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가짜 부부의 세계에서 탈출합니다: Chapter 1 - Chapter 10

21 Chapters

제1화

하아란이 자신을 비웃듯 피식 웃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때 그녀의 휴대폰으로 메시지 한 통이 날아왔다.[아란아, 네가 제일 좋아하는 구찌 신상 가방 샀어. 방금 비행기에서 내렸고 회사 잠깐 들렀다가 너한테 갈게. 사랑해.]오늘은 성태건이 출장 갔다가 돌아오는 날이다. 사실 하아란은 지금 그를 마중하기 위해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란히 걸어 나오는 두 사람을 본 순간 하아란이 주먹을 꽉 쥐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성태건이 입고 있던 트렌치코트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더니 임다빈의 목덜미를 감싸 안고는 진한 입맞춤을 나눴다.한편 하아란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성태건이 하아란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동시에 다른 여자와 키스하는 파렴치한 인간이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그를 보던 하아란의 머릿속에 두 사람이 함께했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두 사람은 본래 죽마고우였다. 중학교 때 부모님이 하아란을 데리고 해외로 떠나려 했을 때 소식을 들은 성태건이 그녀의 집 앞에서 무려 7일 동안이나 무릎을 꿇었다.실신하기 직전까지도 그는 하아란의 손을 꽉 쥐고 놓지 않았다.“아란아, 가지 마. 넌 평생 내 거야. 네가 내 곁에서 멀어지는 거 절대 용납 못 해.”그 후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내내 한결같았다. 하아란이 성태건의 하나뿐인 보물이라는 건 주변 사람 모두가 아는 기정사실이었다.수능을 마친 뒤 성씨 가문에서는 성태건을 해외 명문대에 진학시키려 했지만 성태건은 하아란의 곁을 지키기 위해 가진시에 남는 쪽을 택했다.“아란이가 있는 곳이 내가 있을 곳이에요. 때가 되면 아란이랑 혼인신고 할 겁니다.”그렇게 두 사람은 스물두 살이 되던 해에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하아란은 그녀밖에 모르던 성태건이 이렇게까지 그녀를 기만하고 농락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때 성태건은 신혼 첫날밤을 치르느라 피곤할 하아란을 배려한다며 이튿날에 본인이 혼자 가서 혼인신고 하겠다고 했었다.하아란과 성태건은 태어날 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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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세 시간 후 하아란이 성태건과 함께 살던 신혼집으로 돌아왔다.성태건이 하아란을 싸늘하게 쳐다봤다.“아란아, 어디 갔었어? 전화도 안 받고. 나 꼬박 두 시간이나 기다렸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하아란이 성태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공항에서 성태건이 임다빈의 허리를 감싸 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던 모습이 머릿속에 가득했다.한때는 성태건과의 키스를 그렇게나 좋아했건만 지금은 그저 역겹고 토가 나올 것 같았다.하아란이 아무 대답이 없자 성태건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말도 없이 어디 가는 걸 내가 제일 싫어한다는 거 알잖아. 예전에 받은 벌이 부족한가 보지?”말이 끝나기 무섭게 커다란 손으로 하아란의 가녀린 허리를 끌어안았다.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하아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치켜 올라간 속눈썹만이 파르르 떨릴 뿐이었다.예전에는 그에게서 나는 옅은 담배 냄새조차 매력적이었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줬으나 지금은 너무 위험하게 느껴졌다.성태건의 강압적인 성격과 그녀에 대한 소유욕이 어느 정도인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스무 살 때 하아란이 성태건과 크게 다투고 친구들과 등산을 간 적이 있었다.그때 성태건은 그녀를 찾겠다고 미친 사람처럼 도시의 헬기란 헬기는 몽땅 동원해 산을 이 잡듯 뒤졌었다.그리고 하아란을 찾아내자마자 한 첫 번째 일이 바로 그녀를 한 달 동안 오피스텔에 가두고 짐승처럼 몰아붙이며 탐한 것이었다.하아란이 울며 애원해도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두 번 다시 그의 눈앞에서 사라져 걱정시키는 일이 없을 거라고 끊임없이 맹세하고 또 다짐한 뒤에야 비로소 그녀를 풀어줬다.그 사건 이후로 하아란은 성태건에게 두려움을 품게 되었고 아무리 화가 나도 절대로 잠적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성태건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하아란의 턱을 들어 올렸다.“아란아, 대답해. 내가 벌을 줘야 정신을 차리겠어?”하아란의 두 눈에 당혹감이 번졌다. 만약 그녀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다면 이번에 진짜 악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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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더는 들을 수 없었던 하아란이 휴대폰을 꺼버렸다. 눈물이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나랑 있으면서 마음이 편안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구나.’하아란이 눈물을 닦아냈다. 이 녹음 파일을 누가 보낸 건지 알 수 없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성태건의 아이를 낳아선 안 돼. 아이도 해결해야겠어.’그러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하아란?”“선배, 내일 아침 선배네 병원에서 수술 좀 할 수 있을까요?”“무슨 수술? 내가 교수님께 연락해볼게.”“낙태 수술요.”성태건이 어젯밤 늦게 집을 나간 후 하아란에게 메시지 한 통을 보냈다.[아란아, 나 오늘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아.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 내일 아침에 바로 회사로 출근할게. 내일 저녁에 집에서 보자.]회사로 출근하겠다던 그가 하아란이 낙태 수술을 하러 온 이 병원에 오늘 버젓이 나타났다.성태건이 임다빈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산부인과 병동 복도에 서 있었다.조금 떨어진 곳에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그 인파 속에서 성태건이 임다빈을 구석으로 감싸 안으며 지켜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유난스럽게 감싸고도는 모습이 예전에 하아란을 지켜주던 모습과 똑같았다.임다빈이 고개를 들어 성태건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나 괜찮아, 태건아. 여기 다 임산부들뿐이라 긴장할 거 없어.”성태건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억누르는 기색이 역력했다.“개인 병원으로 가자는데도 기어이 종합 병원에 오겠다더니. 여기가 뭐가 좋다고.”임다빈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난 그저 도우미의 딸이야. 평범한 사람이라 너나 하아란 씨랑 비교할 수가 없어. 여긴 비용도 덜 들거든. 네가 돈을 함부로 막 쓰는 게 싫어.”성태건의 준수한 얼굴에 안타까움이 가득 배어 있었다.“아란이는 늘 내게 세상에서 제일 비싸고 단 하나뿐인 것들만 요구해. 걔 가방 하나가 너의 10년 치 월급과 맞먹을걸? 아란이는 너처럼 철이 들지 않았어.”그러면서 임다빈을 품에 안고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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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선배 기용하가 나타났다.“아란아, 지금 네 몸 상태로 볼 때 이 아이를 지우면 앞으로 다시는 임신하기 어려울지도 몰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어때?”하아란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대답했다.“선배, 나 이미 결심했어요.”이 아이야말로 하아란이 성태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결혼 7주년 기념 선물이었다.성태건이 원치 않았고 처음부터 잔인하게 짓밟아버리려 했던 아이를 절대 그에게 낳아주지 않을 것이다.차가운 수술 도구가 그녀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랫배를 휘젓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그리고 그 고통과 함께 하아란과 성태건을 이어주던 유일한 끈도 완벽하게 끊어졌다.수술 후 하아란이 모르는 번호로 온 메시지를 받았는데 웨딩드레스 샵의 주소였다.하아란이 욱신거리는 몸을 이끈 채 택시를 타고 웨딩드레스 샵으로 향했다. 공교롭게도 성태건과 임다빈도 막 웨딩드레스 샵 앞에 도착한 참이었다.성태건이 임다빈을 품에 꼭 안고 미안한 얼굴로 속삭였다.“내 와이프는 다빈이 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축복받는 결혼식을 올려주지 못해. 그래도 웨딩드레스는 입혀주고 싶어.”“태건아, 너한테 폐를 끼칠까 봐 겁나. 이것도 다 돈이잖아.”그가 임다빈의 코끝을 톡 치더니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바보 같은 소리. 떳떳한 명분은 못 주지만 널 행복하게 해줄 순 있어.”차 안에 가만히 앉아 성태건이 임다빈에게 하는 말들을 듣고 있던 하아란은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와이프? 임다빈이 너의 와이프면 난 뭐야? 임다빈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그럼 내 행복은?’성태건이 임다빈에게 하는 저 다정한 스킨십들은 과거 하아란에게 수천 수백 번도 넘게 해주었던 것들이었다.그녀는 아이를 지운 게 조금도 후회되지 않았다. 성태건이 아이의 아버지가 될 자격조차 없는 쓰레기였기 때문이었다.두 사람이 결혼할 때도 이 샵에서 웨딩드레스를 골랐다.그때 하아란이 탄 차 앞뒤로 고급 외제 차 여러 대가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 모두 성태건과 하아란의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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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하아란을 발견한 순간 성태건의 두 눈에 경악이 가득해졌다.옆에 있던 임다빈을 내팽개치고 3층에 있는 하아란에게 필사적으로 뛰어갔다.성태건의 안색이 핏기없이 새하얗게 질렸고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떠는 모습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봤다.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미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 하아란을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아란아, 오해하지 마. 우리 지금 광고 찍는 중이야. 너도 알잖아, 이 반지는 내가 널 위해 직접 디자인한 거라는 거. 그런데 네가 카메라 앞에 서는 거 싫어해서 너랑 손이 비슷한 임 비서한테 부탁한 거야. 나중에 광고 영상 다 편집되면 온 시내에 이 광고를 틀어서 너한테 서프라이즈 해주려고 했어.”성태건이 떨면서 하아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려 했다. 그런데 반지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하아란은 바로 알아챘다. 그녀의 사이즈가 아니었던 것이었다.그 시각 1층에 있던 임다빈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눈물을 머금은 채 하아란과 성태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성태건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임 비서, 우리 와이프 화났잖아. 당장 설명해. 안 그러면 명성 그룹에서 내쫓을 줄 알아.”임다빈이 한없이 비굴한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이 결혼식은 그저 광고 촬영일 뿐입니다. 기획도 제가 했고요. 사흘 뒤 두 분의 결혼기념일에 온 시내에 띄우려고 대표님께서 준비하신 이벤트예요.”성태건의 준수한 얼굴에 그제야 미소가 번지더니 하아란을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들었지? 다 널 위해서였어. 내가 한 이 모든 일은 전부 널 기쁘게 해주려고 그런 거야. 아란아, 널 향한 내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아. 나 성태건이 평생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너 하나뿐이야.”지난 27년 동안 하아란은 성태건의 입에서 나오는 달콤한 사랑 고백을 전부 믿어왔다.그런데 성태건이 그녀를 배신하고도 앞에서 사랑한다고 뻔뻔하게 말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임다빈이 그 말에 제대로 자극을 받은 듯했다.“대표님, 사모님, 두 분 백년해로하시고 하루빨리 예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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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과거 하아란과 성태건이 선남선녀에 천생연분이라며 떠들던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하나같이 하아란에게 손가락질하고 있다.두 사람의 관계에 제3자가 끼어들어도 된다는 식으로 비난했고 7년 동안 그녀를 속인 게 분명 성태건인데도 그녀의 잘못이라고 비난했다.임다빈이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하아란도 그 뒤를 따랐다.성태건도 몸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다. 의사의 치료마저 거부하면서 임다빈의 수술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결국 과다 출혈로 임다빈은 아이를 잃고 말았다. 게다가 출혈량이 너무 많아 자궁마저 적출했다.성태건이 고통에 몸부림쳤다.“다빈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널 7년 동안이나 해외에 두는 게 아닌데. 그렇게 외롭게 내버려 두지 말았어야 했어. 네가 뒤에서 날 위해 묵묵히 해준 그 희생들을 아란이가 한 거라고 착각하다니... 내가 사람을 잘못 사랑했어. 줄곧 아란이라고만 믿고 있었어.”그 말을 들은 순간 하아란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임다빈이 널 위해 한 일을 내가 한 거라고 착각했다고?’하아란이 눈물을 머금은 채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그녀 역시 어릴 적부터 성태건을 위해 수많은 것을 희생했다.사실 성태건에게 수혈해준 게 하아란이었다. 하아란은 다섯 살 때부터 성태건에게 혈소판 감소증이라는 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 병 때문에 주기적으로 수혈을 받아야만 했다.어린 하아란은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게 바로 성태건이 죽는 것이었다.그에게 수혈해주겠다는 하아란의 고집을 부모님도 꺾지 못했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수혈해줬다.그 탓에 하아란은 늘 병을 달고 살았고 반대로 성태건은 나날이 건강해졌다.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그녀는 걸핏하면 감기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곤 했다.중학교 때 부모님이 하아란을 억지로 데리고 떠나려 했다. 하나뿐인 딸이 성태건 때문에 목숨을 내던지는 걸 더는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성태건은 그가 하씨 가문 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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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하아란이 망치를 들고 웨딩 사진들을 싹 다 박살 냈다. 바닥이 온통 유리 파편으로 뒤덮였다.성태건이 사준 옷가지와 금은보석, 가방까지 전부 쓸어 담았다. 그리고 한밤중에 중고 명품 매입 업체를 불러 모조리 싣고 가게 했다.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성태건과 주고받았던 선물도 아주 많았다.하아란이 토끼 인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주 어릴 때 하아란이 울자 성태건이 그녀를 달래주려고 사준 인형이었다.그 옆에 성태건이 직접 과외를 해주며 기어이 다 풀게 만들었던 수능 문제집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하아란은 이것들을 전부 마당으로 가져가 불길 속에 던져 넣었다.휴대폰이 다시 울려 확인해보니 모르는 번호로 온 메시지였다.[그 사람이 날 이렇게까지 사랑하는 줄은 몰랐어. 자기 목숨까지 내던질 정도로.]하아란이 딱 한 마디를 보냈다.[임다빈, 내가 버린 쓰레기를 수거해 간 걸 축하해.]3시간 후.하아란이 성태건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성씨 가문 산하의 병원에 하아란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뽑아두었던 피 다섯 팩이 보관되어 있었다.최근 몇 년간 성태건이 다친 곳 하나 없이 건강해도 하아란은 혹시라도 급히 수혈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까 봐 6개월에 한 번씩 피를 뽑아 저장해 두었었다.어젯밤 성태건의 상태가 꽤 심각해서 아마 다섯 팩을 전부 다 썼을 것이다.27년이라는 애증의 세월을 정리하는 데는 고작 다섯 시간이면 충분했다.성태건이 보낸 경호원들이 하아란을 강제로 끌고 병원으로 데려갔다.병실 문을 열자마자 성태건이 임다빈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성태건의 두 눈에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하아란, 감히 의사를 돈으로 매수해서 다빈이 아이를 죽인 것도 모자라 자궁까지 적출하게 만들어?”임다빈이 자궁을 잃은 책임을 성태건이 하아란에게 뒤집어씌울 줄은 몰랐다.옆에 서 있던 의사가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대표님, 전부 하아란 씨가 시킨 일입니다. 사모님의 자궁을 들어내지 않으면 저희 가족들이 우강에서 더는 발도 못 붙이게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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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자궁 소파술?”성태건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의문이 묻어났다.의사가 차분히 설명했다.“자궁 내에 근종 같은 것이 발견되었을 때 주로 진행하는 수술입니다.”그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아란이의 자궁을 적출해서 다빈이한테 갖다 줘요. 다빈이 하도 울어서 눈이 다 퉁퉁 부었어요. 더는 울게 해선 안 되니까 수술 당장 진행해요.”“마취제를 투여하고 약 한 시간 정도는 경과한 뒤에야 수술이 가능합니다.”성태건이 그 시간조차 길다며 역정을 냈다.“이미 의식을 잃었잖아요. 당장 배를 가르고 꺼내요.”하아란의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내 자궁을 도려내는 이유가 고작 임다빈이 울지 않게 달래주기 위해서라니...’결국 자궁을 적출했고 수술 중 심각한 과다출혈까지 일으켰다.그녀가 눈을 뜬 건 이틀이 지난 후였다.성태건의 눈동자에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깼어?”목이 바싹 타들어 간 하아란이 뭐라 하기 전에 성태건이 싸늘하게 말했다.“네가 과다출혈로 죽을 뻔한 걸 다빈이가 너한테 수혈해줬어. 다빈이한테 은혜 갚아야지.”옆에서 귤을 까고 있던 임다빈이 수줍은 척했다.“아란 씨한테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고 그런 건 아니야. 네가 아란 씨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아서 수혈해준 거지. 아란 씨를 살릴 수만 있다면 내 몸의 피를 전부 수혈한다고 해도 기꺼이 했어.”임다빈이 참으로 듣기 좋게 포장해서 말했다.뒤이어 성태건이 잔혹하기 그지없는 말을 내뱉었다.“다빈이한테 진 빚은 너의 신분으로 갚아.”하아란이 성태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를 보는 하아란의 두 눈에 이젠 어떤 빛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녀가 고통을 참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그 모습을 본 성태건이 바로 달려와 하아란의 손을 잡고 분노하며 소리쳤다.“뭐야? 나랑 다빈이가 죽든 말든 안중에도 없다는 거야? 우리한테 빚을 진 건 아란이 너야.”하아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눈빛이 무섭도록 차분했다.그녀가 비웃음을 흘렸다.“성태건, 정말 내가 너희들한테 빚을 졌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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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하아란의 맑은 눈동자에 그 어떤 동요도 일지 않았다.오늘은 하아란과 성태건의 결혼기념일 다음 날이자 성태건과 임다빈 두 사람의 진짜 7주년 기념일이었다.때마침 휴대폰이 울려 확인해보니 성태건이었다.하아란이 전화를 받자마자 그의 분노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하아란, 당장 병원으로 돌아와. 다빈이 몸 상태가 안 좋아졌어. 네가 직접 병원에 와서 다빈이 간호해.”그녀가 스크린을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내 자궁을 통째로 떼어서 그 여자한테 바친 거로도 모자라 간호까지 하라고?”“상황 파악 좀 똑바로 해. 다빈이가 심하게 다친 이유가 네가 나타나서잖아. 뱃속에 있던 3개월 된 아이도 잃었어. 아이를 잃은 엄마의 심정이 어떤지 네가 알기나 해?”그 순간 하아란은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뇌리에 유산한 두 아이가 스쳐 지나갔다.그때 병원에서 나와 임신낭 조직을 냉동 보관함에 담은 후 지난 6년 동안 성태건과 함께 결혼기념일을 축하했던 레스토랑으로 보냈다.성태건이 그 레스토랑에 가기만 하면 매니저가 그에게 7주년 선물이자 두 사람의 마지막 결혼기념일 선물을 전해줄 것이다.“나도 알아.”성태건이 여전히 강압적인 태도로 일관했다.“알면 잔말 말고 와서 다빈이 간호해. 그럼 널 용서해 줄 테니까. 예전처럼 너랑 다빈이 차별 없이 예뻐해 줄게.”두 여자 모두 곁에 두겠다는 성태건의 말을 듣던 하아란은 머릿속에 성태건이 결혼식 날 읊었던 맹세가 떠올랐다.“아란아, 사랑해. 영원히 너 하나만 사랑할게.”그리고 친구들이 옆에서 환호성을 질렀다.“태건아, 혹시라도 아란이한테 상처 주면 어떡할 거야?”“명성 그룹 꼭대기 층에서 뛰어내릴게.”과거의 웃음소리가 하아란의 귓가에 생생하게 맴돌았다.그녀는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 내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성태건, 우리 그만하자.”두 사람이 법적 부부가 아니어서 혼인 증명서도 없었다. 7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결국 이별이라는 두 글자로 끝을 맺게 되었다.전화를 끊은 뒤 하아란이 카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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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병원.성태건이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동안 넋을 잃었다.‘방금 나한테 그만하자고 했어?’두 사람이 함께한 세월만 20년이 넘었다. 아무리 피 터지게 싸워도 헤어지자는 말을 입 밖에 꺼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하아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그가 수술실 문 앞에 쓰러졌던 그때 하아란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던 모습을 똑똑히 보았었다.심지어 성태건이 의식을 잃고 생사를 오갈 때 할아버지가 그녀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는데도 끝내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고 오히려 독설만 퍼부었다.성태건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지난 7년 동안 임다빈이 6개월마다 몰래 명성 그룹 산하의 병원에서 헌혈하지 않았더라면 이번에 꼼짝없이 숨을 거뒀을 것이다.성태건은 어릴 적부터 그에게 병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예전에 할아버지가 그와 혈액형이 완벽히 일치하는 성인을 여러 명을 구했다고 했다. 한 번씩 헌혈할 때마다 그 대가로 10억씩 줬다고 했다.혈기 왕성하던 어린 시절 성태건이 하아란을 감싸고 지켜주느라 숱하게 주먹다짐을 한 바람에 그때 꽤 많은 양의 수혈을 받아야만 했다.나중에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무력 대신 다른 수단과 방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법을 배운 뒤로는 단 한 번도 다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꿈에도 몰랐다. 매번 성태건이 수혈받은 피가 할아버지가 말했던 성인 여러 명이 아니라 임다빈이었다는 것을.그렇게 가냘프고 여린 몸으로 무려 20년 동안 성태건의 목숨을 살렸고 그를 사랑했다.성태건은 그때까지 희생한 게 하아란인 줄 알았다. 수혈할 때마다 옆 침대에 누워있던 사람이 하아란이었으니까.수혈해줄 때마다 하아란이 이렇게 말했었다.“태건아, 나 너무 기운이 없어. 맛있는 거 많이 사줘야 해. 알았지?”그 시절의 성태건은 하아란을 떠받들 정도로 아껴주고 싶었다.그러다가 6개월 전 할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임다빈과 밤을 함께 보냈던 그날 밤 성태건이 자기 몸에 상처를 내고서야 여태껏 수혈해준 사람이 하아란이 아니라 임다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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