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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작가: 소피온
다음 날, 안제인은 납덩어리라도 단 듯 무거운 몸을 끌고 은행을 나왔다.

핸드폰 화면에는 이체 완료 알림이 떠 있었다.

안제인은 차가운 현금인출기 외벽에 기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끝났네.’

‘집안이 망했을 때 남은 마지막 빚을... 죽기 전에 드디어 모두 갚았네.’

이어 갑자기 눈앞이 까맣게 어두워졌다. 은행 로비가 빙글빙글 돌았고, 사람들 소리는 멀어졌다.

또한 무언가 붙잡으려 했지만 힘이 없어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한동안 흐릿했던 시야가 서서히 또렷해졌다.

“깼어요?”

옆에서 걱정 어린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제인은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침대 곁에는 선량해 보이는 이모가 앉아 있었다.

이모가 가까이 다가왔다.

“은행에서 쓰러졌어요. 응급 연락처에 남편이라고 저장되어 있어서 전화했는데 몇 번을 걸어도 안 받더라고요. 아버지, 어머니라고 된 번호도 다 안 받았고요. 어쩔 수 없어서 제가 일단 여기서 기다렸어요.”

안제인은 핸드폰을 받아 통화 기록을 열었다.

‘남편’, ‘아빠’, ‘엄마’ 뒤에 붉은 부재중 표시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손끝이 싸늘했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에는 ‘남편’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아이고, 얼른 받아요. 남편분이 찾는 거예요.”

쓰러진 자신을 돕기 위해 애쓴 이모가 재촉했다.

[여보세요?]

지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방금 전화했어?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 놔서 못 들었네. 무슨 일이야?]

안제인은 입을 열었지만 목이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옆의 이모가 보다 못해 전화기에 대고 다급하게 말했다.

“여보세요? 남편 맞으세요? 부인이 쓰러져서 지금 제일병원 응급실에 있어요!”

전화기 너머가 몇 초간 조용해졌다.

이어 지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황과 미세한 불안이 묻어 있었다.

[병원? 쓰러졌다고요? 제 아내가... 어떻게 됐는데요?]

...

20분쯤 뒤, 지태하는 응급실로 급히 들어왔다.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고 숨이 조금 가빴다.

별문제 없어 보이게 앉아 있는 안제인을 흝어보고는 눈이 곧 차가워졌다.

“왜 그래?”

지태하가 다가왔다.

“장모님이 그러시는데... 네가 또 아픈 척하는 거라던데. 날 붙잡으려고 아직도 이런 식이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나경이가 오래전부터 보고 싶다던 공연 표를 어렵게 구했어. 출국 전에 우리 가족이 다같이 보려고 한 마지막 공연이었는데, 너 때문에 다 망쳤잖아.”

“가족?”

안제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 가족에 나는 포함이 안 돼?”

지태하는 말을 잃었다. 공허한 눈빛을 보자 마음 한구석에 불안과 미안함이 스쳤다.

그리고 시선을 피하며 말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런 뜻 아니야. 공연은 나중에 너랑도 보면 되잖아. 언제든 갈 수 있어. 이번 공연은 티켓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어. 네 장밖에 못 구했고, 나경이는 곧 또 떠나니까.”

“네 장.”

안제인은 되풀이했다. 아주 옅게 웃었다.

“아빠, 엄마, 나경, 너. 딱 맞네.”

지태하는 그 웃음이 불안했다. 차가운 손을 붙잡았다.

“여보, 이러지 마. 나경이 가고 나면 내가 데리고 갈게. 알았지?”

“이제 괜찮아.”

안제인은 손을 빼며 말을 잘랐다.

“저혈당이래. 늘 있던 거잖아. 가 봐. 공연 늦겠다.”

지태하는 안제인의 평온한 얼굴과 시계의 시간을 번갈아 보며 망설였다.

“정말 괜찮아? 혼자 갈 수 있어?”

“응.”

안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있다가 택시 타고 갈게.”

지태하는 몇 초간 더 망설이다 결국 몸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응급실을 나갔다.

옆의 이모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가 결국 한숨을 쉬고 따뜻한 물을 따라 주었다.

뮤지컬 공연이라는 걸... 안제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안제인도 문득 궁금해졌다.

지태하가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고, 한나경이 그토록 기대하고,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완벽해지기 위해 모인 공연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

공연장 앞은 환했고 사람들로 붐볐다.

안제인은 매표소로 걸어갔다.

“혹시 <시간의 회전목마> 표 남아 있나요? 아무 자리나 괜찮아요. 돈은 더 드릴 수 있어요.”

창구 직원이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시간의 회전목마>요? 이 공연은 좌석이 늘 넉넉한 편인데요. 웃돈 안 주셔도 됩니다. 어느 가격대로 드릴까요?”

안제인은 멍해졌다.

어두운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 공연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무대의 빛과 그림자는 아름다웠고 배우들의 노래도 부드러웠다.

하지만 안제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시선은 첫 줄 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그곳에 네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안동수는 살짝 고개를 들고 무대를 보고 있었고, 장미희는 한나경에게 몸을 기울여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웃음이 있었다.

한나경은 무대에 집중했고, 가끔 작게 감탄했다.

지태하는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무대 조명에 비친 옆모습은 부드러웠고, 눈길은 무대와 한나경 사이를 오갔다.

안제인은 멀리 떨어진 구석에 앉아 있었다. 마치 남의 행복을 훔쳐보는 도둑의 심정이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어떻게 버텼는지 알 수 없었다.

불이 켜지자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인파에 섞여 밖으로 나갔다.

그 네 사람과 마주치지 않기만을 바랐다.

허둥대다가 화장실로 들어가 한 칸 속에 숨었다.

차가운 칸막이에 기대 거의 튀어나올 듯한 심장과 숨을 가라앉혔다.

그때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이번 달 생활비요.”

한나경의 애교 섞인 목소리였다.

“아이고, 엄마가 깜빡했네.”

장미희의 목소리에는 웃음과 다정함이 묻어 있었다.

“아침에 네 언니가 돈을 보냈어. 마지막 빚까지 다 갚았다고 하더라. 엄마가 지금 바로 보내 줄게. 외국에 있을 때 돈 부족하게 살지 말고,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

“고마워요, 엄마. 그런데 언니가 알면 화내지 않을까요? 언니가 몇 년 동안 고생해서 번 돈으로 빚을 갚는 줄 알았는데, 사실 빚은 그렇게 많지도 않았고 대부분 제 생활비로 간 거잖아요.”

한나경의 목소리에 아주 작은 불안이 섞여 있었다.

칸 안에서 안제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장미희의 태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화낼 게 뭐 있어? 언니가 동생 챙기고 도와주는 게 당연하지. 제인이는 철든 애니까 이해할 거야.”

수도꼭지가 열렸다. 쏟아지는 물소리가 뒤의 말을 덮었다.

안제인은 좁은 칸 안에서 온몸을 떨었다.

얼마나 그대로 서 있었는지 모른다. 다리가 저랄 때쯤 기계처럼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공연장 출구 가까이 다다랐을 때, 앞쪽에서 한나경이 장미희의 팔짱을 다정하게 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손에는 하얗고 예쁘게 꾸민 작은 강아지의 목줄을 잡고 있었다.

장미희의 목에 매여 있어야 할, 안제인의 마지막 마음이 담긴 스카프는 대충 접혀 양끝에 매듭이 묶인 채 강아지 목줄이 되어 있었다.

강아지가 뛰어다닐 때마다 스카프는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을 질질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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