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플로렌스의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Bab 41 - Bab 50

82 Bab

41화. 기록 보관인(2)

베르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상황을 여러 각도에서 계산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다 마침내, 변함없는 격식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는 공무로 바쁘신 분입니다. 격식 없이 외부인을 수시로 집무실에 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트리샤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외부인이라뇨? 난 이제 공작님의 공식적인 ‘기록 보관인’인데. 베르너 씨가 내 보고를 가로막는 건, 오히려 공작님의 눈을 가리는 짓밖에 안 돼요. 아니면…” 그녀의 입가에 느릿한 미소가 번졌다. “내가 당신보다 더 중요한 정보를 쥐게 될까 봐 겁이라도 나는 건가?” 베르너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오랜 세월 공작가를 지켜온 노집사의 얼굴에 드러나는 흔치 않은 변화였다. 그의 눈에 트리샤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같은 존재였다. 통제할 수 없으며, 잘못 다루면 큰 사고를 부를 위험한 존재. 하지만 그녀의 말이 틀린 구석이 없다는 점이 더욱 그를 곤혹스럽게 했다. 중간에서 걸러진 정보는 편해질 수는 있어도, 결코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잠시 팽팽한 대치가 이어졌다. 트리샤는 지지 않고 베르너의 시선을 받아냈고, 마침내 베르너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좋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직접 공작님께 의견을 물어보도록 하죠. 하지만 그때까지는 독단적인 행동을 삼가십시오.” 트리샤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대꾸했다. “좋을 대로 하세요. 하지만 공작님도 나랑 같은 생각일 거란 건 확실하니까.” 베르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짧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 뒤,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이 닫히며 ‘철컥’ 하는 소리가 별채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사라지자, 방 안에는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트리샤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이내 창가로 걸어가 창틀에 걸터앉았다. 차가운 나무의 감촉이 허벅지를 스쳤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밖을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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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뱀을 품는 위험

긴장이 풀리자 갑작스러운 허기가 몰려왔다. 트리샤는 별채로 배달될 식사를 얌전히 기다리는 대신, 저택 구조를 익힐 겸 주방으로 향하기로 했다. 허기를 달랠 작은 간식 하나쯤은 구할 수 있을 터였다. 주방 뒷문 근처에 다다랐을 때, 트리샤의 발걸음이 멈췄다. 반쯤 열린 문 틈새로 하녀들의 은밀한 속삭임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풋…2세라니, 넌 공작님이랑 부인 사이가 어떤지 알고 하는 소리야? 식사때마다 싸우는 건 기본이고, 어쩌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찬바람이 쌩쌩 부는걸.” “어머, 정말? 그 정도인 줄은 몰랐네.” “말도 마. 결혼하신 후로 같은 방에서 주무신 날도 손에 꼽을 정도야.” “쉿, 목소리 낮춰.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다른 하녀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어쨌든 부인께서 불쌍하긴 해. 겉으론 웃고 계셔도 속은 얼마나 타들어가시겠어? 잠자리까지 따로 하는 부부가 세상에 어디 흔하냐고.” 하녀들은 킥킥거리며 고약한 뒷담화를 이어갔다. 트리샤는 벽에 몸을 기댄 채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경청했다. ‘각방이라니.’ 트리샤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아르덴 폰 알브릭, 그 차가운 남자가 제 아내에게조차 마음을 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아주 흥미로운 정보였다. 잠시 후, 그녀는 가볍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는 조금 전까지 은밀한 대화를 엿듣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태연한 얼굴로 반쯤 열린 주방 문을 활짝 밀며 들어갔다. “어머, 실례할게요.”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소스라치게 놀란 하녀들이 대화를 멈추고 굳어버렸다. 트리샤는 그들의 당혹스러운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특유의 수줍은 미소를 띠며 주방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서고에서 일을 하다 보니 입이 좀 심심해서요. 혹시 간단하게 먹을 만한 간식거리가 있을까요? 집사님께 여쭤보려다 바쁘신 것 같아 직접 와버렸네요.” 트리샤는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하녀들을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천진하게 웃어 보였다. 하녀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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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특별 지시

그 단호한 선언 앞에서, 베르너는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입술을 달싹였으나 어떤 단어도 허공으로 튀어나오지 못했다. 공작이 이미 마음의 중심을 굳혔다는 것을, 그리고 한 번 내려진 결정은 결코 번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중앙 거실 한켠에서 베르너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망막 뒤편에 잔상처럼 남아 있는 어젯밤 아르덴의 눈빛—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차갑고 단단했던 그 눈빛을 떠올리며, 그는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트리샤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무거운 돌로 눌러 담듯 애써 가라앉히고 있었다. 그때였다. “...르너? 베르너!” ​회상의 늪에 빠져 있던 베르너를 건져 올린 것은 바람처럼 맑고 온화한 음성이었다. 베르너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언제 다가왔는지 라리엘이 특유의 다정한 온기를 품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는 이 딱딱하고 건조한 저택에서 유일하게 부드러운 숨을 쉬는 휴식처 같았다.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나요?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베르너는 찰나의 순간에 서늘했던 표정을 지우고 평소의 정중한 미소를 되찾았다. ​“아닙니다, 부인.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결례를 범했습니다.” ​“다행이네요. 아까 이야기하셨던 북부 보급 비리 조사 때문이겠죠? 베르너도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쉬어가며 일하세요. 몸이라도 상하시면 공작님이 얼마나 상심하시겠어요.” ​라리엘의 진심 어린 걱정에 베르너는 뒷덜미가 약간 가려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순수한 선의 앞에서 괜히 거짓말을 한 것 같은 기분에 마음 한구석에 묘한 죄책감이 일었다. 그는 이 어색하고 간지러운 공기를 서둘러 털어내려 화제를 돌리며, 옆구리에 끼고 있던 가죽 서류철에서 빳빳한 서류 한 뭉치를 꺼냈다. ​“그렇지 않아도 부인께 보여드릴 것이 있었습니다. 여기 이 목록을 좀 봐주시겠습니까?” ​라리엘은 두 손으로 서류를 받아들었다. 종이 위에는 정갈한 필체로 적힌 목록이 빼곡했다. 방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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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사소한 질투

​의회에서 돌아온 아르덴은 현관을 지나며 무겁고 장식이 과한 예복 겉옷을 거의 뜯어내듯 벗어 던졌다. 가슴을 옥죄던 견장과 금색 장식 단추들이 사라지자, 짓눌려 있던 어깨가 그제야 겨우 내려앉으며 짧은 숨이 터져 나왔다. 하루 종일 이어진 귀족들의 음흉한 논쟁과 겉치레뿐인 대화, 그리고 달콤한 말 속에 숨은 비수를 읽어내야 하는 자리들은 언제나 그를 극도로 피로하게 만들었다.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그는 오직 서늘하고 고요한 자신의 집무실만을 떠올렸다. 그러나 곧장 집무실로 향하던 아르덴의 발걸음은 중앙 거실 쪽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소리에 완전히 묶여버렸다. 베르너와 라리엘의 목소리였다. 문을 통과해 번지는 화기애애한 공기 속에는, 평소 그 앞에서는 쉽게 들려주지 않던 라리엘의 맑은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아르덴은 미간을 아주 약간 찌푸렸다. 이유를 정확히 짚지는 못했지만,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는 차마 발을 떼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내심 그 웃음소리를 더 듣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그 웃음의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심술이 났다. 자신이 모르는 두 사람만의 세계가 존재하는 듯한 소외감에, 아르덴은 옷매무새를 신경질적으로 가다듬고는 일부러 구두 굽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거실로 들이닥쳤다. ​“흠, 흠!” 아르덴은 목을 긁는 듯한 커다란 헛기침을 뱉어내며 거실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잔뜩 굳은 그의 목소리가 방 안의 온도를 순식간에 떨어뜨렸다. ​“무슨 대화가 그리 즐거운 거지?” ​아르덴이 나타나자 라리엘의 얼굴에서 조금 전의 부드러운 미소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방금 전까지 눈이 부시게 빛나던 표정은 간데없고, 그녀는 금세 차갑고 무심한 가면을 쓴 채 차분하게 응수했다. 방어적인 그 태도가 아르덴의 속을 다시 한번 긁었다. ​“별일 아니야. 플로렌스 영지에 보낼 겨울 물품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 ​아르덴의 시선이 즉각 베르너를 향했다. 마치 책임을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베르너가 당혹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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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계약

아르덴은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서늘한 푸른 눈동자가 두 사람을 향했다. “무슨 일이지?” 베르너는 급히 허리를 숙이며,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이 상황에 대해 책망하듯 트리샤를 쏘아보았다. “제가 드린 말씀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무작정 각하를 직접 뵙겠다고 우겨서 말입니다. 루이즈 양, 예의를 지키십시오.” 베르너의 매서운 질책에도 트리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본 양 고개를 살짝 까딱이더니, 아르덴의 거대한 책상 바로 앞까지 거침없이 다가갔다. 그녀는 여유롭게 팔짱을 끼며 베르너를 흘깃 보고는, 이내 아르덴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여쭈어 보세요. 저는 그 대화를 직접 듣고 싶은 것 뿐이랍니다.” 눈앞의 남자가 제국에서 어떤 위상을 가진 공작인지 잘 알면서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점의 위축됨도 없었다. 그 뻔뻔하고 당돌한 모습에 베르너는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트리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아르덴을 향해 호소하듯 말했다. “루이즈양에게 조사 보고는 반드시 저를 거쳐서 해야 한다고 일렀습니다만, 루이즈양은 자신이 공작님께 직접 보고하겠다고 우기는 상황입니다.” 트리샤는 베르너의 말을 들으며 코웃음을 한번 흘리고는 재빨리 그의 말을 받았다. “정보라는 건 입을 거치면 거칠수록 불순물이 섞이기 마련이거든요. 보고는 제가 직접 해야 정확하죠. 공작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아르덴은 턱을 괸 채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의 눈동자가 트리샤의 가벼운 표정 뒤에 숨겨진 진짜 속내를 샅샅이 파헤치려는 듯 집요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트리샤는 그 서늘한 시선을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신경전 끝에, 마침내 아르덴이 무심하게 입술을 뗐다. “틀린 말은 아니군. 베르너, 루이즈가 직접 보고하게 해.” “각하! 하지만 이 자는 아직 신용할 수 없는—” 베르너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그를 불렀지만, 트리샤는 승리감에 젖어 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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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녹스(Nox)

그 순간, 아르덴의 눈빛이 천천히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공작 부인 이야기만 꺼내도 저렇듯 냉기를 뿜어대는 것을 보니 공작이 부인을 어지간히도 싫어하나보다고 트리샤는 생각했다. 하긴, 대단한 권력을 가진 남자가 몰락한 귀족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니, 철저히 실용성을 중시하는 남자라면 그깟 예쁜 얼굴이나 가문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터였다. 정략결혼의 폐해를 눈앞에서 보는 기분이었다. “최대한 둘러대서 피해 봐. 그 정도 사소한 임기응변도 못 한다면 내 정보원으로서의 자격이 없는거겠지.”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트리샤는 역시나 상대하기 쉽지 않은 위험한 남자라고 생각하며, 슬며시 시선을 돌려 얄미운 미소를 지웠다. “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그럼 이제 내 차례군. 당신이 제이드와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언제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훅 치고 들어온 질문이었다. 방심하고 있던 트리샤는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켜며 눈을 깜빡였다. 허점을 찔린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베테랑답게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특유의 뻔뻔스럽고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글쎄요. 사실 근래 몇 년간은 연락다운 연락을 해본 적이 없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아르덴의 잘생긴 미간이 눈에 띄게 좁아졌다. 가죽 소파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고 있던 그가 천천히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테이블 위에 드리워진 그의 그림자가 트리샤를 집어삼킬 듯 길게 늘어났다. 투명하리만치 차가운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명백한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연락도 끊긴 사이면서 그가 잠적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다는 거지? 앞뒤가 맞지 않는군.” 트리샤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한쪽 턱을 괴며 여유롭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녀의 시선은 아르덴의 날카로운 눈빛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공작님, 원래 이런 바닥 사람들은 매일 아침 안부 인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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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만찬 초대 명단(1)

매년 초겨울의 서늘한 기운이 푸른 이끼가 낀 공작저의 높은 담벼락을 타고 스며들기 시작할 무렵이면, 거대하고 정막했던 저택은 평소와 달리 유독 활기를 띠며 분주해졌다. 차가운 바람을 타고 날아온 겨울의 전령은 저택 구성원 모두의 손길을 바쁘게 만들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다가올 ‘자선 만찬’은 아르덴 공작 가문의 위상을 증명하는 가장 거대하고 중요한 연례 행사 중 하나였다. 설상가상으로, 수백 개의 방을 지닌 대저택의 겨울나기를 위한 월동 준비까지 같은 시기에 겹쳐 버렸다. 벽난로에 쓰일 최고급 장작을 들여놓고, 창문마다 방풍 처리를 새로 하며, 메이드들의 겨울용 유니폼을 점검하는 등 산더미 같은 일감 속에서 늙은 집사 베르너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두 배는 빨라져 있었다. 그의 구두굽 소리가 대리석 복도에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 라리엘은 복도를 지나다 이리저리 하인들을 지휘하며 바쁘게 지시를 내리는 베르너를 발견했다. 그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훔쳐내며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노련하고 뼈대 있는 가문의 집사답게 겉으로는 품위와 엄중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살짝 처진 눈가와 굳은 입술 주변에는 숨길 수 없는 깊은 피로가 짙게 서려 있었다. 라리엘은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품에 안고 망설였다. 원래의 계획은 만찬 초청 명단을 들고 저택의 살림을 가장 잘 아는 베르너와 상세히 상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빠 보이는 노 집사를 지금 이 사소한 일로 불러 세우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다는 미안함이 앞섰다. 그에게 짐을 더 얹어주고 싶지 않았다. ​잠시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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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만찬 초대 명단(2)

어려운 이들을 도울 생각에 밤잠을 설치며 만찬을 준비하고 뿌듯해했던 스스로의 순진함이 한순간에 일그러지는 느낌이었다.그녀는 시선을 종이 위로 뚝 떨어뜨리며, 펜 끝으로 흰 여백을 지그시 눌렀다. 검은 잉크가 번져나가는 모양이 꼭 제 마음 같았다.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그녀의 반응에 아르덴이 마지못해 덧붙였다.“그들의 동기가 어찌 되었든, 추위에 떠는 이들에게 돌아갈 기부금의 총액이 많아지는 게 우리에겐 가장 중요한 결과야. 그러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지독하게 합리적인 위로였다.내키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속내까지 자신이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라리엘은 여전히 종이 위에 시선을 둔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신경 안써. 다음은 누구야?”그러나 아르덴은 다음 명단을 부르는 대신, 대답도 잊은 채 라리엘의 풀죽은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아래로 내려뜬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과 목소리에 남아있는 미묘한 씁쓸함의 여운이 자꾸만 그의 마음에 걸렸다.잠시 후, 기대했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의아함을 느낀 라리엘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그녀와 눈이 마주치기 직전, 아르덴은 찰나의 순간에 빠르게 명단으로 시선을 옮기며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귀 끝이 살짝 붉어진 것도 같았다.“킬리언 대공 부부도 추가해. 작년에는 이맘때 여행을 떠나 있어서 명단에서 누락되었을 거야.”그 이름이 아르덴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자마자 라리엘이 쥐고 있던 깃펜이 딱딱하게 멈춰 섰다.얼마 전 대공저에서의 식사 자리에서 아르덴을 향해 노골적으로 무례한 언사를 내뱉던 대공 부인의 오만한 얼굴이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되살아났다.라리엘의 온화했던 표정이 일순간 차갑게 식어 내렸다. 그녀의 표정을 읽은 건지 아르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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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무너진 다짐

​분명 날이 서 있는 말이었지만 상처를 닦아내는 그의 손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심스러웠다. 라리엘은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어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월동 준비에 만찬 준비까지, 이것저것 챙길 게 얼마나 많은데. 명단 확인하고 창고 들락거리다 보면 이까짓 상처쯤은 났는지 안 났는지 모를 수도 있지.”아르덴은 반박하는 대답 대신, 코끝으로 짧고 무거운 숨을 푹 내쉬었다.그는 라리엘의 가느다란 손목에서 시선을 단 한 순간도 떼지 않은 채, 갈색 연고 병의 뚜껑을 돌려 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베르너나 마르타에게 맡기면 되잖아. 꼭 네가 나서서 사소한 것들까지 챙겨야 돼?”​“베르너는 지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 보이거든..”라리엘은 괜히 변명하듯 덧붙이다가, 상처 위에 연고가 닿는 순간 얼굴을 찡그렸다.“아얏… 아프니까 살살 좀 해.”그제야 아르덴이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았다. 통증 때문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붉어진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는 손을 멈췄다가, 이전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연고를 덜어 상처 위에 펴 발랐다.“그렇게 아픈데 지금까지 어떻게 그대로 놔뒀대?”그의 투덜거리는 말에 라리엘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솔직한 감정이 새어 나오려 했다.이윽고 시선을 피한 채 손가락을 살짝 말아 쥐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다들 저렇게 분주하게 일하는데, 나만 공작 부인이라는 자리에 앉아서 여유롭게 놀고먹는 건 싫어. 나도 이 가문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싶단 말이야.”말을 마친 뒤에도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말이 어떤 의미로 들릴지 스스로도 알고 있는 듯했다.아르덴은 그런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다가,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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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밤의 행적

바텐더가 음식을 내오기를 기다리며 그녀는 잠깐 지하실을 둘러보았다.지하실은 넓었지만, 천장이 낮아 압도적인 폐쇄감을 주었다. 몇 안 되는 가스등이 벽면에서 치익 소리를 내며 위태롭게 불꽃을 틔우고 있었고, 그 흐릿한 빛 아래로 독한 담배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떠다녔다.홀 중앙에 놓인 낡은 원형 테이블 몇 개에는 험상궂은 사내들이 둘러앉아 있었다."체크.""받고, 두 장 더."포커카드가 탁자 위를 긁는 소리와 칩이 부딪히는 쇳소리가 공기 중에 파편처럼 흩어졌다. 사내들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입가에 문 담배에서는 끊임없이 회색 재가 떨어졌다.음식이 나오자 트리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이드에 대해서 들어온 소식은?“바텐더는 다시 수건을 들어 잔을 닦기 시작했다.그는 귀찮다는 듯 무심하게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턱 끝으로 허공을 슬쩍 가리켰다."여전해. 그 이름은 죽은 사람 이름보다 더 조용하군. 들어온 거 없어."트리샤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아르덴의 그 방대한 정보망으로도, 이 밑바닥의 지저분한 소문으로도 제이드는 완벽하게 증발해 있었다.바텐더는 잔을 내려놓고 트리샤를 똑바로 응시했다."근데 말이야, 갑자기 왜 그렇게 자네 아버지를 찾아대는거야? 작년까지만해도 그가 어떻게 사는지 관심도 없더니. 그자가 뭐, 돈이라도 들고 날른건가?"트리샤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조명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미소는 매혹적이었지만 어딘가 서늘했다."말했잖아. 그에게 딱 알맞은 임무가 있다고. 그가 같이 처리해주면 참 좋을텐데,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알 길이 없으니… 이 임무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녀석에게 넘겨버려야 겠네."그녀는 말을 맺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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