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그대 맑은 눈에 사무친 원망을: Bab 11 - Bab 20

21 Bab

제11장

숙비가 ‘화재로 목숨을 잃은’지 사흘째 되던 날.마침내 조정에 첫 번째 폭풍우가 몰아쳤다. 어사대의 젊은 감찰어사가 조회에서 황후 유해원의 부덕함을 성토하며 세 가지 죄를 열거했다.첫째, 황후는 자식 하나 없으면서도 후궁의 황자와 공주를 강탈해 적출인 것처럼 꾸몄으니 이는 명백한 기만에 해당된다.둘째, 숙비 서씨는 황실의 혈통을 낳은 공이 있음에도 황후는 산후조리도 끝나지 않은 그녀를 눈밭에 꿇려 수치를 주고 뺨을 때렸으니 국모로서의 인덕을 상실했다.셋째, 숙비가 궁중을 어지럽혔다고 모함하면서도 아무런 증거 없이 곤형을 가했고 그녀를 궁 안에 가둬 화재가 났을 때 빠져나오지 못하게 했으니 후궁을 해친 죄가 있다.상소문의 문장은 마치 서슬 퍼런 칼날 같았다. 특히 마지막 한 줄은 심장을 사정없이 찌르는 듯했다.“이토록 투기심이 강하고 잔혹한 자가 어찌 국모가 될 수 있겠사옵니까? 어찌 제국의 황손들을 훈육할 수 있겠습니까!”소무경은 용상 위에 앉아 그 상소문을 바라보았다.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한편, 조정은 찬물을 끼얹은 듯 적막했다. 문무백관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죽였으나 거센 암류가 조용히 요동치고 있었다. 그때, 황후의 오라비이자 진북장군인 유영태가 참지 못하고 대열에서 뛰쳐나와 어사를 짓밟을 듯 포효했다. “망발이로다! 황후 마마의 현덕하심은 온 내명부가 다 아는 사실이거늘! 숙비의 죽음은 불의의 사고일 뿐인데 어찌 감히 황후마마께 죄를 묻는단 말이냐! 너희 문신 놈들은 늘 뜬소문을 부풀려 조정을 이간질하며 황후를 모함하는구나!” 그럼에도 어사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물러서지 않았다.“신의 폭로가 모함인지 아닌지는 폐하께서 친히 조사를 명하시면 밝혀질 일입니다! 장신궁을 폐쇄하라는 수령을 내린 자가 황후가 아닙니까? 그 모진 곤형을 명한 자 또한 황후가 아닙니까? 단 한 마디라도 부풀림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목을 쳐 죄를 물으소서!” “네 이놈, 감히!”“그만하거라.”소무경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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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장신궁이 화마에 집어삼킨 지 열흘째 되던 날.마침내 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덕수는 건청궁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조사한 밀지를 조심스레 고했다. 장신궁을 봉쇄하라는 명령은 황후가 직접 내린 것이었다. 봉인이 찍힌 수령이 그 증좌로 남아 있었다. 또한, 모진 곤형을 가하라 명한 이 역시 황후가 틀림없었다. 형을 집행했던 상궁은 이미 범행을 자백하며 당시 황후가 “숨이 끊어질 때까지 매질하라” 명령했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증거는 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발견되었다. 새까맣게 그을린 잔해에 화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실수가 빚어낸 화마가 아니었다.그것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한 짓이 틀림없었다.“누구의 짓이냐.”소무경의 어조는 기이할 정도로 평온했으나 그 고요함 아래에는 서늘한 한기가 흐르고 있었다. “궁문을 지키던 환관의 자백에 따르면, 화재가 발생하기 전날 밤 황후마마 곁을 지키는 상궁이 홀로 장신궁을 찾았다고 하옵니다. 들고 가던 찬합이 궁을 나설 때는 비어 있었다고 하여...”덕수는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소신이 그 상궁을 압송해 국문하였더니, 끝내.... 자백했나이다.” “말하라.” “황후마마의 명령이 있었다고 하옵니다. 찬합 밑바닥에 화유와 불씨를 숨겨 가 편전 휘장 뒤에 빈틈없이 뿌려두고, 자시에 불을 붙이라 하셨답니다.”순간, 전각 내부가 침묵에 잠겼다. 용좌 위의 소무경은 마치 석상처럼 굳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침묵이 흐르고 나서야 그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봉의궁으로 가야겠다.”봉의궁.거울 앞에 앉은 유해원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초췌한 꼴을 보며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틀이나 미음을 전폐하며 시위를 벌였음에도 폐하께서는 옷자락 한 번 비추지 않으셨다.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아니, 폐하가 자신에게 이토록 냉혹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소년 소녀 시절부터 온갖 사선을 함께 넘나들며 맺어진 부부였다. 한때 소무경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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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소무경의 몸이 흠칫 떨렸다.“숙비를 바라보는 폐하의 눈빛이 달라졌사옵니다! 눈밭에 무릎을 꿇은 그녀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고 그녀의 눈물에 초조해했으며 후궁을 더 들이셔도 좋다는 말 한마디에 이성을 잃고 분노했지요! 완벽히 숨겼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신첩의 눈은 속이지 못하니까요!”유해원의 뺨을 타고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그러나 입술 끝은 기이하게 말아 올라갔다.“신첩이 왜 그토록 둘째 아이를 원했는지 아십니까? 신첩의 자식으로 키우고 싶어서가 아니옵니다. 전 그 년을 짓밟고 싶었습니다. 자신은 마음에도 없는 사내와 살을 섞게 만들고, 품 안의 핏덩이를 빼앗기는 수치를 고스란히 맛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영원히 아이를 낳는 도구로만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죽어도 폐하의 마음만큼은 얻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고요!”그녀는 한 걸음 다가가 소무경을 노려보았다.“헌데, 제 오산이었사옵니다. 결국 그 년이 폐하의 마음을 가로챘더군요. 죽고 나니 괴로워하고,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고, 신첩을 죄인 취급하며 추궁하지 않사옵니까... 폐하, 숨김없이 말씀해 보세요. 만약 그 년이 살아 있었다면 언젠가는 신첩을 폐위하고 그 자리에 그 년을 앉혔겠지요?”광기에 젖은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소무경은 눈앞의 여인이 지독하도록 낯설게만 느껴졌다.이 여인이 정녕 전장을 함께 누비고 시린 겨울밤 제 손을 감싸 쥐며 온기를 나누던 유해원이 맞는지.“당신이 왕야든, 황제든,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저 당신이 무사하기만 하면 됩니다.”청초하게 웃던 나의 해원이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도대체 언제부터 이토록 망가져 버린 걸까. 투기에 눈이 멀어 악독해지고, 사람의 목숨을 초개 부리듯 하는 괴물이 되었다. “유해원.”가라앉은 목소리에 깊은 피로가 묻어났다. “짐이 그대에게 허락한 것은 짐이 줄 수 있는 전부였다. 황후의 자리, 부귀영화, 심지어 숙비의 아이들까지... 그것이 짐이 줄 수 있는 속죄이자 그대를 안심시킬 방도라 믿었다. 그러나 그대가 원한 것은 보상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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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그날 밤.소무경은 두 아이를 건청궁의 편전으로 데려왔다.세 살이 된 소윤성은 이미 철이 들어 있었다. 유모의 품에 안겨 오면서도 울음 떼 한번 쓰지 않았다. 그저 칠흑처럼 새까만 눈동자를 동그랗게 뜬 채, 잔뜩 겁을 먹고 소무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바마마...”아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소무경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아이를 품에 안아 올렸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에서 아직 지워지지 않은 포근한 젖내가 풍겼다. 조그만 온기를 품에 안은 순간, 문득 서하연이 해산하던 그날의 기억이 선연히 되살아났다. 갓 태어난 소윤성을 안고 침전을 나서던 제 등 뒤로, 뼈를 깎는 듯한 그녀의 처절한 곡소리가 들려왔었다. 그때는 그저 철없는 투정이라 치부했거늘. 이제 와 피눈물로 와닿는 그것은, 제 살귀가 찢겨 나가는 고통이었다.“윤성아.”소무경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숙비마마를 기억하느냐?” 소윤성은 고개를 갸웃했다.“숙비마마요? 늘 문안을 오시지만, 어마마마께서 절대 만나지 못하게 하셨던... 그 마마 말씀이세요?” 심장을 송곳으로 찌른 듯한 아픔이 몰려왔다.“그분을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소무경은 아이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분이 바로 네 생모이시다.” 소윤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생모요?”“너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 분이란 뜻이다.” 소무경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 “황후마마는 너를 길러 주신 어마마마이고, 숙비마마는 네게 숨을 불어넣어 준 진짜 어머니란다.” 아이는 젖살이 통통 오른 얼굴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그럼... 숙비마마는 지금 어디 계세요?” 목구멍이 콱 막혀왔다. 그러다 겨우 핏기 없는 입술을 뗐다.“아주... 먼 곳으로 가셨단다.”“다시는 안 돌아오시나요?”“... 그래, 다시는 오지 못하신다.” 소윤성은 시선을 툭 떨구더니,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소무경의 옷자락을 꾹 쥐었다. “아바마마, 혹시 슬프세요?” 소무경이 흠칫 몸을 떨었다. “어찌 그리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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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소무경은 요즘 들어 자주 꿈을 꾸었다.그리고 그 꿈의 끝에는 언제나 서하연이 서 있었다. 어느 날은 갓 입궁했을 무렵의 아스라한 모습이었다. 연한 청색 옷을 걸친 채 매화나무 아래에서 고개를 들어 꽃을 보다가, 발소리에 뒤를 돌아보며 살포시 미소 짓던 얼굴. 왼쪽 뺨에 얕게 패인 보조개가 서글프도록 선명했다. 또 어느 날은 아이를 가졌을 때의 모습이었다.부푼 배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창가에 앉아 서책을 읽을 때, 그녀의 온몸으로 부서져 내리던 따스하고 고요한 햇살. 그리고 간혹은 차디찬 눈밭 위에 앙상하게 무릎을 꿇고 있던 뒷모습이 나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한 장의 종이처럼 그를 아프게 했다. 그리고 가장 자주 꾸는 꿈은 장신궁을 집어삼켰던 그 잔인한 화마였다.그는 불길이 치솟는 전각 밖에 우두커니 서서 편전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서하연은 거센 불길 너머 창가에 서서 비명을 지르지도, 눈물 흘리지도 않은 채 그저 고요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를 구하려 미친 듯이 몸을 던지려 해도, 두 발이 땅에 단단히 박힌 듯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결국 제 눈으로 그녀가 화염 속으로 완전히 스러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매번 그렇게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면 온몸은 식은땀으로 흥건했고, 심장이 뜯겨 나가는 통증에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오늘 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꿈속에서 서하연은 불바다 한가운데 서 있었다.불길 너머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폐하. 단 한순간이라도... 저를 진심으로 연모하신 적이 있으십니까?”그는 말하고 싶었다.있었다고, 후회하고 있다고.하지만 목이 조여 온 듯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서하연은 참담하게 웃었다.“무정하게 버림받을지언정 부끄러워하지 않으리.... 폐하, 이 시구는 제가 잘못 썼습니다. 부끄럽지 않다가 아니라,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써야 했습니다. 단 한 번도 제 것이었던 적이 없는데 어찌 버림받았다고 논하겠습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불길이 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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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사흘이 지난 후에야 서기백은 비로소 병세가 나았다는 명목으로 입궁했다.소무경은 건청궁에서 그를 맞이했다.고작 보름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건만, 서기백의 관자놀이에는 서리가 내린 듯 백발이 성성했고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무척 수척해진 모습이었다.그 초췌한 몰골을 마주한 순간, 소무경의 가슴 깊은 곳에서 거대한 죄책감이 밀물처럼 차올랐다.“... 태사, 부디 상심을 거두십시오.”그는 황제의 권위를 내려놓고 친히 찻잔을 채워 서기백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서기백은 은혜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끝내 그 찻잔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폐하께서 이 늙은 신료를 급히 입궁하라 명하신 연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소무경은 전해오는 시린 침묵을 견디다 간신히 입술을 뗐다.“짐이 하연이를 황후로 추봉하고, 황릉의 터를 닦아 이장하라 명을 내렸소. 태사도... 그 소식은 들었겠지?”“들었나이다.” 서기백의 음성은 소름 끼칠 만큼 고요했다. “소신이 제 여식을 대신하여 폐하의 해와 같은 융은에 고개 숙여 감사드리나이다.” “짐은...” 소무경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짐은 그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을 뿐이오. 입궁하기 전... 본가의 처소에 머물던 시절의 하연이는 어떠한 여인이었소?” 서기백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복잡한 감정이 어린 눈동자가 소무경을 정면으로 응시했다.“폐하께서는 소신의 입을 통해 무엇을 듣고자 하십니까.” “무엇이든 상관없소.” 소무경의 목소리가 바닥을 기듯 낮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연모했던 것이 무엇인지, 기피했던 것은 또 무엇인지, 평소에는 어떤 생각을 하며 소일을 보냈는지... 짐은 그것이 사무치게 알고 싶다.” 서기백은 그를 한참 동안 응시하다 마침내 목소리를 돋우었다. “하연이는 태어날 때부터 총명함이 남달라 세 살에 시를 깨쳤고, 다섯 살에 대구를 지었으며, 일곱 살이 되던 해에는 장성한 유학자 부럽지 않은 문장을 지어내던 아이였습니다. 하오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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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황후가 폐위되었다는 소식이 별원에 당도했을 때 서하연은 뜰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그때, 청아가 밀서를 움켜쥔 채 허겁지겁 안으로 들이닥쳤다. 얼굴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기쁨이 어려 있었다.“마마! 궁에서 전갈이 왔사옵니다. 폐하께서 드디어 황후를 폐위하셨나이다! 유씨는 서인으로 강등되어 냉궁으로 처형되었다 하옵니다!” 서하연은 손에 든 책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 그저 잔잔한 시선만을 툭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그래.” 청아는 순간 멍해졌다.“마마... 기쁘지 않으십니까?” “기쁘다.”서하연이 담담히 읊조렸다. “내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 그러나 덤덤하게 가라앉은 안색 어디에도 승자의 기쁨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청아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을 늘어놓았다.“마마, 이제 다 해결되었사옵니다. 황자 전하와 공주 전하께서도 마침내 당당하게 마마를 친모로 모실 수 있게 되었질 않습니까. 요란한 풍문이 가라앉고 안정이 찾아오면, 어쩌면 다시...”“다시 무엇을 한단 말이냐.” 서하연이 청아의 말을 가차 없이 잘라냈다. “환궁하여, 다시금 그의 피조물 같은 후궁으로 머물라?” 청아는 입을 다물었다.서하연은 들고 있던 책을 소리 없이 덮고는, 먼발치 마른 나뭇가지 위에 서글프게 내려앉은 잔설을 응시했다.“청아야. 네 눈에는 진정 내가 이 싸움에서 승리한 것으로 보이느냐?” “당연하지요!”청아가 격앙된 어조로 답했다.“황후는 몰락했고 폐하께서는 마마를 황후로 추봉하셨나이다. 게다가 황자 전하와 공주 전하도 이제는 당당하게 마마를 어머니라 부를 수 있게 되지 않았사옵니까.”서기백이 조정을 거쳐 별원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주변이 어스름하게 저문 후였다. 은은한 등불이 밝혀진 서재 안에서, 서하연은 들어온 밀지를 훑고 있었다.궁에 심어둔 서가의 세작이 보내온 밀보였다. 황후의 폐위 조서가 전격 하달된 이후, 조정과 내명부가 어떤 격랑에 휩싸였는지 낱낱이 적혀 있었다.“아버님께 무슨 말을 하던가요?”서하연은 고개도 들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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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그리곤?”“그리곤 윤성이를 정당한 태자의 자리에 올릴 것입니다.” 서하연은 아버지를 곧게 응시했다. “아버지, 이 강산은 장차 제 아들의 것이자, 우리 서가의 것입니다. 제가 황제라는 자리를 다투지 않는다면 설마 저 유가의 잔당들에게 내어주란 말씀입니까? 장차 새로이 조정을 채울 후궁들에게 순순히 양보하란 말입니까?”서기백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버지께서 제가 정말 생각을 끝낸 것이냐고 물으셨지요.”서하연의 목소리는 지독하리치만큼 덤덤했다. “아주 잘 생각했습니다. 한 걸음 물러서면 낭떠러지일 뿐입니다. 하지만 한 걸음 나아간다면, 사지 속에서도 기어이 살길을 쥐어짤 수 있겠지요.”“그 살길이, 궁 안에 있다는 것이냐?”“제 살길은 제 손안에 있습니다.” 서하연은 미소를 지었다.“궁 안이든 궁 밖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윤성이가 있고 서가가 건재하는 한, 저는 어디서든 악착같이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녀는 아버지 앞으로 걸어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투박한 서기백의 손을 따스하게 맞잡았다. “아버지, 저를 걱정하시는 마음은 잘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저를 믿어주십시오. 두 번 다시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서기백은 딸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차가운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 서슬 퍼런 안광에 서기백은 마침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다.”그가 딸의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이 애비가 네 칼이 되어주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서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낡은 《전국책》 한 권을 소리 없이 꺼내 들었다. “아버지, 이제 우리는 세 가지 일을 행해야 합니다.” “말해보거라.” “첫째, 황후가 폐위되어 조정이 뒤숭숭한 틈을 타 유가의 세력을 철저히 청산해야 합니다. 무관 쪽은 아버지가 직접 나서기 곤란하시겠지만, 문관 쪽은 탄핵할 자는 탄핵하고 권력을 박탈하여, 단 한 명도 조정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십시오.” 서기백이 고개를 끄덕였다.“그 일은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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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장

태자 책봉 대전은 추분으로 낙점되었다. 조정을 가득 메운 백관의 하례 속에, 만백성이 우러러보는 성대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고작 세 살밖에 안 된 소윤성은 황색 태자복을 입은 채 소무경의 손을 잡고 태화전 앞의 한백옥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아이는 아직 어린 태가 완연했으나 걸음걸이만큼은 지독히도 올곧았다. 그 미간에 서린 침착함은 도저히 그 나이대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소무경은 아들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서하연을 떠올렸다. 아이의 서늘한 눈매가 그녀를 쏙 빼닮아 있었다. 대전이 막을 내린 후, 성대한 궁연이 이어졌다. 화려한 가무가 흐르고 술잔이 바쁘게 오갔다. 소무경은 어좌에 우두커니 앉아 눈앞의 번화한 풍경을 응시했으나, 정작 내면은 지독한 공허함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문득 지난해 이맘때가 떠올랐다.그때만 해도 서하연은 후궁들의 가장 높은 상석에 앉아, 조용히 춤을 감상하고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 시절의 그는 그녀에게 단 한 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제야 사무치게 보고 싶어 손을 뻗었으나, 정작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태자 책봉식이 끝난 지 사흘 뒤.마침내 서하연의 서찰이 궁으로 흘러들었다. 서찰에는 단 한 줄만 적혀 있었다.[신첩 서씨, 폐하를 뵙기를 청하나이다.] 서찰이 당도한 지 채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양심전의 주인이 직접 움직였다. 아랫사람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소무경이 손수 발걸음을 재촉한 것이었다. 그는 몸을 비틀거리며 서가의 정청으로 뛰어들어 왔다.그러다 그곳에 소복 차림으로 서서 자신을 고요하게 응시하는 서하연을 발견한 순간, 소무경은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지독한 악몽에서 겨우 깨어난 것인지도 몰랐다.“하... 하연아.”소무경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려왔다.“정녕 너란 말이냐?”서하연은 소리 없이 무릎을 굽히며 법도에 맞추어 절을 올렸다. “신첩, 폐하를 뵙나이다.” 소무경은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싶었지만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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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서하연이 궁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은 평온한 호수에 거대한 암석이 내리꽂힌 듯 순식간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조정은 충격에 휩싸였고 내명부는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소무경은 무자비한 철혈의 수단으로 황궁을 짓누르던 모든 의혹을 찍어 눌렀다. 황후는 당시에 간신 무리에게 해를 입어 어쩔 수 없이 가짜 죽음으로 몸을 피했던 것이라며, 이제 모든 진실이 명백하게 밝혀졌으니 마땅히 황후의 자리를 되찾아 주어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감히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었다.폐후 유해원은 여전히 냉궁에 갇혀 있었고 당시 사건에 연루되었던 모든 궁인들은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였으니까. 그 피비린내를 맡고도 다음 제물이 되기를 자처할 어리석은 자는 없었다.그렇게 서하연은 다시 장춘궁으로 발을 들였다. 모든 전각이 그녀가 떠나기 전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멈춰 있었다. 오직 세월의 흔적을 대변하듯 소윤성이 타던 작은 목마와, 혜안의 손때가 묻은 딸랑이가 전각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장춘궁에 발을 디딘 첫날, 태자 소윤성은 유모의 치맛자락 뒤로 몸을 숨긴 채 겁먹은 눈으로 낯선 여인을 훔쳐보았다.“윤성아.”소무경이 기꺼이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네 어머니다.”아이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무언가에 이끌리듯 격렬하게 달려와 그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어마마마!”아이가 목을 놓아 조그맣게 흐느꼈다. “아바마마께서 어머니는 아주 먼 곳에 가신 거라 하셨어요... 정말, 정말로 돌아오신 건가요?” 서하연은 제 품에 파고드는 작고 소중한 아들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메말랐던 눈시울이 그제야 붉게 물들었다. “그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목 멘 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어미가 돌아왔단다.” 혜안이는 아직 너무 어려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핏줄의 이끌림 덕분인지 본능적으로 어미를 따르며 그녀의 어깨에 뺨을 비벼 대고 꺄르르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만큼은 서하연 역시 자신이 견뎌 낸 모든 수치와 고통이 온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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