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은빛 눈의 아이를 낳았다: Chapter 11 - Chapter 20

107 Chapters

11화. 숲의 심장으로

뜨거운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흘렀다.“그건 그분만이 아실 테지요. 당신을 믿고 루미엘님을 맡기셨으니 이 신물은 당신이 잘 간직하십시오.”엘레나 목소리엔 오랜 유산을 건네는 무게가 담겨 있었다.루마레스 사제들에게 전해 내려오던 붉은 돌은 루미엘 어머니를 위한 보호석.어느 순간에도 루미엘을 지키라는 일종의 명령과도 같은 표징이었다.돌을 손에 쥐는 순간.삶은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그래. 어떤 어려움이라도 반드시 이겨낼 거야. 주어진 운명이라면….’가장 밑바닥 삶이었던 나..한낱 궁의 시녀였던 내가 반신반인 루미엘의 어머니라니….회귀는 신이 준 선물이며 또 다른 복수의 서약이었다.하찮은 자를 들어 귀한 존재로 옮기시는 오묘한 그분의 뜻.단두대의 차가운 칼날, 왕의 침묵, 피로 젖은 궁의 돌바닥.그 모든 고통은 돌고 돌아 나를 이 자리로 이끌었다.신이 준 두 번째 삶.그 삶의 목적은 분명했다.아들, 루미엘을 지키고 세상을 바꾸는 것.***지하 신전은 작은 창으로 밖을 볼 수 있었다.바위벽 사이에 뚫린 틈으로 하늘빛이 스며들었다.불안에 떨던 숲 사람들을 위로하는 푸른 빛과 아이 눈동자에서 뿜어 나오는 은빛이 지하 신전 모두의 마음을 평온케 했다.좁은 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카일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전장의 소리와 가끔 모르가나의 소름 돋는 음성이 들렸다.날카로운 웃음소리.피를 부르는 주문.숲 밖 어딘가에서 흘러 들어왔다.닫힌 숲의 문은 하늘로 큰 장막을 걸쳐놓은 듯 견고했다.보이지 않는 장막이었지만, 흑마법사조차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보호막이었다.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또 다른 이적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닫힌 문이 스스로 틈을 벌려 루마레스 전사들을 빨아들이고 다시 굳게 닫힌 것이다.그렇게 숲은 허락된 이들만 품고 다른 자들은 토해냈다.구석에 웅크려 앉은 내 얼굴에 아이의 손이 스쳤다.작지만 따뜻한 손길이 어미를 안심시켜 주려는 듯했다.그때였다.지하 신전 문을 열고 부족의 전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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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사라진 내 아들, 루시앙

제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시간의 흐름을 알려 주었다.인간과 신의 영역.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는 착각이 든 것도 그 음성으로 인함이었다.신전 가장 밑바닥, 지혜의 샘이 있어 멀리까지 물을 길으러 갈 필요도 없는 곳.세상에서 가장 안전지대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숲 밖을 자유로이 왕래하는 소금쟁이 요정이 궁의 소식을 가끔 전해 주었다.앙리 왕은 지병인 우울증과 불면증이 심해졌고 더 이상 여자를 찾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별궁이 불타 폐쇄됐고 왕비는 계속 나와 아들을 찾으려 혈안이 돼 있다고 했다.바깥 세계와 차단된 생활에 익숙해질 즈음.어김없이 찾아오는 소금쟁이 요정.때론 눈물을 글썽이며 때론 박장대소하며 그의 말은 영웅담이 되어 쏟아졌다.숲과 인간 세상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그.우쭐대는 모습이 처량하기까지 했다.굳이 몰랐어도 되는 일들을 들으면 마음이 무너졌다.지워졌다고 생각했던 기억들.또다시 생생하게 스멀스멀 나를 옭아맸다.산짐승의 죽음도 그런 무표정한 모습으로 바라보진 않았을 것이다.요정이 왕궁 소식을 전해 줄 때마다 심장에 박제된 왕의 얼굴이 분노와 함께 끄집어내졌다.***루마레스 숲에 들어온 지도 다섯 해가 흘렀다.이름도 없이 죽임당했던 아들은 신의 빛.루시앙이란 멋진 이름도 갖게 됐지만 반신반인(半神半人) 아들을 인간의 이름으로 부르는 자는 어미인 나밖에 없었다.우린 아이 호칭을 혼용하는 것에 익숙했다.아들이 반신반인(半神半人) 루미엘이 아닌, 그냥 인간으로 살기를 바랐다.인간과 신의 고뇌와 책임.저 어린 것이 감당하기엔 벅찰 것 같다는 엄마로서의 얕은 생각이었다.아마도 그런 마음이 호칭에 스며든 듯했다.다행히 신의 피를 가진 아이였지만 자랄 때만큼은 여느 아이처럼 평범했다.평범한 아이처럼 자라는 걸 바란 나로서는 감사한 일이었다.아이 때 추억과 기억이 평생 지탱할 힘을 주리란 믿음에서였다.카일은 우리 모자를 위해 헌신적이었다.물론 다른 이들에게도 친절한 그였지만.루시앙에게 아버지의 빈 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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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반신반인(半神半人) 루미엘의 각성

몸이 지면에서 떨어진 듯 착각이 일렁였다.발끝으로 향한 시선.“오우, 맙소사!”여긴…. 성굴(聖窟) 에테르?인간과 신의 경계에서 생명이나 신성한 힘이 생성되는 곳.몸을 묶어두던 대지의 무게가 사라진다는 동굴이었다.마치 깊은 물 속을 걷듯 몸이 가볍게 떠오르며 폐부 깊숙이 향기가 전해졌다.온갖 고뇌가 사라지며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평온으로 정결해진 기분.오묘함이었다.푸른 안개가 더욱 짙어진 공간에 들어서자, 한가운데 큰 바위가 보였다.바위 표면에는 은빛 문양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카일이 경이로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믿을 수 없습니다. 성굴(聖窟) 에테르가 출입을 허락하다니….”분위기에 압도당한 채 멍하니 서 있는 우리 곁으로 아이가 다가왔다.“사부님! 어머니!”우린 곧 또 한 사람이 이 공간에 있음을 알게 됐다.“루미엘님을 이곳에 모셔도 되겠습니까?”엘레나였다.“이제 신께서 루미엘님의 신성을 조금씩 돌려주시려나 봅니다.”손에 들린 지팡이가 강한 빛을 내며 꿈틀거렸고 상기된 얼굴로 의식을 준비하는 그녀였다.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눈빛엔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호기심 많은 루시앙이 잰걸음으로 바위를 향해 다가갔다.그녀가 아이를 가장 높은 제단에 올려놓는 순간.은빛 섬광이 아이에게 빨려 들어갔고 푸른 광채가 몸을 휘감았다.거친 호흡으로 빛을 내뿜는 바위.카일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광경을 주시하는 것밖에 없었다.아이 얼굴빛으로 인해 서 있기조차 버거운 상황.손등으로 시야를 가리며 제자리에서 버틸 뿐이었다.두 손을 높이 들어 무어라 외치는 엘레나.언어는 낯설었지만, 강한 보호막이 아이와 나를 둘러싸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루미엘님!”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엘레나.카일의 눈빛 또한 경외로 가득 차 있었다.“우린 신의 피를 이어받은 루미엘님을 지키는 부족입니다. 신께 환생하실 루미엘님을 지키라 명령받은 마지막 후손입니다.”두 사람은 루미엘을 향한 루마레스 부족의 맹세를 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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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우리의 삶이 역사가 될 테니까

듣는 모두가 숙연해졌다.“사제님은 어떤 이유에서든 오래 사실 겁니다.”“허허! 제 나이가 몇인 줄 아십니까?”엘레나 사제의 나이는 추정하기 힘들었다.옆을 지키던 카일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마리안 님이 맞춰 보시겠습니까?”“제가요…?”“어디 잘 맞추시는지 볼까요?”“음…. 일흔 조금 넘으셨을 것 같습니다.”“일흔이요? 허허!”하늘을 잠시 주시하던 그녀가 루시앙을 바라보며 답했다.“이제 조금 있으면 삼백 살 됩니다.”“예…?”“이 늙은이 생전에 루미엘님을 보내주시다니…. 지금도 믿기지 않습니다.”놀란 나를 바라보며 엘레나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루마레스 부족은 인간보다 수명이 깁니다. 더구나 사제직을 맡은 자는 더욱 그렇지요.”내 시선이 자연스레 카일에게 옮겨졌다.“제 나이가 궁금하십니까?”“아…. 아닙니다.”마음을 들킨 것 같아 민망함에 고개를 심하게 저었다.“저는 어립니다.”‘휴…!’나도 모르게 안도감이 들었다.“아직 백 살이 조금 안 됐으니까요.”“네?”왠지 모를 실망감과 당혹스러움.카일에 대한 내 마음은 감출수록 조금씩 커져만 갔다.“신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 조금 더 첨가물을 넣으신 듯합니다.”“예…?”“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아직 멀쩡합니다.”“마리안 님, 안심하셔도 되겠습니다.”어느 전사의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나와 카일을 번갈아 바라보던 모두의 웃음소리가 숲을 가득 메웠다.***전사들과 장인들은 능숙한 솜씨로 집을 지었다.제법 훌륭한 집이 그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아이는 새롭게 단장된 곳에 잘 적응했다.성굴(聖窟) 에테르에서의 변화 이후.아이 골격은 눈에 띄게 커졌고 성인 남자 키만큼 성장했다.신의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숲 사람들 모두는 알고 있었다.은빛 눈의 광채가 빛이 없는 곳에서, 주위를 환하게 비출 만큼 밝게 빛났기 때문이었다.아이가 신의 모습으로 완전히 변하기 전.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훗날 천한 시녀 출신이지만 신에 의해 높이 들린 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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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모두 바쁜 하루를 보낸 터라 아침부터 보이지 않던 그를 지금에서야 찾았다.“오늘은 물길 따라 순찰 임무를 수행할 겁니다.”“어차피 요정은 우리 음식도 안 먹는걸요. 이 자리가 거북하겠지요.”소금쟁이 요정이 먹는 유일한 음식은 석청이었다.이른 새벽부터 진득한 석청을 걷을 때.그의 흥얼거림을 들으면 음산한 기운이 스며들었다.감정 기복이 심한 그에게 익숙해지지 않는 건 나뿐이었다.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그에 대해 자세히 아는 이는 엘레나 뿐인듯했다.차원 회랑에서 곁을 스쳤던 소금쟁이 요정.숲으로 인도하고 경계를 맡는 전령사인 그였지만,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자였다.둔갑술이 뛰어나 숲 밖에선 사람이나 다른 동물, 심지어 벌레로 바깥세상을 살폈다.이방인처럼 섞이지 못하고 혼자이길 좋아하는 그.맡겨진 임무보단 다른 일에 흥미를 쏟느라 엉뚱한 정탐만 하고 돌아올 때가 많았다.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그는 요사이 수상한 행적이 많았고 늘 무언가에 홀린 듯 살아갔다.그를 엘레나는 신뢰하는 눈치였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항상 초조한 그의 눈빛과 그림자 없음이 꺼림직했다.그는 그날 숲에 돌아오지 않았다.다음 날.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기록을 위한 종이를 만들 겸 오랜만에 아이들과의 나들이를 위해서였다.나뭇잎으로 배를 만들어 흐르는 물에 띄웠다.언젠가 궁으로 돌아가 넓은 세상을 통치할 루시앙이지만.지금은 또래 아이가 느낄 수 있는 추억을 차곡차곡 심어주고 싶었다.아이들에게 작은 나뭇잎 배는 훌륭한 장난감이었다.물결 따라 움직이는 배를 쫓으며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카일은 내일부터 시작되는 수련을 위해 그들의 움직임을 빠짐없이 주시하고 있었다.숨은 골짜기 가장자리.굵은 나뭇가지가 만든 아치 아래 자리를 폈다.이슬이 걷히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종이 만드는 작업을 서둘렀다.짙은 안개가 걷히며 햇살이 나무 사이로 스며들었다.전사들이 이끼 깔린 숲에 나무통과 돌절구를 설치해 준 후.손을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종이 만드는 일에 집중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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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흔들리는 마음

아니다.정신 차리자.난 루시앙을 왕국의 지배자로 올릴 때까지.어느 한 사람의 사랑만 갈구해선 안 된다.내 인생보다 더 중요한 건 내 아들 루시앙.완전한 반신반인(半神半人) 루미엘로 변화되기 전까지, 내 인생은 없다.나의 다짐이 카일에 대한 마음을 힘겹게 밀어냈고 그의 품 또한 거부했다.그의 품을 벗겨내며 아무 일 없던 듯 벌떡 일어나 옷 매음 새를 가다듬었다.나를 놓지 않으려는 그의 몸짓.나 또한 망설여졌지만.그의 팔을 강하게 뿌리쳤다.이런 감정 따윈 내게 사치였으니까.다시 날 향해 다가온 그.이번엔 더욱 강하게 그의 팔을 밀어냈다.그리고.잠깐의 어색한 정적이 흐른 뒤.그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마리안 님, 전….”“카일, 우리 여기까지만요. 그리고 왜 회귀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신 겁니까?”카일은 신께 나와 아이를 보호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자였다.그걸 생각 못 했던 내가 어리석었다.“미안합니다. 당신의 힘듦을 끄집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이 사람은 날 먼저 생각하는구나….’고마운 마음이 목까지 차올랐다.“그럼, 엘레나 사제도 알고 계신 가요?”“네. 사제님과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네….”“당신이 힘들어할 때마다 마음 아팠습니다.”‘내 힘겨움 때문에 마음 아팠다고?’혼자 잘 감당했던 슬픔과 설움이 통곡으로 터져 나왔다.이번엔 그가 날 더욱 깊이 안아주었다.아니, 내가 먼저 그에게 기댔는지도 모른다.카일 품속은 편안하고 따듯했다.한참을 그에게 안겨 슬픔을 토해낸 후.그의 입술이 나의 그것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그때.분명 나도 원했지만 팔은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어미의 다짐과 한 여인으로서의 갈망이 뒤엉키며 다시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미안합니다. 나도 모르게, 가 보겠습니다.”민망한 듯 돌아선 그를 조용히 바라봤다.분명 나도 이 남자를 원하는데….누군가를 마음에 품는 게 두려웠다.어쩌면 영원히 그럴지도 모른다.“어머니.”반쯤 눈을 뜬 루시앙이 씩 웃으며 일어났다.“저는 두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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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차원 회랑을 지키는 문지기 종족

앙리 재위 14년 어느 날.탈리온 신전의 검은 불길이 다시 한번 요동쳤다.7년 전 루시앙이 태어났던 그날 이후 두 번째였다.거대한 검은 연기는 온 왕국을 뒤덮었고 백성 모두를 불안 속으로 가둬 놓았다.놀란 비올렛 왕비와 모르가나.한걸음에 수중 신전으로 달려갔다.재빨리 단도로 손바닥을 가른 모르가나.탈리온의 사람임을 증명하는 검은 피를 제단에 뿌렸다.겨우 분노가 가라앉은 탈리온.곧 불길이 잔잔해지며 온 나라에 퍼졌던 연기도 사라졌다.“모르가나, 이게 무슨 일입니까?”“이렇게 커다란 진노는 한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글쎄 그 이유가 뭐냐고 묻지 않습니까?”모르가나의 한숨이 제단에 닿으며 신전 전체가 흔들렸다.다시 자기 피를 뿌리며 흑마법 춤을 추는 모르가나.탈리온의 영혼을 불러드리는 그들만의 의식이었다.“비올렛, 위를 봐요.”신전 지붕이 열리며 루마레스 숲이 보였다.“저긴….”“마리안과 앙리 아들이 숨어 들어간 곳인 듯합니다.”“탈리온께서 저길 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겁니까?”숨죽이고 숲을 샅샅이 관찰한 둘은 한동안 말을 이을 수 없었다.루시앙의 은빛 눈동자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루…. 루미엘?”비올렛은 털썩 주저앉았다.“루미엘이 환생했다고? 게다가 마리안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다니….”모르가나도 두려움에 떨며 은빛 눈동자만 주시했다.“천한 계집 몸에서 나온 저…. 저 아이가 왜 은빛 눈동자를 갖고 있는 겁니까?”“예언대로 입니다.”가장 낮고 천한 자로 환생한다는 예언.루미엘에 관한 이야기였다.“마리안에게 나온 아이가 왕국을 통치하게 된다는 말입니까?”“그대로 실현되게 둘 순 없지요.”“묘책이 있습니까?”“탈리온님의 힘으로 없애버려야지요. 예언의 사내아이를.”“모르가나, 당장 우리 딸을 위해 저 아이를 없애주세요. 이 왕국은 우리 공주 것입니다.”“당연하지요. 비올렛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기필코 찾아내 없애겠습니다.”깊은 상념에 빠진 왕비.힘겹게 말을 이었다.“루마레스 숲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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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소금쟁이 요정의 비밀

오래 전 억울하게 몰살된 요정 종속은 천계로 들어가는 길목, 차원 회랑에 멈춰 섰다.그들은 천계 입성을 거부한 채 인간계로 돌아가 원수를 갚겠다고 신께 호소했다.심판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음을 부인한 행위.신을 향한 반역이었다.분노한 신은 이들에게 천계와 인간계 중간 지대인 오직 차원 회랑에만 기생할 수 있는 운명을 부여했다.죽지도 살지도 않은 존재인채로 차원 회랑에 그들을 가둔 것이다.“죽은 자가 영혼과 육체를 모두 지녔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상일 수도 있고요.”“말로만 듣던 희귀 생명체가 이자라고요?”순간 요란하게 울리는 굉음.제단 아래 탈리온 사자들이 몸부림치는 소리였다.겁에 질린 소금쟁이가 심하게 몸을 떨었다.“저…. 저 아래서 누가 날 부르고 있어.”모르가나 입가에 비열한 웃음이 흘렀다.빛과 어둠을 동시에 지니고 차원 회랑에서 태어난 요정.거듭된 삶과 죽음을 기억하며 인간, 동물, 벌레 모습을 그대로 흡수했다.때론 죽은 자로 때론 산 자로.천계 입성 전.잠깐 인간의 육체로 머무는 차원 회랑.그 곳의 육체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문지기종족에게 신이 부여한 유일한 위로였다.다중 영혼과 육체를 가진 그를 차원 회랑에서 납치한 탈리온.요정을 통해 둔갑술을 완성시키고 온갖 어둠의 술법을 가르치며 흑마법사로 키웠다.탈리온의 모든 악을 흡수한 요정이 어둠에 완전히 점령당할 무렵.그 안에 꺼져가던 빛은 마지막 힘을 다해 신께 도망쳤다.문지기종족은 빛과 어둠, 인간과 천계 어느 곳에도 종속될 수 없는 자들이었기에, 어둠에 물든 자신을 구해 줄 유일한 존재는 신밖에 없음을 반사적으로 알고 있었다.요정을 가엾게 여긴 신은 어둠을 없애고 빛의 모습만으로 새로운 육체를 만들어 주었다.작고 물 위를 뛰는 생명체.바로 소금쟁이였다.신은 힘들어하던 요정의 기억을 지우고 숲에서 살 수 있게 허락했다.옛일을 기억 못 하는 요정은 매일 둔갑술로 다른 이의 육체를 불러들였다.그날 이후.탈리온 사자들에게 소금쟁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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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벌어진 작은 틈

피가 검게 변한 요정.무엇에 홀린 듯 탈리온 제단을 향해 덥석 엎드렸다.지나치게 마른 체구의 소녀 입에서 굵직한 사내와 여자아이 목소리가 번갈이 터져 나왔다.“너는 탈리온의 후예니라. 흑마법사로서 임무를 다하거라.”“네! 명심하겠습니다.”두 인격이 요정 몸에서 꿈틀댄 첫날이었다.풀려난 소금쟁이 요정은 허둥지둥 신전을 빠져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모르가나, 요정도 우리 편이 되었는데 얼굴빛이 왜 안 좋은 겁니까?”“요정 어딘가에 신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야지요.”탈리온 신전에서 멀어지며 알 수 없는 울걱함이 요정을 지배했다.루마레스 숲이 다가올수록 전에 느끼지 못했던 두려움이 마음을 두드리고 있었다.탈리온 피가 몸속 가득 침투된 요정.둔탁한 걸음으로 숲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뒤를 따라붙은 모르가나와 흑마법사들.요정이 움직일 때마다 몸에 담긴 악의 피로 신호를 탐지하고 있었다.수문을 지난 요정은 곧 숲 외부에 도착했다.푸른 빛이 요정을 마중 나와 있었고, 주위를 살핀 여린 소녀의 모습인 그는 열린 숲의 장막에 들어섰다.그리고.벌어진 작은 틈 사이로 누군가 지팡이를 스르륵 밀어 넣었다.모르가나였다.요정이 장막을 통과하자, 숲의 기운이 폭발하듯 솟구쳤다.푸른 안개가 그의 발끝에서 피어났고 거대한 나무뿌리들이 천천히 움직였다.숲의 장막은 모르가나와 흑마법사들 기운을 감지했지만.이미 틈이 벌어진 뒤였다.푸르렀던 숲 하늘이 탈리온의 피로 물들며 검푸르게 변해갔다.***숲 아이들 첫 수련일.아침 공기가 차가웠다.밤새 쌓인 이슬이 나무껍질에 내려앉아, 손끝에 닿으면 또르륵 흘러내렸다.어젯밤 내내 긴장했던 마음과 달리 아이들 얼굴엔 설렘이 가득했다.카일은 아이들 도착하는 순서대로 허리엔 단도, 어깨엔 활을 매줬다.나무뿌리에 걸터앉은 그의 눈빛이 새벽을 가르듯 날카로웠다.심각한 표정의 그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카일, 무슨 일 있어요?”“아…. 아닙니다. 무슨 일이라뇨.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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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슬픈 기억

어젯밤 발자국을 떠올렸다.우리 거처가 외부에 알려졌다면, 다시 이 숲을 버리고 은신처를 옮겨야 했다.지하 신전에 들어온 후 내 속에 수많은 번민이 뚫고 나와 용트림 치기 시작했다.안전지대인 이곳.신전 안은 늘 그렇듯 차분했지만, 오늘은 그 고요마저 불안하게 느껴졌다.“마리안 님!”엘레나 사제가 힘겹게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사제님.”“저 대신 밖을 살펴 주시겠습니까?”그렇지 않아도 카일 걱정에 온 생각을 집중하던 내게 밖을 순찰할 명분이 생겼다.“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벌떡 일어나던 나를 다시 주춤하게 한 건 그녀의 거친 숨소리였다.최근 들어 그녀가 서 있을 때조차 벽에 몸을 기대는 일이 잦아졌다.“마리안님, 혹시 이 늙은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숲 사람들을 돌봐주십시오.”“사제님,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걱정스러웠다.그녀의 말엔 진심이 묻어났기 때문이었다.“당신은 신께서 택한 분이십니다. 약속해 주십시오.”날 바라보는 엘레나 눈빛은 간절했다.자신이 더 버티지 못함을 아는 사람처럼.‘신물인 붉은 돌을 건넬 때 이미 그녀는 나를 후계자로 지목한 건 아닐까?’외면할 수 없는 그녀의 절박함이었다.“네...!”“그럼, 마리안 님만 믿겠습니다.”오늘따라 힘없는 그녀.짧은 호흡으로 이야기를 마친 후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녀의 뒷모습이 내게 왜 이리 무거움으로 다가오는지.언젠가 그 자리가 텅 빌 것을 생각하니 정체 모를 두려움이 몰려왔다.전사복으로 무장한 후.곧바로 신전을 빠져나왔다.고요한 달빛이 멀리 물소리까지 전해 주는 밤.숨은 골짜기 위로 짙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물 사이로 파다닥 튀어오는 익숙한 음색.소금쟁이 요정이었다.오늘은 이상하게도 그가 나를 기다리는 듯했다.“마리안,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앙리 왕의 모습으로 둔갑한 그가 내 앞에 섰다.소금쟁이 얼굴 위에 서린 왕과 마주하자, 단두대 위에서 본 마지막 눈빛이 떠올라 솜털까지 쭈뼛해졌다.내 속에 잔존 해 있던 왕.끔찍했고 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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