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그대로 기숙사를 박차고 뛰어나가 집으로 향했다.이미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부모님은 넋이 반쯤 나가 있었다.“우주야…”“납치라뇨! 우리 은하가 왜요!”어머니는 하염없이 가슴을 치며 울었고, 그제야 우주는 그간 있었던 일을 전부 전해 들었다. 의료 소송에 휘말렸다 무혐의로 종결 났던 사건, 그리고 그 사망한 환자의 아들이 은하를 납치했다는 사실을.그 모든 말을 전해 들은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가 멀어지는 느낌이었다.은하는 다음날, 낡은 폐창고에서 발견되었다.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가족 모두가 안도했지만,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처음 병원 침대 위에서 눈을 떴을 때,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했다.우주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눈으로 한발 물러섰다.그 순간, 우주는 내면이 깨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은하야, 오빠 왔어. 오빠야.”은하는 세상과 자신 사이에 막을 치듯, 가느다란 몸을 구석으로 말아 넣었다.밤에는 경기를 일으키며 비명을 질러댔고, 무엇보다 혼자 있는 시간 자체를 견디지 못했다. 의사들은 모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말했다. 심리 치료가 필요하다고, 회복까지는 긴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다.결국 어머니가 병원을 그만두고 은하의 곁을 지켰고, 우주는 마음은 무거웠지만 학교로 돌아갔다. 사실 휴학을 하려고 했지만, 부모님은 한사코 우주의 결정을 막았다.“그건 안 돼 우주야, 온 가족이 무너질 순 없잖니.”“그래. 은하는 엄마랑 아빠가 돌보면 돼. 너는 걱정 말고 네 할 일 해.”맞다. 온 가족이 무너질 순 없었다. 자신이라도 일상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어야 했다. 혹시라도 온 가족이 다시 웃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더 많이, 더 편하게 웃을 수 있도록.“은하야, 오빠는 너를 위해 다시 힘내볼 거야. 그러니까 너도… 조금만 더 버텨줘.”그때까지만 해도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위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지금 이 위기만
우주는 그렇게 꿈에 그리던 세진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입학식 날 학교 정문 앞에서 부모님, 은하와 함께 찍은 사진은 늘 지갑에 소중하게 담겨 있었다.처음 기숙사에 들어가던 날, 9살의 은하는 참 많이도 울었다. 새하얀 티셔츠에 곰돌이 가방을 멘 채 입술을 삐죽이며 매달렸다. 이미 코끝까지 빨개져 있었다.“오빠 꼭 가야 돼? 그럼 나는? 나느은!”“은하야, 오빠는 학교가 멀어서 기숙사에서 지내야 해. 자주 올 테니까 울지 마. 응?”“택시! 매일 택시 타면 되잖아! 흐아앙!”우주는 그 천진난만한 말에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지금 이 순간에 웃어버리는 건 너무 못할 짓 같았다. 대신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은하와 눈을 맞췄다.“엄마 아빠 말씀 잘 듣고, 숙제도 잘 하고, 편식하지 말고 잘 있을 수 있지?”“아니! 못해앵!”“거짓말쟁이. 어제도 혼자 잘 잤잖아.”“어제눈 오빠가 있었짜나아!”그 작고 서러운 목소리로 떼를 쓰는 통에, 결국 부모님이 은하를 말릴 수밖에 없었다.“은하가 자꾸 이러면 오빠는 멋진 의사 선생님 못 되는데?”“우리 우주가 은하 때문에 슬프겠네.”엄마 아빠의 그 한마디에 은하는 움찔했다. 눈물범벅인 얼굴, 그 작고 동그란 눈망울엔 진심이 가득했다.“오빠 정말 의사 될 거야? 엄마랑 아빠처럼?”“그럼, 멋진 의사가 돼야지! 그래야 우리 은하 아야 하면 고쳐주지.”그 말에 은하는 꺼억,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고 우주는 은하를 품 안에 꼬옥 안아주었다.아직 가슴팍까지 닿지도 못하는 작은 머리를 쓰다듬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오빠 다녀올게. 전화도 자주 할게.”“진짜지?”“그럼, 진짜지.”은하의 눈망울은 여전히 그렁그렁했지만, 더는 떼를 쓰지도, 울지도 않았다. “엄마, 아빠. 연락 자주 드릴게요. 저 가요.”어머니는 우주를 꼭 안아주었고, 아버지는 덤덤하게 어깨를 토닥여주었다.“우리 아들, 장하네. 힘들어도 잘 이겨낼 수 있지?”“그럼요.”“아빠는 늘 아들을 응원한다
밤공기는 차분했고, 가로등 불빛 아래에 서 있던 가희가 태하의 차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가희는 웃었지만, 태하는 차에서 내리면서도 웃지 않았다. “무슨 중대한 진술이라도 받으러 온 거야?”“백가희.”“뭐야… 혹시 나… 뭐 잘못했어?”“응.”순식간에 긴장감이 몰려온 가희가 마른침을 삼켰다.방금 전까진 엄청나게 설렜는데, 진짜로 무슨 잘못을 한 건가 싶어서.“뭔데 그래? 일단 미안해. 그러니까 표정 좀 풀어.”“바보같이… 나를 왜 아직도 좋아해.”“….”가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설마 또 거절인가? 너무 자주 귀찮게 했나? 오늘 음식을 너무 많이 먹었나?별의 별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눈물이 찔끔 맺힐 듯 말 듯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그 모습이 태하의 눈에는 너무나 작고도 애처로워 보였다. 팔을 벌려, 가희를 품안에 꼭 안아주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오, 오빠…”“늦었지만, 우리 이제라도 제대로 시작해 보자.”결국 참아왔던 눈물이 안도의 숨과 함께 터져버렸다.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전과는 달라졌다고 느끼긴 했지만, 오빠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흐흑… 나 울어엉… 오빠아아앙…”태하는 어깨를 들썩이며 엉엉 우는 가희를 더 단단히 품 안으로 감쌌다.밤공기 속, 고백 위로 떨어지는 눈물에 마치 아팠던 시간들이 전부 다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울 거야? 대답은 안 할 거야?”가희가 눈물 콧물 범벅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흐아앙… 오빠앙… 오늘 집에 못 가.”“뭐?”“오빠가 책임져. 오빠가 나 울렸잖아.”“이게 진짜, 발랑 까져가지고.”“나도 이제 어른이라고!”***조명이 은은하게 켜진 침실 안.고요한 공기 속에서 서로를 막 갈구하기 시작하던 그때, 가희가 태하의 옆구리에 난 흉터를 보고는 모든 행동을 멈췄다.“이게 뭐야?”“아, 그거… 전에 범인 잡다가.”“개새끼! 죽여버릴 거야! 누구야!”이럴까 봐 말을 못 한 건데, 동료들한테도
이현과 은하의 결혼식 날.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가희와 태하는 함께 한강으로 향했다. 태하는 라면을 호호 불며 먹는 가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배 안 불러? 식장에서도 엄청나게 먹던데.”“라면은 그냥 디저트로 먹는 거지. 그리고 스테이크 엄청 느끼했단 말이야.”“그게 다 어디로 들어가는지 의문이다.”“근데 오빠.”“응?”“결혼식 보니까 어때? 은하 언니 오빠 첫사랑이잖아.”아무렇지 않은 질문에 잠시의 정적이 흘렀지만, 그 정적은 생각보다 오래 가지 않았다. “은하는 이제 친구지.”“그게 가능해?”“응, 가능해.”“그럼 오빠 마음은 지금, 아주 확실하게 비어 있다는 소리네?”“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래.”가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오빠가 먼저 연락했잖아!”태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내가 언제?”“내 사진을 보면, 늘 마음이 평온하다며.”“그게 무슨 소리야…?”“사실 이거 비밀인데… 내가 바로 비블이지롱!”태하는 눈이 동그랗게 커졌고, 가희는 핸드폰을 들어 자신의 SNS 계정을 보여주었다. “이거 봐, 맞지? 비블!”“그 비블이… 진짜 너였어?”태하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한참 동안 가희를 바라봤다.비블은 진심으로 응원하고 좋아하는 계정이다.특이하지만 따뜻한 사진들도 마음에 들었고, 짧은 한 줄의 문장들로 그간 지친 마음을 위로받곤 했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 백가희였다니. 그 모든 위로를 백가희가 해줬던 거라니. “정말 내 사진을 보면 마음이 평온해졌어?”“응, 그런 소질이 있는 줄은 몰랐네. 진짜 신기하다.”“나 사실… 그날 오빠가 남긴 댓글 보고 연락하고 싶었어.”“하지 그랬어.”“그냥… 그때는 뭔가 자신이 없었달까? 우리 오빠 마음이랑 좀 비슷했던 것 같아.”“백이현, 백가희. 너네 둘은 예전부터 진짜 놀랄 일 투성이 남매다.”그 말에 가희가 웃음을 터뜨렸다.“인정. 정상적인 남매는 아니지.”“뭔가 되게 고맙다, 네가 비블이라서.”생각지도 못한 말에 가희의 심장은 이미 쿵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도착하자마자 호텔방을 잡고 봄 내음을 맡으며 사진기를 들고 걷던 중, 가희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지하철역 앞, 한 남자가 다급히 걷다 어르신 한 명과 부딪힌 것.어르신은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넘어지고 말았고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어르신을 지나쳤다.“저 자식 뭐야? 사과도 안 하고 저렇게 간다고?”주변에서는 지나가던 행인들이 어르신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곧장 그 남자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뭐? 나?”“반말하지 마시고요, 그쪽 때문에 어르신께서 넘어지셨잖아요. 사과는 하고 가셔야죠!”그 순간이었다. 남자의 눈빛이 일그러지더니, 대뜸 가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오지랖 부리다 큰코 다치는 거야. 알아?”퉤에!입에서 튄 가래침이 가희의 신발 옆으로 뚝 떨어졌다. 비릿하고 더러운 냄새가 섞인 숨결이 코끝을 찔렀다.하지만 가희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부릅뜬 채, 손목을 거칠게 털어냈다.“성격 한번 더럽네, 이거 놓으세요!”그 모습을 지켜보던 행인들이 다급히 신고를 했고, 결국 남성과 함께 경찰서로 향했다.‘와… 오자마자 재수 한 번 더럽게 없네.’***경찰서에 도착해서도 가희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반성 따윈 없는 가해자의 표정을 보니 괜히 더 혈압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어디 싸가지 없이 어르신한테!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그러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믿기지 않는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태하 오빠?”맞다. 태하는 경찰이었고, 하필 자신이 온 파출소가 하필이면 태하 오빠가 근무하는 곳이였다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태하는 곧장 가희를 향해 다가왔다.“백가희, 네가 왜 여기 있어? 미국에 있다고 들었는데? 아니, 그보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그렇게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조사를 받았다. 씩씩거리며 모든 일들을 털어놓자 이제야 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아 맞다, 태하오빠!’그대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태
가희는 결국 휴학을 결심했다. 처음부터 애정 없던 학교와 학과였다. 유치원 선생님이 될 것도 아니었고, 적당히 성적에 맞춰 들어왔던 곳에 더이상 머무를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어쩌면 목적 없이 살던 순간부터 어긋난 궤도 위에 있었던 거겠지.그날 밤, 휴학을 결심하고 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나… 학교 휴학할까 해.”“힘들면 그렇게 해.”생각보다 덤덤한 대답에 오히려 놀란 쪽은 가희였다.“뭐야? 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안 말려?”“애초부터 유아교육과가 말이 되냐? 차라리 내가 무용학과 졸업하는 게 훨씬 더 빠르겠다.”“…죽을래?”“휴학하고 뭐 할 건데.”“나… 프라하 놀러 가면 안 돼?”“여긴 안 돼, 위험해.”“치, 됐어. 그냥 여행이나 다닐까 봐.”“그래, 아빠 카드 펑펑 써. 대신 그 시간 안에서 뭐든 찾길 바란다.” 이제라도 스스로를 위한 시간을 제대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이 아닌 휴식, 절망이 아닌 발견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휴학 후, 가희는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아빠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이런 자유를 누리진 못했겠지.’전과는 다르게 생각이 많아지며, 자연스레 감사라는 감정마저 자리잡았다.그리고, 여행 사진들을 찍어 게시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개인 계정이 아닌 @B_travel이라는 아이디로 새로운 계정을 팠다. 시작은 단순히 취미용이었다.하지만 특이한 구도와 몽환적인 느낌, 하루하루를 닮은 짧은 문장에 점차 팔로워 수가 늘어났고, 어느새 사람들은 가희를 ‘비블’이라고 부르며 칭송했다.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되는 것, 비블은 너무나도 자유로웠다. 자유로운 연애도 하긴 했지만 딱히 만남이 깊게, 오래도록 지속되진 않았다. 이제는 사랑조차 자유로운 감정이 되어버린 걸까. 그러던 어느 날, 비블로 살아간 지 일 년이 지났을 무렵. 한 팔로워가 댓글을 남겼다.- @jungth_12 : 비블님, 비블님 사진을 보면 늘 마음이 평온해요. 오늘도 멋진 사진 감사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치는 어느 가을날, 희뿌연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은하는 옷장에 걸린 새 교복을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걸려 있는 교복은 마치 새로운 시작을 속삭이는 듯했지만, 은하에게는 그저 낯설고 무거운 천 조각에 불과했다. 고등학교 입학 후 벌써 세 번째 전학. 이제는 익숙해야 할 것 같은데도, 여전히 이 순간은 낯설었다. 그리고 이 지긋지긋한 고등학교 생활은 아직도 1년도 넘게 남아있었다.학교를 옮길 때마다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것도.
조심스럽게 은하를 안아들고 보건실로 향해 걸음을 옮기는 태하. 팔에 안긴 몸은 생각보다 가벼웠고, 숨소리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민희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뒤를 따르며 은하의 핸드폰을 꽉 쥐고 있었다.보건실로 향하자마자 은하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내려 놓았다.놀란 보건 선생님이 급히 다가와 은하의 상태를 살폈고, 담임 선생님 역시 소식을 듣고 보건실로 달려왔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큰 소리에 갑자기 놀란 듯 하더니… 가방에서 약을 꺼내 먹었어요.”“약? 무슨 약?”민희는 서둘러 은하의 가방을 뒤적여 은하가 먹었던
시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강우주.조용한 진료실, 익숙한 풍경, 익숙한 업무였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정리 하다 가도, 다시금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은하는 괜찮겠지….”정신과 의사인 우주. 사실 그가 정신 의학과라는 길을 선택한 이유도 동생, 은하 때문이었다.은하가 9살이던 그날 이후. 그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가혹했던 사건이 지나간 후, 은하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활기라곤 온데간데 사라졌고, 과거의 기억을 잃었으며, 때때로 보이는 불안한 모습과 깊이 새겨진 트라우마들
이번에도 말없이 선생님을 따라 걸었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몇몇 학생들의 흘깃거리는 눈초리가 느껴졌다.아무리 고개를 숙이고 걸어도, 모든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첫 날이라 그래, 이것도 내일이면 괜찮아 질거야.'2학년 3반 교실 앞에 다다르고 나서야 작은 목소리를 냈다.“저기… 선생님.”“응?”“전학생 소개는 선생님께서 이름 정도만 해주시고요… 저는 바로 자리에 앉고 싶은데요.”선생님은 은하의 표정을 살피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알겠어. 부담 느끼지 말고 편하게 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