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렌스의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의 모든 챕터: 챕터 21 - 챕터 30

82 챕터

21화. 모순

흔들리는 라리엘의 눈동자를 보며 그가 덧붙였다. “뭐, 다소 우발적이었다고 할 수 있지.” ​“...그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거야?” 아르덴은 실소를 터트렸다. ​“믿고 말고는 네 맘이지. 자신이 범인이라는 걸 믿어달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라리엘이 분노를 가까스로 누르며 말했다. “선대 공작님이 돌아가시고 네가 새로운 공작이 되었을때, 아버지는 네가 어떻게든 빠르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언제나 물심양면이셨어. 그랬는데… 네가 한순간의 화 때문에 그런 짓을 했다고?” “글쎄… 한순간의 화였든지 묵혀둔 화였든지, 어쨌든 이게 네가 그토록 원하던 진실이야.” 책상 위에 놓인 종이칼을 만지작거리며 서늘하게 답하는 그의 표정은 차가우면서도 무심했다. “지금은 죄송하게 생각해. 그래서 그 죄책감 때문에 너에게 결혼 제안을 한거잖아. 넌 꽤 예쁘니까 나한테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지.” ​“……!” ​거짓말. 라리엘은 속으로 외쳤다. 어젯밤 내 손을 잡고 안도하던 그 온기가 거짓일 리 없다고. 하지만 아르덴의 눈은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잔혹한 진실을 내뱉고 있었다. ​ “분노하는 건 자유지만, 라리엘. 네겐 증거도, 나를 심판할 힘도 없지. 그러니 너는 그저 지금처럼 내 아내라는 이름으로 이 저택에 갇혀 살면 돼.” ​라리엘은 전신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분노로 인해 손이 덜덜 떨렸지만, 아르덴의 말대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남자는 제국의 공작이었고, 모든 권력은 그의 손안에 있었다. 증거도 힘도 없는 그녀는 거대한 바위 앞에 선 한 줌의 모래에 불과했다. ​“너는… 악마야.” ​“알고 있어.” ​아르덴은 무심하게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용건이 끝났으면 나가 봐. 바쁘니까.” ​무력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라리엘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마치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복도를 걷던 라리엘은 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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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울고 있을 수 만은 없어

​라리엘은 베개를 꼭 껴안았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결론은 언제나 잔혹한 현실로 되돌아왔다. 설령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해도, 그가 진실을 감추고 그녀를 밀어내기로 작정했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증거도, 힘도 없는 자신은 이 저택에서 평생 그의 소유물로, 혹은 그가 뿌린 죄책감의 거름으로 죽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걸까. ​그때, 방문 너머 복도에서 아주 미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라리엘은 숨을 죽였다. 규칙적이고 묵직한 발소리.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르덴이었다. 발소리는 그녀의 방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라리엘은 이불을 꽉 쥐고 문 쪽을 응시했다.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까 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요동쳤다. 하지만 문 너머의 인물은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차가운 목재 문 하나만이 놓여 있었지만, 그 너머로 아르덴의 지독하게 가라앉은 기척이 전해졌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방금 식당에서 고모와 웃으며 식사를 마친 뒤, 승리자의 여유를 즐기러 온 것일까? 아니면…… 그 역시 이 문을 열지 못할 만큼 무거운 무언가에 짓눌려 있는 것일까. ​한참을 머물던 기척은 결국 문을 열지 않은 채 서서히 멀어졌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라리엘은 비로소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안도감과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쓸쓸함이 밀려왔다. ‘울고 있을 수만은 없어.’ 그의 말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스스로 감당해야만 했다. 그의 말처럼 평생 이 저택에서 인형처럼 살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가 악마인지, 아니면 스스로 악마가 된 가련한 겁쟁이인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눈물을 닦아냈다. ***** ​차갑고 건조한 아침 공기가 알브릭 공작저의 현관을 감쌌다. ​헤르트루드가 마차에 오르기 전, 우아한 코트 자락을 여미며 아르덴과 라리엘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아르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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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플로렌스 저택으로

다음 날, 플로렌스령으로 향하는 마차 안의 공기는 바깥의 공기보다 더 시렸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단 한 마디도 섞지 않은 채 각자 창밖만 바라보았다. 마차가 수도를 벗어나 플로렌스령에 접어들자, 서늘했던 공기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펼쳐진 평원 위로 오후의 햇살이 부서졌다. 창밖으로는 이제 막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한 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졌고, 멀리 마을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한 연기가 평화로운 정취를 더했다. 길 옆으로 난 개울물의 맑은 물줄기가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릴 듯했고, 숲에서 풍겨오는 알싸하면서도 포근한 흙내음은 라리엘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졌다. 이곳은 그녀의 어린 시절, 아버지가 들려주던 웃음소리가 깃든 따뜻한 요람이었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라리엘은 몇 번이나 말을 꺼내려다 삼켰다. 그러나 결국 마차가 영지의 경계선을 넘었을 때쯤, 라리엘이 어색하게 입을 뗐다. “……부탁이 있어.” 아르덴은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이 없었다. 라리엘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가족들은 내가 행복하게 잘 지내는 줄로만 알아. 그러니까 저택에 도착하면… 알아서 잘 연기해줘.” 아르덴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 비릿한 냉소가 스칠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의 눈에는 정체 모를 피로함이 서려 있었다. “행복한 부부라니. 네 아버지를 죽였다고 고백한 남자와 그 딸이 하기엔 지나치게 비극적인 연극이군.” “내 동생들은 아직 어려. 어머니도 몸이 안 좋으신데 상처 드리고 싶지 않아.” 아르덴은 다시 창밖으로 스치는 평화로운 영지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마지못한 듯 턱을 까딱였다. “어렵지 않지. 연기라면 나도 익숙하니까.” ***** 플로렌스 백작저는 비록 예전의 화려함은 잃었지만, 빛바랜 담쟁이덩굴이 감싸여 여전히 포근한 옛집의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마차가 정원에 멈추기도 전에 저택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소녀가 달려 나왔다. “언니!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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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가장된 평온

긴 밤이었다. 어머니의 거친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고 고요한 수면으로 잦아들 때까지, 라리엘은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침대 곁을 지켰다. 새벽녘의 푸른 기운이 방 안의 어둠을 밀어낼 즈음,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언니, 이제 좀 쉬어. 내가 교대할게.”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엘리시아가 들어왔다. 라리엘은 뻣뻣하게 굳은 목을 돌리며 겨우 미소지었다. “그래, 부탁할게. 어머니께서 새벽에 물을 조금 드셨어. 열은 이제 거의 내린 것 같아.” 엘리시아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방을 나온 라리엘의 몸은 솜뭉치처럼 무거웠다. 계단을 내려가 식당으로 들어선 라리엘은 그대로 멈춰 섰다. 화려한 은식기도, 윤기가 흐르는 고기 요리도 없었다. 식탁 위에는 그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투박한 보리 빵 몇 조각과, 텃밭에서 갓 따온 듯한 거친 채소들이 담긴 샐러드, 그리고 묽게 끓여낸 감자 수프가 전부였다. 몰락해가는 가문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그러나 공작의 신분에는 한없이 초라한 아침 식사였다. 하지만 그 식탁의 중심에 앉은 아르덴은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언니! 빨리 와서 앉아. 아르덴 오빠가 이 수프 정말 맛있대!” 막내 루시가 밝게 웃으며 라리엘을 끌어당겼다. 그는 투박한 나무 숟가락을 들고 묽은 감자 수프를 한 입 크게 머금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완벽한 예복 차림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풀려 있었다. “어머니는 어떠시지?” 그의 시선이 밤을 지새워 퀭해진 라리엘의 눈가에 잠시 머물렀다. “…많이 좋아지셨어. 덕분에.” 라리엘은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오빠, 언니한테도 말해줘요. 내가 끓인 감자 수프가 얼마나 맛있는지.” 그는 빵 한 조각을 손으로 뜯어 수프에 적신 뒤 입에 넣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조금 투박하긴 하지만 고소하고 따뜻해서 좋아.”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는 비웃음이나 결벽증적인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거친 보리 빵을 씹는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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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그날 밤의 기억

그날은 유독 눈발이 거칠게 날렸다. 사전 연락도 없이 알브릭 공작저를 찾아온 플로렌스 백작의 어깨에는 차가운 눈가루가 가득 쌓여 있었다. 평소의 온화하던 모습은 간데없고, 백작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깨질 듯 위태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자네, 이것 좀 보게나.” 백작이 떨리는 손으로 내민 것은 플로렌스 가문의 오래된 서고 깊숙한 곳에서 찾아낸 기록들이었다. 아르덴은 영문을 모른 채 서류를 받아 들고 천천히 훑어내려갔다. 처음 몇 장은 평범한 가계 연표와 영지 관리 기록이었다. 하지만 어느 지점에 이르자, 그의 시선이 멈칫했다. 그것은 백 년쯤 전, 플로렌스 가문의 조상이 영토를 확장하던 시기의 비망록이었다. 기록 속 내용은 참혹했다. 영토 확장을 위해 남동부의 어느 평화로운 영지를 침공한 백작의 조상은, 반항하는 영지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정벌’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명백한 만행이었다. “가문의 영광이 피 칠갑 된 시체 위에 세워진 것이었어.” 백작은 무너질 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고결하고 정직한 성정의 그에게, 자신의 혈관에 학살자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사형 선고와도 같았을 것이다. “난 이걸 세상에 알릴 생각일세.” 백작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가문의 명예가 바닥으로 추락하고, 내가 모든 작위를 박탈당하더라도… 죗값을 치러야겠어. 죽은 이들의 원혼이 이 서류 갈피마다 맺혀 있는 것 같아 잠을 이룰 수가 없네.” 아르덴은 서류를 내려놓고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부를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백작님, 진정하십시오. 이건 백 년 전의 일입니다. 지금 와서 가문을 파멸로 몰아넣는다고 해서 죽은 이들이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르덴. 진실을 덮고 세운 정의는 모래성과 같네. 내 딸들에게 이런 부끄러운 역사를 물려줄 수는 없어.” 백작의 완고함은 꺾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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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소년의 잔상

루시와 엘리시아는 어느새 숙녀의 체통도 잊은 채 연못가로 뛰어들어 물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줄기가 공중으로 튀어 올라 무지개 빛을 만들어냈다. 라리엘도 주저하다가 동생들이 뿌리는 물세례에 웃음을 터뜨리며 합세했다. “앗, 차가워! 얘들아, 그만해!” 라리엘은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지르며 손으로 물을 튀겼다. 수도에서의 고단한 생활, 아버지의 죽음, 아르덴을 향한 증오…… 그 모든 무거운 것들이 잠시나마 물거품 속으로 사라졌다. 그동안 아르덴은 연못가 옆 낡은 벤치에 플로렌스 백작 부인과 나란히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라리엘이 저렇게 웃는 건 참 오랜만에 보는군요.” 부인이 가느다란 숨을 내쉬며 입을 뗐다. “예전엔 참 잘 웃는 아이였지요. 아버지가 들꽃을 한 다발만 꺾어 와도 온 동네가 떠나가라 좋아하곤 했으니까.” 아르덴은 연못가에서 웃고 있는 라리엘을 바라보았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방울, 웃음에 살짝 흐트러진 머리칼까지.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였다. 부인은 추억에 젖은 듯 라리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나둘 꺼내놓았다. 나무 위에 올라갔다 내려오지 못해 울음을 터뜨렸던 일, 아르덴이 선물한 리본을 잃어버리고 사흘 밤낮을 속상해하던 일까지.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아르덴의 입 안이 씁쓸해져왔다. 그때였다. “에잇! 오빠도 같이 놀아요!” 장난기가 발동한 루시가 양손 가득 물을 퍼올려 아르덴을 향해 세차게 튀겼다. 차가운 물방울이 아르덴의 완벽한 제복 상의와 뺨에 흩뿌려졌다. 순간, 라리엘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아르덴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하.” 아르덴은 잠시 멍하니 뺨에 흐르는 물기를 느끼더니, 피식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셔츠 소매를 걷어붙였다. “먼저 공격했으니, 보복도 각오해야 할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위협 대신 장난스러운 생기가 감돌았다. 아르덴은 성큼성큼 물가로 다가와 큰 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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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도발과 진심(1)

옆에 누운 아르덴의 호흡이 미세하게 멈췄다. 라리엘은 그의 반응에 상관없이 말을 이었다. “가족들에게 잘해준 거 말이야. 엘리시아와 루시가 저렇게 웃는 거 정말 오랜만에 봤어. 어머니도 네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해지신 것 같고.” “착각하지 마.” 아르덴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차가웠다. 그는 시선을 천장에 고정한 채 무미건조하게 덧붙였다. “네가 부탁한 연극에 충실했을 뿐이야. 알브릭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게 하려면 그 정도 수고는 당연한 거니까.”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하지만 오늘 연못가에서 보았던 그의 웃음, 동생들의 장난을 받아주던 그 다정한 눈빛을 떠올리면 이 차가운 변명은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라리엘은 몸을 옆으로 돌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나한테만 그렇게 차갑게 구는 거야?” “…….” “왜 나에게는 일부러 상처를 주려고 안달인 건지 묻고 싶어. 다른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내 동생들에게도 그렇게 다정할 수 있으면서. 왜 나만 보면 그렇게 독을 품은 사람처럼 구는 거야?” 아르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라리엘과 눈을 맞췄다.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그의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이유가 필요해? 넌 네 아버지가 남긴 채무의 담보일 뿐이야. 담보에게 다정함을 낭비할 만큼 나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고.” 잔인한 말이었다. 평소라면 그 말에 가슴이 난도질당해 입을 다물었겠지만, 오늘의 라리엘은 달랐다. 그녀는 따져 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잔잔한 호수 같은 눈빛으로 그를 빤히 응시하며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아니, 틀렸어. 이곳에서 네가 동생들을 대하던 건 연기처럼 보이지 않았거든. 루시와 물장난을 치고, 엘리시아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어주던 그 표정은… 가짜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어.” “안 잘거야? 그만 떠들고 잠이나 자.” 그가 다시 천장으로 고개를 돌리며 무심하게 말을 내뱉었다. 라리엘의 목소리가 점점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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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도발과 진심(2)

라리엘은 돌아누운 그의 등을 바라보며 승리감 대신 씁쓸한 통증을 느꼈다. 그녀가 그를 도발할 수 있었던 건 용기라기보다는 믿음이었다. 그는 결코 선을 넘지 않을 것이다ㅡ. 그는 믿음에 부응했고, 이를 악물고 자신을 내려다보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도 분명히 보았다. 아르덴 폰 알브릭. 너는 대체 무엇을 지키기 위해 이토록 처절하게 스스로를 악마의 틀 안에 가두고 있는 걸까. 정리되지 않은 감정과 혼란이 밀려와 머릿속이 어지러워진 그녀는 더이상 생각하지 않으려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결국 먼저 잠에 빠져든 쪽은 라리엘이었다. 긴장이 풀리며 의식이 서서히 가라앉았고, 고르게 이어지는 숨결이 방 안을 채웠다. 아르덴은 한참 뒤에야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라리엘을 바라보았다. 아까 전의 대치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평온하게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다시 천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늘 밤, 그는 끝내 잠들지 못했다. ​* ​다음 날 아침, 플로렌스 저택 앞에는 수도로 돌아갈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어머니, 무리하지 마시고 약 꼭 챙겨 드셔야 해요.” 라리엘이 어머니의 야윈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백작 부인은 딸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인자하게 웃었다. “알겠으니 걱정 마렴, 라리엘. 엘리시아와 루시도 있잖니. 오히려 네가 걱정이구나. 수도 생활이 고될 텐데…” “저야 말로 괜찮아요. 이젠 수도 생활이 더 편한걸요.” 곁에 선 엘리시아와 루시가 차례로 라리엘의 품에 안겼다. 엘리시아가 언니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언니, 너무 애쓰지 마. 힘들면 언제든 편지해.” 루시는 라리엘의 허리를 꽉 껴안으며 울먹였다. “언니, 이제 가면 또 언제 오는거야?”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리는 라리엘을 슬쩍 본 아르덴이 대답을 대신했다. “다음엔 마차를 보내줄 테니 너희가 어머니를 모시고 수도로 와. 전에 말한 얼음 디저트 맛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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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미련한 손길

​누군가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차가운 새벽 공기와 함께 알싸한 비누 향과 서늘한 침엽수 향이 코끝을 스쳤다. 어디선가 맡아본 향이라 생각하며 라리엘은 깊은 잠의 가장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침대 매트리스가 아주 미세하게 눌렸다. 곧이어, 라리엘의 이마 위로 무엇인가가 닿았다. ​서늘하고 단단한 손등이었다. ​“…….” ​얼음처럼 차가운 감촉이었다. 머릿속을 들쑤시던 열기가 손등이 닿은 자리를 중심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라리엘은 자기도 모르게 그 시원한 감각을 향해 고개를 아주 조금 더 밀어 넣었다.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지독한 고독 속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이 그녀를 안도하게 했다. 라리엘의 반응에 놀란 듯, 손이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저도 모르게 이끌린 것인지 손등은 떼어지지 않고 그녀의 이마를 가만히 짚어주었다. 이윽고 차가운 손끝이 라리엘의 뺨을 타고 내려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어둠 속에서 나직한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짓눌린 감정이 갈 곳을 잃어 입술 밖으로 새어 나온, 지독하게 쓸쓸한 고백 같은 소리였다. ​라리엘은 그 숨결이 자신의 이마 근처에 머무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꿈인가…?’ ​만약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이 차가운 공작저에서 누군가 자신을 위해 이토록 깊은 밤을 지새우며 곁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어붙었던 심장이 조금씩 박동을 되찾는 듯했으니까. ​정체 모를 간호인은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세심하게 그녀를 돌봤다. 물수건을 갈아주고, 이불이 어깨 아래로 내려가면 다시 여며주었다. 라리엘은 눈을 뜨면 그가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에 끝내 눈꺼풀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그저 그 시원한 손길을 이정표 삼아,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깊고 평온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창밖으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번지기 시작할 무렵, 침대 곁을 지키던 그림자가 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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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제이드 크로이츠

​저택의 현관문이 묵직하게 닫히는 소리가 복도를 타고 멀리 퍼져나갔다. 아르덴이 연회장으로 떠나고 홀로 남겨진 라리엘은 침실 창가에 서서 멀어지는 마차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황금색 문장이 새겨진 마차는 차갑고도 우아하게 멀어져 갔다. 혼자서 연회장에 나타난 공작은 아마도 그가 말했던 대로 ‘병약한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헌신적인 남편’의 배역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라리엘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텅 빈 방 안에는 고요만이 먼지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정적을 깼다. ​“부인, 베르너입니다.” ​문이 열리고 베르너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작님께서 연회장으로 향하시기 전, 부인께서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즉시 조치하라고 엄중히 분부하셨습니다. 혹시 무언가 필요하시거나, 불편하신 곳이 있으십니까?” ​라리엘은 처음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따 필요하면 제가…” 거기까지 말한 그녀가 생각이 바뀐듯 곧바로 말을 고쳤다. ​“아, 베르너. 제가 플로렌스에 다녀 오느라 자리를 비웠으니 공작저의 정무 서류들이 밀려 있겠죠?” ​베르너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그렇습니다만… 부인께서는 아직 기력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하셨습니다. 각하께서도 부인의 안정을 최우선으로—” ​“안정은 충분히 취했어요. 공작부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미뤄두고 싶지 않군요. 지금 바로 제 집무실로 서류들을 가져와 주시겠어요?” ​단호하면서도 온화한 라리엘의 부탁에 베르너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즉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후, 라리엘의 집무실 책상 위에는 공작저의 살림을 기록한 장부와 결재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라리엘은 깃펜을 들었다. 잉크 향이 코끝을 스치자 몽롱했던 정신이 비로소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베르너는 곁에 서서 라리엘의 업무 처리를 도왔다. ​“이쪽 공급처의 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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