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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는 길고 긴 비였다
재회는 길고 긴 비였다
Author: 소피온

제1화

Author: 소피온
“앞으로 한 달 남았습니다. 새해를 넘기기도 어려울 수 있어요.”

의사는 영상 자료를 모니터에서 내리며 맞은편에 앉은 안제인을 바라보았다.

“안제인 씨, 병세가 나빠지는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빠릅니다. 가능하면 보호자를 모시고 오세요. 앞으로 치료 방향도, 간병 계획도 같이 의논해야 합니다. 혼자 감당하기는 어렵습니다.”

안제인이 천천히 눈을 들었다.

“보호자 없습니다.”

의사가 멈칫했다.

“차트에는 배우자 지태하 씨가...”

“예전 일입니다.”

안제인이 말을 끊었다.

“지금은 저 혼자예요.”

의사는 몇 초 동안 말을 고르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

“진통제 용량을 올리겠습니다. 통증이 심하면 참지 말고 드세요.”

의사는 처방전을 내밀었다.

“영양제도 아침저녁으로 한 포씩 챙기시고요. 다음 주에는 반드시 오셔야 합니다. 그때 치료 계획을 다시 잡겠습니다.”

“네.”

안제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진료실을 나왔다.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화면이 켜졌지만 알림창은 말끔했다. 고작 날씨 알림 하나뿐이었다.

부재중 전화도, 새 메시지도 없었다.

안제인은 시내버스에 올랐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버스가 라온센트럴몰 앞을 지나갈 때, 보슬비 너머로 유명한 샤브샤브집 간판이 붉게 빛났다.

통유리 안은 환했고, 사람들 그림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안제인의 몸이 굳었다.

창가 자리에 앉은 네 사람은 안제인이 너무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지태하는 아침에 안제인이 직접 다려 준 회색 셔츠를 입고 몸을 기울인 채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입가에는 다정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옆에는 3년 만에 외국에서 돌아온 한나경이 있었다.

맞은편에는 아버지 안동수와 어머니 장미희가 앉아 있었다.

한나경에게 고기를 덜어주는 안동수의 손길은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다.

무언가 말하며 웃고 있는 장미희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저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자연스러운 웃음을 안제인은 3년 동안 본 적이 없었다.

네 사람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냄비를 가운데 놓고 둘러앉아 있었다.

냄비 속에는 매콤한 국물이 보글보글 끓고, 한나경 앞의 작은 접시는 음식으로 수북했다.

버스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고 교차로 앞에 섰다.

빨간불이었다.

안제인은 핸드폰을 꺼냈다. 연락처 맨 위에는 지태하의 이름이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통화 연결음이 흘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유리창 안쪽 식탁 위, 지태하의 핸드폰 화면이 밝아졌다.

지태하는 아래를 한번 보았다.

그다음 핸드폰 화면이 보이지 않도록 조용히 엎어 두었다.

지태하는 다시 한나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나경이 내민 음료를 받아 들고 또 무언가 말하자, 한나경이 더 환하게 웃었다.

안제인은 전화를 끊었다. 다시 걸었다.

손가락은 기계처럼 움직였다.

끊고, 다시 걸고, 끊고, 다시 걸었다.

빨간불은 30초 정도 남아 있었다.

유리창 안에서 안동수가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네 사람이 가까이 모였다.

왼쪽에는 지태하, 오른쪽에는 한나경, 뒤에는 부모님.

한나경이 브이 자를 만들며 꽃처럼 웃었다.

찰칵-

안제인은 핸드폰을 내렸다.

진작 알아야 했다.

3개월 전 지태하가 숨겨 둔 부계정을 발견했을 때부터.

지태하가 ‘오랜 이별 끝의 재회 첫날’이라고 적은 날부터.

매일 다른 여자와의 시간을 기록하던 그때부터.

초록불이 켜졌다.

버스가 천천히 움직였다.

안제인은 차창에 기대었다. 창문의 유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3년 전, 집안이 무너졌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이렇게 비가 내리는 저녁이었다.

부모님은 마지막으로 남은 통장을 한나경에게 쥐여 주며 말했다.

“나경아, 이거 가지고 나가서 공부해. 집 걱정은 하지 말고.”

한나경은 울었다. 장미희를 끌어안고 말했다.

“엄마, 보고 싶을 거야.”

안동수는 한나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바보 같은 소리. 네 몸이나 잘 챙겨.”

안제인은 문가에 서 있었다.

낡은 가방 하나를 메고 있었고, 그 안에는 갈아입을 옷 몇 벌뿐이었다.

아무도 안제인을 쳐다보지 않았다.

아무도 안제인에게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비가 더 거세졌을 때, 안제인은 20년을 살았던 집을 혼자 걸어 나왔다.

우산도 없이 온몸이 젖었다.

지태하가 차를 몰고 찾아왔을 때, 안제인은 버스정류장에 쪼그려 앉아 떨고 있었다.

지태하는 차에서 뛰어내려 외투를 걸쳐 주었다.

“나랑 집에 가자.”

버스 안내 방송이 안제인을 기억에서 현실로 끌어냈다.

눈을 뜨자 버스 안은 텅 비어 있었고, 기사만 뒤돌아보고 있었다.

“저기요, 종점이에요.”

안제인은 약봉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 안은 어두웠지만 현관 센서등이 켜졌다.

신발을 갈아 신고 약봉투를 신발장 위에 올려두던 안제인의 시선이 옆 벽에 멈췄다.

결혼사진이 아직 그곳에 걸려 있었다.

사진 속 지태하는 안제인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고 눈빛은 부드러웠다.

안제인은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주방의 불은 켜져 있었다.

가 보니 역시 전기밥솥의 보온 등이 켜져 있었다.

뚜껑을 열자 따뜻한 흰죽이 있었다.

쌀알은 부드럽게 퍼져 있었고, 알맞게 끓여져 있었다.

옆에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요즘 속이 자주 불편하다고 했지? 조금씩 자주 먹어. 죽이 위에 좋아. 식기 전에 꼭 먹어. 나 늦을 것 같아.]

안제인은 죽을 한 그릇 떠서 식탁 앞에 앉았다.

죽에서는 은은한 쌀 향이 올라왔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죽 먹었어? 거래처 사람들하고 있어서 늦을 것 같아. 속 안 좋으니까 찬 음식 먹지 말고, 냉장고에 잘라 둔 사과는 조금 뒀다가 먹어.]

안제인은 그 문자를 바라보다 화면을 껐다.

반 그릇쯤 먹었을 때, 위장이 세차게 뒤틀렸다.

안제인은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 가장자리를 붙잡고 허리를 숙인 채, 온몸이 찢길 듯 토했다.

한참 뒤에야 겨우 멎었다.

변기 물을 내리고 세면대 앞으로 갔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찬물이 얼굴에 닿자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 사람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이마와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눈은 붓고 빨갰으며,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안제인은 그런 자신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행이야. 이제 한 달만 버티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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