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는 길고 긴 비였다의 모든 챕터: 챕터 1 - 챕터 10

22 챕터

제1화

“앞으로 한 달 남았습니다. 새해를 넘기기도 어려울 수 있어요.”의사는 영상 자료를 모니터에서 내리며 맞은편에 앉은 안제인을 바라보았다. “안제인 씨, 병세가 나빠지는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빠릅니다. 가능하면 보호자를 모시고 오세요. 앞으로 치료 방향도, 간병 계획도 같이 의논해야 합니다. 혼자 감당하기는 어렵습니다.”안제인이 천천히 눈을 들었다.“보호자 없습니다.”의사가 멈칫했다. “차트에는 배우자 지태하 씨가...”“예전 일입니다.” 안제인이 말을 끊었다. “지금은 저 혼자예요.”의사는 몇 초 동안 말을 고르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진통제 용량을 올리겠습니다. 통증이 심하면 참지 말고 드세요.” 의사는 처방전을 내밀었다. “영양제도 아침저녁으로 한 포씩 챙기시고요. 다음 주에는 반드시 오셔야 합니다. 그때 치료 계획을 다시 잡겠습니다.”“네.”안제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진료실을 나왔다.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화면이 켜졌지만 알림창은 말끔했다. 고작 날씨 알림 하나뿐이었다.부재중 전화도, 새 메시지도 없었다.안제인은 시내버스에 올랐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버스가 라온센트럴몰 앞을 지나갈 때, 보슬비 너머로 유명한 샤브샤브집 간판이 붉게 빛났다.통유리 안은 환했고, 사람들 그림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안제인의 몸이 굳었다.창가 자리에 앉은 네 사람은 안제인이 너무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지태하는 아침에 안제인이 직접 다려 준 회색 셔츠를 입고 몸을 기울인 채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입가에는 다정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옆에는 3년 만에 외국에서 돌아온 한나경이 있었다.맞은편에는 아버지 안동수와 어머니 장미희가 앉아 있었다.한나경에게 고기를 덜어주는 안동수의 손길은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다. 무언가 말하며 웃고 있는 장미희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저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자연스러운 웃음을 안제인은 3년 동안 본 적이 없었다.네 사람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냄비를 가운데 놓고 둘러앉아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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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안제인은 침대 위에 웅크리고 누웠다. 옆으로 몸을 말고 팔로 자신을 감쌌다. 어둠 속에서 핸드폰 화면만 환하게 빛나 창백한 얼굴을 비췄다.안동수와 장미희의 친딸인 한나경을 ‘되찾은’ 날이 떠올랐다.집에는 장식등이 걸렸고, 부모님은 안제인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하고 조심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부모님은 낯을 가리며 주저하는 여자아이 주변을 맴돌며 이것저것 챙겼다. 아이에게 집에서 가장 좋은 방을 내주고, 가장 부드러운 말을 건넸다.안제인은 거실 구석에 서서, 10몇 년을 살아온 집이 하룻밤 사이 다른 사람의 무대가 되는 모습을 보았다.그때부터 부모님의 시선은 안제인에게 거의 닿지 않았다.오직 지태하만 그대로였다.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고, 같은 나무에 올라갔으며, 같은 연을 날리던 지태하는 예전처럼 안제인 곁에 남아 있었다.지태하가 손을 잡고 말했다. “제인아, 겁내지 마.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안제인은 구명줄이라도 붙잡듯 지태하에게 매달렸다.집안이 무너진 날도 그랬다.집은 아수라장이었다. 채권자들이 문 앞을 막았고, 부모님은 정신없이 허둥댔다.안제인은 방 안에 숨어 밖에서 낮게 오가는 다툼을 들었다. 결국 장미희가 빨개진 눈으로 들어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제인아, 집이 정말 어쩔 수가 없다. 이 빚은 엄마 아빠가 미안해. 나경이는... 나경이는 아직 어리잖니.”그 저녁 안제인을 찾아온 사람도 지태하였다. 지태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안제인을 일으켜 세워 품에 꽉 안았다.이내 지태하는 말했다. “제인아, 우리 결혼하자.”지난 3년 동안 지태하는 나무랄 데 없이 잘해 주었다.안제인은 진심으로 고마웠고, 진심으로 사랑했다. 고난은 끝났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며 남은 삶을 함께 걸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3개월 전, 우연히 그 숨겨 둔 계정을 보기 전까지는.‘오랜 이별 끝의 재회 첫날’이라는 문장을 보기 전까지는.그 글자들 사이에는 억누른 설렘, 추억, 원망이 있었다.한나경이 3년 전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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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그다음 일주일 동안 지태하는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하지만 매일 저녁 7시 30분이면 배달 알림이 안제인의 핸드폰에 정확히 도착했다.뒤이어 지태하의 문자가 왔다. [죽 뜨거울 때 먹어. 제때 밥 먹고, 나 걱정시키지 마.]안제인은 예전이 떠올랐다. 지태하는 아무리 바빠도 최대한 집에 돌아와 부엌에서 한두 시간씩 시간을 들여 아내가 좋아하는 국을 끓였다.지태하는 배달 음식은 믿을 수 없다며, 직접 만든 게 훨씬 마음 놓인다고 했다.이제 배달된 죽을 안제인은 더는 먹지 않았다.그때마다 몰래 지태하의 부계정에 들어갔다.역시 날마다 글이 올라와 있었다.[오랜 이별 끝의 재회 65일째. 나경이를 데리고 모교에 갔다. 예전 나무 길을 걸으니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오랜 이별 끝의 재회 67일째. 나경이가 감기에 걸렸다. 약을 사 주고 생강차를 끓였다. 여전히 자기 몸을 돌볼 줄 모른다.][오랜 이별 끝의 재회 70일째. 나경이와 집을 보러 다녔다. 국내에도 돌아올 곳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일주일 지난 후, 안제인은 혼자 병원에 가 재검사를 받았다.항암 치료는 고통스럽고 길었다.뒤따라온 심한 메스꺼움 때문에 안제인은 병원 화장실에서 거의 쓸개즙까지 토해낼 것처럼 몸을 잔뜩 웅크렸다.거울 속 초췌한 얼굴과 듬성듬성해져 두피를 가리지 못하는 머리카락을 보던 안제인은 수도꼭지를 틀어 찬물로 뺨을 여러 번 씻었다.계단 입구로 막 걸어갔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아빠’라는 두 글자가 떠 있었다.안제인은 잠시 멈칫했다. 안동수는 먼저 전화하는 일이 드물었다.전화받자 말도 꺼내기 전에 안동수의 화난 목소리가 쏟아졌다. [안제인! 오늘 어디 갔어? 오늘 네 엄마 생일인 거 몰라? 가족들이 너 기다리면서 밥도 못 먹고 있어! 네 엄마가 오후 내내 준비했는데, 그것도 잊었어?]안제인은 핸드폰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이번 달 내내 고통스러운 항암치료와 부작용에 시달리느라 날짜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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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다음 날, 안제인은 납덩어리라도 단 듯 무거운 몸을 끌고 은행을 나왔다.핸드폰 화면에는 이체 완료 알림이 떠 있었다.안제인은 차가운 현금인출기 외벽에 기대 깊게 숨을 내쉬었다.‘끝났네.’‘집안이 망했을 때 남은 마지막 빚을... 죽기 전에 드디어 모두 갚았네.’이어 갑자기 눈앞이 까맣게 어두워졌다. 은행 로비가 빙글빙글 돌았고, 사람들 소리는 멀어졌다.또한 무언가 붙잡으려 했지만 힘이 없어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한동안 흐릿했던 시야가 서서히 또렷해졌다.“깼어요?” 옆에서 걱정 어린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안제인은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침대 곁에는 선량해 보이는 이모가 앉아 있었다.이모가 가까이 다가왔다. “은행에서 쓰러졌어요. 응급 연락처에 남편이라고 저장되어 있어서 전화했는데 몇 번을 걸어도 안 받더라고요. 아버지, 어머니라고 된 번호도 다 안 받았고요. 어쩔 수 없어서 제가 일단 여기서 기다렸어요.”안제인은 핸드폰을 받아 통화 기록을 열었다. ‘남편’, ‘아빠’, ‘엄마’ 뒤에 붉은 부재중 표시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손끝이 싸늘했다.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에는 ‘남편’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아이고, 얼른 받아요. 남편분이 찾는 거예요.” 쓰러진 자신을 돕기 위해 애쓴 이모가 재촉했다.[여보세요?]지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방금 전화했어?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 놔서 못 들었네. 무슨 일이야?]안제인은 입을 열었지만 목이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옆의 이모가 보다 못해 전화기에 대고 다급하게 말했다. “여보세요? 남편 맞으세요? 부인이 쓰러져서 지금 제일병원 응급실에 있어요!”전화기 너머가 몇 초간 조용해졌다. 이어 지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황과 미세한 불안이 묻어 있었다. [병원? 쓰러졌다고요? 제 아내가... 어떻게 됐는데요?]...20분쯤 뒤, 지태하는 응급실로 급히 들어왔다.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고 숨이 조금 가빴다. 별문제 없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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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설 연휴를 일주일 앞둔 날이었다.안제인은 침대 위에 웅크려 있었다. 진통제 효력이 막 떨어졌고, 새로운 둔통이 위 깊은 곳에서 퍼지기 시작했다.초인종이 울렸다.안제인이 문을 열었다.“엄마.”장미희는 위아래를 훑고 습관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대낮인데도 왜 그렇게 기운이 하나도 없어? 잠을 못 잤어?”“네.” 안제인은 몸을 비켜 주었다.“오늘 온 건 할 말이 있어서야.” 장미희가 헛기침하고 안제인의 얼굴을 보았다. “설 지나고 나서 말이야, 영순 이모네 친척 아들이 외국에서 막 돌아온대. 괜찮은 사람이고 직장도 좋다더라. 너희 둘 한번 만나보라고.”안제인은 멈칫했다.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만남 자리 말이야. 소개팅.” 장미희가 다시 말했다. “너도 알지? 나경이랑 태하는 그때 집안일도 있었고, 나경이 외국으로 나가느라 어쩌다 헤어진 거잖아. 이제 나경이도 돌아왔고, 이번에는 안 나가고 싶다더라.”장미희는 잠시 멈추고 안제인의 낯을 살폈다. 안제인이 창백한 얼굴로 가만히 있을 뿐 격하게 반응하지 않자 말을 이어 갔다. “내 생각에는 너랑 태하가 결혼도 그때 너무 성급했어. 나경이한테 그런 마음이 있고, 태하도 나경에게 마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잖니?”“네가 철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거야. 너희가 이혼해도, 너랑 태하는, 또 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엄마가 더 좋은 사람 찾아 줄게. 너 손해 보게 하지는 않을게.”장미희는 말을 마치고 안제인을 바라보았다. 예상한 거절이나 울음, 아니면 적어도 서운하다는 항의를 기다리는 듯했다.하지만 안제인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고개를 들어 장미희를 보았다. “좋아요. 나경이에게 자리 비켜 줄게요.”이번에는 장미희가 굳었다.그때 문이 열리고 지태하와 한나경이 함께 들어왔다.장미희가 재빨리 말했다. “지 서방, 나경아, 마침 잘 왔다. 내가 방금 제인이한테 말했어. 설 지나고 괜찮은 사람 소개해 주기로 했고, 제인이도 하겠다고 하네. 젊은 사람들 일은 이렇게 터놓고 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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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안제인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의식이 천천히 돌아왔다.‘지태하... 다 보았구나.’‘많이 놀랐겠지.’마지막에 공포로 가득했던 지태하의 얼굴이 떠오르자 안제인의 마음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힘겹게 고개를 돌려 침대 곁을 보았다. 위경련이 심해져 피를 조금 토한 것뿐이라고, 괜찮다고, 오래된 병이라고 설명하려고 했다.하지만 침대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차가운 의자 하나만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병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간호사가 약통이 올려진 트레이를 들고 들어왔다.“깼어요? 몸은 좀 어때요?” 간호사는 침대 곁으로 와 수액과 모니터를 능숙하게 확인했다.“괜찮아요...” 안제인의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제 남편은요?”간호사의 손이 잠깐 멈췄다. 고개를 들어 안제인을 보았고, 눈빛에는 숨기기 어려운 동정과 난감함이 있었다.“남편분이요.” 간호사가 목소리를 낮췄다. “전화 한 통 받더니 급하게 나가셨어요. 아마 여동생분 강아지가 갑자기 계속 토한다면서 상태가 안 좋다고, 여동생분하고 강아지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가야 한다고 하시던데요.”“아...” 안제인은 자신이 그렇게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다.그다음 이틀 동안 병실은 줄곧 조용했다.연말연시가 가까워서 그런지 병원은 평소보다 한산했고, 복도의 소란도 줄었다.안제인은 대부분 누워 창밖의 회색 하늘을 보았다.몸이 너무 약해졌다. 조금만 움직여도 온 힘이 빠져나갔다.베개 옆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하며 병실의 적막을 깼다.안제인은 힘겹게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었다. 화면에는 ‘남편’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여보세요?]지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에는 차 안 음악 소리와 바람 소리 같은 잡음이 있었다.[여보? 몸은 어때? 좀 괜찮아졌어?]“응, 많이 나아졌어.” 안제인은 작게 답했다.[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지태하는 안도한 듯했다. [설이는 나경이가 기르는 강아지인데, 장염이 좀 심하대. 근처 동물병원에서는 어렵다고 해서 옆 도시 전문 병원으로 데려가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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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설 전야였다.안제인은 1인실에 있었다. 창밖 멀리 도시의 불빛이 반짝였고, 아주 멀리서 둔탁한 불꽃 소리가 들렸다.텔레비전이 켜져 있었다. 음량은 아주 낮았고, 화면에는 시끌벅적한 새해맞이 특집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핸드폰 화면이 밝아졌다. 어두운 침대 머리맡에서 유난히 눈부셨다.지태하의 영상통화였다.안제인은 흔들리는 프로필 사진을 오래 바라보았다.결국 남은 힘을 끌어모아 떨리는 손으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화면이 켜지고 지태하의 얼굴이 나타났다.[여보!]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저녁 먹었어? 뭐하고 있어?]안제인은 카메라를 자신에게 돌리지 않았다. 핸드폰을 베개에 기대어 천장 한쪽만 보이게 했다.“조금 먹었어.” 목소리는 아주 작았고 텔레비전 소리에 묻힐 듯했다. “TV 보고 있어.”[왜 얼굴은 안 보여 줘?]지태하가 묻는다. 평소의 다정한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또 살 빠졌어? 밥 잘 챙겨 먹으라고 했잖아.]“아니야.” 안제인은 말했다. 그래도 카메라를 움직이지 않았다.그때 화면 저편에서 장미희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가까이에 있는 듯했다. [지 서방, 제인이랑 영상통화 하니? 얼굴 좀 보자. 새해 인사도 받아야지.]한나경의 맑은 웃음소리도 희미하게 들렸다.안제인의 심장이 오그라들었다.[장모님이 보고 싶어 하셔.]지태하는 핸드폰을 그쪽으로 돌렸다.화면 구석에 장미희와 한나경의 모습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앞에는 과일과 간식이 놓여 있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한나경은 빨간 니트를 입고 있었다. 피부색이 더 하얘 보였고 웃음은 달콤했다. 장미희도 새 옷을 입고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제인아, 빨리 엄마한테 새해 인사해.]장미희가 화면을 향해 웃었다.안제인의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 그래도 핸드폰은 움직이지 않았다.지금 자기 모습은 말라비틀어지고 초췌했다. 얼굴은 잿빛이고, 머리카락도 빠져서 숱이 듬성듬성해서 모자를 써도 병색이 가려지지 않았다.누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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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여보? 제인아? 왜 그래? 핸드폰 떨어뜨렸어? 안제인?”지태하는 흐릿한 침대 시트와 천장만 보이는 핸드폰 화면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창밖에는 불꽃이 계속 터졌고, 그 빛 때문에 지태하의 얼굴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다. 새해를 맞는 가벼운 기쁨은 빠르게 알 수 없는 불안으로 바뀌었다.하지만 지태하의 부름에 답이 오기 전에, 호텔 스위트 거실에서 한나경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태하 오빠! 빨리 와요! 엄마가 같이 잔 들자고 하세요. 전화 그만해요!”이어 장미희의 다정한 재촉이 들렸다. “지 서방, 설날 밤인데 무슨 이야기는 돌아가서 하면 되지. 빨리 와. 너만 기다려.”지태하는 미간을 찌푸리고 핸드폰을 향해 두 번 더 ‘제인아’ 하고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저쪽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단조로운 기계음, 또렷하지 않은 텔레비전 소리뿐이었다.‘아마 핸드폰을 떨어뜨렸겠지.’ ‘신호도 안 좋은가 보네.’지태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뒤의 떠들썩한 부름이 불안을 조금씩 덮었다.‘아마 제인은 피곤해서 깜빡 잠든 것 같아. 요즘은 늘 기운이 없었지.’결국 지태하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어두워졌다.몸을 돌려 불빛과 온기가 가득한 거실로 돌아갔다.식탁 위에는 반쯤 마신 와인과 주스가 있었고, 텔레비전에서는 새해 특집 노래가 흥겹게 흘러나왔다.한나경의 뺨은 살짝 붉었고 눈은 반짝였다. 그녀는 술잔을 내밀었다.장미희도 편안한 웃음을 띠고 있었고, 말수가 적은 안동수도 표정이 풀려 있었다.“자, 새해 복 많이 받자! 우리 가족, 오늘처럼 매년 행복하자!” 장미희가 맨 먼저 잔을 들었다. 목소리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한나경이 바로 맞장구쳤다. 맑은 목소리에는 미래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지태하도 잔을 들고 함께 부딪쳤다.술 한 모금을 넘겼지만 지태하는 마음 한쪽이 여전히 빈 것 같았다. 갑자기 끊어진 전화가 아주 작은 구멍을 남긴 듯했다.“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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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그래’라는 말이 거의 나올 뻔한 때, 지태하의 머릿속에 다른 얼굴이 스쳤다.창백하고, 고요한 얼굴.아련함은 알 수 없는 초조함으로 바뀌었다. 지태하는 미간을 찌푸리고 반 걸음 뒤로 물러났다. 지나치게 가까워진 거리를 벌리며 분명하고 절제된 목소리로 말했다. “한나경, 장난치지 마.”한나경의 기대가 굳어졌다. 곧 당혹과 상처로 바뀌었다. “태하 오빠...”“우리 사이는 이미 지난 일이야.” 지태하가 말을 끊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입장을 다시 확인하는 단호함이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지금 너는 나한테 그냥 동생이야.”“동생?” 한나경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믿기 어렵다는 서러움이 섞였다. “동생으로만 본다고? 그런데 왜 우리가 다시 만난 뒤 하루하루를 그렇게 기록했어? ‘오랜 이별 끝의 재회’라면서 그 부계정에 일기처럼 올렸잖아. 내가 그걸 볼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또 얼마나 기대하게 됐는지 알아?”끝내 눌러 두었던 말이 터졌다. 눈물도 함께 흘렀다.지태하는 완전히 굳었다. 침착하던 표정은 충격과 비밀을 들킨 난처함으로 바뀌었다. “너... 네가 그 계정을 어떻게 알아?”그는 분명 잘 숨겼다고 생각했다. 자신 말고는 아무도 몰라야 했다.한나경은 당황한 모습에 더 서러워졌다. 동시에 복수라도 하듯 말했다. “내가 어떻게 알았냐고? 언니 핸드폰에서 봤어! 언니가 그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었어. 한 줄 한 줄, 전부 보고 있었어!”쾅!지태하는 순간에 큰 충격을 받았다.‘제인이 다 알고 있었어?’‘그 부계정도, 그 기록들도...’‘‘오랜 이별 끝의 재회’에 관한 은밀한 설렘과 추억, 그때 버려졌다는 분함까지...’‘제인이가 전부 알고 있었어...’‘그래서 몇 달 동안 점점 말수가 줄고, 점점 더 차분해졌던 거야.’‘그래서 장모님은 ‘자리를 비켜라’라며 소개팅을 제안했을 때 그렇게 쉽게 고개를 끄덕였던 거야.’‘그래서 내 걱정에 그렇게 무덤덤하고, 거의 감정이 죽은 사람처럼 반응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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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전화를 끊자 지태하는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어두워진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장미희는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 겨우 일어났다.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처음 안제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받은 충격은 조금 가신 듯했다. 대신 어디선가 생겨난 의심과, 그 의심에 기댄 분노가 떠올랐다.장미희가 넋이 나간 지태하를 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말투에는 요행을 바라는 마음과 누군가를 탓하고 싶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지 서방, 제인이가 우리만 밖에서 새해를 보냈다고 화가 나서 병원하고 짜고 이런 장난을 친 건 아니겠니?”안동수는 말이 없었지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눈빛에도 비슷한 불확실함과 짜증이 섞여 있었다.‘장난?’지태하는 그 단어에 찔린 듯했다.‘제인이?’‘늘 조용하고, 때로는 모든 걸 참고 넘기던 제인이 ‘가짜 죽음’ 같은 큰 장난을 친다고?’하지만 마음 한쪽은 그게 사실이길, 아무리 나쁜 장난이어도 좋으니 살아 있길 간절히 바랐다.‘당장 확인해야 해!’지태하는 연락처를 빠르게 뒤져 부부의 집 근처에 사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형? 나야, 지태하. 부탁 하나만 할게. 지금 당장 우리 집 아래로 가서 봐 줘. 거실이나 안방 불이 켜져 있는지. 그래, 지금. 급해. 보고 바로 전화 줘.”말은 빠르고, 거절할 수 없는 다급함이 있었다.전화를 끊자마자 한나경의 방문이 다시 열렸다.한나경이 지태하 곁으로 와 부드럽게 말했다.“태하 오빠, 아빠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언니는 원래 몸이 괜찮았잖아요. 속이 조금 안 좋은 정도였을 거예요. 이번 일은 분명...”한나경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에 알맞게 눈물이 고였고,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에는 자책과 죄책감이 가득했다. “분명 제가 잘못한 거예요. 제가 이번에 돌아와서 엄마 아빠랑 태하 오빠 마음을 너무 빼앗아 버렸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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