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os los capítulos de 플로렌스의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Capítulo 71 - Capítulo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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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제이드의 치부

마침내 약속한 깊은 숲길 속, 버려진 폐허 근처에 마차가 이르렀다.한때는 신성한 예배당이었을지도, 혹은 국경을 감시하던 군사들의 초소였을지도 모를 정체 모를 석조 건물은 오랜 세월 방치되어 이제는 지붕이 사정없이 무너져 내린 채 겨울의 시린 하늘을 흉물스럽게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이끼가 잔뜩 낀 커다란 돌덩이에 등을 기댄 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트리샤는, 저 멀리서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랄프의 마차를 발견하자마자 신호를 보내기 위해 건물 안쪽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잠시 후, 붕괴된 건물 잔해 사이로 아르덴이 등장했다.이런 먼지 날리는 폐허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갈하고 단정한 남작가의 예복 차림을 한 고결한 자태였다.랄프는 귀족의 서슬에 기죽지 않으려는 듯, 일부러 짐짓 어깨를 으쓱하며 거만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마차 뒷좌석에 실린 작은 목재 궤짝의 쇠사슬을 풀고 뚜껑을 탁 소리가 나게 열어 보였다.“자, 로드릭 남작님. 약속했던 약속의 물건입니다. 우리 녹스가 자랑하는 최상급 물건들이니 눈이 번쩍 뜨이실 겁니다.”대기하고 있던 트리샤가 아르덴의 눈짓을 받고 궤짝 앞으로 다가갔다.독특한 향을 은은하게 내뿜는 환각제의 고운 가루를 손끝으로 살짝 묻혀 문질러 보았다. 품질을 확인하는 완벽한 연기를 펼친 그녀는 아르덴을 향해 고개를 아주 천천히 한 번 끄덕였다.물건에 장난질은 없다는 뜻이었다. 아르덴은 랄프의 신경을 긁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음, 가져온 물건의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은 모양이군……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시 아쉽기는 하군. 비록 어제 탈레스 씨에게 직접 제이드 크로이츠가 현재 임무를 수행 중이라는 설명은 들었지만, 내심 그가 이번 거래의 전담자로 오길 바랐거든.”&ls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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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진실의 파편

트리샤는 대답 대신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숲바람이 그녀의 뺨을 거칠게 때리고 지나갔다. 한참 동안의 지독한 정적 끝에, 마침내 그녀의 메마르고 갈라진 입술이 힘겹게 달싹였다.“……바보 같은 노인네.”혼잣말처럼 나직하게 내뱉은 가느다란 목소리에는, 평생 자신을 버려두었다고 믿었던 아버지를 향한 짙은 원망과, 제 존재가 결국 아버지의 목을 죄는 덫이 되었다는 지독한 비참함이 복잡하게 뒤섞여 울컥 흘러나오고 있었다.어느덧 사방은 어두워지고 있었고, 아르덴은 위장 마차에 먼저 오르며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물었다.“그가 수행한 임무가 무엇인지 모른다면서, 왜 그렇게까지 동요하는 거지? 생각보다 별 것 아닌 임무였을지도 모르지 않나?”트리샤는 그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고개를 홱 돌려, 아르덴의 얼음 같은 눈동자를 서늘하게 쏘아보았다.이 비극적인 순간조차 결코 놓치지 않고, 자신을 향해 진실을 떠보는 그의 지독하리만치 치밀하고 집요함에 완전히 질려버린 표정이었다.“부탁이니까 지금은 그냥 아무말 말고 조용히 가죠?”하늘이 온통 타들어 가는 듯한 짙은 주홍빛과 핏빛 노을로 무겁게 물들 무렵,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숲속의 비밀 별장에 가까스로 다다랐을 때였다.마차가 멈춰 서자, 줄곧 침묵을 지키던 트리샤가 마침내 결심을 굳힌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따가…시간 좀 내줘요. 당신에게 할 얘기가 있어요.”*늦은 저녁 식사가 끝나고, 아르덴의 임시 집무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트리샤는 낮 동안의 충격과 동요를 어느 정도 가슴속 깊은 곳으로 밀어 넣고 정리한 듯, 얼음처럼 차갑고 건조하게 정돈된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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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수색을 피하기 위해

정확히 3일 뒤, 론체스터의 거친 암석 지대와 플로렌스의 온화한 평야가 날카롭게 맞닿은 험준한 산길 어귀는 지독하리만큼 무겁고 축축한 습기를 가득 머금은 안개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아르덴은 아무런 말도 없이 하얗게 일렁이는 안개 너머의 심연을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사방을 집어삼킨 짙은 안개 탓에 시야는 고작 몇 걸음 앞조차 제대로 트이지 않아 극도로 답답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감각을 최대한 곤두세운 채 주변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바람에 쓸쓸하게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마찰음, 먼 산봉우리에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굶주린 짐승의 기괴한 울음소리, 그리고ㅡ 서서히 발걸음을 좁혀오는 사람의 은밀한 발소리까지.“……이쪽입니다, 남작님.”낮고 쇠 긁는 듯 쉰 목소리가 자욱한 안개 속에서 울려 퍼졌다. 3일 전 폐허에서 마주했던 녹스의 행동대원, 랄프였다.“오늘따라 이 바닥 분위기가 영 좋지 않거든요. 올라오는 길에 마을 어귀에서 잔뜩 날이 선 채 순찰 중인 영지 경비대를 얼핏 보았는데, 운이 나쁘면 이 외진 산길 턱밑까지 올라올 수도 있으니 서둘러 물건만 챙겨서 조심하십시오.”그는 무언가 쫓기는 사람처럼 초조하고 불안한 듯 연신 고개를 돌려 사방의 수풀을 살피며, 농가 수레 뒤편에 덮어두었던 지저분한 포장 천을 거칠게 걷어 올렸다.그 퀴퀴한 먼지 속에는 지난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고 단단하게 봉인된 목재 궤짝 몇 개가 층층이 가지런히 실려 있었다.아르덴이 궤짝 앞으로 다가와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확인한 후, 약속된 잔금을 치르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인근 수풀 속에서 사방을 감시하며 망을 보고 있던 랄프의 동료 조직원 하나가, 사색이 된 얼굴로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숨을 가쁘게 헐떡이며 숲을 헤치고 미친 듯이 달려왔다.&ld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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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나쁜 예감

몇 시간 뒤, 긴박했던 응급 처치를 간신히 마친 영지의 노의사가 무거운 가죽 가방을 챙겨 들고 피비린내 나는 별장을 서둘러 나섰다.방 문이 닫히는 둔탁하고 묵직한 소리가 어두운 복도를 따라 서서히 멀어지자, 넓은 방 안에는 이제 벽난로의 잔불이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와 아르덴의 가느다란 숨소리만이 정적 속에 무겁게 남았다.트리샤는 침대에 창백한 낯빛으로 누워 있는 아르덴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평소 철저하게 정제되어 있던 귀족 특유의 수려한 얼굴은 의식을 잃은 와중에도 여전히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지만, 핏기가 완벽하게 가셔 푸르스름한 입술과 미동도 없이 축 처진 속눈썹이 그가 낮 동안 얼마나 많은 양의 선혈을 길바닥에 쏟아냈는지를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었다.어깨와 가슴을 꽁꽁 싸맨 하얀 붕대 위로는 이미 희미한 선홍빛 혈흔이 널따랗게 번져 있었다. 완전히 멈추지 않은 미세한 출혈이 천의 조직을 타고 천천히 스며든 잔인한 흔적이었다.트리샤는 잘게 떨리는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크게 하며, 기가 찬다는 듯 낮고 나직하게 읊조렸다.“진짜 미쳤어.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이 인간.”아르덴은 감고 있던 무거운 눈꺼풀을 아주 천천히 들어 올렸다.칼날이 살을 찢었던 지독한 통증 탓인지 수려한 미간이 일순간 살짝 찌푸려졌지만, 그의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서늘하고 차가웠다.“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알아요? 조금만 깊었어도 정말 죽었을지도 몰라요. 이게 무슨 무모한 짓이냐고요!”아르덴은 대답 대신 그저 가슴을 들썩이며 짧고 메마른 숨을 한 번 내뱉을 뿐이었다.트리샤는 화가 치미는 듯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였다.그녀가 붉게 타오르는 벽난로 옆을 지나 어두운 창가까지 걸어가 호흡을 가다듬었다가, 다시 침대 쪽으로 굳은 표정으로 돌아오자 그가 마침내 갈라진 목목한 입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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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뜻밖의 얼굴

“부인, 이 밤중에 혼자 움직이시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게다가 론체스터까지는 거리도 멀어서…”베르너의 만류가 끝나기도 전에 라리엘이 고개를 완강히 저었다. 이미 마음은 결정을 내려버린 뒤였다.“제가 가서 상태가 어떤지 꼭 확인해 봐야겠어요. 혼자 가는게 정 위험하다면 기사라도 몇 명 붙여 주세요.”라리엘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차분했다. 그녀가 놀라서 흥분하거나 쓰러질까봐 걱정하고 있던 베르너는 그 침착함에 잠시 말을 잃었다.“베르너, 마차를 준비해주지 않으면 내가 직접 마굿간으로 내려가 아무 말이나 잡아타고 홀로 성문을 나가버릴지도 몰라요. 농담이 아니에요.”협박이라고 하기엔 담담했고, 농담이라고 넘기기엔 눈빛이 지나치게 진지했다. 베르너는 그녀가 정말 그렇게 할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즉시 가장 정예한 기사들과 마차를 정문 앞에 준비시키겠습니다.”그가 물러나 거실을 나가자, 라리엘은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그녀는 여행 채비를 위해 곧장 방으로 향했다. 차분했던 목소리와는 달리 겉옷과 망토를 챙기는 그녀의 하얀 손은 속절없이 덜덜 떨려 단추조차 제대로 채우지 못할 지경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이 짙게 깔린 공작저의 정문을 마차 하나와 말 세 필이 박차고 나갔다.진눈깨비가 몰아치는 밤길을 빠른 속도로 달리는 마차 안에서 라리엘은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중이었다.‘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어. 전령의 말이 맞을 거야. 그러니 분명 큰일은 아닐 거야.’어쩌면 이렇게 대책 없이 한걸음에 달려간 자신의 모습이 민망해질 정도로, 별장에 도착했을 때 아르덴이 멀쩡하게 깨어있을 수도 있다.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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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재회

밤새도록 마차 안에서 억눌러왔던 숨이 터지듯 훌쩍이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아르덴은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라 그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눈물로 젖은 얼굴을 한 라리엘이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정말 괜찮은거야? 의사가 뭐라고 해?”불안이 고스란히 담긴 질문이었다.“붕대는 상처를 고정하고 지지하느라 요란하게 감아둔 것뿐이야. 그냥 어깨 표면만 조금 베였을 뿐이니까, 네가 이렇게 울고 불고 할 이유가 전혀 없어.”라리엘의 시선이그의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왼쪽 어깨를 향했다.그의 호언장담과 달리 붕대 사이로 스며든 선혈이 아직도 선명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다시금 세차게 흔들리자 아르덴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이정도 가벼운 상처는 검술 훈련을 할 때도 입을 수 있는 흔한 부상이야. 그러니까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그의 담담한 어조에도 라리엘은 걱정스런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질문을 사정없이 퍼부었다.“치료는 제대로 한 거 맞아? 약은 제대로 있고? 간호하는 사람은? 같이 내려왔다던 수행원은 대체 어디 간거야?”“치료는 영지에서 가장 유능한 의사가 완벽하게 끝냈고, 이 정도 상처에 간호는 사치야. 수행원은… 내가 지시한 일을 하느라 외출중이야. 그것보다 너야말로 대체 어떻게 온거야? 베르너가 널 혼자 보냈을 리가 없는데.”라리엘이 그제야 방 안의 기운을 살피며 숨을 고르듯 대답했다.“응. 절대 안 된다고 해서 기사들이랑 같이 왔어.”아르덴의 마음이 복잡하게 얽혔다. 라리엘이 여기서 트리샤와 마주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비록 기록보관원인 루이즈의 도움이 필요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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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너무 부려먹는거 아니야?

먼저 거즈가 밀리지 않도록 손등으로 가볍게 눌렀다. 긴장된 그의 근육이 손길에 반응하듯 미세하게 굳었다가, 이내 천천히 힘을 풀었다.그 변화가 고스란히 손끝에 느껴져, 그녀는 무심코 숨을 들이마셨다.붕대의 끝을 잡아 어깨 위에서 한 바퀴 감았다.너무 느슨하면 의미가 없고, 너무 조이면 아플 것이 분명했다. 라리엘은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힘을 조절했다.어깨를 한 번 감은 뒤 붕대를 가슴 쪽으로 내리고는 그녀가 잠시 손을 멈췄다.상처를 지지하려면 더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조금만 참아.”낮게 말한 뒤, 라리엘은 그의 앞으로 반 발짝 다가섰다. 몸을 숙여 붕대를 당기며 그의 몸을 반쯤 감싸 안는 자세가 되었다.팔 아래로 느껴지는 그의 단련된 몸에, 괜히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다시 풀렸다. 아르덴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그의 가슴팍으로 떨어지는 라리엘의 숨결이 느껴질 때마다 가볍게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그녀가 붕대를 가슴 둘레로 한 바퀴 감아 올리고, 다시 어깨 쪽으로 올렸다.“아프면 말해.”아르덴은 대답 대신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다시 한 번, 이번엔 조금 더 단단하게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는 그의 반응을 살피며 천을 당겼다 놓았다를 반복했다.마지막으로 고정하기 위해 매듭을 지어야 했다.무의식적으로 그의 가슴께에 손을 얹은 채 매듭의 위치를 가늠하던 라리엘은 문득 그 사실을 깨닫고 숨을 멈췄다. 단단히 다져진 근육 아래에서 그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고개를 들자 두 사람의 시선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스쳤다.짧은 침묵 후에 라리엘이 급히 시선을 내렸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그녀는 애써 숨을 가다듬으며 붕대를 묶었지만, 손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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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지난 밤의 회상

조금 전, 아르덴의 침실 문을 닫고 나온 트리샤는 소매와 옷자락에 허옇게 묻은 산길의 흙먼지를 무심하게 털어냈다.예상은 충분히 했지만, 역시나 가시방석이 따로 없는 불편하고 숨 막히는 자리였다.별장 안은 이른 시간답게 조용했다.그녀는 느릿하게 계단을 내려오며, 불과 몇 분 전 마당에서 목격했던 풍경부터 머릿속으로 다시금 천천히 떠올렸다.별장 앞마당에 나란히 세워진 마차와 말들. 겉보기에 장식이 요란하거나 과하지는 않았지만, 마차의 중앙과 말의 가죽 마구에 새겨진 정교한 문장은 단번에 신분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묵직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전날 밤, 전갈을 보낼 때 ‘공작이 도적에게 습격을 당해 깊은 부상을 입었다’는 말을 굳이 덧붙인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혼자서 녹스의 꼬리를 추적하고 공작의 뒤치다꺼리까지 감당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벅차고 위태로웠기에 저지른 충동적인 일종의 보험이었다.그렇기에 공작저에서 누군가가 구원의 손길이든, 호위 병력이든 이쪽으로 급파될 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하지만 공작 부인이 직접 올 줄이야.”상황이 이렇게 흘러간다면, 그녀는 다시금 루이즈 연기를 해야했다. 막상 가짜 신분을 연기하며 눈치 빠른 귀족 부인 앞에서 이것저것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을 변명하고 비위를 맞춰야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고개가 절로 저어질 만큼 귀찮고 까다롭게 느껴졌다.게다가 하필이면 공작이 끔찍이도 싫어한다던 공작 부인을 제 손으로 직접 불러들인 꼴이 되었으니, 잠시 후 마주할 그의 서늘한 눈빛이 얼마나 더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조금 전 방문을 열고 공작을 마주했을 때, 트리샤의 불길한 예상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공작은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는 얼굴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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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추적

트리샤는 그의 내면을 지배한 그 공포를 정확하게 꿰뚫을 칼날을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당장 가서 탈레스 씨에게 전해요. 남작님이 이 사태에 대해 직접 면담을 강력하게 요청하신다고. 사과를 하든, 보상을 논의하든 얼굴 보고 직접 끝내야겠다고 하시니까.”“그, 그건 정말 힘들 거요! 탈레스 님은 우리 같은 하급 행동대원들의 말 한마디에 쉽게 움직이거나 모습을 드러내는 만만한 분이 아니…….”“그럼 당신 대가리가 먼저 날아가겠군.”트리샤가 허리춤에서 무심하게 단검을 꺼내 손톱을 정리하는 시늉을 했다.“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어요. 남작님은 인내심이 그리 깊은 분이 아니거든요. 내일까지 확답이 없으면 우린 우리식으로 움직일 거에요. 알겠어요?”협박에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랄프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샤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로브의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여관을 나섰다.여관 안의 어두운 테이블에 홀로 남겨진 랄프는 뼛속까지 스며든 공포와 떨림을 어떻게든 씻어내려는 듯, 앞에 놓인 독한 독주를 거칠게 손으로 쥐고 연거푸 목구멍으로 들이켰다.그렇게 한 시간쯤 흘렀을까, 거나하게 취기가 올라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랄프가 마침내 여관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의 뒤를 검은 그림자가 은밀히 뒤쫓기 시작했다.랄프는 여관 뒤편의 허름한 헛간 쪽으로 비틀거리며 향하더니, 문 앞에서 무언가를 경계하듯 주위를 잔뜩 찌푸린 눈으로 잠깐 훑어보았다.그리고 사방에 아무도 없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하고서야, 낡은 목재 헛간 안으로 슥 들어갔다.‘헛간?’커다란 버드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이고 그의 기이한 행적을 지켜보던 트리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선지에 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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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상대하기 어려운 여자

거실에 홀로 앉아 있는 공작 부인을 발견한 트리샤는, 예상외의 호출에 대답 대신 그저 어깨를 한번 무심하게 으쓱해 보이고는, 라리엘의 바로 맞은편 옆으로 낡은 목재 의자를 거칠게 끌어와 털썩 앉았다.라리엘은 트리샤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일도 고될 텐데, 공작님이 뜻밖의 부상까지 당하셔서 루이즈씨가 고생이 많아요.”그녀의 걱정스런 말에 트리샤는 라리엘의 깊은 눈동자를 잠시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뒷골목에서 온갖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보며 자라온 트리샤였지만, 눈앞에 앉은 이 라리엘이라는 귀족 여인의 눈만큼은 속내를 도무지 가장 읽어내기 어려운 미지의 영역이었다.이 여자를 상대하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잡으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솔직히 기분 나쁘지 않아요, 부인?”갑작스럽고도 도발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라리엘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큰 눈을 한 번 크게 깜빡이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뭐가 말이죠?”그녀의 얼굴에는 정말로 상대방의 의도를 추호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순수한 호기심과 의아함 가득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사교계 특유의 고단수 연기라고 치부하기에는, 눈동자의 떨림이나 피부의 미세한 변화조차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투명한 태도였다.트리샤는 그 태도에 오히려 자신의 신경이 기분 나쁘게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사냥감을 노리는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직설적인 비수를 꽂았다.“공작님이 이 한적하고 외딴 남부 별장에서 외간 여자랑 단둘이 며칠 밤낮을 지내고 있던 거잖아요. 부부 관계도 안 좋은 판국에, 내가 공작님이 몰래 숨겨둔 내연녀고, 우리가 여기서 은밀하게 밀회를 즐기고 있던 거라는 상식적인 의심이나 질투는 눈곱만큼도 안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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