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궁극적인 목적의 모든 챕터: 챕터 61 - 챕터 70

108 챕터

제61화

병원에서 설희와 대화를 나누는 우주의 표정이 평소보다 더 부드러웠다. “은하는 요즘 어때?”우주는 커피잔부터 손에 감싸 쥐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감쌌다.“좋은 친구들도 생긴 것 같고, 어제는 글쎄 그 친구들이랑 헥헥거리며 집으로 뛰어 오더라니까?”“뭐? 은하가?”“그렇다니까. 다 같이 저녁도 먹었는데, 애들이 진짜 재미있어.”설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나, 이건 강우주가 그동안 노래를 불러 댔던 희망사항이잖아.“와, 이게 무슨 일이야? 학원도 잘 다니고 있고?”“응. 미술학원 원장님도 칭찬 일색이고, 요즘은 좀 얼떨떨 하다니까.”“좋은 변화인 건 확실하네. 너도 이제 감싸려고만 하지 말고, 은하를 좀 더 믿어줘.”“그래야지.”설희가 잠시 멈칫 하더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은하 상태 말이야, 지금보다 조금 더 좋아지면… 그 얘기, 천천히 털어 놔도 되지 않을까?”“무슨 얘기?”“…너랑 은하 사이 말이야.”“안돼.”어렵게 내뱉은 질문에 비해, 너무도 단호하게 떨어진 대답이었다. “언젠간 은하도 알아야 할 문제야. 안다고 피하고, 싫어할 애도 아니고.”“안된다니까?”우주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여전히 은하를 보호하고 지키는 일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실이란 건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있는 법.입양아라는 사실이 뭐 어때서? 이미 가족인데. 이미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오빠인데. “고백이 늦어질수록, 그만큼 숨겼다는 말이랑 똑같아.”“그만하자. 제발 그만.”“야, 강우주….”***학교에서는 제법 시험기간 분위기가 나기 시작했다.저마다 한숨을 내쉬며 시간이 아깝다는 듯 공부만 하는 이들, 혹은 아예 포기해 버린 듯 더욱 더 활기차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까지.이현과 태하의 대화 주제는 오늘도 역시나 강은하였다.“우주 형님, 요리 진짜 잘하시지 않냐?”“응. 진짜 맛있게 먹었어.”“강은하는 좋겠다. 형님 음식을 맨날 먹다니….”순간, 태하의 머릿속에 스쳐가는 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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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화

차에서 내린 이현은 곧장 핸드폰부터 꺼내 들었다.수화음이 두어 번 울리자, 태하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뭐냐? 또 어디 갔냐 너?”“야, 정태하! 얼른 우리집 다녀오자.”“무슨 소리야.”“아, 빨리! 결심과 실행은 우정이 두터운 녀석들이라고!”태하는 한숨부터 새어 나왔다. 그런 문장을 학업에 쓰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이현의 집.여느 때처럼 정갈하게 정리된 거실과 은은하게 퍼지는 향초 냄새.그리고 오늘도, 가정부가 가장 먼저 그들을 맞이했다.“오늘은 두 분이 같이 오시네요.”“네. 엄마는요?”“방에 계세요.”이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침실 쪽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고, 태하는 그런 이현을 말리며 따라 나섰다.“야! 뭐 하는 거야!”“빨리 와. 급해.”똑, 똑-“엄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는데요.”얼마 지나지 않아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방 안은 고급스럽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이현의 어머니는 화장대에 앉아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무슨 일이야? 어머, 태하도 같이 왔구나?”“…네. 안녕하세요.”"태하는 여전히 잘생겼네.""감사합니다."영혼 없는 인사는 이쯤이면 됐다는 듯, 이현은 곧바로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엄마, 저 독립 하려고요.”“뭐? 뭐를 해?”“이제 기말고사 끝나면 고3 이잖아요.”어머니는 의심스러운 눈빛부터 장착했다. “고3? 수능은 무슨, 기말고사 날짜나 제대로 알기나 해?”“이제부터 차차 알아가려고요. 아, 그리고 태하가 도와주기로 했어요.”“정말이니 태하야? 그러기엔 등수 차이가 너무 나지 않니?”태하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아, 네. 이현이가 머리는 좋잖아요. 안 해서 그렇지.”어머니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진 듯 했다. 그렇다고 독립에 대한 허락은 아니었고 말이다.“공부는 집에서 하면 되잖아.”“효율이 떨어지잖아요. 학교랑 집이랑 거리도 멀고, 태하도 왔다 갔다 하기 힘들고. 고3한테는 시간이 금이라고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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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서 있던 영주가 스르륵 상체를 떼었다.며칠간 은하의 근처를 맴돌았다. 하지만, 도무지 혼자 있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곁에는 늘 백이현, 그리고 정태하가 있었으니까.하루하루 그 모습을 지켜볼수록, 영주의 분노는 빠르게 자라났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얼마나 기다렸는 줄 알아?”“무슨 일인데?”“얘기 좀 하자고.”“나는 너랑 할 얘기 없어.”은하는 아무렇지 않게 그 앞을 지나치려 했지만, 영주는 그런 반응조차 이미 예상했다는 듯 팔목부터 덥석 붙잡았다. “백이현이랑 정태하한테 뭘 어떻게 했길래, 너한테만 찰싹 달라붙는 거야? 설마, 아무도 모르게 유혹이라도 한 거야? 방법 좀 알려줄래?”“이거 놔.”"이제 아예 둘 다 꼬셔보려고? 강은하, 얌전한 척은 혼자 다 떨더니. 보기보다 음흉하네?"영주의 팔에 점점 힘이 실리고 있었다. 덩달아 눈빛까지 변해가고 있었다.“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라고.”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실로 날카로웠다.은하는 붙잡힌 팔에 전해지는 압박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파. 좀 놓고 얘기 해.”하지만 영주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손아귀에는 힘이 더 단단히 들어갔다. “네까짓 것 때문에 나는 이제 학교도 못 다녀. 알아? 아냐고!”분노와 질투, 그리고 억눌린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모습이 은하의 눈에는 그저 한심해 보였다. “그게 정말 나 때문이라고 생각해?”“어. 네가 전학 온 뒤부터 모든 게 엉망이 됐어. 이현이랑 태하는 원래 나랑만 어울렸어. 근데, 네가 다 뺏어갔잖아.”은하가 차갑게 받아쳤다.“걔들이랑 그렇게까지 가까웠다면, 나로 인해 달라질 이유가 없는 거잖아.”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영주가 이를 악물었다.이렇게 나올 거라곤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마침, 바닥에 버려진 깨진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손부터 빠르게 움직였다. 망설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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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화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지고, 두 명의 경찰관이 차에서 내렸다.“신고 받고 왔습니다.”태하가 나서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사건의 전말을 전해들은 경찰들은, 이현의 얼굴과 피 묻은 교복을 바라보며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달았다.“피해자 분, 일단 병원부터 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이현이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은하가 단호하게 말했다.“뭐가 괜찮아? 당장 가야 해.”“알겠어. 알겠으니까 잠깐만.”그때, 태하의 연락을 받은 우주가 다급하게 뛰어왔다.도착하자마자 은하의 상태부터 확인한 우주의 눈에, 피를 흘리며 서 있는 이현의 모습은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다.“이, 이현아. 너 괜찮은 거야?”“네. 형님! 저 괜찮습니다.”경찰관이 영주를 향해 다가갔다.“가해자 분, 조사가 필요합니다. 함께 경찰서로 가주셔야겠어요.”“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진짜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요….”영주는 필사적으로 변명을 이어갔지만, 경찰관은 단호했다.“폭력 사건은 의도가 아니라, 결과로 판단됩니다.”“그리고 피해자 분은, 일단 병원으로….”심각한 표정의 우주가 나섰다.“저희 병원으로 데리고 가겠습니다.”“의사십니까?”“네. 강진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아, 그럼 일단 치료부터 받으시고, 피해자들도 조사를 받아야 하니 저희가 강진 병원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모든 것이 끝났다.한참을 떨며 자리에 서 있던 영주는, 결국 경찰을 따라 힘없이 걸어갔다.그 모습이 점점 멀어질 때까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너 안 되겠다. 얼른 병원 가자.”“형님, 저 머리 엄청 단단하죠?”“장난칠 때 아니야. 상처가 커.”은하는 여전히 멍해 보이긴 했지만, 다행히 상태는 괜찮은 것 같았다.병원으로 향하기 위해 골목을 빠져 나오자, 근처에 있던 최 비서와 박 비서가 곧장 다가왔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입니까?”“아….”“태하 도련님, 괜찮으십니까?”“저기 최 비서님. 좀 조용히….”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주는 당황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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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 안으로 경찰들이 들어섰다. 그들은 곧바로 우주와 태하, 은하를 향해 다가왔다.“오늘 발생한 사건에 대해, 간단한 진술이 필요합니다.”“피해자는 치료를 받고 있어서요. 제가 먼저 진술해도 될까요?”태하의 말에 경찰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을 꺼내 들었다.“이영주 학생이 여기 있는 강은하 학생을 위협했고, 그 과정에서 백이현이 대신 다쳤습니다. 이현이가 아니었으면, 아마 은하가 직접 공격을 당했을 거에요.”경찰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록했고, 우주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가해 학생은 현재 경찰서로 이송 되었습니다. 피해자 측에서는 처벌 의사를 어떻게 결정 하실 건가요?”이번에는 우주가 대답했다.“피해자 의견도 중요하지만, 저희 측에서는 대충 넘어갈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그때, 치료를 마친 이현이 모습을 드러냈다.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이현의 옆에는 응급실 의사가 함께 서 있었다.“강 선생님.”“좀 어떤가요?”“상처가 생각보다 커서 몇 바늘 꿰맸습니다.”꿰매기까지 했다는 말에, 은하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아… 추가 검사는 필요 없을까요?”“다행히 뇌진탕이나 골절은 없습니다. 그래도, 당분간은 소독 잘 하시고 무리하지 마세요.”의사는 간단한 차트 정리를 마친 뒤 자리를 떠났고, 남겨진 사람들 사이에서는 침묵만이 흘렀다. 이현은 경찰관에게 다시 한번 상황을 설명하고, 절대로 합의 할 생각이 없다는 의사를 확실하게 전한 후 은하에게 다가왔다. “강은하.”그제야 은하가 고개를 들었다.“…미안해.”아씨, 차라리 차갑게 굴더 모습이 훨씬 더 나으려나. 왜 이렇게 풀이 죽었어. “네가 왜. 이영주가 미쳐 날뛴거지.”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우주가 가볍게 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자, 다들 너무 심각해지지 말고 집에들 가자.”“형님. 저희 저녁을 아직 못 먹었습니다요!”역시나 백이현은 백이현이었고, 태하가 나서 말리기 시작했다.“오늘은 너네 집 가서 먹어. 왜 그래 진짜. 눈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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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화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아침 일찍 학교로 향하던 태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설마, 진짜 오겠어?’다치기까지 한 이현이, 어울리지 않는 공부를 하기 위해 아침 일찍 올 리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생각과 달리, 교실 문을 열자마자 떡하니 앉아 있는 백이현. 자신보다도 먼저 온 모양이었다.“야, 왜 이렇게 늦게 와?”이게 정말 현실인가. 내가 정말 저 돌머리의 과외 선생 노릇을 해야 하는 거냐고.“너 혹시,머리 다치고 어디 이상해진 거 아니야?”“뭐래. 그런 거 아니거든? 목표가 생겼잖아.”태하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책부터 펼치자, 이현은 바로 곁에 앉아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야, 나 영어는 좀 괜찮은 것 같아.”“그래? 그럼 이 문장 해석해 봐.” - The stars shine brightest when the night is darkest.자신만만하게 문제를 내려다본 이현이 생각보다 유창하게 해석을 시작했다.“밤이 존나게 어두울 때, 별이 겁나게 빛난다.”태하는 놀란 눈으로 그런 이현을 바라보았다.“어?”“나 백이현, 영어 유치원 출신.”그게 다가 아니었다.긴 문장과 잔뜩 꼬아 놓은 문법 역시 척척. 물론,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석 하긴 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수준이었다.“그동안 영어 점수는 왜 그 모양이었냐?”“읽기 귀찮으니까.”“하… 어떤 과목이 제일 힘든데?”“수학.”“그건 깔끔하게 포기하자.”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그나마 희망이 있는 과목들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예상과는 다르게 제법 제대로 된 공부 모드에 돌입한 두 사람. 남들보다 일찍 등교해 공부를 끝내고 나서는, 잊지 않고 함께 은하의 집으로 향했다.***아침을 먹던 우주는 이현이와 태하에 대해 이것 저것 캐묻고 있었다.그들의 비서를 만난 후, 적지 않게 신경이 쓰였던 것.“태하랑 이현이는 보통 애들이랑은 조금 다른 것 같던데?”“집이 잘 산대. 태하네 부모님은 드베르 운영하시고….”“뭐? 드베르? 그 주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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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성적 이야기는 아주 잠깐이었다. 기분 좋게 걷던 중, “부모님은 뭐라셔? 걱정하셨겠네.”태하의 질문에 이현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붕대 감고 들어갔는대도 아는 척도 안 하더라.”“뭐?”“또 싸웠다고 생각 하겠지 뭐. 됐어. 학교나 가자.”은하에겐 그 말이 이상하리만큼 무겁게 다가왔다.처음으로 안 백이현과 부모님의 관계는, 아들이 다쳤는데도 걱정 어린 말 한마디 보태지 않는 일반적이지 않은 관계 같았다.“빨리와! 강은하!”백이현의 웃음 뒤에 가려진, 자신은 알 수 없는 감정이 처음으로 신경 쓰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됐어. 나랑 무슨 상관이야.’***교실 분위기는 역시나였다. 영주에 대한 소문이 이미 파다하게 나 있었다. 웅성거림과 수군대는 소리를 시작으로, 모든 시선이 은하와 이현, 태하에게 집중되었다. 이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신의 자리로 향하며 중얼거렸다.“소문 한 번 빠르네.”태하와 은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몇몇 학생들이 은하에게 다가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은하야, 너랑 이영주 일. 진짜야?”“백이현은 그래서 모자 쓴거야?”“진짜 경찰서 갔어? 이영주는 어떻게 됐는데?”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 한 건 아니었지만, 여전히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었다.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이현이 은하의 자리로 성큼성큼 다가왔다.“나한테 물어봐. 내가 피해자니까.”학생들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뭇거렸다.이현은 화를 내긴 커녕, 오히려 능청스럽게 웃으며 모자를 벗었다. “이거 봐, 나 어제 10바늘이나 꿰맸다니까?”그제야 학생들의 관심이 은하에게서 이현쪽으로 완전하게 옮겨갔고, 은하는 생각보다 빨리 불편한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박. 너 진짜 아팠겠다.”“이영주 미쳤나 봐. 웬일이니?”“백이현. 너 괜찮아?”은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백이현, 또… 나 도와준 거지?’어제도 오늘도. 왜 이렇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머릿속을 헤집는 거지?동시에, 그동안 차갑게만 굴어 댔던 스스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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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화

한참을 고민하다 고무 패드 조각을 손에 쥐고, 이현을 향해 몸을 돌린 은하.여전히 검은 모자를 쓴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 몰랐지만, 태하도 함께였다.“백이현… 너였어?”“뭐가?”“이거.”은하의 손에 들린 조각들을 본 이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태연했다.“그거? 왜?”“청소 도구함에 붙여 놓은 거, 정말 너냐고.”“응. 나야.”오히려 놀란 건 태하인 듯 보였다. “뭐냐? 백이현? 진짜 너였냐?”“그럼. 나지.”놀라지도 않고, 당당하게 자기라도 밝히고. 은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보란듯이 닫을 땐 언제고, 이건 왜 붙여 놓은 건데?”“야, 미안하다고 했잖아! 사과하는 마음으로 한땀 한땀 붙였다. 왜!”“…….”“그리고 혹시 모를까 봐 하는 소린데, 다른 반도 다 가서 붙였다?”생각해보니 그랬다. 요즘은 정말 그 쾅쾅거리는 소리가 어디서도 들리지 않았다.나는 왜 이렇게 백이현을 미워했을까.잘못한 일이라고는, 그날 청소 도구함 문을 일부러 세게 닫은 것. 그거 하나가 전부인데. 심지어 그 일을 두고두고 미안해 하고 있었는데.모진 말만 내뱉는 내가 대체 뭐라고, 백이현. 이 자식은 이렇게까지 날 챙기는 걸까.단단히 굳어버린 은하의 얼굴. 불안해진 이현이 자세를 낮춰 눈을 마주했다.“왜 그래. 내가 또… 잘못했어?”“아니야….”“잘못한 거 아니지? 잘한거지?”이번 만큼은 솔직한 대답을 하고 싶었다. “응… 고마워. 백이현.”물론 목소리는 너무나도 작았지만.은하가 빠르게 몸을 돌려 교실로 향하자,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현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근데, 내 캐비닛엔 왜 서있던 거지?’이제야 살펴본 캐비닛 안, 체육복 위에 곱게 접힌 쪽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떨리는 마음으로 쪽지를 펼쳐보았다.[백이현. 어제는 도와줘서 고마워. 상처 소독 신경 써서 해야 한 대. 그리고 저번에 때린 건 미안.]이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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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화

당황한 이현이 은하의 손에서 쪽지를 뺏어 들고는, 한 글자 한 글자 읊어주기 시작했다.“뭐라는 거야! 잘 들어.”끄덕.“강은하. 이제, 다 용서 해 준거지? 우리 친구 된 거 맞지? 딴 말 하기 없기다. 나는 너 믿어.”어쩔 수 없이 자신의 쓴 쪽지를 직접 읽게 된 이현.내용을 들은 민희가 폭소했다.“대박. 은하는 '나는 너 믿어'를, '나는 너 밀어'로 읽은 거야?”태하 역시 맞장구쳤다.“나도 그렇게 읽혔는데? 진짜 심각하다. 백이현.”은하는 자신을 밀어버리겠다는 오해는 풀었지만, 어이가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심각한 악필이네.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라던데….”이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작아졌다. 아무래도 주눅이 든 모양새였다.“너희들은 지금, 내 충만한 감성을 무참하게 짓밟고 있어. 그리고, 내가 강은하를 왜 미냐? 오히려 잡아주겠지.”악필로 발생 된 오해는 빠르게 해결되었다.네 사람은 테이블에 모여 하하호호 웃으며 점심 식사를 이어갔다.그 모습은 평범한 학교 생활을 즐기는 봄날같은 청춘, 그 자체였다. **미술학원에 간 은하를 기다리는 동안, 이현과 태하는 교실에 남아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태하는 머리를 싸매며 문제를 풀고 있는 이현을 향해 진심 어린 걱정을 내뱉었다.“너, 글씨가 그딴 식이면 주관식은 다 틀린다고 봐야 해.”“정태하. 말이 심하다.”“인류가 이해하기엔 난이도가 너무 높잖아.”“…그렇게 심각해?”“'해석해 주세요' 가 아니라 '해독해 주세요' 수준이라고.”“나만 잘 읽히나.”***은하가 끝날 시간에 맞춰 미술 학원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이내 학원 문이 열리며 은하가 걸어 나왔다.이제는 놀라지도, 밀어내지도 않는 모습. 손에는 작은 귤 두 개까지 들려 있었다.“원장님이 주셨어. 너네 먹어.”기분 좋게 받아 든 이현과 태하는 곧바로 먹지 않고는, 주머니 속에 조심스레 밀어 넣었다. 마치 귀한 음식이라는듯.걸음을 옮기면서도, 이현은 주머니 속에 든 귤을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히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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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화

기말 고사날 아침.태하의 집 분위기는 유난히 무거웠다. “시험 준비는 제대로 했겠지?”태하는 익숙하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네.”“손 꼽히는 명문고가 아닌, 송화고에 보낸 이유는 하나다. 네가 여유롭게 1등을 하길 바랐기 때문이지.”“네, 잘 알고 있습니다.”반면, 이현이네 분위기는 뭔가 달랐다. 부모님은 오늘이 기말고사 날이라는 것 조차 모르는듯 그 어떠한 말도 건네지 않았다.정작 이현의 모습만이 사뭇 달랐다.새벽부터 일어나 한참동안 책상 앞에 앉아 있더니, 마치 오늘만을 기다렸다는 듯 비장한 각오로 집을 나섰다.‘할 수 있어. 얼른 가서 태하가 체크해준 거 위주로 다시 훑어 보자.’그렇게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3일간 치러진 시험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넋을 잃었다. 태하와 이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은하는 아니었다.모두가 마지막 시험을 준비하며 정신없는 와중, 태연히 미술 학원을 향하고 있었다.그런 은하를 향해 민희가 물었다.“설마, 너 오늘도 미술 학원 가게?”“응. 왜?”“아니, 그냥. 다들 시험 기간에는 예체능 학원은 쉬잖아.”“…왜 그래야 해?”은하다운 반응에 곧바로 도리질을 치던 민희가 멋쩍게 웃었다.“아니아니, 내가 미안. 내일 마지막 시험 끝나면, 좀 놀자!”“그래. 너도 내일 시험 준비 잘하고.”그렇게 송화 고등학교의 기말고사가 끝이 났다. ***드디어 시험 성적 발표 날, 학생들이 각자의 등수를 확인하기 위해 게시판에 몰려 들었다.이현과 태하, 은하도 자연스레 게시판으로 향했다. 빼곡하게 나열된 이름과 등수. 희비가 엇갈리는 표정과 탄식들.태하는 어차피 1등이라 생각했는지 큰 관심이 없어 보였고, 누구보다 급했던 건 이현이었다.아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한참동안 자신의 이름을 찾던 중,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가렸다.“……와씨.”“왜? 몇 등인데?”“야. 정태하! 나 진짜 미쳤다. 대박. 미친. 개쩐다.”태하는 그제야 이현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당연히 마지막 등수부터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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