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플로렌스의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Bab 31 - Bab 40

82 Bab

31화. 뜻밖의 제안(1)

차가운 액체가 제복의 어깨를 타고 흘러 하얀 셔츠 안쪽까지 짙게 물들였다. 주변의 소음이 순식간에 멎고, 싸늘한 정적이 연회장을 덮었다. ​“죄,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여급사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연회장 관리인이 사색이 되어 달려와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낚아챘지만, 아르덴은 손을 들어 이를 제지했다. ​“그만두게. 고의도 아닌데 소란을 떨 것까진 없지.” ​아르덴은 젖어버린 소매를 무심하게 털어내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뚝뚝 흘리며 품속에서 작은 손수건을 꺼내 아르덴에게 내밀었다. ​“이, 이걸로라도… 정말 죄송합니다.” ​아르덴은 여급사가 건넨 손수건을 받아들려다 멈칫했다. 손수건 모서리에는 아주 작게, 일반적인 하인들의 소지품이라기엔 지나치게 정교한 플로렌스 가문의 옛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백작이 생전에 개인적으로 사용하던 인장과 흡사한 도안이었다. ​아르덴은 그제야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떨고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특이하게도 은발이었다. 그는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손가락에 상처가 있군. 가서 치료부터 하도록.” ​그는 여급사를 물러가게 한 뒤, 젖은 제복을 가다듬으며 곁에 있던 시종에게 짧게 지시했다. ​“여분의 옷으로 갈아입어야겠으니,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 ​연회장을 나온 아르덴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라졌다. 탈의실용으로 마련된 작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손안에 쥔 손수건을 펼쳐보았다. ​문양 사이로 아주 작은 글씨가 적힌 얇은 종이 조각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오늘 밤 11시. 제3지구 붉은 지붕 여관. ㅡ트리샤 크로이츠.] [p.s. 본인이 직접 오시길.] 크로이츠는 플로렌스의 집사 제이드의 성이었다. ​ 아르덴은 종이를 손 안에서 구겨버렸다. 대담하게도 자신을 직접 만나길 원하는 이 트리샤라는 자는 아까의 여급사였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인물이 있는걸까? ​그를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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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뜻밖의 제안(2)

자세를 바로하며 팔짱을 낀 그녀는 공작을 앞에 두고도 존칭도 쓰지 않은 채 그를 똑바로 보며 말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르덴이 턱을 괴며 천천히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내가 왜 그래야하지?” “난 아버지를 빼낼 힘이 필요하고, 당신은 아버지가 가진 정보가 필요하니까. 하, 설마 정말로 몰라서 물어본 건 아니죠?” 트리샤가 눈을 아래 위로 훑으며 헛웃음을 날리고는 말을 이었다. 묘하게 나른한 말투였다. “난 이게 꽤 괜찮은 조합이라고 생각하는데. 공작께선 어떠신지?” “...그 조직이 어떤 조직인지는 지금 물어도 소용없겠지?” 아르덴의 물음에 트리샤의 입술이 야릇한 호선을 그렸다. “당연한 거 아닌가요? 모든 건 당신이 확답을 준 후에 얘기할거에요.” 그녀의 은발과, 그 아래에서 번뜩이는 눈동자를 보며 아르덴은 이 여자가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담하고 위험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가 천천히 물었다. “당신은 그 조직에 대해 어떻게 알고있지? 내 막대한 정보망에도 걸리지 않은 사실을 당신이 알고 있다는건 흥미로운데.” 트리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해요. 나도 그 조직의 일원이니까” 뜻밖의 고백에 아르덴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다시 한번 이 말을 해야겠군. 그 말을 어떻게 믿지?” 트리샤가 작게 한숨을 쉬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가 다시 그를 바라봤다. “그건 증명할 방법이 없네요. 하지만 그 조직은 당신의 정보망보다 훨씬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것, 그리고 당신이 내 존재를 여태껏 몰랐다는 것, 이 둘만으로도 유추는 가능하죠.” “그러니까 지금 당신은 아버지를 위해 조직을 배신하는거다?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아르덴의 비아냥섞인 질문에 그녀는 기분이 조금 상한 것 같았다. 아르덴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난 제이드 크로이츠를 좋은 이유로 찾고있는게 아니야. 내가 그를 찾아내면 그가 더 위험해질 수도 있지. 그래도 괜찮은 건가?” 트리샤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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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달빛 아래 산책

침대에 누워 억지로 눈을 붙여보려 했지만, 복잡하게 얽힌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굴러다녔다. 닫힌 방 안의 공기는 지나치게 무겁고 정체되어 있었다. 라리엘은 결국 몸을 일으켜 실내복 차림 그대로 방을 나섰다. ​가을의 정원은 고혹적이면서도 잔인했다. 낮의 화려했던 색채는 달빛 아래에서 바랜 잿빛으로 변해 있었고, 이따금 불어오는 밤바람에 마른 낙엽들이 대리석 바닥을 긁으며 처량한 소리를 냈다. 공기는 이미 초겨울의 기운을 머금어 숨을 들이쉴 때마다 시리도록 서늘했다. ​라리엘은 그 안개 낀 어둠 속을 느릿하게 걸었다. 서늘한 공기가 오히려 머리를 맑게 해주는 것 같았다. 발목을 스치는 젖은 풀잎의 감촉은 그녀가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문득 헤르트루드 고모와 정원을 산책하던 날을 떠올렸다. 고모님은 아르덴이 일부러 가시뭉치가 되었을거라고 이야기 했었다. ‘하지만 기억하렴. 가시를 헤치고 들어가면 결국 그 안엔 여전히 네가 기억하는 그 다정한 소년이 살고 있단다.’ 라리엘은 고모님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내가 그 단단한 가시뭉치를 헤치고 들어갈 수 있을까. 조금만 손대도 더욱 날카로운 가시로 자신을 휘감고 숨어버리는 그를… 그때, 정원 입구 쪽에서 묵직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라리엘이 고개를 돌리자, 안개를 헤치고 아르덴이 걸어 오고 있었다. 셔츠에 검은 코트를 걸친 차림의 그는 저택을 나설 때와 다른 모습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켰다. 아르덴은 예상치 못한 라리엘의 등장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이제 들어오는 거야?”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라리엘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밤바람처럼 낮고 잔잔했다. 아르덴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대답 대신 다가와 그녀의 앞에 섰다. 푸른 눈동자 아래에 드리운 피로와, 지워지지 않은 날카로움이 동시에 보였다. ​“어딜 좀 다녀온 것뿐이야.” ​그는 트리샤와의 만남이나 수도 뒷골목의 소음을 지워버리려는 듯 무심하게 얼버무렸다. ​“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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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깨지 않는 꿈이라면

라리엘이 어깨에 걸친 코트를 벗어 건네려 했다. 아르덴은 그녀의 팔에 들린 옷을 잠시 바라보았다. 내일이면 그는 다시 그녀를 모질게 밀어낼 것이고, 그녀 또한 상처받은 눈으로 그를 차갑게 대할 것이다. 그 지독한 현실로 돌아가기 싫었다. 그는 옷을 건네 받는 대신 코트 아래 그녀의 손목을 살며시 잡았다. 라리엘이 반사적으로 그를 보았다. 그의 시선은 잡은 손목을 향해 있었다. 그의 체온이 느껴지자 라리엘의 심장이 조금 빨리 뛰기 시작했다. “아르덴…?” 아르덴이 그녀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둘의 거리가 서로의 숨결이 닿을만큼 가까워졌다. 그는 여전히 시선을 아래로 둔 채 고민하고 있었다. 이 문 너머로 그녀를 보내는 순간, 꿈결 같던 이 온기가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만 같아서. 아니, 차라리 이 순간이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이었다면ㅡ. 마침내 아르덴이 고개를 들어 라리엘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녀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 보고있었다. 그 투명한 눈동자를 본 순간 그의 심장이 한 번 크게 요동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반대편 손으로 라리엘의 뺨을 감싸고 그녀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라리엘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이 포개어지는 순간까지도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는 그저 자신의 심장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다는 생각 뿐이었다. 손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후, 아르덴이 천천히 입술이 떼어냈다. 라리엘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작게 토해내며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아르덴이 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입술을 짓씹는 것이 보였다. 그의 숨결이 라리엘에게 감겨올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는 코트를 낚아채듯 받아들며 그녀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미안. 들어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짧은 말을 내뱉은 그는 라리엘을 보지도 않고 곧장 돌아서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침실로 들어온 라리엘은 닫힌 문에 등을 기댄 채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았다. 입술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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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지난 밤의 잔상

​오후의 그림자가 저택의 회랑을 길게 가로지를 무렵에야 아르덴은 의회를 빠져나왔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차창 밖으로 익숙한 수도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공작저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머릿속은 점점 어지러워졌다. ​‘실수였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분위기에 취한 장난이었다고 치부해야 할까.’ ​어떤 변명을 갖다 붙여도 구차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밀어내야 한다는 이성과, 차마 숨기지 못하고 터져나온 애틋한 본능이 치열하게 난투극을 벌인 끝에, 남은 것은 지독한 자기혐오뿐이었다. 아르덴은 마른세수를 하며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을 갈무리했다. ​라리엘은 로비 한편에서 하녀장 마르타와 함께 겨울 대비 물자 목록을 검토하고 있었다. ​“부인, 창고에 보관 중인 석탄의 양이 예년보다 적습니다. 미리 넉넉히 확보해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하세요, 마르타. 그리고 별채의 벽난로 수리 현황도 다시 확인해 주시고요. 겨울엔 외풍이 심할 테니까요.” 마르타는 꼬장꼬장한 성격이었지만 함께 일해보니 생각보다 손발이 잘 맞았다. 공작저에서의 첫 연회 이후로 그녀는 라리엘의 결정에 군말이 없었고, 어떤 때는 그녀가 챙기지 못한 것까지 캐치하는 세심함도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인들에게 지급할 겨울 피복용 양모도 검수를 해야합니다.” “아, 그렇죠. 검수는 이번 주 내로 끝내도록 하죠. 품질이 떨어지는 건 전부 반송시키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인.” 그때, 하인의 보고가 들려왔다. “부인, 공작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순간 라리엘의 손등에 힘이 들어가며 펜 끝이 종이를 찢을 듯 멈춰 섰다.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지만,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억지로 평정을 가장했다. ​“알겠어요. 식사 준비를 서둘러 달라고 하세요.” * ​저녁 식탁 위에는 무거운 적막만이 흘렀다. 은식기가 그릇에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깼다. 아르덴은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의 시선은 허공 어딘가를 떠돌며 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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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킬리언 대공

그때, 마차가 급커브를 돌며 크게 흔들렸다. 예상치 못한 충격에 중심을 잃은 라리엘의 몸이 아르덴 쪽으로 확 쏠렸다. 짧은 숨소리와 함께 균형을 잃은 순간, 아르덴은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의 숨결이 엉켰다. 라리엘의 코끝에 아르덴의 서늘한 향수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라리엘의 입술 근처에 머물다 다급히 위로 치켜 올라갔다. “조심해.” 아르덴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라리엘이 자세를 바로잡을 때까지 어깨를 쥔 손에 힘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멀어지려 하자, 아주 잠깐이었지만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그녀를 제 쪽으로 더 끌어당기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라리엘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감추려 고개를 숙이고 드레스 자락을 정리했다. 심장이 괜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고마워. 길이 좀 험하네.” “내일부터는 마부에게 더 주의를 주도록 하지.” 아르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하게 손을 거두어 다시 무릎 위에 놓았다. 하지만 그 역시 시선을 쉽게 돌리지 못한 채, 한동안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공저의 화려한 불빛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할 때까지 두 사람은 각자 반대편 창밖을 보며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숨기기 위해 애를 먹었다. 대공저는 소문대로 화려했다. 성문을 통과하자 정원 곳곳에 세워진 등불이 밤을 낮처럼 밝히고 있었다. 아르덴은 먼저 내려 다시 한 번 라리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그녀도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 응접실로 안내된 두 사람은 잠시 대공 부부를 기다리며 자리를 잡았다. 응접실 벽면에는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가 위압적으로 걸려 있었다. 백합 향과 시가 향이 공기 중에 기묘하게 얽혀들어 묘하게 무거운 압박감이 생겼다. 라리엘은 숨을 고르며 고개를 아주 살짝 돌렸다. 자칫하면 두통이 올 것 같았다. 잠시 후, 응접실 문이 열리며 경쾌한 웃음소리가 먼저 흘러들어왔다. “어서 오게, 알브릭 공작! 그리고 아름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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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모욕의 무게

곧이어 만찬이 시작되었다. 은으로 장식된 커다란 식탁 위로 하인들이 줄지어 들어와 접시를 내려놓았다. 샴페인을 곁들인 신선한 굴 요리는 차갑게 식혀진 은접시에 담겨 있었고, 송아지 고기 찜에서는 트러플 향이 진하게 배어 나왔다. 촛불 아래서 윤기가 도는 음식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식욕을 자극했다. 대공 부인이 우아하게 잔을 들어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르덴을 응시했다. 그녀의 입가에 미묘한 연민이 떠올라 있었다. “공작을 볼 때마다 선대 공작님이 생각나네요. 참으로 강직하고 훌륭한 분이셨는데, 그렇게 일찍 세상을 뜨실 줄은 누구도 몰랐죠.” 부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마치 오래된 추억을 떠올리듯, 잔잔한 애도를 담은 어조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는 오묘한 가시가 있었다. “제국을 위해 헌신하시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으니… 세간에서는 알브릭 가문의 운이 거기까지였다느니, 후계자를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해 하늘이 데려갔다느니 하는 고약한 소문도 돌았었죠.” 라리엘은 숨을 들이켰다. 부인의 말은 어디까지나 ‘남의 입을 빌린 이야기’라는 외피를 쓰고 있었지만, 그 칼끝은 정확히 아르덴을 향해 있었다. “아, 무례했다면 미안해요.” 대공 부인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운 채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부모 복이 짧은 건 본인의 탓도 아니니까요, 안 그래요?” 라리엘은 급기야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일찍 부모를 여읜 아르덴의 아픈 구석을 후벼 파는 것은 물론, 알브릭 가문의 위상까지 깎아내리는 언사였다. 라리엘은 반사적으로 옆에 앉은 아르덴의 눈치를 살폈다. 선대 알브릭 공작이 돌아가셨을 때, 그가 얼마나 깊은 상실 속에 빠져 있었는지는 그녀도 아버지를 통해 들어 알고 있었다. 성년이 되기도 전에 양친을 잃어 괴로워하는 그를 플로렌스 백작이 겨우 붙들어 세워 공작의 자리에 앉힌 것이다. 라리엘은 그의 눈이 번뜩이거나, 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르덴은 평온했다. 그는 오히려 우아한 손짓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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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서툰 위로

마차가 크게 한 번 흔들렸다. 바퀴가 돌을 밟고 지나가는 듯한 충격이 전해졌지만, 그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지. 선친이 일찍 자리를 비켜주신 덕분에 난 강력한 권력을 손에 넣었어. 그게 사실인데 굳이 부정해서 뭘 하겠어.” 냉혹한 대답이었다. 그 말은 단순한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수년간 되뇌어 온 결론처럼 들렸다. 라리엘은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심한 척 내뱉는 말들이 실은 제 속을 도려내며 쌓아 올린 방벽이라는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안쓰러웠다. 그가 내뱉는 독설보다,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시간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라리엘은 그를 쏘아보며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다가, 무릎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손 좀 줘봐.” 아르덴이 의아한 듯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피로에 절어 있던 눈빛에 잠깐 당혹이 스쳤다. “뭐?” “손 좀 잡아보라고. 마차가 너무 흔들려서 멀미 날 것 같으니까. 지지대 삼게 좀 줘봐.” 마치 짐짝을 맡기는 듯한 틱틱거리는 말투였다. 아르덴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손을 내밀어 라리엘의 손을 쥐었다. 라리엘은 민망함을 감추려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작게 읊조렸다. “아까도 느꼈지만 길이 정말 험하네.” 그러면서도 그녀는 힘을 주어 그의 손을 눌러 잡았다. 비정한 괴물인 척 스스로를 깎아내리던 그 차가운 손에, 자신의 온기라도 욱여넣으려는 듯한 절박한 위로였다. 아르덴은 갑작스럽게 전해지는 악력에 흠칫 놀란 듯했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라리엘이 쥐어오는 힘을 묵묵히 받아내며 다시 창밖을 보았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밤길을 달렸다. 그들이 공작저에 도착할 때까지 마차 안에는 오직 말발굽 소리와, 두 사람이 놓지 않은 손의 온기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 그날 밤, 공작저로 돌아온 아르덴은 집무실에 불도 밝히지 않은 채 홀로 앉아 있었다. 두터운 커튼 너머로 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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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판 위의 새로운 말

베르너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났다. 문이 닫히고, 다시 집무실에는 아르덴 혼자만이 남았다. 그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유리 너머로 공작저의 정원이 어둠에 잠긴채, 등불 몇 개만이 희미하게 길을 밝히고 있었다. 아르덴은 그 어둠을 가만히 응시했다. 곧, 판 위에 새로운 말이 올라온다. 그리고 그 말은, 생각보다 훨씬 날카로운 칼날을 숨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 ​수도에서 가장 화려하고 은밀한 티하우스, ‘르 뤼미에르’의 3층은 귀족들이 비밀스러운 모임이나 정략적인 대화를 나누기 위해 사용되는 장소였다. 두꺼운 카펫이 모든 발소리를 집어삼켰고, 복도마다 피어오르는 비싼 향료 냄새는 이곳에서 오가는 추문과 음모의 악취를 교묘히 가려 주었다. ​가장 안쪽, 굳게 닫힌 개별룸 안에는 어느 귀족 영애로 보이는 젊은 여인이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레이스가 촘촘히 박힌 부채를 우아하게 쥐고 있었지만, 부채질하는 속도는 초조한 듯 미세하게 빨랐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창가로 비치는 햇살 아래에서 서늘한 미모와 푸른 눈동자가 빛났다. ​여자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렸다. ​“약속 장소를 이런 곳으로 정하다니, 지금 나랑 장난해요?” 미소는 곧 언짢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 드레스 대여료가 얼마나 비싼지 아냐구요! 내가 이 옷감 상할까 봐 계단 오를 때 얼마나 조심했는지 안다면 질색할걸.” ​트리샤는 풍성한 치맛자락을 신경질적으로 매만지며 투덜거렸다. 아르덴은 그녀의 가벼운 타박에 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지.” ​그의 건조한 목소리가 테이블 위에 차갑게 내려앉았다. 트리샤는 부채를 탁 접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눈 속에 서린 장난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서, 공작님께서 먼저 보자고 연락을 주셨다는건,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겠죠?” ​아르덴은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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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기록 보관인(1)

“부인,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침 햇살이 공작저의 긴 복도를 가로질러 하얗게 부서지던 시각, 하인들의 분주한 발소리와 찻주전자가 데워지는 소리가 저택 특유의 차분한 아침 공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한참 이르게 거실로 내려온 라리엘은 차분하면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베르너가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공작님의 전언이 있어 모시고자 합니다.” 베르너는 말을 아끼며 몸을 돌려 길을 안내했다. 라리엘은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창을 따라 늘어선 커튼 사이로 스며든 빛이 대리석 바닥에 길게 드리워졌다. 응접실 문이 열리자, 안쪽에는 낯선 여인이 한 명 서 있었다. 아르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작님께서는 이른 새벽 의회로 출석하셨습니다.” 베르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신, 새로 고용된 인력을 부인께 먼저 소개하라는 전언을 남기셨지요.” 어제 아르덴이 티하우스에서 주문했던 대로, 트리샤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깨를 넘기는 긴 머리카락은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염색되어 차분하게 내려앉았고, 화려한 드레스 대신 깃이 빳빳하게 선 짙은 감색의 정장 차림에 장식이라곤 가슴팍에 달린 작은 은제 브로치뿐이었다. 그 단정함이 오히려 그녀의 이목구비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했다. “이쪽은 루이즈 양입니다. 이번 북부 보급 비리 조사와 관련해 전하의 방대한 개인 서류를 정리하고 분류할 전문 기록 보관인입니다.” 라리엘은 미세하게 눈을 깜박였다. 개인 서류라니. 아르덴이 외부 인력에게 그만큼 깊은 부분까지 맡긴다는 건, 이 여인이 상당한 신임을 얻었다는 뜻이었다. 베르너의 매끄러운 소개가 이어졌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보안이 엄중하여, 루이즈 양은 당분간 공작저 별채에 상주하며 업무를 수행할 예정입니다.” ‘루이즈’라고 불린 여인은 고개를 숙여 우아하게 절을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 부인. 루이즈라고 합니다. 공작님의 명성에 해가 가지 않도록 맡은 바 소임을 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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