골 아래로 늘어진 진주 목걸이는 그녀의 호흡에 따라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남청색 드레스 위로 드러난 어깨선과 가녀린 목덜미가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아르덴은 목 안쪽이 바짝 말라붙는 기분이 들었다.이 기묘한 갈증이 무엇인지,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아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시선을 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그의 시선을 느낀 라리엘이 문득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왜 자꾸 그렇게 봐? 어디 이상해? 화장이 번졌나?”그녀가 손등으로 제 뺨을 살짝 짚으며 묻자, 아르덴은 생각이라도 읽힐까 싶어 짤막하게 대답했다.“아니.”라리엘은 그의 반응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자신의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손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정리하며 중얼거렸다.“제일 예쁜 걸로 골라 입은 건데, 별로야?”라리엘이 속상한 듯 눈썹을 까딱이자 아르덴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사실 문제는 ‘별로’인 게 아니라, ‘지나치게 예쁘다&rsqu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라리엘의 무릎 위에서 책을 거두어 제자리에 꽂았다. 그리고는 부서질 세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안아 올렸다. 잠결에 으응, 하며 그의 품을 파고드는 라리엘의 온기에 아르덴은 숨을 멈췄다. 그녀에게선 여전히 예전 그 온실의 꽃향기가 났다. 그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며, 차가운 서고를 지나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그녀의 침실에 도착해 침대에 눕히는 순간까지도 아르덴은 팔에 힘을 풀지 못했다. 잠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는 이
숨이 조금 가라앉은 뒤에야 라리엘은 옷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닦아냈다. 눈물에 젖은 편지지를 구겨버리는 대신 조심스럽게 종이를 말렸다. 이 얼룩조차 자신의 일부라고 인정하듯. 지금 여기서 주저앉으면 정말로 아르덴의 말대로 '입 다물고 인형처럼' 살게 될 뿐이었다. '울고 있을 시간조차 아까워. 내가 무너지면 우리 가족은 정말 갈 곳이 없어져.' 라리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붉어진 눈가를 화장으로 차분히 가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거울 속에는 더 이상 처량하게 우는 소녀가 없었다.
연회장의 불빛이 하나둘 꺼진 뒤, 라리엘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화려하지만 갑옷처럼 무거웠던 자수정 드레스를 벗어던졌다. 꽉 조여졌던 코르셋이 풀리자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은 여전했다. 시녀들은 늘 그렇듯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편히 쉬십시오, 부인.”이라는 형식적인 인사만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침실은 완전히 라리엘 혼자만의 공간이 되었다. 촛불 하나만이 위태롭게 타오르는 방 안에서 라리엘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한동안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손은 무릎
라리엘은 짧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소임이라니? 오늘 내 소임은 너의 살아있는 장식품이 되는 것 아니었어? 충분히 완수했다고 생각하는데.” 날 선 대답에 아르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그는 괜히 먼 정원을 바라보며 짐짓 무심한 투로 덧붙였다. “…안색이 좋지 않군. 연회장의 향기가 너무 독했나?” 그것은 아르덴 나름의 절박한 안부였다. 괜찮으냐고, 아까 그들의 말에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진심이 서툰 질문 속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가시 돋친 말들에 온마음이 할퀴어진 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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