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은빛 눈의 아이를 낳았다: Chapter 31 - Chapter 40

107 Chapters

31화. 사랑, 그 잔인한 시작

새로운 숲의 밤은 지독하리만치 고요했다.은신처를 옮긴 뒤, 숲 사람들은 활기를 되찾았다.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안도감과 루미엘이라는 신성한 존재가 자신들을 지켜주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하지만 모두 잠든 시간.형용할 수 없는 공허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숲 중앙, 사제 처소.거꾸로 자란 고목 뿌리가 천장을 이룬 그럴싸한 요새였다.잠든 루시앙.아니, 루미엘….아이는 더 이상 내 아들 루시앙이 아니었다.사람들 고민을 듣고, 숲의 흐름을 정하며, 소금쟁이 요정을 한 마디로 제압하는 아이.은빛 눈동자에 서린 자애로움은 따뜻했지만, 그 온기는 만인을 향한 평등한 빛일 뿐.어미를 향한 특별한 애정은 희미해져 있었다.손을 뻗어 아이 뺨을 만지려다 멈칫했다.아이 주변 은빛 광채가 내 손끝을 밀어내는 착각이 스몄다.‘루시앙, 너 내 아들 맞는 거지?’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질문이 목구멍을 타고 쓰게 넘어갔다.그때였다.“마리안 사제님.”처소 입구, 그림자가 짙은 곳에 카일이 서 있었다.그는 갑옷을 벗지 않은 채였다.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도록 긴장을 늦추지 않는 그의 모습이 애처로웠다.“카일,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순찰하던 중 사제님 처소에 불이 꺼지지 않아 들렀습니다. 표정이…. 좋지 않으시군요.”카일은 천천히 다가와 침상 곁에 섰다.그는 잠든 루시앙을 한참 내려다보았다.그의 눈에도 아이의 변화가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아이 숨소리가 너무 고요하죠?”침묵을 깬 것은 나였다.“예전엔 자면서 칭얼거리기도 하고, 내 옷자락을 꼭 쥐기도 했는데…. 이젠 조각상처럼 누워 있어요. 꿈조차 꾸지 않는 신의 현신처럼요.”“...루미엘 님 신성이 깨어났기 때문이겠지요. 그것은 축복입니다, 사제님.”“알아요. 축복인 거. 하지만 카일, 나는 나쁜 어미인가 봐요. 세상이 구원받는 것보다 내 품에서 투정 부리던 루시앙이 그리워요. 아이가 완전한 신이 되어버리면….”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사제라는 직함.숲의 결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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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사랑의 맹세

그의 품에서 난 그저 평범한 여인이었다.보호받고 싶은 유일한 사람.내게 카일은 그런 사람이었다.작은 틈도 허락지 않은 우리.원했던 만큼 더 간절히 서로를 품었다.“마리안….”“네?”망설이던 그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저…. 그게…. 한 가지만 약속해 줄래요?”“어떤…. 약속이요?”“루미엘님이 왕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게 된 후엔.”“네.”“저와 함께….”‘어서 말해요. 카일.’말끝을 흐리는 그.이번엔 내가 먼저 용기를 내었다.“네! 그렇게 할게요.”그의 눈망울에 작은 물방울이 맺혔다.나 또한 그랬다.“저도 당신을 원해요. 그날이 오면 당신 여자로만 살고 싶어요.”“마리안….”그의 입술이 내 것에 닿았다.처음 느끼는 편안함과 은은한 격정이 날 휘감았다.서로 호흡이 닿는 순간.느껴지는 전율이 내 온몸을 타고 심장까지 흔들어 놓았다.그의 눈물을 닦아주자, 내 속 더 깊숙한 곳까지 카일이 들어왔다.우리는 그날 몸짓으로 약속을 대신했다.그를 더 욕심내고 싶었다.하지만.훗날의 우리를 위해 조금 뒤로 물러섰다.***다음 날 아침, 숲 광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루미엘의 은빛 광채.반사된 은빛에 숲 사람들은 하늘에 성호를 그으며 기뻐했다.사제인 내가 광장에 도착하자, 모두 벌떡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엘레나는 사제직을 물러준 대사제 자격으로 의식에 참여했다.“사제님, 오늘 정화 의식 준비를 마쳤습니다.”의식을 준비하는 자가 다가와 나지막이 속삭였다.루미엘과 얼굴을 마주치자, 아이는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아이에게 아니…. 루미엘님께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살아있는 신의 아들에 대한 사제로서의 예법이었다.“루미엘님, 의식 준비가 끝났습니다.”아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성스러운 은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어머니, 제가 신성을 찾았어도 저는 여전히 당신의 아들입니다.”“루미엘님….”어젯밤 카일과의 대화를 들었던 모양이었다.“마리안 사제님, 의식을 시작하셔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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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저무는 별

새로운 숲의 평화는 소금쟁이 예언처럼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이곳이 마지막 정착지가 될 거라는 내 예감도 그의 저주로 차갑게 식어버렸다.소금쟁이 몸속 검은 피는 흑마법을 다시 우리 보금자리로 끌어들였다.탈리온의 기운을 깨운 밤.그림자가 되어 흑마법사들이 숲의 경계를 두드리기 시작한 것도 이날 밤이었다.하지만 이번 습격은 이전과는 달랐다.경계를 부수는 대신, 숲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독성비를 내리게 했다.그리고 그 저주를 온몸으로 받아낸 것은 숲과 생명을 공유하고 있던 엘레나였다.엘레나 덕분에 숲의 모든 생명체는 안전했지만.그녀의 나이 든 몸이 방어하기엔 흑마법의 힘이 너무 거셌다.“엘레나 님! 힘을 내세요. 제발!”“대사제님!”그녀의 처소로 달려갔을 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와 있었다.온 숲을 가득 메운 정령들의 통곡 소리.루마레스 숲의 지주였던 그녀의 육신은 급격히 굳어갔다.대사제복은 검은 얼룩으로 물들었고, 손가락은 이미 마른 장작처럼 변해 있었다.“사제…. 마리안 님….”엘레나의 목소리는 벼랑 끝 바람 소리처럼 위태로웠다.곁에 서 있던 루미엘이 신성을 끌어올려 그녀에게 손을 얹었다.정화의 빛이 그녀 몸을 감싸자, 탈리온의 기운은 비웃듯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루미엘 또한 필사적으로 대항했다.상반된 두 기운의 격돌.벽체와 지붕이 흔들리며 작은 공간이 잠식됐다.루미엘이 다시 온 힘을 다해 검은 기운을 제 자리에 묶어놨다.선과 악 사이에서 몸이 거세게 요동치던 엘레나도 평온을 되찾는 듯했다.하지만 조금씩 회복돼 가던 그녀.표정은 오히려 일그러져 있었다.“아닙니다. 루미엘님…. 멈추십시오.”엘레나가 힘겹게 손을 들어 루미엘을 제지했다.“이 저주는…. 숲의 심장부에 박힌 쐐기입니다. 저를 정화하는 데 신성을 낭비하시면, 정작 다가올 거대한 어둠으로부터 숲을 지킬 힘이 모자라게 됩니다.”“엘레나 님.”“제 시간은…. 이미 이곳에서 멈추기로 정해져 있었습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신이 없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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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잔혹한 대가, 그리고 각성

“멍청한 녀석들! 그깟 늙은이 영혼 하나 못 가져오고 고스란히 천계로 올려보내? 내가 이런 한심한 것들을 믿고 거사를 치뤄야 한다니….”비올렛의 날카로운 고성이 신전의 음습함을 끌어 올렸다.손끝에서 흘러나온 흑마력에 석조 벽면이 검게 그을렸다.“죄송합니다, 비올렛. 하지만 전력을 다했음에도…”“모르가나, 당신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영혼 찬탈 주문을 외운 건 당신이잖아요. 천계의 문이 열리기 전 영혼을 낚아챘어야지요.”비올렛 눈이 살기로 가득 찼다.“영혼을 가로채려는 순간, 루마레스 것들의 기도가.”“네…?”“천사들을 예정 시간보다 빨리 불러들였어요.”“그 정도 일은 예상했어야죠.”“영혼을 찬탈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천계의 문 근처에 있던 천사들이 다 내려왔습니다.”“또 변명이에요? 겨우 필멸자 영혼 하나에 쩔쩔매다니, 게다가 천사 핑계까지? 흑마법 수장이라는 이름이 아깝습니다.”“변명이 아닙니다.”“탈리온 님께서 사제의 피와 영혼을 원하실 텐데, 어찌할 겁니까?”두 사람의 시선이 신전 가장 어두운 구석, 음산하게 박혀 있는 거대한 마법궤로 향했다.대사제 엘레나 영혼이 갇혀 비명을 지르고 있어야 할 흑마법 덩어리.텅 빈 한기만 뿜어내고 있었다.루미엘을 녹여버릴 유일한 열쇠인 사제의 영혼을 놓친 것이었다.침묵 속, 하급 흑마법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 모르가나 님. 탈리온 님께는 꼭 엘레나가 아니더라도 사제의 기운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그렇지. 하지만 그만한 신성을 지닌 제물은 흔치 않다.”“그럼… 그 여인을 데려오면 되지 않겠습니까?”“누구 말인가?”“마리안인지 뭔지 하는 여자 말입니다. 이번에 새로 사제가 된 루미엘의 어미 말입니다.”순간 모르가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흑마법 기지에서 마리안과 대면한 후 모르가나 태도는 눈에 띄게 수상해졌다.자신도 모르게 황급히 말을 잘랐다.“아… 안 돼. 그 여자는 안 된다.”“뭘 그리 정색하십니까?”비올렛이 다가와 모르가나 턱 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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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그의 숨결이 닿았을 때

그의 숨결이 닿았을 때, 본능적으로 깨달았다.험난한 사제 길에서 날 지탱해 줄 유일한 내 사람이란 사실을.그의 도톰한 입술이 이마, 코 그리고 내 입술에 닿으며 더욱 빨라진 호흡.상의를 들어 올려 가슴을 만진 카일 손으로 인해 튀어나올 듯 요동치는 내 심장 움직임까지 들키고 말았다.거칠어진 숨소리.서로를 향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끓어오르는 격정에 몸을 맡겼다.그렇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오랜 시간 어둠 속에 머물렀다.신기한 경험이었다.카일 몸속에서 한없이 무너져 내리던 마음이 다시 일으켜 세워졌다.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다음 날 아침.성소 밖으로 걸어 나오는 나의 모습은 어제와 달랐다.엘레나가 남긴 낡은 지팡이를 짚고, 사제복을 몸에 걸쳤다.눈물로 얼룩졌던 눈동자는 숲의 모든 흐름을 꿰뚫어 보는 예리한 사제의 눈으로 변해 있었다.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나의 달라진 위엄에 압도되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터주었다.광장 중앙.가장 높은 제단 위에 선 나는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콰아앙!파동이 숲의 경계 끝까지 퍼져나갔다.“루마레스 사람들이여, 고개를 들어라! 슬픔은 어제로 끝났다.”내 목소리에 숲이 메아리로 대답했다.루미엘이 내 곁으로 다가와 손을 잡았다.아이의 은빛 눈동자가 나의 각성을 축복하듯 빛나고 있었다.카일 역시 내 뒤에서 검을 뽑아 들며 엄숙한 맹세를 대신했다.“이제부터 이 숲의 법은 내가 정하며, 침범하는 자에게는 루미엘의 신성과 사제의 분노가 함께할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 한, 누구도 이 숲의 평화를 짓밟지 못할 것이다.”숲의 모든 나무도 가지를 흔들며 나의 선언에 응답했다.엘레나가 떠나며 슬픔과 공포가 서려 있던 눈빛에는 다시 생존을 향한 강렬한 투지가 담겨졌다.멀리 나무 위.이 광경을 지켜보던 소금쟁이가 코웃음을 지었다.“드디어 진짜 숲의 주인이 나타났네. 이제야 좀 볼만하겠어.”이 숲 바로 옆까지 다가온 거대 먹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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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안개를 헤치고 나타난

“얘야, 마리안! 내가 네게 능력 준다고 하지 않았니?”누굴까.한참 생각한 난.곧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신했다.“혹시…. 신이세요?”설마, 지금 신이 내게 말을 거는 건 아니겠지?“네가 말한 그가 나니라.”“이제 저와 직접 소통하시는 건가요?”사제가 된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라 생각했다.“난 항상 네게 말을 걸었단다.”“신도 거짓말을 잘하시네요. 전 당신 목소리를 듣지 못했어요.”“네가 날 찾지 않는 때에도 난 네 옆에 항상 있었단다.”내 머릿속을 순식간에 스쳐 간 지난날.그제서야 깨달았다.신은 내 곁에 늘 있었다는 사실을….어느 때는 가까이 어느 때는 멀리.심지어 존재 자체도 모르게 조용히 있던 적이 더 많았지만.내게 일어난 일련의 과정을 보면 분명 신은 내 곁에 항상 있었다.내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하진 않는다 해도.이날 난 처음 신과 대화를 나눴고 이후 내 능력도 루미엘과 함께 성장해 갔다.이렇게 신의 도움으로 흑마법사들을 소멸시킬 수 있었다.상황이 종료되자, 숲은 다시 고요를 찾았다.카일과 기사들이 피와 흙먼지에 뒤덮인 채 돌아왔다.다행히 큰 부상자는 없었다.전사들이 다가와 내게 무릎을 꿇었다.“사제님 덕분에 놈들을 완전히 몰아냈습니다.”“고생했습니다. 모두 다친 곳은 없지요?”카일과 눈이 마주쳤다.제단에서 내려와 그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주었다.수많은 눈이 우리를 보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사부님 검에 묻은 피가 움직입니다.”루미엘 말처럼 카일 뿐 아니라, 전사들 검에 묻은 피에서도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검을 모두 여기 내려놓으십시오.”일제히 내려놓은 검.흑마법 흔적에 성스러운 물을 떨어뜨리자, 모두 사라져 버렸다.“마리안 사제님 만세! 루미엘님 만세!”여기저기서 승리를 외치며 우리를 칭송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여러분! 이번 승리는 신께서 주신 선물입니다.”“맞습니다. 나를 높이 세우지 마십시오. 모든 공은 신과 여기 계신 그분의 아들 루미엘님 덕분입니다.”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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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신의 기록

두루마리가 흔들리며 그 속에서 튀어나온 별궁 찬모.카일과 나는 어리둥절한 채 멍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사제님, 카일! 우릴 도와주세요.”찬모 목에 걸린 장신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께름직한 문양이 새겨진 목걸이였다.왕비 연못 입구에 펄럭이던 깃발 모양과 같았다.그제야 그녀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예전과 많이 달라진 모습.무엇엔가 쫓기는 초조함.그녀 몸은 분명 떨고 있었다.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우린 벌떡 일어나 그녀를 경계했다.그녀에게 손을 얹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찬모.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카일은 이미 검을 반쯤 뽑아 든 채 그녀를 매섭게 바라보고 있었다.“안나, 당신 목에 그 휘장은 무엇입니까?”“이건 비올렛 왕비가 모든 백성의 목에 걸어놓은 왕 패예요.”“그걸 왜?”“왕비 스스로 왕이 됨을 선언하고 모두에게 이걸 걸어놓은 겁니다.”“이 목걸이에 흑마법 주술이라도 불어 넣은 거예요?”목걸이에 손을 대자, 검은 연기를 내며 부서졌다.“사제님, 이건 죽을 때까지 풀 수 없는 물건이라 했는데…. 사제님 앞에선 힘을 쓰지 못하네요. 내 생각이 맞았어요. 우릴 구해줄 분은 당신과 그분의 아들 루미엘님 밖엔 없으십니다.”찬모는 확신에 찬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그녀의 엄숙하고도 간절한 눈빛엔 거짓이 없었다.훅 들어온 마음.바깥 세계를 알고자 했던 생각과 함께 눈앞에 궁의 모습이 펼쳐졌다.시선을 돌려 궁 밖 백성의 생활을 보았다.처참함에 더는 자세히 볼 수 없었다.왕좌에 앉은 비올렛 등 뒤로 검은 형체가 뚜렷했다.탈리온.그자였다.“카일, 탈리온이 한 짓이에요.”“탈리온이 비올렛을 조정하고 있단 말입니까?”“네.”심각한 표정의 카일.무언가 원치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그때도 이런 상황이었습니다.”“그때라뇨?”“루미엘님을 처음 이곳에 보내실 때요.”그의 품에 항상 품고 다닌 단도 집에서 무언가를 꺼낸 카일.밖으로 나오며 굵고 낡은 형태의 기록서가 되었다.루마레스 부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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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숲의 기억

그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손발이 차가워지며 숨이 가빠졌다.이내 정신을 잃은 나.깨어나 보니 날 감싸 안은 카일이 울부짖고 있었다.“마리안! 마리안!”얼마 동안 이렇게 울고 있던 거야?날 위해 이토록 슬퍼하다니.“카…. 일. 나 안 죽었어요.”“오! 마리안. 신이시여! 감사합니다.”카일의 뺨을 어루만졌다.위로는 그에게 필요한 듯했다.“사제님,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아닙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지워지지 않은 상처가 있나 봅니다.”주섬주섬 일어나 나설 준비를 했다.“찬모님, 앙리 왕이 와 있다고 했지요?”“네.”나를 강하게 막아선 카일.“뭘 하시게요? 설마 마리안, 당신이 그를 만나려는 건 아니지요?”“카일, 난 루마레스 사제입니다. 루미엘의 때가 오면 인간계 모두를 통치해야 할 텐데 지금 저들의 상황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눈을 지그시 감은 카일이 체념한 듯 말을 뱉었다.“말리고 싶지만…. 당신 생각이 옳기에 나도 함께 가겠습니다.”“아니에요. 당신은 숲을 지키고 계세요. 잠시 그를 보고 오겠습니다.”카일의 젖은 눈빛은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었다.“염려 마세요. 붉은 돌이 보호막을 쳐줄 겁니다.”미더운 듯 바라보는 카일을 뒤로 하고 새벽이슬 내린 숲의 길을 따라나섰다.저 발걸음 어딘가 익숙한데.별궁 찬모의 걷는 모습이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숲의 경계인 장막에 다다랐을 때였다.“마리안, 마리안!”누군가 날 처절한 소리로 부르고 있었다.왕 앙리였다.이를 악물었다.난 루미엘 어머니로 왕을 만나는 것이다,옛 상처 따윈 물러가거라.인간계를 다스릴 내 아들 루미엘의 길을 열기 위해 가는 것이다.다짐을 되새기자, 붉은 돌이 소용돌이치며 큰 원을 만들었고 그곳에 나를 밀어 넣었다.완벽한 보호막이 입혀지자, 숲 장막이 사제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내 앞에 나타난 사내.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고급스러운 향내를 풍기며 수많은 별궁 여인을 탐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찬모가 경계를 서며 주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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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전쟁의 서막

숲 정령의 기억은 뿌리를 타고 내 의식 속에 흘러 들어왔다.푸른 빛을 내며 모르가나를 향해 돌진한 분노와 함께.휘청거리며 쓰러진 그는 본래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모르가나가 쓰러지자, 찬모가 황급히 달려왔다.“너…. 는 소금쟁이?”“그래, 나다.”“네가 어찌 우리를 시도 때도 없이 배신하는 게냐?”“근신만 하라는 너희보다 할 일을 주는 탈리온이 좋으니까.”“뭐…? 소금쟁이! 이제부터 너를 숲 백성에서 제외한다.”“마음대로 해. 나도 감옥 같은 곳엔 돌아가지 않을 거니까.”차갑게 그들을 내려다보았다.“가서 비올렛에게 전하거라. 숲은 더 이상 참지 않는다고.”입을 삐죽이는 소금쟁이는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한 듯 보였다.“난 신의 사제다. 탈리온 따위에 무릎 꿇지 않는다. 신의 권위에 도전한다면 역병보다 더한 재앙이 덮칠 것이다.”숲의 정령들마저 숨죽인 시간.나는 지팡이를 휘둘러 바람을 일으켰다.신물에서 흘러나온 에메랄드빛 거대한 돌풍이 그들을 순식간에 내동댕이쳤다.소금쟁이는 정신을 잃은 모르가나를 부축한 채 허둥지둥 모습을 감추었다.옆을 지키던 루미엘이 조용히 숲의 문을 열었다.상황이 정리된 후.무거운 침묵이 숲 전체에 퍼졌다.아무 말 없이 자기 처소로 향하는 루미엘.아이 뒷모습이 유난히 외로워 보였다.마치 세상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을 홀로 짊어진 존재처럼.나는 힘없이 주저앉았다.지팡이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거대한 파도가 우리를 향해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다.“마리안.”카일이 다가와 내 곁에 앉았다.그는 떨리는 내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 주었다.갑옷의 차가운 감촉과 체온이 뒤섞인 묘한 감정.그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평온이었다.“왕국이 움직였다는 건, 조만간 정규군이 밀고 들어올 거라는 뜻입니다. 제가 숲의 전사들을 훈련하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과 루미엘님은 내주지 않을 겁니다.”“카일…. 내 실수였어요.”“아닙니다. 당신은 루미엘님을 위해 한 일입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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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숲을 떠나 왕좌를 향해

루마레스 숲의 경계에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짙은 안개 너머로 엘레나 대사제가 떠난 제단.우리를 품어주었던 은신처의 그림자가 아련하게 보였다.도망쳐 온 시녀였던 내가 사제로 각성하고, 내 아들 루시앙이 신성을 지닌 존재로 성장 한 곳.루미엘로 신성이 깨어난 지금.회귀자인 다른 여인들과 딸들도 완전한 생명을 돌려받았다.이제 안식처였던 이곳을 떠나 세상으로 나서는 우리.모두에겐 더 이상 평화에 안주하려는 망설임이 없었다.어느덧 루마에스 부족수도 365명으로 늘어났다.출정하기 앞서 치유의 샘물을 담은 구슬을 좌측 팔뚝에 나눠 심었다.신변의 어려움이 생길 때 서로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정보망이었다.세 그룹으로 나누어 잠입하기로 했다.1진은 일반 백성으로 궁이 있는 수도에 잠입할 인원들.2진은 루미엘과 나 그리고 최고 전사들로 꾸민 상단.3진은 카일이 이끄는 기사단으로 위장한 루마레스 전사들과 장인들이었다.숲은 문을 활짝 열어 우리와의 이별을 축복해 주었다.루마레스 숲에선 마지막이 될 사제의 명령을 시작했다.“어느 누구도 죽으면 안 됩니다. 만일 위기의 순간이 온다면 모든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루미엘도 다가와 선언했다.“여러분, 숲의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저 신의 아들인 루미엘이 책임집니다. 우린 승리하기 위해 나섰으며, 악을 몰아내고 신의 나라를 세울 것입니다.”와 아아아!숲 사람들 함성이 하늘에 닿을 듯 우렁찼다.“인간계 모두는 신의 보호 아래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루미엘의 선언이 끝나고 숲의 정령들마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여러분, 우리도 함께 가겠습니다. 여러분 없는 숲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껏 해 오던 것처럼 여러분 삶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겠습니다.”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군단을 이룬 숲 공동체.정령들은 일반 백성들로 구성된 1진과 합류해 먼저 출발했다.이제 2진인 우리 상단과 3진인 카일의 기사단이 출발할 차례였다.카일이 나서서 물건이 제자리에 있는지, 마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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