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렌스의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의 모든 챕터: 챕터 51 - 챕터 60

82 챕터

51화. 가식과 선의 사이

“오늘 조사한 바로는, 론체스터에서 플로렌스로 넘어 가는 산길 어딘가에 지도에도 없는 은신처가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아르덴은 잠시 침묵한 채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내 저택의 인력을 붙여줄 순 없어. 이 건은 당신의 단독 행동으로 처리해야 돼.”그녀는 오히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짧고 낮은 웃음을 터뜨리고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저도 바라던 바예요. 공작님 밑에 있는 딱딱한 기사들이랑 같이 움직이다간 3일도 안 돼서 정체가 들통날걸요? 대신…”“대신?”트리샤의 눈이 반짝였다.“공작님께서 준비해 주실 게 몇가지 있어요.”그녀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하나씩 눈앞에서 펼쳐 보이며, 아주 차분하고 노련하게 필요한 것들을 나열했다.“이동에 필요한 말 한필, 밀수에 필요한 현금, 그리고 밀수업자를 상대할 만한 적당한 신분. ”아르덴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밀수를 하겠다는 소리인가?”“설마요. 하는 척만 하겠다는 거에요. 그 정도는 해야 그들이 상대해 줄테니까.”집무실 안에 잠시 무겁고 팽팽한 침묵이 내려앉았다.아르덴은 잠시 고민에 잠긴 듯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가능성과 위험, 그리고 트리샤라는 인물에 대한 신뢰와 불신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잠시 후, 그가 마침내 결론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좋아, 마음대로 해봐. 필요한 현금과 신분은 내일 아침 베르너와 상의 하면 돼. 며칠 걸릴 수도 있겠군.”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트리샤가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며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역시 결단력이 있으시네요. 저도 준비할 게 좀 있으니 며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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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티타임

“부인께서 아직 깨어 계신 줄 알았더라면 진작 물러 나왔을 텐데… 제 불찰이에요. 부인께서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그리고는 금방이라도 라리엘의 얼굴이 수치심과 분노로 보기 좋게 일그러지기를 기대하며 눈을 살짝 들어 라리엘의 안색을 살폈다. 교묘한 덫을 놓았으니 걸려들 일만 남았다고 확신했다.하지만 뜻밖에도, 라리엘의 표정은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하기 그지없었다.트리샤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당혹감을 느꼈다. 라리엘이 오히려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루이즈 양의 불찰이라뇨. 그런 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답니다. 공작님의 업무를 그토록 성심성의껏 도와주고 있으니 오히려 내가 고마울 따름인걸요. 그래도 몸을 상해가며 일하진 마세요. 필요한 게 있거나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시고요.”그녀는 다시 한번 진심이 담긴 인자한 안주인의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자신의 침실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트리샤는 라리엘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멀어지던 카펫 위의 발소리가 마침내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된 뒤에야, 그녀가 천천히 허리를 펴고 숨을 내쉬며 라리엘이 사라진 복도를 쏘아보았다.기묘한 패배감이 스며들었다.그녀는 고개를 한 번 갸웃리고는 별채로 향하는 복도로 몸을 돌렸다.라리엘의 해맑은 미소가 잔상처럼 떠올랐다. 뒷골목에서 뼈저리게 배운 진리는 하나였다.대가 없는 호의나 순수한 친절이란, 이 썩어 빠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며, 쥐새끼만도 못한 사기꾼들의 얄팍한 거짓말이라는 것을.이내 트리샤의 얼굴에 비릿하고도 씁쓸한 냉소가 자리 잡았다.‘바보가 아니라면…… 제 감정을 완벽하게 숨길 줄 아는 아주 만만치 않은 여자겠군.’저택을 나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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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다루기 어려운 사람

“머리를 많이 쓸 때는 이렇게 달콤한 음식을 먹는 게 최고라고 하더라고요. 루이즈 양도 한입 먹어봐요. 먹으면 확실히 기운이 날 거예요.”라리엘은 아주 자연스러운 손길로 트리샤의 찻잔에 향긋한 홍차를 따라주며, 화려한 디저트 접시를 그녀 쪽으로 조심스럽게 밀어주었다.찻잔에서 상큼한 베르가모트 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트리샤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라리엘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이제 슬슬 본론이 나오겠지. 먼저 잔뜩 먹여놓고 뒤통수를 치려는 수작인가?’트리샤는 라리엘이 언제쯤 목소리 톤을 낮추며 “그런데 어젯밤 일 말인데……” 하고 운을 뗄지 기다렸다. 하지만 라리엘은 전혀 그럴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창밖으로 펼쳐진 공작저의 겨울 정원 풍경에 대해 아이처럼 재잘거리기 시작했다.“벌써 서리가 내려서 장미들이 다 시들어버렸죠? 어제 정원사에게 부탁해서 장미 덤불마다 짚을 덧대줬는데, 루이즈 양 별채 창가 쪽은 괜찮았는지 모르겠네요. 이제 곧 눈이 올 텐데, 정원의 저 상수리나무들이 겨울을 잘 버텨줘야 할 텐데 말이에요.”앙상해진 나뭇가지나 곧 닥칠 추위를 걱정하는, 트리샤에게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평화롭고 무의미한 수다였다.트리샤는 표정 관리를 하며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맞장구를 쳤지만, 머릿속은 복잡해졌다.이 여자는 정말로 어젯밤 자신이 던진 그 노골적인 자극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며 상대를 지치게 만드는, 자신보다 훨씬 더 고단수의 심리전을 펼치고 있는 걸까?하지만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라리엘의 투명한 눈동자를 빤히 보고 있자니, 트리샤의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변해갔다.‘이 여자…진짜로 아무런 저의가 없는 거야?’하긴, 귀족가에서 자란 온실 속 화초들이 눈치가 없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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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자선 만찬

아르덴은 대답 대신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뒷짐을 진 그의 손가락이 초조하게 얽혔다. 뒷모습에서조차 숨 막히는 압박감이 뿜어져 나왔다.창밖을 응시하는 그의 눈에 겨울을 앞둔 정원이 들어왔다.화려하던 꽃들은 진즉 시들고, 잎을 거칠게 떨군 앙상한 나무들 사이로 하인들이 만찬 준비를 위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롭고 완벽한 공작가의 일상이었다.하지만 아르덴은 알고 있었다. 그 평온한 수면 아래에는 언제 터질지 모를 균열이 숨어 있다는 것을.속에서 뜨거운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지금 당장 응접실로 들이닥쳐 트리샤를 끌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그 가식적인 웃음, 나긋나긋하지만 뼈가 있는 말투, 그리고 무엇보다 라리엘의 순진함을 저울질하는 그 계산된 눈빛을 떠올리기만 해도 속이 뒤틀렸다.하지만 그는 이내 주먹을 꽉 쥐며 그 충동을 억눌렀다. 지금 과민하게 반응했다간 라리엘이 의구심을 품게 될 것이 뻔했다.​“일단은 지켜보지. 지금 내가 과하게 움직이면 라리엘이 의심할 게 뻔해.”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지독하리만치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무거운 침묵을 지킨 뒤, 뒤를 돌아보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베르너, 하인들에게 루이즈가 저택 안에서 뭘 하고 다니는지 잘 감시하라고 일러둬. 그리고 그녀가 라리엘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지 않는지 자네가 직접 지켜보며 감시해.”​“명심하겠습니다, 각하.”​베르너는 정중히 고개를 숙인 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홀로 남겨진 아르덴은 응접실이 있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그의 시선은 마치 그 두꺼운 벽을 뚫고 갈 것처럼 강렬했다. 집무실 안에는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거칠게 타닥거리는 벽난로의 장작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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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깨진 잔 너머

“정말요? 부인께서도 그런 생각을 하셨다니 믿기지 않아요.”클로디아가 뜻밖이라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네. 모두가 제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며 속으로 점수를 매기고 평가하는 것만 같았거든요. 내가 과연 이 자리에 잘하고 있는지, 이 화려한 옷과 직위가 내게 어울리는지 말이에요.”라리엘은 지난날의 긴장을 추억하듯 가볍게 웃으며,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달칵이는 작은 소리와 함께 그녀는 담백한 어조로 대화를 전환했다.“오늘은 가벼운 만찬 자리니까, 너무 딱딱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나저나 식사가 입맛에는 좀 맞으시나요? 좋아하는 음식은 드셨는지 모르겠어요.”“아, 사슴 요리가 정말 훌륭했어요. 고기가 입안에서 살살 녹을 정도로 부드러운 데다, 허브와 향신료의 배합이 독특해서 자꾸 손이 가더라고요.”조금 전의 수줍음은 어디로 갔냐는 듯 클로디아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라리엘은 흐뭇한 안주인의 미소를 지었다.“저희 저택 주방장이 이번 만찬을 위해 특히 공을 들이고 신경 쓴 메뉴예요. 영애의 마음에 드셨다니 고생한 보람이 있네요. 다행이에요.”영애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라리엘의 다정한 접대에 완전히 마음을 연 듯했다.그녀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잠시 타이밍을 보다가, 이윽고 쑥스러움에 뺨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청했다.“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조만간 저희 저택에 부인을 초대해도 될까요? 공작님은 너무 바쁘실테니… 부인만이라도 오셔서 함께 담소를 나누면 좋을텐데요…”“아…”라리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혼자 외출을 하겠다고 하면 아르덴은 분명 안 된다고 고개를 저을 게 뻔했다. 굳이 그와 갈등을 빚고 싶지는 않았다.“그보다는 제가 초대를 하면 어떨까요? 저택의 정원도 보여드리고 차도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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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우울의 파편

늦은 저녁, 수도의 밤공기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서늘했다. 론체스터로 떠나기 전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기 위해 종일 거리를 누볐던 트리샤는 굳은 어깨를 한 번 돌리며 별채로 돌아왔다.가죽 부츠 안쪽으로 축축하게 스며든 피로가 매 걸음마저 발목을 붙잡아 끄는 듯 묵직했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걸음걸이에 흐트러짐을 허용하지 않았다.트리샤는 등 뒤로 문을 걸어 잠근 후, 온종일 품 안에 소중히 안고 다녔던 묵직한 보따리를 책상 위에 툭 내려놓았다.둔탁하고 묵직한 소리가 정적을 깨웠다.하부 조직원들을 매수할 때 요긴하게 쓰일 금화, 그리고 소매 속에 숨기기 좋은 날렵한 은제 단검 몇 자루. 단검의 손잡이를 살짝 만지자 차가운 금속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이 정도면… 부족하진 않겠지.”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책상 위에 보따리를 풀었다.옷을 갈아입은 뒤, 뒷골목의 악명 높은 골동품상을 협박하고 달래며 간신히 손에 넣은 론체스터 인근 산맥의 상세 지형도를 책상 전면에 넓게 펼쳤다.종이는 오래되어 가장자리가 누렇게 바래고 닳아 있었고, 지형을 표시한 잉크는 군데군데 흐릿하게 지워져 있었다.‘루이즈'의 날카로운 시선이 지도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머릿속에서는 이동 경로와 시간표가 그려지고 있었다.‘내일 오전에 출발하면… 이 고개를 넘는 데 다섯 시간 정도, 이 협곡은 야간에 통과하게 되겠지.’그때, 창틈으로 가느다란 음악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트리샤는 고개를 들어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았다. 낮게 깔린 어둠을 뚫고 저 멀리 본채 쪽에서는 창문마다 화려하고 따스한 등불이 찬란하게 넘실거리며 일렁이고 있었다.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선율과 사람들의 웃음 섞인 웅성거림이 바람을 타고 건너왔다.‘맞다, 오늘이 그 만찬 날이었지.’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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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기분 전환(1)

라리엘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이 아주 잠깐 흔들렸고, 입술이 달싹였다.하지만 결국 그녀는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며,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아니. 아무 일도 없어. 그냥… 어제 연회가 조금 신경 쓰였는지 밤에 잠을 몇 번 설친 모양이야. 피로가 덜 풀려서 그래.”평소보다 낮은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스스로도 그 떨림을 느낀 듯 라리엘은 괜히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가라앉지 않던 감정이 잠시 눌리는 듯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결국 라리엘은 채 몇 숟가락도 뜨지 못한 채, 식사가 끝났음을 알리듯 냅킨으로 입술을 가볍게 훔쳤다.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식당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가냘픈 등 뒤로 육중한 문이 달칵이며 닫혔다.식당 문이 닫히고 홀로 남겨진 뒤에도 아르덴의 시선은 차마 거두어지지 못하고 한동안 그 문가에 무겁게 머물러 있었다.아침 햇살 한 조각 받지 못한 채,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불안하게 흔들리며 걸어가던 그녀의 쓸쓸한 뒷모습이 그의 머릿속에서 도무지 지워지지 않았다.그녀가 느끼는 슬픔의 정체를 알 것 같으면서도, 차마 먼저 손을 내밀어 달래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지독하게 부조리했다.그는 깊은 한숨처럼 아주 작게 숨을 내쉬며, 온기를 잃고 완벽하게 식어버린 넓은 식탁을 잔인하리만치 고요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가슴에 서리가 내린 듯 아려왔다.집무실로 돌아온 아르덴은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을 안은 채 책상 너머에 선 베르너를 마주했다.베르너는 트리샤가 오늘 아침 일찍 말을 타고 론체스터로 비밀리에 떠났다는 사실을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보고하고 있었다.사적인 감정을 배제한 정보원의 이동 경로가 베르너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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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기분 전환(2)

따뜻한 남부에 위치한 플로렌스령은 딸기가 많이 열리는 곳이었고, 그녀는 라리엘은 딸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그 붉은 과일을 좋아했다.그 시절 봄이 오면, 연례행사처럼 알브릭 공작의 가족들이 플로렌스의 온화한 기후를 즐기고 달콤한 딸기를 맛보러 남부를 방문하곤 했다.남부 특유의 따스한 봄볕이 테라스를 따스하게 가득 채울 때면, 플로렌스의 늙은 정원사들은 그날 새벽 가장 먼저 수확해 이슬이 맺힌 최상품 딸기만을 골라 번쩍이는 은쟁반에 산처럼 가득 담아오곤 했다.응접실에서 담소를 나누는 알브릭 공작과 아버지 옆에서 그녀는 제 몫을 순식간에 비워내고는, 옆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던 아르덴의 접시를 눈독 들였다.그는 자신의 딸기를 뻔뻔하게 집어 가는 라리엘의 손길을 단 한 번도 막은 적이 없었다.오히려 그녀가 더 편하게 가져갈 수 있도록 읽던 책을 내려놓고 슬그머니 접시를 그녀 쪽으로 밀어주기까지 했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그는 무뚝뚝했지만 늘 제 것을 내주었다.그 때의 일을, 이 남자는 아직도 기억하는걸까.“너, 이런 달콤한 거 안 좋아하잖아. 갑자기 웬 케이크야?”“말했잖아. 답답해서 나온 거라고. 꼭 내가 먹으려고 시켜야 하나?”아르덴은 괜히 퉁명스럽게 말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귀끝에 맴도는 열기를 감추려는 듯 그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사이, 점원이 다가와 은쟁반을 내려놓았다.동그랗고 새빨간 겨울 온실 딸기가 화려하게 듬뿍 올라간 조각 케이크와, 향긋하고 맑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다질링 홍차가 테이블 위를 채웠다.라리엘은 의아함을 잠시 내려놓고 조심스레 포크를 들어 케이크를 한 조각 크게 떴다. 입안에 넣는 순간, 겹겹이 쌓인 부드러운 시트와 기분 좋은 단맛의 크림이 혀끝에서 녹아내렸다.“…맛있다. 생각보다 훨씬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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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눈물의 이유

우느라 진을 다 뺀 탓인지, 라리엘은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결국 그녀는 밀려오는 피로감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꾸벅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리엘은 반대편 차창 쪽에 머리를 위태롭게 기댄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덜컹거리는 마차의 진동에 그녀의 머리가 창틀에 부딪힐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아르덴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잠시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부서지기 쉬운 무언가를 다루듯 그녀의 머리를 받쳐 자신의 어깨 위로 부드럽게 끌어당겼다.어깨에 라리엘의 머리가 닿자, 불안하게 흔들리던 그녀의 숨소리가 이내 규칙적이고 일정하게 안정을 찾았다.아르덴은 창밖의 정체된 불빛들을 바라보며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느슨하게 풀었다. 손수건을 흠뻑 적셨던 그녀의 눈물의 의미를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단순히 오페라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직감했다.낯선 수도 생활, 자신을 향한 증오, 그리고 가슴 깊이 묻어둔 고향에 대한 그리움까지.그 모든 것을 혼자 감내하느라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닳아 있었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평온하기를 바랐다.그는 제 어깨 위에서 무방비하게 잠든 라리엘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의 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가닥을 아주 천천히 넘겨주었다.번잡하던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마차는 점차 제 속도를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규칙적인 덜컹거림 속에 잠에서 깬 라리엘은 머리와 뺨에 닿아 있는 묵직하고도 따스한 온기를 느꼈다.“……아.”자신이 창틀이 아닌 아르덴의 어깨를 베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라리엘은 놀라서 몸을 홱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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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회상

“보, 보지 마! 내 얼굴 지금 엉망진창이고 웃긴 거 나도 잘 아니까, 볼일 끝났으면 빨리 네 방으로 나가!”라리엘의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잘 익은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물들며 큰 소리로 핀잔을 주었다.그녀의 가슴이 거세게 고동쳤다. 하지만 아르덴은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은 채, 퉁퉁 부어오른 그녀의 눈가를 아주 깊고 가만히 들여다볼 뿐이었다.그의 눈동자에는 놀림이 아니라, 기묘하고도 깊은 다정함이 서려 있었다.“……별로 웃기지는 않은데.”“거짓말하지 마. 아까 마차에서는 그렇게 비웃어놓고.”라리엘이 억울함에 입술을 비죽이며 투덜거리자, 아르덴은 여전히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소중한 보물을 쥐듯 감싼 채, 사뭇 진지하고도 가라앉은 표정으로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그의 뜨거운 숨결이 뺨에 닿았다.“웃기기보다는…… 물에서 막 건져 올린 귀여운 금붕어 같아.”낮게 읊조린 그의 말에 라리엘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붕어? 금붕어?! 너 지금 나랑 한번 싸우자는 거지? 당장 나가!”참다못한 그녀가 아르덴의 단단한 가슴팍을 세게 밀어냈다.그는 밀어내는 그녀의 손길에 못 이기는 척 순순히 뒤로 물러나면서도,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그가 문을 나서자 마자, 라리엘은 화끈거리는 두 뺨을 양손으로 다급히 감싸 쥐고는, 문을 쾅 닫아버렸다.홀로 남겨진 고요한 방, 침대 머리맡의 등불만이 은은하게 깜박이는 가운데, 그녀는 밀려오는 부끄러움과 정체모를 감정에 침대 위로 쓰러지듯 몸을 거칠게 던졌다.붕어 같다는 말은 분명 조롱이자 놀림이 확실한데, 왜 심장은 이토록 시끄럽게 쿵쾅거리며 뛰는지 도무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손에 꼭 쥐고 있던 차가운 찻잎 주머니를 부어오른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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