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은빛 눈의 아이를 낳았다: Chapter 21 - Chapter 30

107 Chapters

21화. 상처투성이 어린 소녀

어린 시절의 나.두려움에 떨고 있는 소녀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안았다.오래 전 감정이 고스란히 내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 전해졌다.“아가, 이젠 괜찮아. 다 끝났어.”“네? 정말요?”“응! 고생 많았다. 이제부턴 네게 행복한 일만 있을 거야.”“우리 할머니가 저를 궁에 버리고 갔어요. 제 곁엔 아무도 없어요.”“혼자 버티느라 힘들었지? 이제 모두 다 지나갔어. 마리안!”시공간을 초월해 만난 그날의 내게 깊은 위로와 희망을 전해주었다.어른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모두 쏟아내며 더욱 꽉 안아 주었다.보호받고 싶었던 만큼.서글픔을 토해낼 만큼.분명 어린 시절의 나를 위로하는 말이었는데...마음 깊은 곳이 평온으로 차올랐다.어느새 소녀의 흐느낌도 사라지고 호흡도 안정돼 갔다.이렇게.예전 나의 상처를 보내 주었다.“컥컥! 마리안, 숨 막혀.”“...?”“당신이 날 이렇게 좋아했어?”“너...넌? 이거 놔.”“네가 먼저 안았잖아. 왜 이제와서 싫은 척이야.”소녀가 사라진 자리.소금쟁이가 날 음흉하게 안은 손을 풀지 않았다.요정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전사복이 흑빛으로 변했다.그의 심장에서 기어 나온 묵직한 줄이 날 옭아맬 때.주머니에서 꿈틀대던 신물이 긴박하게 튀어 올랐다.두툼한 방어벽을 세운 후.순식간에 숲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나무줄기와 잎, 안개까지 거대한 신물이 되었다.단숨에 소금쟁이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 친 사내.카일이었다.“아이고, 아이고! 요정 죽네, 죽어!”“소금쟁이, 마리안 님께 무슨 짓을 한 거냐?”“뭘 그렇게 화를 내? 잠깐 심심해서 장난 한번 친 것 같고.”카일이 그렇게 화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눈동자는 분노로 들끓고 손등 힘줄까지 도드라져 있었다.“요정은 당분간 경계 업무에서 제외한다.”“뭐?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난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조사가 끝날 때까지 나무집에 들어가 있기를 명령한다.”“뭐…? 무슨 조사를 해? 내가 뭔 잘못을 했다고.”악을 쓰며 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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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흑점

숲이 주는 작은 경고들.경계를 늦추진 않았지만.숲 사람들의 일상은 멈출 수 없었다.미래를 준비하는 우리.촉수만 높게 세운 채 평범한 하루를 이어갔다.이른 시간부터 허름한 전사복을 꿰매고 오늘 필요한 약초를 정리했다.루시앙의 수련 준비도 끝냈다.달리기, 나무 타기, 통나무 위 균형 잡기가 오늘 항목이었다.아침을 준비하며 어제 엘레나가 했던 말을 계속 떠올렸다.‘숲을 책임지라고?’생각이 머물자, 주머니 속 돌이 뜨거워지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날 책망하는 신물의 행동이었다.‘내 능력으로 하는 게 아니지. 괜한 걱정을 끌어왔구나.’신의 돌은 내 생각까지 꿰뚫으며 마음의 길을 제시하는 듯했다.첫 번째 수련은 바깥 넓은 공터까지 왕복해서 달리는 코스.카일이 속도를 조절하며 옆에서 함께 달렸다.아이들은 서로 질세라 힘껏 발을 내디디며 흙을 두드렸다.뒤처지는 아이가 생기면, 루시앙이 슬쩍 속도를 늦춰 함께 달렸다.그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저렸다.아이는 처음부터 다른 이들을 섬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두 번째는 균형 잡기.물 위에 길게 놓은 통나무 위를 맨발로 걸었다.처음엔 팔을 휘저으며 물속에 잠겼지만, 거듭된 연습을 통해 눈을 감고도 건널 수 있게 되었다.비틀거리다 물속에 빠진 아이들을 위해 여인들은 물가에서 수건을 들고 기다렸다.이 숲에서 유일하게 웃음소리가 나는 곳.아이들이 있는 자리였다.세 번째는 활쏘기 훈련이었다.어제 배운 대로 아이가 훌륭한 솜씨로 활을 다루자, 카일은 화살을 꽂아주었다.“힘을 조금만 빼고, 어깨를 편안하게. 대신 눈을 더 크게 떠야 합니다.”“네, 사부님. 저 혼자 해보겠습니다.”루시앙이 다시 활을 들었다.통나무 위 흰 원에 정신을 집중시키자, 은빛 눈동자가 번뜩였다.습득 능력이 뛰어난 루시앙의 다섯 화살이 중앙에 꽂혔을 때.전사 하나가 다급히 연습장으로 뛰어왔다.땀과 흙으로 뒤섞여 있었다.“카일!”전사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숲 외곽에서 이상한 표식을 또 발견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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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어둠의 산지

아이를 안고 뛰는 카일 옆에서 미친 듯이 달렸다.급박한 상황.기도문도 나오지 않았고 그저 아이를 지켜달라는 외마디만 외칠 뿐이었다.하늘이 검게 물든 걸 발견했을 땐 이미 루마레스 숲을 한참 벗어난 후였다.구름마저 흑빛.태양이 가려진 그곳은 어둠의 산지였다.흑염 출현 이후, 루마레스 숲의 그것과는 다른 흑빛.빛 한 점 없는 낭떠러지였다.왜 그랬을까?카일과 나 두 사람 모두 그런 행동을 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성이 아닌 감성만이 지배한 그때.위험을 느꼈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가시덤불에 둘러싸인 우린 루시앙만을 보호하려 안간힘을 썼다.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암전 동굴.동물적 감각으로 버티며 그 자리에 얼어붙은 우리.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카일의 떨리는 목소리.반사적으로 머리가 쭈뼛해졌다.“루미엘님!”공포가 밀려왔다.“루시앙을 왜 부르세요? 당신 품속에 있잖아요.”“마리안 님….”카일 품속에 루시앙이 없어졌다.“루미엘님!”“루시앙, 루시앙!”설마...내 아들을 여기서 또 잃는다고?안 돼.보이지 않는 두려움이 아들을 잃었다는 슬픔과 얽혀 날 옥죄었다.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린 건 내 절망이 극에 달할 때였다.모르가나.이자가 끝내 내 아들을 해했단 말인가.아냐.내 아들은 이렇게 쉽게 안 죽는다.아니...내가 더 이상 내 아들을 힘없이 잃지 않을 것이다.그자의 목소리와 함께 암전 상태가 벗겨졌다.“하하하! 이거 큰 수확인걸? 역시 네 아들이 그 루미엘인지 반신반인지가 맞구나.”“모르가나, 네 이놈!”결국 내 아들 정체를 알아버렸다.“루미엘님은 어디 계신 게냐?”“너희 신께 찾아 달라고 해라. 이제부터 그 아이는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아니지…. 그 아이는 곧 죽겠구나.”“네 맘대론 안 된다. 이리 와라. 이 놈! 내가 널 먼저 죽여 버릴 것이다.”“하하하! 그럼, 그러시든가.”“모르가나! 루미엘님께 무례한 짓 하지 마라. 너를 위한 충고니라.”“그딴 충고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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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흑마법 요새

입에서 튕겨 나온 알 수 없는 단어.또다시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모두 사라진 흑마법사들.그 녀석은 피까지 토하며 산화됐다.카일과 대적하던 자들도 자취를 감춘 후.그가 놀란 눈으로 가까이 다가왔다.“마리안님, 지금 당신이 한 말 기억하십니까?”“Vade retro...?”“우리 부족의 고어입니다. 엘레나 사제와 저만 알고 있는….”그때였다.붉은 돌이 허공에 떠오르며 어디론가 우릴 인도하는 듯했다.카일과 나는 말하지 않아도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루시앙이 있는 곳으로 우릴 인도하는 신물의 반응.한참 돌을 따라 들어갔을 때.검은 흙바닥이 파도처럼 출렁이는 요새가 나왔다.“어…. 어….”덮치려 밀려드는 파도.카일과 내가 집채만 한 물결에 허둥댈 때.몸이 저절로 공중에 올려졌다.날개 없는 우리에겐 낯선 경험.하지만.곧 익숙한 듯 균형을 찾았다.“하하하! 잘도 찾았구나.”“모르가나! 내 아들은 어디 있느냐?”“네 아들? 아하! 루미엘이란 괴물 말인가?”“뭐…. 감히 루미엘님께 괴물이라고?”“반신반인이면 돌연변이 괴물이 맞지 않느냐?”“모르가나!”“흥분은 가라앉혀라. 죽음 앞에서 그리 소릴 질러서 되겠느냐?”“예전엔 비올렛과 네 흉계에 죽었지만, 지금은 아니다.”“뭐…? 죽었지만? 이게 무슨 말이냐?”“...?”“너 혹시 회귀라도 한 게냐?”“흑마법도 벌거 아니구나. 회귀자를 알아보지 못하는구나.”“설마…. 네가?”저자가 왜 저리 떨고 있는가?회귀라는 말 이후.모르가나가 떨기 시작했다.“마리안, 네가 정말 회귀자가 맞느냐?”“그래. 난 단두대에서 살아왔다. 신께서 살리신 게다.”“비올렛 생일에…?”“맞다.”“비올렛 생일에 회귀 후 도망친 거란 말인가? 그렇다면 네가? 설마….”안절부절못하는 모르가나.뒷걸음질 치는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순간.암흑과 함께 그자가 완전히 사라지며 주위는 지독한 한기만이 감돌았다.잔잔해진 흑 물결.땅에 발을 딛고 선 후.마음이 산란했다.분명 그자가 날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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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시공간 이동

천천히 눈을 떴다.주위는 고요했다.낯설지 않은 풍경.루시앙을 잃어버렸던 바로 그 장소였다.“시공간이 우리를 튕겨낸 것 같습니다.”“시공간? 혹시 시공간 이동…. 이요?”어릴 적 할머니와 함께 어둠에 갇혔을 때.그때도 누군가가 우리를 뱉어내듯 밀어냈고 빛으로 나올 수 있었다.할머니께서 분명 시공간 이동이란 말을 읊조리셨었다.그 어둠이 지금도 꿈에서 나를 얽어매곤 한다.붉은 돌이 우릴 다시 이곳으로 데려왔다.돌 표면은 더 깊은 균열로 얼룩져 있었고 기묘한 잔광이 번뜩였다.루시앙을 구출하고 흑마법 소굴을 파괴했지만.그날의 승리는 완전하지 않았다.오히려 새로운 전쟁의 서막에 불과했다.나의 회귀를 듣고 어디론가 사라진 모르가나.그자는 이제 나의 존재를 명확히 각인했을 것이다.“놈들은 멈추지 않을 겁니다.”루시앙 손목 흑점이 언제든 다시 아이를 집어삼키려 할 터였다.등 뒤.흑마법 소굴을 불태운 푸른 잔향이 숲을 가르고 있었다.카일은 망설이지 않았다.몸이 굳어진 루시앙을 끌어안은 채 신전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뿌리처럼 얽힌 통로를 달리는 동안.그의 팔에 안긴 아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아이 팔에서 번져 나온 흑점이 살아 움직이듯 수축과 팽창을 반복했다.미세하게 흐트러지며 다시 응집되기를 거듭하는 형체.인간의 상처는 아니었다.“엘레나! 엘레나!”목청껏 그녀를 부르며 뛰어든 신전.그녀는 제단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이 순간을 미리 알고 있던 듯 이미 제를 준비하고 있었다.정신을 잃은 루시앙.흑점은 어느새 아이의 목선을 타고 얼굴 가장자리까지 물들이고 있었다.“마리안 님, 제가 의식을 치르는 동안 붉은 돌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합니다.”“네.”두 손을 제단 위에 올린 사제 엘레나.제단 불길은 솟구쳤고 곧 주위로 흐르듯 번져 나갔다.흑점은 옅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짙어졌고, 가장자리 또한 선명한 윤곽을 드러냈다.존재를 과시하는 반발처럼.“사제님, 어찌해서 흑점이 짙어진 겁니까?”“걱정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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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탈리온과 지혜의 천사

끌려가듯, 기어가듯….제단 아래로 검은빛이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곧 신전 바닥에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다.“돌려줘라.”누가 써놓은 글자일까?보기만 해도 소름 돋는 짧은 문장.기도문을 외우며 한참을 내려다보았다.“탈리온!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너 따위가 이곳에서 장난질이냐?”나지막한 음성이 엘레나의 입을 통해 새어 나왔다.“허! 꼬맹이 엘레나가 많이 컸구나.”이 목소리가 탈리온…?그자가 이곳까지 왔다고?“거듭 말한다. 물러가라.”검은 불덩이가 엘레나 옆에 떨어졌지만, 그녀는 꿈쩍 않고 정면만 응시했다.“탈리온, 더 이상 신의 노여움을 사지 말거라. 그분의 오래 참으심도 끝이 있다.”“네가 신을 아는 듯 말하는구나. 신은 온 차원을 통틀어 내가 가장 잘 안다.”“Vade retro.”굵고 단호한 엘레나의 한마디.긴박한 상황 속.검은 불덩이에 더 가까이 다가간 엘레나.나를 향해 손짓했다.그녀 옆으로 다가가자 붉은 돌이 요동치며 검은 불덩이를 붉게 물들였고, 그 불길은 곧 루시앙을 둘러쌌다.신물인 돌이 아이를 철저히 보호하고 있었다.순간.루시앙 몸속에서 빠져나온 흑점이 제단 바닥에 나뒹굴며 다시 한번 글자를 새겼다.‘난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 은빛 눈동자를 가진 이 아이만 내놔라.’“사제님!”“쉿! 염려 마십시오.”불안이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놈들의 소굴이 눈앞에서 우글거렸다.“그분 손에 맡깁시다. 그분께서 해결해 주실 겁니다.”엘레나의 확신에 찬 한마디 후.제단 불은 거대한 형체로 변해 루시앙을 다시 에워쌌다.바닥에 새겨진 글자는 불길에 삼켜지듯 지워졌고, 그 위로 새로운 문장이 새겨졌다.‘사랑하는 내 아들 루미엘! 인간 죄악을 이기고 일어나거라. 너의 때가 가까웠느니라.’신이 직접 새긴 글자 하나하나가 루시앙에게 빨려 들어갔고 곧 아들의 몸체는 눈부신 은빛으로 다시 빛났다.그때.신전 중앙 시계탑에서 지혜의 천사 음성이 들려왔다.“탈리온, 더는 욕심내지 말거라. 루미엘님은 그분의 아들이시다.”“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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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사제 마리안

좀 전의 소란이 끝나고 불타오르던 제단 불마저 완전히 가라앉자, 신전 안에는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불이 꺼진 곳.새로 만들어진 은빛 불꽃이 타오르며 그 자리를 메웠다.엘레나는 잠든 루시앙을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마리안 님.”제단 앞.그녀 가까이 다가갔을 때.내 손에서 조금 전까지 격렬하게 반응하던 붉은 돌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이번에는 제가 아니라, 마리안 님이 제를 올리셔야 합니다.”“제가요? 전…. 방법도 모르는걸요?”“몸이 반응해 줄 겁니다.”“네? 신께서 직접 약속하신 것은 어찌 되는 건가요?”그분의 약속.‘사랑하는 내 아들 루미엘! 인간 죄악을 이기고 일어나거라. 너의 때가 가까웠느니라.’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마리안 님의 훈련 과정입니다. 당신과 루미엘님의 연결선이 확고해야 하니까요.”“네.”“사실…. 제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당신께 사제의 일을 맡기는 첫 의식이 될 겁니다.”흰 사제복을 들고 온 카일.엘레나 손에 쥐어 주었다.제단을 둘러선 루마레스 부족들은 함께 손을 잡고 무언가를 읊고 있었다.인간계와 천계를 잇는 사제를 위한 기도라 했다.잠시 망설였으나, 이 또한 신의 뜻이라면 순종하는 수밖에.“루미엘님을 지키는 일이 사제의 첫 번째 덕목입니다. 가장 적합한 분이 왜 마리안 님인 줄 아시겠지요?”“네. 제가 사제를 이어받겠습니다.”내 아들을 위해서라면 사제가 아닌 더 힘든 직분도 맡았을 것이다.엘레나 시선이 루시앙 팔, 흑점이 사라진 자리에 머물렀다.“손을 그곳에 얹으세요.”엘레나 사제 말대로 아이 팔에 손을 얹은 순간.사라졌던 흑점이 옅은 형태로 다시 피어올랐다.흠칫 놀란 날 안심시키려 엘레나가 속삭였다.“탈리온은 생각보다 힘이 강한 자입니다. 신께서 그를 만드실 때 강한 힘을 넣어주셨거든요.”“그래서 신의 자리를 탐내고 반역을 저지른 겁니다.”카일이 감정을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내 앞에 지난날의 탈리온이 보였다.많은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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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홀로서기

능력도 없는 내가 이들의 평안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날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저들.난 해줄 수 있는 게 없는데….누구도 알아챌 수 없는 작은 신음으로 신을 찾았다.그리고.어디서 용기가 생겼는지 제단을 향해 손을 올린 나.아니….내 손은 이미 나도 모르게 올려져 있었다.“신께서 저를 사제로 삼으시길 원하신다면 제단의 불을 일으켜 주소서.”지축을 흔들듯 커다란 소리가 내 입을 통해 흘러나온 그때.믿기 어려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펑!모두 놀라 뒤로 물러섰다.마치 누군가 기름을 부은 것처럼 제단 불이 이전보다 더 강렬하게 타올랐다.“사제님!”갑자기 날 향해 엎드린 사람들.“이러지 마세요. 저는 그냥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일 뿐이에요. 제게 고개 숙이지 마세요.”“아닙니다. 당신은 신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사제란 걸, 우리 눈으로 확인했습니다.”낯설었다.이런 상황이….“어머니.”“루시앙!”뛰어가 아들을 안았다.“감사합니다.”두 뺨 기득 흐르는 눈물을 아이가 닦아주었다.“어머니! 울지 마세요. 왜 우시는 거예요?”깨어난 아이와 제단을 교대로 바라봤다.‘당신께서 제 기도를, 또 제 첫 의식을 받아주셨군요.’감격을 품은 것도 잠시.놀란 아이 질문에 답을 해야 했다.“제가 왜 이곳에 있어요? 숲을 살피러 갔었는데.”잠깐 망설였다.아이에게 말해야 할지….하지만 이제 내 아들로서가 아닌 공생을 시작해야 하는 루미엘이라면….운명적 상황을 알아야 했다.이야기를 차분히 듣던 아이 얼굴이 일그러졌다.“어머니, 제가 해결하고 싶습니다.”“아직은 나설 때가 아니다. 이길 힘을 키운 다음, 저들과 상대해야 한다.”"네. 그럼, 힘이 생긴 후엔 제가 모두를 보호할 겁니다.""물론이지. 하지만 그때가 지금은 아니야."아이가 뒤로 물러서자, 장로 한 사람이 다가와 루시앙 옆을 지켰다.문제는 신전 안에 모인 숲 사람들이었다.외부 침입자가 흑마법사들이란 걸 짐작한 이들의 동요가 심하게 일었다.게다가 이들 중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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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회귀자와 숲의 비밀

“막아라!”숲을 뚫고 들리는 카일의 긴박한 음성.나무들이 가지로 등을 밀어주며 순식간에 숲이 열렸던 자리에 도착했다.틈은 닫쳤지만, 아직 흑염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윙윙대는 소리가 귀를 울리며 심장에 파고들었다.숲의 기척은 침입자의 방향을 가르쳐 주는 이정표였다.엘레나는 그 방향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마리안 님은 이 소리 들리시죠?”“네.”“마리안 님과 제게만 들리는 겁니다.”카일은 몇 걸음 다가가, 틈이 열려 있던 자리를 살폈다.원래의 형태로 돌아온 자리였지만, 그는 쉽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저 길이 다시 열릴 수도 있습니까?”“가능성은 있습니다.”엘레나의 대답은 단정적이었다.“한 번 열린 길은 기억됩니다.”이 말은 이 숲이 더 이상 완전한 성역이 아니라는 것.그렇다면 우린 다시 숲을 이동해야 한다.숲의 외곽 틈이 완전히 닫혔지만.찢겨 나갔던 공간이 봉해지는 소리는 마치 거대한 짐승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무겁고 서늘했다.틈이 메워진 자리.친근하고 포근했던 루마레스 숲의 기운은 없어진 채, 날 선 경계심과 정체 모를 낯섦만이 감돌고 있었다.한 번 오염된 대지는 더 이상 우리를 품어주지 않겠다는 듯 차갑게 식어 버렸다.마음 위로 무거운 바윗덩이가 내려앉았다.또다시 정든 은신처를 버리고 숲을 통째로 옮겨야 한다는 부담감이었다.숲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신전.오랜만에 숲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아들은 뛰어와 카일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놈들이 좌표를 알아버렸어요.”“이제 도망은 지긋지긋합니다. 차라리 이곳 지형을 이용해 정면으로 맞섭시다.”당연한 듯 이동을 주장하는 이들과 끊임없는 이동으로 지친 자들은 항전을 외쳤다.“신께서 우리 편이라면 이기지 못할 적은 없습니다.”그들의 항전 의식은 점점 거세졌다.“이곳은 더 이상 머물 수 있는 숲이 아닙니다.”“그러니까 맞서 싸우자는 얘깁니다.”“우리 삶의 목표는 루미엘님 신성이 완전히 깨어나실 때까지 보호하는 겁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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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공생애의 시작점

엘레나 옆에서 바람의 머묾과 나무들 방향을 살핀 루시앙.분명 이전의 겁 많던 어린아이는 아니었다.침착하고 깊은 자태로 모두를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럽게 빛났다.“바람의 소리로 보아 지금 이동하는 게 맞습니다. 멀리서 흙빛 바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루시앙의 위엄있는 한마디에 모두는 홀린 듯 이동을 준비했다.다시 둥글게 제단 앞에 모인 우리.엘레나가 지팡이를 땅에 박자 익숙한 회오리바람이 발밑에서 솟구쳤다.거친 호흡소리와 흔들리는 지축.이젠 익숙해진 일상이기에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스스로 움직인 숲.순식간에 우리를 새로운 안전지대로 옮겨 놓았다.새로운 숲은 이전보다 더 깊고 은밀한 곳으로 흘러 들어간 듯했다.눈을 뜨자마자 들려온 새들의 지저귐.외부의 탁한 기척이 쉽게 스며들지 못할 만큼 평화로운 햇살.파도도 일렁이지 않는 잔잔한 바다가 이 세상 것이 아닌 듯 보였다.그동안 보았던 냇물과는 차원이 다른 광활함이었다.이곳이야말로 우리의 마지막 정착지가 될 것이라는 강렬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엘레나가 숲의 가장 깊숙한 중심부로 이끌었다.그곳엔 화려한 신전도 거창한 제단도 없었다.다만 수천 년 세월을 버틴 거대한 고목 위.작은 움막 하나가 숨어 있었다.카일이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먼저 다가간 순간.딱!바닥을 경쾌하게 튕기며 굴러온 돌멩이 하나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움막 안쪽, 줄로 결박된 왜소한 소녀가 보였다.“앗, 들켰네. 내가 너무 빨리 왔나?”경박한 목소리.소녀 형체를 하고 있었지만, 이 자가 소금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숲을 옮기는 긴박함으로 인해 그를 결박해 두었던 사실을 잊고 있던 우리.소외된 사실을 인지한 그였지만, 전혀 기죽지 않은 표정의 소금쟁이는 손가락 끝으로 계속 돌을 튕겨댔다.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은 돌은 기이한 궤적을 그리며 둥둥 떠다녔다.“어디 감히 이런 장난을 치는 게냐!”엘레나의 꾸지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입술을 삐죽이며 심술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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