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플로렌스의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Bab 11 - Bab 20

82 Bab

11화. 얼음 가면(2)

라리엘은 짧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소임이라니? 오늘 내 소임은 너의 살아있는 장식품이 되는 것 아니었어? 충분히 완수했다고 생각하는데.” 날 선 대답에 아르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그는 괜히 먼 정원을 바라보며 짐짓 무심한 투로 덧붙였다. “…안색이 좋지 않군. 연회장의 향기가 너무 독했나?” 그것은 아르덴 나름의 절박한 안부였다. 괜찮으냐고, 아까 그들의 말에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진심이 서툰 질문 속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가시 돋친 말들에 온마음이 할퀴어진 라리엘에게 그의 질문은 또 다른 빈정거림으로 들릴 뿐이었다. “향기가 독했던 게 아니라, 그 안에 섞인 사람들의 악취가 견디기 힘들었을 뿐이야. 물론 넌 그 악취를 즐기는 것 같았지만.” 라리엘은 난간을 짚은 손에 힘을 주며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르덴은 그녀의 서늘한 눈빛을 마주하자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 오는 것을 느꼈다. “말조심해. 이 결혼이 네게 안락한 도피처가 될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진심을 보였다가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품에 안고 사과하고 싶어질 것 같았기에, 그는 더욱 잔인한 말을 골라 뱉었다. 하지만 라리엘은 이제 그의 냉대보다 더 시급한 확인이 필요했다. “아르덴. 하나만 물을게.” 그녀는 품 안에 숨긴 아버지의 편지, 그 서늘한 문구들을 떠올리며 낮게 읊조렸다. “‘금기된 역사’라는 게 대체 뭐야? 아버지가 너에게 보냈다는 그 사본들에 뭐가 적혀 있었던 거야?” 순간, 테라스의 공기가 일순간 멈춘 듯 정적에 휩싸였다. 아르덴의 눈동자가 아주 짧은 찰나 매섭게 빛나는 듯 했으나, 그는 놀랍도록 빠르게 평정을 유지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아주 천천히 돌려 라리엘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서려 있던 미세한 온기조차 지워진, 완벽한 무표정이었다. “어디서 그런 근거 없는 단어를 주워들었는지 모르겠군.”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Baca selengkapnya

12화. 어머니의 편지

연회장의 불빛이 하나둘 꺼진 뒤, 라리엘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화려하지만 갑옷처럼 무거웠던 자수정 드레스를 벗어던졌다. 꽉 조여졌던 코르셋이 풀리자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은 여전했다. 시녀들은 늘 그렇듯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편히 쉬십시오, 부인.”이라는 형식적인 인사만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침실은 완전히 라리엘 혼자만의 공간이 되었다. 촛불 하나만이 위태롭게 타오르는 방 안에서 라리엘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한동안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지만, 시선은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장면만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테라스에서 마주했던 아르덴의 얼굴, 그 차갑게 빛나던 푸른 눈동자. ​‘금기된 역사.’ ​그 단어를 입에 올렸을 때, 아르덴의 눈동자에서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갔던 그 기묘한 정적을 라리엘은 똑똑히 기억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고, 오히려 비릿한 모욕으로 화제를 돌려 그녀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 침착함이 지나치게 완벽했다는 것이 라리엘에게는 역설적인 확신을 주었다. ​‘그는 알고 있어.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목숨을 잃었는지, 그리고 그 문헌이 어떤 의미인지.’ 그러나 확신과는 별개로, 현실은 막막했다. 공작저는 거대했고, 구조는 복잡했으며, 모든 길은 아르덴에게로 이어져 있었다. 그가 사용하는 서재와 집무실은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어 있다. 게다가 하녀장 마르타를 비롯한 고용인들은 하나같이 그의 눈과 귀처럼 움직였다. 라리엘은 이곳에서 ‘주인’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깊숙이 고립된 존재였다. 화려한 보석과 비단에 둘러싸인 채,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으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그때, 라리엘은 문득 테라스에서 아르덴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순간이 떠올랐다. 차갑고 비정한 경고를 내뱉으면서도, 그녀의 뺨을 스치듯 머리칼을 정리해주던 그의 손가락은 이상하리
Baca selengkapnya

13화. 기사와 공주(1)

숨이 조금 가라앉은 뒤에야 라리엘은 옷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닦아냈다. 눈물에 젖은 편지지를 구겨버리는 대신 조심스럽게 종이를 말렸다. 이 얼룩조차 자신의 일부라고 인정하듯. ​지금 여기서 주저앉으면 정말로 아르덴의 말대로 '입 다물고 인형처럼' 살게 될 뿐이었다. ​'울고 있을 시간조차 아까워. 내가 무너지면 우리 가족은 정말 갈 곳이 없어져.' ​라리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붉어진 눈가를 화장으로 차분히 가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거울 속에는 더 이상 처량하게 우는 소녀가 없었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차가운 진실의 문을 열 준비가 된 알브릭의 공작부인이었다. 그녀는 봉인된 편지를 시녀에게 전달하며 창밖의 차가운 정원을 응시했다. ​연회가 끝난 뒤의 공작저는 기묘한 평온 속으로 돌아갔다. 표면만 놓고 보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듯 보였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가 제공되고, 하인들은 늘 그렇듯 조용히 복도를 오갔으며, 정원에서는 잘 가꿔진 화단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햇빛을 받고 있었다. 아르덴은 마치 그날 테라스에서의 대화가 없었던 일인 양 행동했다. 그는 여전히 차가웠고, 식사 자리에서도 공적인 용건 외에는 단 한 마디의 대화도 섞지 않았다. 라리엘 역시 그에게 다가가려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자신을 방치해 주는 것이, 저택 곳곳을 탐색해야 하는 그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 알브릭 공작저의 안주인이라는 자리는 단순히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는 역할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 하녀장 마르타가 가져오는 방대한 가계부와 고용인 명단, 저택 보수 목록, 그리고 끊이지 않는 사교계의 초대장들… 라리엘은 서류 위에 고개를 파묻은 채,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른 채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이 모든 게 나를 묶어두려는 그의 계략은 아닐까.’ ​라리엘은 잉크가 묻은 손가락을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간의 고군분투 끝
Baca selengkapnya

14화. 기사와 공주(2)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라리엘의 무릎 위에서 책을 거두어 제자리에 꽂았다. 그리고는 부서질 세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안아 올렸다. ​잠결에 으응, 하며 그의 품을 파고드는 라리엘의 온기에 아르덴은 숨을 멈췄다. 그녀에게선 여전히 예전 그 온실의 꽃향기가 났다. 그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며, 차가운 서고를 지나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그녀의 침실에 도착해 침대에 눕히는 순간까지도 아르덴은 팔에 힘을 풀지 못했다. 잠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는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준 뒤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왔다. ***** ​하늘은 잉크를 쏟은 듯 검었고, 대지는 차가운 눈보라로 가득했다. 꿈을 꾸는 사람이 종종 그러하듯, 라리엘은 문득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지금 드레스 하나만을 걸친 채 끝이 보이지 않는 설원을 달리고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잠들기전 읽고 있던 동화책의 내용인 듯 했다. 등 뒤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들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발이 얼어붙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 순간, 눈앞에 거대한 얼음 성벽이 솟아올랐다. ​성벽 위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눈부신 은색 갑옷을 입고, 차가운 금발을 휘날리는 기사. 그의 얼굴은 아르덴이었다. ​기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성벽 아래로 내려와 라리엘을 안아 올렸다. 그의 품은 얼음처럼 차가웠으나, 동시에 등 뒤의 어둠으로부터 자신을 완벽하게 단절시켜 주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기사는 떨고 있는 라리엘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널 이곳에 가둬야해. 그래야 네가 살 수 있어.” ​기사의 손이 닿는 곳마다 라리엘의 몸은 서서히 투명한 얼음 속에 갇히기 시작했다. 가두는 것인지 구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속박 속에서, 라리엘은 기사의 눈에 맺힌 지독한 슬픔을 보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 ​라리엘은 거친 숨을
Baca selengkapnya

15화. 후작부인의 만찬(1)

마차를 타고 후작저로 가는 동안 아르덴은 신문을 읽는 척하고 있었으나, 시선은 내내 라리엘의 잘게 떨리는 손가락에 머물러 있었다.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옆모습은 당당해 보였지만, 가늘게 떨리는 긴 속눈썹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아르덴은 신문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당장이라도 저 가녀린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다정함은 독이 될 뿐이었기에, 아르덴은 수차례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갈등하던 그의 시선이 마침내 라리엘의 눈가에 맺힌 작은 불안을 포착한 순간, 이성은 결국 본능에 자리를 내주었다. 아르덴이 무심하게 손을 뻗어 라리엘의 차가운 손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아르덴을 바라보았다. “...뭐야?” 놀람과 경계가 뒤섞인 목소리였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그 온기가 닿는 순간 라리엘의 몸이 굳었지만, 아르덴은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창밖을 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착각하지 마. 네 손이 하도 사시나무 떨 듯 떨리는 통에 마차가 흔들리는 것 같아 잡은 것뿐이니까.” “……뭐라고?” “그렇게 겁에 질린 표정으로 들어갔다간, 헤르만 후작 부인이 내 안목을 의심할 거야. 알브릭의 안주인이 고작 그 정도 담력밖에 안 된다면, 나도 곤란해지지 않겠어?” 비정한 독설이었다. 걱정이 아니라 마치 품평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에 라리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거 놔. 내 담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네 옆이 지나치게 숨 막혀서 그런 거니까.” 이를 악물며 말한 라리엘이 손을 확 빼내려 했지만, 아르덴은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깍지를 끼듯 더욱 단단히 맞잡았다. “놓으라고 해서 놓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닐 텐데. 밖에서 사람들은 우리의 이 맞잡은 손을 보며 알브릭의 결속을 떠올려야 해. 그러니 얌전히 있어.”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무심했지만, 라리엘을 꽉 쥔 그의 손길만은 이상하리만큼 신중하고 따뜻했다. 라리엘은 이를 악물고 그를 쏘
Baca selengkapnya

16화. 후작부인의 만찬(1)

​라리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의 생전 모습과 겹쳐 보이는 인자한 노신사였다. 그녀의 얼굴에 놀람과 반가움이 동시에 떠올랐다. ​“에드먼드 남작님!” ​​아버지의 오랜 벗이자, 가문이 몰락하기 전 자주 저택을 방문했던 지인이었다. 차가운 공작저에서 홀로 싸워오던 라리엘에게 그의 등장은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와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남작님을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소식이 끊겨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나야말로 백작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르네.” 그의 시선에는 진심어린 애도가 담겨있었다. “자네가 이런… 갑작스러운 혼처를 맞이했다는 이야기에 걱정이 많았지. 백작께서 살아계셨다면 결코ㅡ”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기가 미묘하게 갈라졌다. ​“남작.”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대화를 가로질렀다. 어느새 다가온 아르덴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라리엘의 곁에 섰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어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동작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분명했다. ​그것은 ‘내 영역 안의 것을 건드리지 마라’는 경고였다. ​“공작님, 저는 그저 오랜 인연으로 안부를 묻던 중이었습니다.” 에드먼드 남작의 목소리는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미세한 떨림을 숨기지는 못했다. ​아르덴은 눈매를 가늘게 뜨며 남작을 내려다보았다. ​“남작의 염려에 감사하군. 하지만 내 아내의 안위는 알브릭의 기사들과 내가 온전히 책임지고 있으니, 남작께서 밤잠을 설치며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네.” 그의 말투는 정중했으나 칼날처럼 예리했다. “오히려 지금은 과음하신 듯하니, 시종의 부축을 받아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게 남작의 품위 유지에 더 도움이 되지 않겠나?” ​말은 부드러웠으나 사실상 ‘취했으니 입 닥치고 사라져라’는 노골적인 축출이었다. 아르덴의 서늘한 기세에 눌
Baca selengkapnya

17화. 고모님의 방문(1)

마차가 멈추자마자 아르덴은 시종의 부축도 받지 않은 채 먼저 내렸다. 그는 뒤따라 내리는 라리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성큼성큼 본관으로 향했다. “부인, 방까지 모시겠습니다.” 하녀장 마르타가 다가왔지만, 라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라리엘은 차가운 복도를 걸어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다. 화려한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홀로 침대에 누웠다. 피로가 밀려왔지만 마차 안에서 느꼈던 그의 열기와 독설이 뒤섞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증오와 슬픔, 그리고 알 수 없는 상실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후작저에서 돌아온 아르덴은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어두운 방 안, 촛불 하나 켜지지 않은 공간에서 그는 거칠게 크라바트를 풀어 헤쳤다. 숨이 막혔다. 그녀를 몰아세울 때마다 제 가슴이 먼저 무너지는 감각을 참아내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었다. 똑똑. 정적을 깨는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집사 베르너였다. “들어와.” 베르너는 조용히 들어와 아르덴에게 두툼한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공작님, 지시하신 대로 플로렌스 백작님의 마지막 행적을 조사했습니다.” 아르덴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서류 봉투를 낚아채듯 받은 그는 촛불을 켜고 내용을 훑기 시작했다. 종이를 넘기는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조사 결과는?” “공작님의 짐작이 맞았습니다. 백작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그 문헌'의 원본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현장에 그 원본이 없다는 건…” 베르너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백작님을 살해한 목적이 ‘그 문헌’이라 짐작됩니다.” 아르덴은 눈을 감았다. 라리엘이 그토록 증오하는 자신,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알고 싶어 하는 진실. 그 간극 사이에 놓인 어둠은 생각보다 훨씬 깊고 위험했다. “……계속 조사해. 그리고 라리엘에게 접근하는 자들이 있는지 한시도 눈을 떼지 마.” “하지만 각하, 부인께서 계속해서 진실에 다가가려 하신다면—”
Baca selengkapnya

18화. 고모님의 방문(2)

만찬이 끝나고 헤르트루드가 방으로 물러간 뒤, 복도에는 다시 아르덴과 라리엘 두 사람만 남았다. “……손을 놓지 않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아르덴이 낮게 읊조렸다. 목소리에는 여전히 가시가 돋쳐 있었지만, 어쩐지 평소만큼 날카롭지는 않았다. 라리엘은 그를 돌아보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연기를 하라면서. 고모님을 속이려면 그 정도의 '오만하고 친절한 공작' 이미지는 필요했을 뿐이야.” “라리엘.” 아르덴이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다 멈칫했다. 허공에서 멈춘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라리엘은 그를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내일 고모님과의 산책은 걱정 마. 네가 원하는 '완벽한 아내'의 모습을 보여드릴 테니까.” 닫히는 문 뒤로 아르덴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밤사이 비라도 스쳐 간 듯, 가을 아침의 공기는 맑고 선선했다. 정원의 나무들은 아직 잎을 완전히 떨구지는 않았지만, 초록 사이사이로 황금빛과 붉은빛이 스며들어 계절이 깊어졌음을 조용히 알리고 있었다. 약속대로 헤르트루드 고모는 이른 아침부터 라리엘을 불러냈다. 아르덴은 정무가 바쁘다는 핑계로 서재에 틀어박혔고, 덕분에 두 여인만의 산책이 시작되었다. “자, 라리엘. 이 늙은이 보폭이 좀 빠르지? 무릎이 성할 때 부지런히 걸어둬야 하거든.” 헤르트루드는 화려한 털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정원길을 누볐다. 라리엘은 숨을 고르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 공작저의 후원은 가을 햇살 아래서 한층 또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하학적으로 다듬어진 회양목 울타리 사이로, 고결한 자태를 뽐내는 백색 대리석 조각상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다. 중앙 분수대에서는 차가운 물줄기가 수정처럼 솟구쳐 올랐고,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장미들은 가을 햇살에 데워져 은은한 향기를 내뿜었다. 한참을 걷던 헤르트루드가 화단 앞에 멈춰 서서 가지치기가 잘 된 장미 덤불을 가리켰다. “저 장미 말이다. 아르
Baca selengkapnya

19화. 가시 덤불 속의 소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문이 열리고, 아르덴이 들어왔다. 평소 집무실 옆 작은 방에서 머물던 그가 이 방의 문턱을 넘는 것은 결혼 첫날밤 이후 처음이었다. 그는 걸치고 있던 제복 상의를 벗어 의자에 던지듯 걸치며 미간을 찌뿌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며칠간의 냉랭함과는 다른, 지독하게 어색하고 민망한 기류가 흘렀다. “…고모님이 복도 끝 방에 머무시니 어쩔 수 없군.” 아르덴은 침대 근처로 다가오다 말고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침대 밑 대리석 바닥을 향했다. 결혼 첫날밤, 침대 아래 바닥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라리엘의 모습이 떠오른 듯했다. 아르덴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오늘은 내가 바닥에서 자지. 네가 또 바닥에서 자다가 다음 날 병이라도 나면, 고모님께 내가 학대라도 한다고 광고하는 꼴이 될 테니까.” 그의 배려는 여전히 가시 돋친 말에 담겨 있었다. 라리엘은 그 비아냥 섞인 말투에 울컥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을 걱정해서라기보다는 그저 '고모님의 눈'과 '알브릭의 체면' 때문이라는 그 태도는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됐어. 네가 바닥에서 주무시는 걸 고모님이 아시기라도 하면 그게 더 큰일이지. 쓸데없는 고집 피우지 말고 그냥 침대로 올라와.” “라리엘.” “괜찮으니까 올라오라고. 네 말대로 병이라도 나면 곤란하니까.” 라리엘이 지지 않고 쏘아붙이며 침대 한쪽 끝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아르덴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결국 마지못한 듯 침대 반대편으로 다가와 몸을 뉘었다. 탁, 소리와 함께 촛불이 꺼졌다. 정적이 찾아오자, 감각은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졌다. 서로의 숨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라리엘은 괜히 의식하지 않는 척, 지극히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가장하며 아르덴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그저 아무렇지 않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몸을 돌린 순간, 라리엘의 시야에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아르덴의 푸른 눈동자가 곧바로
Baca selengkapnya

20화. 악마의 거짓말

몇 시간 뒤, 방안 가득 찬란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르덴은 눈을 떴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뒤섞인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헤매는 꿈. 평소라면 식은땀에 젖어 불쾌하게 깨어났을 아침이었지만, 오늘 밤은 이상하게도 마지막 기억이 따뜻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던, 그 다정한 감각. ​그는 숨을 멈춘 채 옆을 돌아보았다. 라리엘이 자신의 손을 양손으로 소중하게 감싸 쥔 채, 그의 팔 근처에 머리를 기대고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다. 햇살을 받은 그녀의 속눈썹이 눈가에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웠고,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그녀의 어깨가 평화로워 보였다. ​아르덴은 지난 기억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어젯밤, 라리엘이 곁에 눕는 순간부터 그의 감각은 비정상적으로 곤두서 있었다. 얇은 이불 너머로 느껴지는 그녀의 작은 몸놀림, 공기 중에 흩날리는 은은한 향기. 그것들은 아르덴의 이성을 끊임없이 시험했다.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기고 싶은 본능적인 갈망을 억누르기 위해 잠들 때 까지도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녀는 너를 증오한다', '너는 그녀의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죄인이다' 를 머릿속으로 수천 번 되새기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 그런 엄청난 자제력 끝에 겨우 잠이 들었을 때 악몽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자신을 건져 올린 것은, 다름 아닌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그녀의 손길이었다. 아르덴은 굳어버린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은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녀의 아버지를 언급하며 위신을 운운했고, 그녀를 도구라 부르며 고립시켰다. 그런데 그녀는 왜 이 끔찍한 악마의 손을 잡아준 것일까. 그의 가슴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죄책감이었고, 동시에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할 애틋함이었다. ‘너는 왜… 끝까지 나를 미워하지도 못하고.’ 그는 잡힌 손을 빼내려 했지만, 잠결에도 그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듯 힘을 주는
Baca selengkapnya
Sebelumnya
123456
...
9
Pindai kode untuk membaca di Aplikasi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