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은빛 눈의 아이를 낳았다: Chapter 51 - Chapter 60

107 Chapters

51화. 바람조차 얼어붙은 절벽

왕국의 북쪽 경계.끝없이 이어진 설원 넘어.바람조차 얼어붙은 절벽 위에 두 개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무릎 꿇은 비올렛.찢어진 드레스 자락이 바위 위로 길게 흩어져 있었다.왕비의 자리도.명예도.권력도.모두 잃었지만.오직 그녀 눈동자에 증오만은 그대로였다.더욱 짙어진 그림자.불씨를 품은 숯처럼 자신을 내어 주고 있었다.“고개를 들어라.”심연에 가라앉은 목소리.검은 갑옷을 걸친 사내가 서 있었다.붉은 눈동자.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흑마(黑魔) 탈리온.재앙의 이름이었다.“루미엘을 내게 바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비올렛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그 계집과 루미엘을 무너뜨릴 힘을 주세요.”처절하게 갈라진 목소리.비올렛의 절규였다.“무너뜨린다?”탈리온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네가?”하지만.비웃음도 조롱도 아니었다.그보다 훨씬 오래되고 차가운 감정인 듯했다.깨문 입술에 피가 맺힌 비올렛.“무엇이든 하겠습니다.”“무엇이든.”“예.”침묵을 깬 절벽 아래 바람 소리.처절한 곡소리 같았다.비올렛을 향해 손을 내미는 탈리온.그의 손바닥 위로 검은 결정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검은 피를 머금은 심연의 마석(魔石).수많은 생명과 원한이 응축된 재앙의 조각이었다.“좋다. 내 군대와 심연의 마석을 주지.”탈리온 눈빛이 그녀를 태울 듯했다.“대신. 이번에도 실패한다면.”검은 손이 비올렛 턱을 들어 올렸다.“네 영혼은 내 것이 된다.”비올렛은 광기에 가까운 웃음을 지었다.“하하하하! 제 주인인 당신께 기꺼이 드리겠습니다.”인간계에 머물렀던 첫 번째 루미엘의 마지막 모습.탈리온은 그때를 기억 속에서 다시 끄집어냈다.자신에게 영혼을 팔고 타락했던 인간.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임당한 순간에도….신의 뜻에 순종했던 신의 아들.“그 아이와 나의 차이점인가...? 난 신의 뜻에 저항했고 그 아이는...”흑마(黑魔)가 되기 전.신의 가장 사랑하는 피조물이었던 탈리온.그가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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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악마의 돌

북쪽 경계 탈리온 요새.차가운 칼바람이 몰아치는 절벽 끝에서, 심연의 마석을 받아 든 비올렛은 의기양양했다.손끝에서부터 흘러드는 압도적인 마력이 그녀를 기괴한 흥분으로 물들였다.모르가나에게 투영됐던 탈리온.그 거대하고도 파괴적인 어둠의 존재를 마주했을 때.그녀는 흑마(黑魔)인 그에게서 희망을 봤다.자신을 옭아맨 비참한 운명의 사슬을 끊어낼 유일한 구원의 빛.그것을 잔혹한 어둠 속에서 발견한 것이다.하녀 몸에서 태어난 비올렛.그녀에게 평생을 따라다닌 낙인이자 저주였다.아버지 크로센 공작은 천한 신분인 하녀에게 태어난 자기 딸을 외면했다.가문의 수치라 여겨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남들 이목을 가릴 만큼의 거처할 곳과 필요를 공급해 주는 것으로 의무를 대신한 그였다.오만하고 차가운 저택 안에서, 하녀인 어머니는 크로센 공작 부인에게 심한 학대를 당하며 병으로 비올렛 곁을 떠나고 말았다.매질과 폭언 속에서 신음하던 어머니가 싸늘하게 식어가던 그 밤.어린 비올렛은 홀로 울부짖었다.그때 이후.그녀 머릿속을 지배한 유일한 소원.귀한 신분인 자들에게 복수하는 것뿐이었다.자신을 벌레만도 못하게 취급했던 고고한 가문의 인간들.그리고 피를 나눴음에도 방관했던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에게도 똑같은 고통을 돌려주리라 맹세했다.스스로 왕비가 되길 자청했고 왕국을 손에 넣으려는 계획을 세운 비올렛.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밖에 없음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왕의 여자가 되어 세상을 발밑에 두는 것만이 비참한 과거를 세탁할 유일한 계단이었다.다행히 왕국의 실권을 잡았던 탐욕스러운 공작가.가문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영악한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그녀를 왕비로 만든다면 더욱 강력한 힘을 갖게 되는 것이기에 흔쾌히 그녀를 왕비 자리에 올렸다.허울뿐인 가문의 이름을 등에 업고, 그녀는 마침내 왕궁의 가장 높은 곳에 발을 디뎠다.음습한 음모 속에서 유일하게 온기를 나누었던, 사랑하는 모르가나와 함께 왕국에 입성하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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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거부할 수 없는 계약

53화. 거부할 수 없는 계약“비올렛!”돌아본 그곳에 서 있는 자.유일하게 자신을 여자로 봐주었던 외모가 수려한 청년이었다.비올렛이 처음 사랑에 빠졌던 그 모습.그녀의 메마른 가슴을 뛰게 했던 어린 시절 모르가나였다.심연의 마석이 그의 육체를 가장 찬란했던 때로 돌려놓은 것이다.“당…. 당신은.”비올렛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내가 뭐 달라졌습니까?”“네.”“당신 눈빛…. 오랜만에 날 그렇게 보는군요.”밀려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모르가나에게 안긴 그녀.억눌러왔던 비극의 기억들이 해일처럼 밀려왔다.그들 사이 딸을 잃고 슬퍼하던 그날이 스쳤다.두 번째 검은 불길이 쏟아지던 밤.하늘에서 재앙이 빗발치고 탈리온의 분노가 극에 달하던 그때였다.앙리 재위 14년.루미엘이 일곱 살 되던 때.비올렛은 딸을 잃었다.자식의 차가운 시신을 안고 그녀 이성은 완전히 붕괴되었다.그 이후 더욱 폭주한 그녀.앙리를 흑마법 독으로 침상에 눕히고 왕국을 차지했다.미쳐버린 모성애가 그녀를 괴물로 만들었다.“모르가나, 그때 왜 갑자기 우리 아이가 죽었을까?”그의 품에서 눈물 흘리는 비올렛.“탈리온께서 제물로 가져갔을 겁니다.”모르가나의 목소리에 깊은 슬픔과 체념이 묻어났다.“당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네.”두 사람 눈물이 엉키며 서로의 상처를 확인한 순간.비올렛 눈가가 더욱 매서워졌다.슬픔은 이내 더 큰 증오로 탈바꿈했다.“그럴지라도 지금 내겐 흑마 탈리온의 힘이 필요해.”그녀는 마석을 움켜쥐며 광기를 드러냈다.“비올렛!”모르가나가 만류하듯 그녀 이름을 불렀지만, 비올렛은 완강했다.“내가 나와 아이를 가장 높은 곳에 올리려 했는데…. 마리안과 그 하찮은 핏줄이 모든 걸 망쳤어.”“이제 다 지난 일입니다.”“아니…. 내겐 아니야. 난 기어코 탈리온의 힘으로 루미엘과 마리안을 죽이고 왕좌를 되찾을 거야.”절규하는 비올렛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였다.지독한 원망 속에서도 결국 서로밖에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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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전쟁의 나팔 소리

집무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피로 뒤엉킨 자가 뛰어들었다.처참한 몰골의 그.카일이 검을 뽑아 전령 앞을 가로막았다.혹시 모를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무슨 일인가?”카일의 엄숙한 목소리가 방 안 가득 퍼졌다.“변란입니다. 국경 수비대가…. 국경 수비대가 전멸했습니다.”“뭐라고?”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카일 눈동자 역시 크게 흔들렸다.공포에 질린 전령은 붉은 봉인이 찍힌 서신을 꺼내 들었다.그의 손에서 피에 젖은 양판지가 사정없이 흔들렸다.“탈리온 요새, 수십만 대군이 왕국 본토로 진격하고 있습니다.”긴박한 순간.시간이 멈춘 듯 시야가 흐려지며, 미래의 눈이 내 앞에 다가왔다.그들 선봉에 선 군사들은 인간이 아니었다.살이 썩어 들어가는 시체와 생명체라 부를 수 없는 메마른 뼈들의 행렬.검은 안개와 함께 전진하는 유령들.분명 탈리온의 수하들이었다.기괴한 괴수들과 흑마법사들이 길을 열고 뒤로 늘어선 파멸의 군세.지옥의 무도를 떠올릴 만큼 소름 끼쳤다.“여자와 청년이 말을 타고 군대를 이끌고 있었습니다.”전령의 이어지는 보고였다.비올렛, 그리고 겉모습은 청년의 껍데기를 두르고 있지만,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하는 노파 모르가나였다.“비올렛이 기어이 탈리온의 힘을 끌어들이고 있네요.”“흑마(黑魔)와의 계약의 끝은 파멸뿐인 걸 모르나 봅니다.”“아뇨. 알 거예요. 모든 걸 잃은 지금, 끝까지 싸워보고 싶은 거겠지요.”영혼을 팔아 지옥문을 연 것이 분명했다.그녀가 쥐고 있던 국경 방어선.과거 왕비일 때 파악해 놓은 군사 기밀이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군대는 왕국의 비밀 보급로와 취약한 방어선만을 골라 무서운 속도로 돌파하고 있었다.마치 왕국을 단숨에 꿰뚫으려는 듯.왕국 전체가 전쟁의 공포에 흔들릴 때.집무실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루미엘이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어머니, 이미 대지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 지 오래되었어요.”루미엘이 창밖을 응시했다.그의 맑은 눈동자 너머로 신성이 은은하게 일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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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성전(聖戰)의 서막

카일이 직접 이끄는 본대가 국경으로 향하는 동안에도.왕국의 명운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불타는 마을.무너진 성벽.그리고 피난민들의 끝없는 행렬….흑마법으로 무장한 탈리온 군대.지나는 곳마다 대지를 썩게 만들고 생명을 앗아갔다.“살려주세요! 괴물들이 아이를 잡아갔어요.”사라진 아이들 모두.탈리온 제물로 바쳐졌다.“신이시여! 정녕 우리를 버리시나이까.”절망에 빠진 백성들.더는 그들의 아우성을 외면할 수 없었다.차가운 바람 사이로 백성들의 처절한 통곡이 끊이지 않았다.어둠이 깔린 광장.나는 갑옷으로 무장한 채 백성들 앞에 섰다.“마리안 님이시다.”“마리안 님, 우릴 구원하소서!”흐느끼던 백성들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그들의 절박한 눈동자.“여러분, 구원은 오직 신의 영역입니다.”가슴 깊숙한 곳에서 차오르는 슬픔이 날 각성시키고 깨어나게 했다.이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것이야말로 나의 책무임이 강하게 밀려왔다.“하지만 오늘,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여러분을 잔혹한 전쟁으로부터 지키겠습니다.”“마리안 님, 만세! 만세!”흩어졌던 마음들이 뭉치기 시작했다.백성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가 낡은 갑옷을 입고 광장 한복판으로 몰려들었다.“우리도 전장에 나가겠습니다.”전장에 나가길 자원하는 그들 앞에.달빛을 받고 서 있는 수천 마리의 백마.천계의 페가수스를 닮아 있었다.“신물이 여러분을 지켜줄 것입니다.”품 안에서 신의 붉은 돌을 꺼냈다.결연한 의지로 돌을 조각내 백성들에게 급히 나누어주었다.신기하게도 쪼개질수록 더욱 커지는 붉은 돌.빛을 잃기는커녕 더욱 거대하고 영롱하게 타올랐다.백성들을 따스하고 강한 보호막으로 감싸 안은 붉은 돌.영롱한 빛이 사람들 곁에 머물렀다.“루미엘 왕국의 백성들이여!”나의 우렁찬 외침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두려워 하지 마라! 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순간 전사가 된 백성들 눈빛이 달라졌다.왕의 어머니가 직접 최전선에 나섰다는 사실만으로도 무너지던 사기가 하늘을 뚫을 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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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검은 안개

카일 외침에도 불구하고, 공포에 질린 병사들은 도망치고 있었다.균열이 생긴 전장.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둑과 같았다.왕국군의 패색이 짙어 있을 때.절망이 전장을 집어삼키기 직전.지원군인 우리가 도착했다.피로 얼룩진 갑옷을 입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카일.처절하게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그가 보였다.“...카일!”전장의 소음 속으로 그의 이름을 흘려보냈다.카일이 기적처럼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아주 먼 거리였으나 오직 서로만이 선명하게 보였다.그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내 모습이 담겼다.나는 말없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가슴에 새긴 맹세.반드시 이 전쟁을 끝내겠다는 약속.그리고 반드시 함께 살아남겠다는 서약이었다.카일 입가에 안도와 확신이 담긴 미소가 스쳤다.순간.무너져 가던 왕국군 진영에서 천둥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마리안 님이다.”“왕국의 어머니께서 지원군과 함께 오셨다.”왕의 어머니이자 신의 사제인 나를 본 전사들.눈빛에 일제히 푸른 생기가 돋으며 밀려오던 공포가 씻겨나갔다.작열하는 붉은 신물을 지팡이 끝에 얹어 높이 들어 올렸다.“루미엘 왕국 전사들이여!”우렁찬 외침이 전장에 울려 퍼지자, 모든 시선이 내게 쏠렸다.“승리는 우리 것이다. 지체치 말고 공격하라!”“와아아아!”“마리안을 위하여!”“루미엘 왕국을 위하여!”왕국군 전체가 하나의 거대 검이 된 순간이었다.“반격하라!”지팡이를 바닥에 세차게 내리치자, 굉음과 함께 폭발적인 힘이 터져 나왔다.“전군, 돌격!”정렬을 맞춘 수만의 병력이 일제히 앞으로 나가자, 대지가 요동쳤다.그때.어둠을 등지고 선 두 사람,.모르가나와 비올렛이었다.“직접 기어 나왔구나, 천한 계집.”비올렛이 냉소를 흘렸다.“마리안, 생각보다 빨리 전투태세를 갖추었구나. 제법인데.”엘레나 대사제가 남기고 간 지팡이를 다시 한번 높이 들어 올렸다.“비올렛, 신의 진노를 받아라.”“하하하! 가소로운 것.”대지를 향해 두 손을 뻗은 비올렛.평원 곳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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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은빛 날개, 예언의 시작

왕국의 가장 높은 곳.성벽의 끝자락에서 홀로 전장을 보는 자가 있었다.국왕 루미엘이었다.머나먼 국경의 지평선은 이미 참혹한 아비규환의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인명을 앗아간 죽음의 악취.인간 내면에 잠식된 절망과 공포.금단의 흑마법과 태고의 신물이 격돌하며 뿜어나온 비명이었다.탈리온의 파멸적인 힘으로 비대해진 그의 수하들.마를 줄 모르는 군세처럼 밀려들고 있었다.대지를 가득 채운 흑마(黑)의 진격.그 자체로 재앙이었다.참상을 마주한 루미엘 얼굴이 굳어갔다.그의 은빛 눈동자는 미동조차 없었다.“인간계에 파멸만이 허락되었단 말인가.”나직한 탄식 속에서.백성을 구원하겠다는 맹렬한 열망.어머니와 카일의 걱정으로 눈시울이 붉어졌다.그의 간절함이 영혼에 닿았다.거룩한 운명의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듯, 고결한 은빛이 해일처럼 번져 나갔다.서늘하면서도 따사롭게….인간은 감히 우러러보지 못할 지고한 신성이었다.왕궁 탑을 감싸고 있던 검은 기류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천계의 문이 열리며, 하늘을 가른 빛의 기둥이 폭포수처럼 내려와 그를 감쌌다.낮의 태양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광채였다.도성에 남아 신음하던 백성들.왕궁 위로 쏟아지는 찬란한 빛을 보며 무릎 꿇었다.파괴된 성벽 아래에서.불타는 집의 잔해 속에서.사람들은 손을 모았다.이 잔혹한 전쟁이 종식되기를….간절히 염원하고 또 기도했다.그들 눈물이 은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났다.“천계의 문이 열렸다.”“신의 아들이 이 땅에 강림하셨다.”지켜보던 자들의 경악과 경탄이 뒤섞인 함성 속에서.예언의 표식이 발현되었다.천계의 증거.루미엘 등 뒤로 눈이 부시도록 장엄한 은빛 날개가 펼쳐진 것이다.빛으로 빚어진 깃털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듯.신성을 뿜어냈다.“나는 인간계에 내 아버지, 신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태어났다.”스스로 신의 아들임을 만방에 선포한 루미엘.전례 없는 빛의 폭발이 도성을 뒤흔들었다.빛의 잔상을 부수며 하늘로 날갯짓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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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신의 아들과 흑마(黑)의 격돌

그것은 엄숙한 주문이자 역사를 바꿀 선언이었다.오른손을 가볍게 뻗자, 그를 감싸고 있던 은빛 날개가 다시 한번 크게 요동쳤다.수만 개 깃털이 날아올라 각각 거대한 창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하늘을 가득 메운 은빛 투창들이 적들을 향해 일제히 겨냥되었다.“빛이여, 깨어나라.”루미엘 명령과 함께.하늘을 메웠던 빛의 창들이 일제히 쏟아져 내렸다.대지를 정화하는 신성한 비.어둠을 몰아내는 벌이었다.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탈리온의 마른 뼈들이 빛의 창에 뚫려 한 줌 재로 변해갔다.단 한 번의 몸짓으로….압도적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왕국 전사들.승리의 기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루미엘은 천천히 대지로 발을 내디뎠다.그의 발이 피로 물든 흙에 닿는 순간.주변 핏자국이 정화되며 초목의 생기가 돋아났다.루미엘은 신검을 뽑아 들었다.은빛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을 내고 있었다.루미엘은 오직 전방의 어둠만을 응시했다.모든 파멸의 원흉 탈리온의 본진이 있는 곳을 향해.“운명은 결코 어둠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그의 선언은 예언의 시작이었다.악의 군세를 향한 신의 예언….“비올렛.”한 흑마법사가 다급히 외쳤다.“우리 요새에 끌려왔던 소년 시절 루미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습니다!"”알고 있다.“붉은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는 모르가나.그 역시 놀란 눈치였다.왕궁에서 탈출한 이후 단 한 번도 루미엘을 잊은 적이 없었다.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날개가 돋친 루미엘.아들이 모두에게 신성을 드러내며 나타나자, 혼비백산 제 갈 길을 찾는 흑마법사들.이와 상반된 왕국 병사들은 신이 난 듯 하늘만 응시하고 있었다.“성장이 너무 빠르다. 지금 죽이지 못하면 정말 끝이겠구나.”탈리온의 탄식.그 또한 괴성을 지르며 몸을 뻗쳤다.흑익(黑翼).신과 대항하며 검게 타들어 간 검은 날개가 다시 돋아 올랐다.지켜보는 이들의 웅성거림은 공포로 변해 있었다.처음 인간계에 내려왔던 루미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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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신과의 약속

하지만.지금, 이 시간.모르가나에게 필요한 건 흑마 탈리온의 힘뿐이었다.“그 입 닥쳐라!”모르가나가 광인처럼 날뛰며 루미엘을 향해 또 한 번 돌진했다.그자의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다 괴물에 가까웠다.흑마법사들이 동시에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수백 개의 마법진.수천 개의 저주.그리고 검은 안개.전장이 순식간에 어둠으로 뒤덮였다.“전쟁을 루미엘 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이미 신성을 회복한 루미엘 이지만.완전한 모습은 아니었다.내 결심을 눈치챈 카일이 다가왔다.“마리안, 위험합니다. 지금은 루미엘님께 맡기고 지켜봅시다.”“위험한 게 무슨 상관이에요? 흑마법사 마법진을 그대로 두면 루미엘의 신성을 잃게 될지도 몰라요.”“마리안, 루미엘님은 신의 아들이십니다.”그랬다.내 아들이지만.내 아들이 아닌….“카일, 이건 내 예감이 맞아요.”“마리안….”내 결의에 찬 모습에 그도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대사제 지팡이를 움켜쥐었다.그리고 전방을 가리켰다.“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겠지요?”그의 눈이 번뜩였다.“루미엘이 모르가나를 상대하는 동안, 우리는 흑마법사와 적군을 무너뜨린다…?”결심한 듯 포효했다.“전군! 왕국의 미래를 위해 싸워라.”전사들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잡고 검을 들어 올렸다.“돌격하라!”왕국의 군대가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반대편 진영.비올렛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이게 무슨 마음일까?”분명 모르가나는 강한 모습으로 신의 아들인 루미엘과 비등하게 싸우고 있었다.하지만.행복하지 않았다.등에 식은땀이 흘렀다.***그 시각.루미엘도 모르가나 공격을 막아내며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검은 마력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더 깊고.더 오래된 존재.그리고.더 위험한 존재.‘탈리온이 아직 절대 악을 가지지 못했을 텐데….’그 순간이었다.루미엘 가슴에서 푸른 빛이 강하게 쏟아졌다.신성이 스스로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낯선 기억과 함께….끝없는 빛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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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틈도 없는 철옹성

다급한 탈리온의 목소리.하지만.이미 마석은 루미엘 심장에 정통으로 파고들었다.탈리온의 흑마력으로 완성된 심연의 마석.흑마 탈리온의 힘이 응축된 돌로 인해 주인인 그자가 책임져야 했다.“안돼!”사라지는 탈리온.천계와 인간계 중간 지역.차원의 회랑으로 숨어들었다.탈리온이 사라진 자리.흑마력으로 결성된 군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무슨 일인지 나의 군대도 찾아볼 수 없었다.“루미엘! 루미엘?”내 아들 루미엘 마저 사라지고 없는 지금.무엇에 홀린 듯 혼란스러웠다.“안돼! 루미엘!”나와 카일은 드넓은 국경을 헤매고 다녔다.“카일, 내 아들 루미엘을 찾아야 해요.”“마리안, 걱정하지 말아요. 그분은 신의 아들이십니다.”“그런 소리 이제 그만 해요. 무슨 신의 아들이 두 번씩이나….”뒷말이 입을 통해 새어 나오지 않게 손으로 막았다.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으니까.땅으로 떨어진 모르가나는 비올렛 품에 안착했다.“모르가나, 난 어찌해야 해. 믿었던 탈리온마저 사라지고 말았어.”“후퇴합시다. 론도 왕조로 일단 피신해서 내일을 기약합시다.”“우리에게 내일이 있을까?”“그럼요. 당신과 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왕국을 차지해 봤잖아요.”“그랬죠. 가요. 론도 왕국으로!”그들을 체포하려 뒤따르는 카일의 팔을 잡았다.“카일, 그냥 두세요. 루미엘이 사라진 지금 저들을 붙잡아서 뭐 하게요.”그렇게 비올렛과 모르가나는 서로를 의지한 채 잔악무도한 론도 왕조로 향했다.뒤를 돌아본 모르가나가 쓴웃음을 지었다.그 웃음의 의미를 나중에야 알았다.“루미엘! 루미엘…!”휘청거리던 나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세상이 지독한 암흑으로 물들었다.‘아니야.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정신이 아득해지는 지금.심장이 터질 듯한 분노와 슬픔이 나를 붙잡았다.내 아들, 루미엘.겨우 살려내어 왕좌에 앉혔거늘, 또다시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신이 내린 운명이라는 핑계로 내 아들을….그 참혹한 전쟁에 또다시 바칠 순 없었다.‘신이시여,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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