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궁극적인 목적의 모든 챕터: 챕터 31 - 챕터 40

108 챕터

제31화

태하가 은하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정 시켰다.“은하야, 진정 좀 해.”“…….”“백이현이 시킨 거 아니야. 정문 앞 편의점에서 민희를 만났어. 네가 나를 만나러 옥상으로 갔다는 데 그 소리를 듣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온 건 백이현이라고.”은하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붙잡고 있던 태하의 손마저 뿌리치면서. 눈은 이미 감정을 넘어선 무표정에 가까웠다. 마치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터벅터벅 창고 밖을 향해 걷기 시작하는 은하. 발걸음 소리만이 무겁게 옥상 바닥을 울렸다.생각보다 심각해진 상황에 태하와 이현은 제자리에 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태하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이건 아니잖아….’이현 역시 마찬가지였다.평소 같으면 가벼운 농담이라도 던지며 넘어갔겠지만, 이번 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그저 붉어진 뺨으로 멍하니 제 자리에 서 있었다.은하가 점점 멀어져 가는 동안, 남겨진 두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잠시 후, 쿵! 둔탁한 소리가 계단 쪽에서 울려 퍼졌다.본능적으로 계단 쪽을 향해 뛰는 태하. 이현 역시 곧장 그 뒤를 따라 나섰다.다급히 계단으로 달려 내려간 그들 눈 앞에는, 무릎을 꿇은 채 계단에 기대어 있는 은하의 모습이 보였다. 옆에는 바닥에 쓰러진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고.다리에 힘이 풀려 걷는 것조차 힘들었던 은하가 책상을 지탱했고, 고장난 다리로 인해 힘없이 굴러 떨어진 것.“강은하!”태하가 은하의 어깨를 붙잡았고, 이현은 뒤쪽에 서서 은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괜찮아?”태하의 질문에 침묵이 이어졌다.그리고, 잠시 뒤 들려오는 믿을 수 없는 대답.“저… 안 들려요.”“뭐?”텅 비어버린 눈동자에 태하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너… 지금…”더 이상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흐릿한 눈동자는 제대로 된 초점조차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제야 은하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눈동자를 가까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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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잠시 후, 응급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강은하 환자 어디 있어요? 담당의 입니다.”설희였다. 우주가 출장을 간 탓에, 연락이 자동으로 설희에게 전달됐던 것.설희는 빠르게 침대 위에 누운 은하를 확인하더니, 단숨에 상황을 파악했다.“공황으로 인한 발작 후 의식 저하 상태… 심박수 체크했고, 혈압은요?”“저혈압 수치로 확인됐고, 아직 자발적 반응은 없습니다.”설희는 은하의 곁에 서 있는 태하와 이현을 바라보았다.“너희 둘, 은하랑 같이 있었어?”“네….”“일단 기다려. 정맥 투여 가능한 안정제로 준비해 주세요. 수액 라인부터 확보해주시고요.”안정제가 투여되자 급박했던 의료진들이 조금은 안도하는 모습이었다.설희는 그제야 이현과 태하와 함께 자리를 옮겼다. 응급실 바깥에 놓인 벤치에 자리를 잡은 세 사람. 설희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얘들아.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줄 수 있어?”“학교 옥상에서…. 사고가 있었어요.”태하의 대답에 설하는 곧장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지금… 단순한 일이 아닌 거지?”태하는 입술을 꽉 깨물었고, 이현의 표정에선 그 어떤 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저 손 끝만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솔직히 이야기 해야 해.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닌 것 같은데?”설희의 말이 맞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태하는 결국 은하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 놓기 시작했다,창고에서 있던던 일을 전부 전해 들은 설희가 곧장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우주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우주는 분명 이 소식을 듣자마자 학회고 나발이고 모든 걸 팽개치고 귀국할 것이다. 그건 우주의 병원 생활에 있어 치명적인 일이 되고 말 것이다.결국 우주에게는 문자 메시지만을 남겼다.[은하, 학교 끝나고 나랑 같이 있어. 걱정하지 말고 이따 전화할게.]그리고, 곧바로 경찰에 연락을 취했다.“여기 강진 병원 응급실입니다. 고등학생이 학교 내에서 협박 및 감금 피해를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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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병원에는 경찰들이 도착해 이현과 태하에게 진술을 받았고, 학교 측에도 즉시 연락이 들어갔다.담임 선생님도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왔다. 이 모든 일 들이 벌어지는 동안, 은하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눈앞의 상황을 보고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의식을 잃은 채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강은하.그 옆에서 날이 선 얼굴로 앉아 있는 백이현.그리고 단호한 표정으로 경찰과 대화 중인 정태하.“얘들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모든 상황 설명을 들은 담임 선생님의 표정이 굳어졌다.학교에서 파견된 또 다른 교사 한 명도 병원으로 뛰어 들어왔고, 상황은 겉잡을 수 없이 심각해졌다. 응급실 모니터에 보이는 은하의 수치들을 확인한 설희가 태하와 이현을 바라보았다.“다행히 상태는 안정되고 있어. 병실로 옮길 거니까 너희들은 이만 돌아가.”그제야 조금은 안도한 듯 했지만, 아무도 돌아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자리에서 미동조차 없는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설희가 피곤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진짜 말 안 듣네.”잠시 후, 담임선생님과 급히 파견된 교사, 그리고 이현과 태하 역시 병실로 함께 이동했다.은하는 무겁게 가라앉은 의식 속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머리가 띵하고, 몸이 이상하게 무거웠다.무엇보다 공기가 달랐다. 익숙한 교실의 소음도, 냄새도 아니었고 희미한 형광등 불빛이 눈꺼풀 사이를 찔렀다.“은하야? 정신이 좀 들어?”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설희의 모습이 보였다.오랜만에 보는 설희는 여전히 흰 가운을 입고, 마치 우주처럼 따뜻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은하는 한동안 그 시선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멍한 상태였다.“설희 언니…?”“응. 이제 안전해. 걱정하지 마.”부드럽게 은하의 손을 포개 쥐었다. 은하는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설희의 손길은 차분하고 안정적이었다.그제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완전히 인식할 수 있었다.‘또 병원이구나….’“…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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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그래서? 밤새 여기 있겠다고?”“응. 너는 가던가.”태하의 시선이 병실 문을 향했다.문득,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떠올렸다.‘허전하겠다. 그동안 내가 대신 오빠 해줄까?’그때만 해도 장난 반, 진심 반이 담긴 억지스러운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가슴 한쪽을 묵직하게 짓눌렀다.“널 어떻게 믿고 혼자 가냐.”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침대 위에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은하의 모습이 보였다. 기계음과 숨소리만이 흐르는 공간. 태하가 망설임 없이 한쪽 소파로 걸어가 자리를 잡자, 이현 역시 그 옆에 앉아 한 숨을 내쉬었다.시간이 흐르고, 창문 너머로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았다.은하가 푹 자길 바라는 마음에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스위치를 내린 태하.형광등이 꺼지는 순간, 병실은 한층 더 고요해졌다. 희미한 의료 기기 불빛과 창문을 타고 스며든 어둠만이 공간을 채웠다.이현은 소파에 기대 앉아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태하 역시 마찬가지였고.그러나 얼마 후, 병실 문이 급하게 열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병실 안으로 들어온 설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뭐야? 불은? 너희들이 끈 거야?”순간, 태하와 이현은 놀란 마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형광등이 다시 켜지고, 차가운 불빛이 공간을 밝히자마자 설희의 시선이 침대 위로 향했다.다행히, 은하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하아, 은하는 불 끄고 못 자.”태하와 이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불을 끄고 못 잔다고? 이건 또 무슨 소리야.“죄송합니다… 푹 자길 바라는 마음에…”“다행이네, 안정제 덕분에 깨진 않아서.”사실, 설희는 누구보다 등골이 오싹했다. 만약, 불이 꺼진 병실에서 은하가 깨어났다면 어땠을지를 상상하자,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은하 옆엔 내가 있을 테니까. 니들은 그만 돌아가. 미성년자들이 밤 늦게 뭐하는 거야?”“싫어요.”“저도 싫은데요.”“이것들이 진짜?”무작정 쫓아낼 수도 없었다. 지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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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병실 문이 벌컥 열리며 설희가 뛰어 들어왔다. 비상 호출 소리에 놀란 듯 숨결마저 거칠었다.“무슨 일이야?!”함께 들어온 간호사가 기계 화면에 뜬 수치부터 확인했고, 태하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작게 흘렀다.“꿈을 꾼 것 같아요… 그냥 갑자기….”간호사가 긴장된 목소리로 외쳤다.“선생님!”“안정제 추가로 넣어주세요.”투명한 약물이 천천히 혈관을 타고 흘러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은하에게 향했다. 눈가에는 아직도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순간,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이현이 다급히 병실 문을 열고 뛰쳐 나갔다.태하가 그런 이현을 뒤 쫓았다.“야! 백이현!”이현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저 앞으로만 내달렸다.“백이현! 잠깐 서봐! 갑자기 왜 그래!”복도를 질주하는 두 사람. 이현은 결국 병원 문을 밀어 젖히고, 한밤중의 차가운 공기 속으로 거칠게 뛰어 나갔다.밖은 여전히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거리에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일렁이고 있었고, 차가운 밤바람이 거칠게 옷자락을 흔들었다. 이현은 그 자리에 멈춰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툭 떨궜다.“나… 그동안 쟤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그제야 이현의 옆에 멈춰 선 태하는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보고야 말았다. 이현은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뒤늦게 몰려온 감정. 이제와 감당해야 하는 죄책감이 얼마나 무거워 보이던지.“너, 저번에 그 청소 도구함 때문에 그래?”“몰랐어… 알았으면… 안 그랬을 거야.”“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할 때 좀 듣지.”“진짜로… 내가 쟤를 부술 뻔 했어.”지난 날, 자신의 행동을 뼈저리게 후회했다.왜 유독 강은하에게만 짓궂게 굴고 싶었던 걸까. 그저 흔들리는 모습이 보고 싶었던 걸까?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거침없는 말을 쏟아내는 입술이 미웠던 걸까? 아니다. 어쩌면, 그저 그럴 만한 상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은하가 진짜로 무너질 수도 있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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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등교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하나 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교실로 들어선 민희가 곧장 태하에게 뛰어왔다. 소문은 이미 날만큼 난 듯 했다. “정태하! 어떻게 된거야? 은하는? 은하는 괜찮아?”“어. 민희야. 은하는… 병원에.”“이게 다 무슨 일이야? 박찬희 진짜 미친 거 아니야?”“그래도 어제 네 덕분에 늦지 않게 갈 수 있었어. 고마워.”“다행이다. 다행이야. 진짜.”그리고, 곧 경찰차 한 대가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에 아이들이 수군 거리기 시작했다.“대박. 진짜 박찬희 잡으러 온 거야?”“학교에서 경찰까지 불렀다고?”본관 앞에 경찰차가 멈추자, 학교 전체가 순간 조용해졌다.모두가 술렁이는 사이, 이현과 태하 역시 교실 창가에서 그 이질적인 장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찬희 그새X, 어제 그냥 죽여 놨어야 하는데.”차갑고 날카로운 말투, 분노를 삼키지 못한 채 여전히 꽉 쥔 주먹.“백이현. 진정좀 해.”역시나 학교는 제대로 뒤집어졌다.찬희와 무리들은 이미 부모님까지 소환된 상태였고, 그 자리에 있던 이현과 태하 역시 조사를 받았다. 교무실 분위기도 살벌했다. 책상 위에는 몇 장의 징계 관련 서류가 놓여 있었고, 학교 관계자들과 경찰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진술을 마치고 나온 이현과 태하의 눈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교무실 방향으로 힘없이 걸어오고 있는 영주였다. “이영주?”평소처럼 당당한 모습이 아니었다.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꽉 쥔 채 걸어오는 다리에는 힘이 없었다.게다가 눈에 띄게 굳은 얼굴, 잔뜩 경직된 몸.마치, 스스로 무너지고 있다는 걸 인지한 사람의 모습같달까.이현의 목소리가 기다렸다는듯 튀어나왔다.“이영주. 설마, 아니지?”태하도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은 단 한 사람을 향해 박히는 순간이었다. 한참을 자리에 서서 부르르 떨던 영주가 소리쳤다.“이게 다 너 때문이야!”날카로운 외침이 복도를 쩌렁하게 울렸다. “백이현! 다 너 때문이라고!”“뭐?”“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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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별 다른 말이 오고 가진 않았다. 도착하고 나서도 묵묵히 복도를 따라 걸었고,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오가는 사이, 마침내 은하의 병실 앞에 섰다.태하가 먼저 병실 문을 밀어 열었다.모두가 멈칫했다. 침대 위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은하의 뒷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깨어 있긴 한데, 분명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민희가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은하야….”그제야 은하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마주한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듯 그냥 덤덤했다. 이현은 너무나도 낯설고 차가운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덤덤한 눈빛은 문가에 서 있는 세 사람을 느릿하게 훑더니, 민희에게 정확하게 고정되었다.“민희야. 왔어….”“아씨, 얼마나 놀랐다고! 좀 괜찮아?”“응.”이현과 태하는 자리를 비켜주듯 병실을 나섰고, 은하와 민희의 대화가 시작됐다.“오늘 학교 난리 났었어. 경찰도 오고….”은하는 딱히 궁금하지 않은 듯 고개만 끄덕였다.“많이 놀랐지?”“조금.”“어제 말이야, 나까지 몰랐으면 진짜 큰일날 뻔 했어.”이제야 은하의 얼굴에 궁금증이 드리워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네가 그랬잖아. 태하랑 옥상에서 만나기로 했다고.”“응.”“근데, 정문 앞 편의점으로 정태하가 떡하니 들어오는 거야. 그래서 은하랑 벌써 이야기 끝난 거냐고, 왜 애를 옥상으로 부르냐고 장난스레 물으니까 깜짝 놀라더라고. 그게 지금 무슨 소리냐고.”“아… 그래서 왔던 거구나.”“그게 다가 아니야. 갑자기 편의점에 앉아있던 백이현이 미친 듯이 뛰어나가더라? 편의점 의자 다 쓰러지고, 완전 난리도 아니었어.”은하는 몰랐던 이야기에 잠시 놀란 듯 했지만,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을 끔찍했던 상황에서 구해준 건 사실이지만, 만약 처음부터 백이현과 엮이지 않았다면? 과연 어제의 일은 일어났을까? 괜히 침대 맡의 시트만 손끝으로 만지작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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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결국 축 늘어진 어깨를 뒤로한 채 시야에서 사라진 이현.덩달아 기분이 가라앉은 태하가 조심스레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깨어있는 은하를 보자마자 부드러워지는 표정.“은하야, 좀 어때? 괜찮아?”“괜찮아.”그 대답이 진심이 아닐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주춤거리며 은하의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무거운 고백을 털어놓았다.“이현이, 많이 후회하고 있어.”“상관 없어. 백이현 얘기, 더는 하지 마.”“알 건 알아야지. 어제 너 안고 병원으로 달려온 것도 백이현이고, 밤새도록 집에도 못 들어가고 병원에만 있었어.”순간 은하는 백이현의 뺨을 때린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미안한 감정이 딱히 들지 않았다. 물론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어제 일어난 일이 백이현의 탓이 아니라는 것 즈음은.그렇다고 용서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친구로 지내기엔 이미 어긋난 관계, 처음부터 삐딱선을 탄 만남의 결과는 늘 뻔했으니까.적막만이 흐르던 그때, 설희가 병실로 들어섰다. “어머, 얘 또왔니?”“아, 네.”“같이 있던 친구는? 그 하루 종일 손 떨던 친구.”“방금 갔어요.”은하가 멈칫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백이현이 하루 종일 손을 떨었다고? 믿을 수 없었다.근데 어쩌라고? 믿을 수 없다면, 안 믿으면 그 뿐이다. 그게 그동안 살아온 방식이었다.“은하야, 일단 퇴원부터 하자. 언니가 같이 있어 줄게.”“…네.”설희가 태하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너도 오늘은 집에 가서 좀 쉬어. 한 숨도 못잤을 텐데.”“네.”잠시 후, 퇴원 수속을 마치고 함께 병원을 나선 설희와 은하. 은하의 모습은 다행히도 차분해 보였다.설희는 은하를 늘 동생처럼 챙겼다. 은하 역시 그런 설희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편하지만은 않았다.남이라는 존재는 늘 불편하고, 신경 쓰이고, 절대로 피해를 끼치기 싫은 존재였으니까.별 다른 말 없이 집에 도착한 뒤에도, 설희는 우주의 빈 자리를 채우듯 살갑게 굴어댔다.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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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카페에 앉아 태하를 기다리던 이현은 다리를 덜덜 떨어댔다.문이 열리고, 단단히 굳은 표정으로 들어선 태하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의 질문이 시작됐다.“아까 한 말 뭐야? 강은하가 혼자 있다니? 그래도 되는 상태야? 아니잖아?”잠시 머뭇거리던 태하의 입술이 무겁게 떨어졌다.“그… 은하네 오빠 해외 출장 가셨잖아.”“응.”“오빠랑 둘이 지낸데. 부모님은 어릴 때 돌아가셨다고….” 이현의 눈빛이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그의 뇌리엔 수많은 질문들이 떠올랐다. 부모님이 안 계신다고? 설마, 부모님이 돌아가신 일과, 지금의 상태가 관련이 있는 걸까? 그 의사라는 누나는 몸도 좋지 않은 애를 왜 집에 혼자 둔 거야?그리고… 정태하는 생각보다 강은하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아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혼자 있어도 되는 상황 이냐고. 갑자기 또 공황이라도 오면 어떡해?”“그러게. 좀 걱정 되네.”“전화해 봐. 빨리.”“은하? 번호 몰라…”?그렇게 친한척 굴어대더니 아직까지 번호도 모르고, 이 답답한 자식 같으니라고.“야! 가정사까지 속속들이 아는 놈이, 뭐? 번호를 모른다고?”“듣고보니 이상긴 하네. 근데… 집은 알아.”“이건 또 무슨 전개냐.”“집까지 데려다준 적 있거든. 근데 무턱대고 찾아가기도 좀 그런데….”***그 시각, 두 사람의 조우따윈 몰랐던 은하는 아무렇지 않게 우주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은하야, 어디야?”“집이지.”“별일 없었지?”이번엔 조금 느릿하긴 했지만, 대답은 명확했다.“응.”“설희는?”“방금까지 같이 있다 가셨어. 밥도 잘 챙겨주셨고.”“알겠어. 푹 자고, 내일도 학교 잘 다녀오고.”“응. 오빠.”마음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오빠가 돌아오면 모든 사실을 알텐데, 그땐 또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나 싶어서.***한숨만 내뱉던 이현은 결국 담임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태하의 말처럼 무작정 집으로 찾아갈 순 없으니, 전화라도 먼저 걸어 보기로 한 것.그러려면 연락처를 알아내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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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은하는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헛웃음을 터뜨렸다.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듯 했지만, 이내 두 사람에 대한 생각을 지우기로 했다.그들의 걱정 어린 눈빛과 직접 찾아온 마음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불 필요한 감정은 밀어내는 게 안전하다.텅 빈 거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던 중, 문득 병실에서 꾼 꿈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너무나도 생생한 꿈이었다. 한없이 어둡기만 한 적막 속, 분명 낯선 어른들의 목소리가 들렸었다.[오빠도 친오빠가 아니라며.][죄책감에 앞으로 어떻게 산대?]그 이질적인 목소리는 마치 지금도 귓가에 울려대는 것처럼 웅웅거렸다.이해할 수 없었다. 어릴 적 부모님을 잃고, 오빠만을 의지하며 살아 왔는데. 친 오빠가 아니라니? 죄책감은 또 뭔데?단순한 꿈인가. 아무런 의미 없는 개꿈일 뿐인가.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중간이 뚝 끊겨버린 기억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오빠와 나이 차이는 많이 났지만, 그저 자신이 늦둥이라고만 생각해 왔었다. 한 번도 친오빠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단 말이다.무엇보다 오빠와 함께 했던 시간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다. 나는 지금, 과연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걸까?혼란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고, 엉켜버린 머릿속에선 마치 지금까지의 기억들이 조작된 것처럼 느껴졌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우주의 방으로 향했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이 불쑥 올라온 것처럼,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자연스러웠다.문을 열고 마주한 오빠, 우주의 방은 늘 그렇듯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은하의 눈길에 책상 위로 향했다. 늘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행복이 가득한 사진들.그 중, 환하게 웃고 있는 부모님의 사진을 한참을 쓰다듬었다.엄마, 아빠. 저는 왜 하나도 행복하지 않나요? 다들 행복한 추억을 연료삼아 살아간다는데, 저한테는 왜 그 어떠한 연료도 없는 건가요.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려, 침대 옆에 놓인 서랍으로 시선을 돌렸다.서랍을 열어 안에 담긴 물건들을 하나씩 살펴보던 중, 가장 아래쪽 서랍에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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