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버린 아내가 그룹 회장이었다: Chapter 101 - Chapter 110

112 Chapters

제101화 — 아직 줄지 않은 것

서영애가 다시 미소를 걸쳤다.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한 박자가 늦었다."…누구니, 그게.""고모의 해외 자산에서 서류를 만들던 사람이에요. 업계에서는 백 선생이라고 부른다고 하더군요.""모르는 이름이구나.""이번에 제 앞으로 날아온 그 유령 회사 서류도, 그 사람 작품이에요."서지안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런데 그 사람은 실수를 하지 않기로 유명해요. 이름과 날짜는 부탁한 쪽이 적어 준 대로 넣을 뿐이니까요. 그러니 그 날짜를 적어 준 사람이 따로 있다는 뜻이에요."서영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이 조금 길었다."주문한 사람은 이렇게 시켰을 거예요. 저 여자가 죽은 사람으로 있던 십오 년, 그 기간에 유령 회사를 굴린 것처럼 만들어 달라고. 그래서 설립일이 그 십오 년의 첫해로 들어갔어요."서지안이, 처음으로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강윤서… 제 나이는 알았겠죠. 그런데 기간만 시켜 놓고, 나온 물건은 들여다보지 않은 거예요. 이기는 게 급했으니까요."서영애의 눈꺼풀이 한 번 깜빡였다."강윤서 씨는, 그 문을 혼자 열 수 없었어요."서지안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소개해 준 사람이 필요했죠."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서영애가 아주 낮게 웃음을 흘렸다. 웃음이라기보다 콧소리에 가까운 것이었다."그 애가 여기까지 찾아왔더구나."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HW 딸이라고.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니? 부회장님을 존경한다고 했어."서영애의 입가가 비틀렸다."우습지. 나를 존경한다는 게 아니야. 나를 쓰고 싶다는 거지. 그런 건 얼굴만 봐도 알아. 그런데, 나는 그 애를 안 쫓아냈어. 왜인지 아니?""…쓸 만해서요.""그래. 아주 쓸 만했지."서영애가 자기 손목의 수갑을 내려다보았다."나는 여기 있고, 손발이 다 묶였어. 그런데 그 애는 밖에 있고, 회사가 있고, 아버지 눈만 피할 줄 알면 뭐든 할 수 있어. 그러니까 그 애가 나한테 온 게 아니야. 내가 그 애를 부린 거야."서지안은 숨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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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화 — 종이가 말하게

열흘째 되던 날 아침, 두 장이 한꺼번에 손에 들어왔다.하나는 그 나라 등기소가 보낸 공식 회신이었다. 서류에 적힌 법인이 등기부에 등재된 사실이 없다는 한 줄. 번역 공증까지 마쳐 도장이 세 개나 찍혀 있었다. 다른 하나는 검찰의 수사 개시 통보였다. 위조 문서 유포 혐의로 정식 수사에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법무팀장이 두 장을 나란히 책상에 올려놓았다.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회장님. 이걸로 됩니다.""고생하셨어요."서지안은 두 장을 한참 들여다보았다.열흘이었다. 주가는 바닥을 두 번 갈아 치웠고 주주 항의 전화가 하루에 수백 통씩 왔다. 그런데 제일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밖에서 들어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회의실에 들어서면 말이 끊겼고, 복도에서 마주친 직원들이 눈을 피했다. 아무도 묻지 않았고, 아무도 믿는다고 말하지 않았다.그 열흘을 견딘 값이 이 두 장이었다.홍보실장이 노트북을 열며 물었다."기자회견은 언제로 잡을까요. 오늘 오후도 가능합니다.""안 해요."방 안의 공기가 멈췄다. 홍보실장이 되물었다."…예?""회견 안 합니다. 자료만 내보내세요.""회장님.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입니다. 회장님이 직접 나가시면 하루 종일 뉴스가…""그러니까 안 하는 거예요."서지안이 두 장을 봉투에 넣었다."지난번엔 제가 카메라 앞에 섰어요. 그전에도 그랬고요. 그때마다 하루 종일 제 얼굴이 텔레비전에 나왔죠."그녀가 잠깐 말을 끊었다."제 딸이 그걸 봤어요."홍보실장이 입을 다물었다."여덟 살짜리가 텔레비전에서 아저씨들이 엄마한테 나쁜 말 하는 걸 보고, 밤에 자지도 못하고 현관에서 저를 기다렸어요. 엄마 거짓말 안 했지, 하고 물어봤고요."서지안이 봉투를 밀어 놓았다."이번엔 종이가 말하게 두죠. 등기소 회신하고 수사 개시 통보. 그 두 장이면 충분해요. 제 얼굴은 필요 없어요."법무팀장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다만 그렇게 하면, 우리 쪽 이야기가 덜 실릴 수도 있습니다.""그럴 리가요."서지안이 옅게 웃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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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화 — 꼬리를 자르는 손

강윤서가 접견 신청을 넣은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변호인을 앞세우면 기록이 남지 않는다. 지난 두 달 동안 그렇게 여섯 번을 들어갔다. 익숙한 절차였고, 한 번도 막힌 적이 없었다.그런데 오후에 답이 왔다. 수용자 본인이 접견을 거절했다는 통보였다.강윤서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거절. 그 두 글자가 이상하게 낯설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거절을 한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도, 회사 사람들도, 심지어 강도현조차 거절할 때는 이유를 붙여 주었다.이건 이유가 없었다.변호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서영애 씨 쪽 변호인단이 이번 주에 또 바뀌었습니다.""또요?""이번엔 형사 전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것도 검찰 출신으로 셋이나 붙였습니다."강윤서의 손끝이 책상을 두드리다 멈췄다.자산 관리 전문가를 옆에 세우던 사람이 갑자기 형사 변호인을 셋이나 붙였다. 지킬 것을 지키는 단계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이제는 빠져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변호사가 서류를 만지작거렸다."저희 쪽에 들어온 이야기가 있는데, 서영애 씨 측에서 해외 자산 관련 자료를 자진 제출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형량을 줄이려는 것으로 보입니다.""…무슨 자료요.""거기까지는 모릅니다. 다만."변호사가 잠깐 망설였다."자진 제출이라는 건 보통, 자기 것을 내놓는 게 아니라 남의 것을 내놓는 겁니다."강윤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두 달 전 그 접견실이 떠올랐다. 그날 그녀는 자기가 판을 짜러 갔다고 생각했다.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내주고 원하는 문을 하나 열게 만들 생각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됐다. 서영애는 순순히 사람을 붙여 주고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캐묻지 않았다는 것이 그때는 편했다. 지금은 그게 제일 이상했다."…변호사님. 제 돈이 그 사람 계좌를 한 번 거쳐서 나간 거였으면, 어떻게 됩니까."변호사가 잠깐 말을 골랐다."돈세탁이라는 말을 듣게 되실 겁니다."강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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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화 — 할머니의 성당

"엄마, 바다 언제 나와?"서아가 뒷자리에서 세 번째로 물었다. 창문에 코를 붙인 채였다."아저씨. 아니, 아빠한테 물어봐."말해 놓고 서지안은 귀가 조금 달았다. 먼저 그렇게 부른 건 아이였다. 식도 올리기 전에 엄마가 앞장서서 아빠라고 부르는 건 어딘가 뻔뻔한 것 같아서, 그 말이 아직 입에 붙지 않았다.운전석의 강도현이 웃었다."삼십 분. 대신 세어 보면 더 안 와."수사가 검찰로 넘어가고 사흘째였다. 그 주말에 하루를 비웠다. 성당을 한 번 봐 두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먼저 서아를 데려가자고 한 사람은 서지안이었다. 자기가 결혼할 자리를 딸이 먼저 보는 게 순서 같았다."엄마.""응.""결혼하면 나는 이름 바뀌어?"서지안이 뒤를 돌아봤다. 아이는 창밖을 보면서 아무렇지 않게 물었지만, 며칠을 벼른 얼굴이었다."안 바뀌어. 서아는 그냥 서아야.""그럼 아빠 성은?"서지안의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그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안 바꿔도 돼.""왜?""도현 아빠 성이, 원래 서아 성이랑 같아."서아가 눈을 크게 떴다."진짜?""진짜."아이는 그게 굉장한 우연이라고 생각한 얼굴로 다시 창밖을 봤다. 이름표를 새로 쓸 일도, 친구에게 설명할 일도 없다는 뜻이었다. 아이한테는 그게 다행이었다.서지안은 그 다행이 조금 서늘했다. 십 년을 그 집 사람으로 살았던 흔적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대로 남아 버린 것 같아서.신호에 걸렸을 때, 강도현의 손이 운전대를 한 번 고쳐 잡는 것이 보였다. 그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마을은 그대로였다. 낡은 방파제와 그물이 널린 시멘트 바닥, 페인트가 벗겨진 민박집 간판. 차에서 내리자마자 서아가 바다 쪽으로 뛰어갔다."서아야, 뛰지 마!""아이고, 총각!"민박집 문이 열리고 할머니가 나왔다. 물바가지를 그대로 든 채였다. 그 눈이 방파제로 달려가는 아이에게 가서 멈췄다."…애기가 있었어?""제 딸이에요."할머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아이를 불렀다. 그러고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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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화 — 지는 법

엘리베이터 앞에서 법무팀장이 한 번 더 만류했다."회장님. 지금 저쪽은 피의자입니다. 나눈 말이 조사에서 어떻게 옮겨질지 모릅니다.""녹음하세요. 제 방에서요.""…예?""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나중에 제가 증명할 수 있게요."강윤서는 로비 구석 소파에 앉아 있었다.늘 입던 진홍빛은 아니었다. 어두운 회색 코트에 화장기 없는 얼굴, 머리는 대충 묶여 있었다. 직원들이 힐끔거리며 지나갔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서지안이 다가서자 그제야 일어섰다."…회장님.""올라가시죠."지나가던 직원 둘이 걸음을 늦췄다. 서지안은 그쪽을 한 번 봤다. 두 사람이 곧 시선을 돌렸다.회장실 문이 닫히고도 강윤서는 한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서지안은 재촉하지 않았다. 물을 한 잔 따라 앞에 놓아 주었을 뿐이다."고발장에서 제 이름 좀 빼 주세요."서지안은 잔을 내려놓았다."저는 이름을 넣은 적이 없어요. 위조 문서 하나로 고발했고, 그 뒤는 수사기관이 따라간 거예요.""그러니까 회장님이 취하하시면…""취하해도 안 멈춰요. 제 손을 떠났어요."강윤서가 잔을 잡았다가 놓았다. 손끝이 떨렸다.이 사람이 이 방에 처음 온 날, 다리를 꼬고 앉아 회장실을 한 바퀴 둘러봤다. 그때 앉았던 자리와 지금 앉은 자리가 같았다."아버지가 오늘 아침에 저를 이사회에서 뺐어요. 지분은 남았는데 자리는.. 없어요. 백 선생 번호는 끊겼고, 그 여자는 접견을 거절했어요."그녀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여자가 검찰에 제 계좌를 넘겼어요. 자기는 감옥에 있었고, 제가 알아서 보낸 돈이라고 했다는군요."서지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밖에 있고, 회사가 있고, 돈을 넣고 뺄 수 있는 손. 그 여자한테 필요했던 건 그거였어요. 그게 저였고요."강윤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처음부터 제가.. 쓰인 거예요."말하고 나서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왜 저였는지도 알겠어요. 저는 아버지 이름으로 움직일 수 있고, 회장님을 이기고 싶어 했고, 물어보지 않을 사람이었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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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화 — 명의자 없는 계좌

강윤서가 나가고 사흘 동안, 서지안은 그 계좌 하나만 붙잡고 있었다.검찰은 셋을 다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중 둘은 강윤서 명의였고, 언론도 그 둘만 썼다. HW 대표 딸의 돈, 그 여자의 몰락.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세 번째는 아무도 쓰지 않았다. 쓸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는 법인 하나였다.법무팀장이 서류를 내려놓은 것은 이틀 뒤였다."등기는 살아 있습니다. 다만 그게 전부입니다."서지안이 첫 장을 넘겼다. 법인 이름이 세 번 바뀌어 있었다."주소지에 가 봤습니다. 상가 삼 층인데, 그 층에 사무실이 여섯 개 있고 그중 하나가 서류만 받아 주는 곳입니다. 직원은 없습니다.""설립이 언제죠.""…십오 년 전 봄입니다."서지안의 손이 멈췄다.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도 그해 봄이었다."자금 흐름은요.""돈이 들어오는 건 여러 군데인데, 나가는 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나간 몇 건이 이상합니다."법무팀장이 다음 장을 짚었다. 형광펜이 열다섯 줄에 그어져 있었다."자문료라는 이름으로 매년 한 번씩, 같은 날에 같은 금액이 빠져나갑니다. 십오 년 동안 하루도 어긋난 적이 없습니다.""금액은요.""이천사백만 원입니다. 십오 년 동안 한 번도 안 올랐습니다."서지안이 고개를 들었다."…한 번도요?""예. 물가가 오르든 말든 그대로입니다. 보통 이런 돈은 액수가 움직입니다. 더 달라고 하거나, 덜 주려고 하거나요."움직이지 않는 숫자는 두 가지 뜻이었다. 받는 쪽이 더 달라고 하지 못하거나, 주는 쪽이 액수를 바꾸는 순간 이게 무슨 돈인지 드러난다는 것을 아는 것."받는 사람은요.""개인 계좌입니다. 그런데 명의자 확인이 안 됩니다. 대리인이 만든 계좌로 보입니다."서지안은 서류를 덮지 않았다. 대신 손끝으로 그 줄을 한 번 훑었다.돈을 숨기려면 굴려야 한다. 여러 군데로 나누고, 이름을 바꾸고, 나라를 옮긴다. 그런데 이 계좌는 그러지 않았다. 들어온 돈을 그냥 쥐고 있었고, 매년 한 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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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화 — 십오 년을 받은 사람

이름은 조성달이었다.십오 년 전 참고인 조사에서 그는 두 문장만 답했다. 정비는 정상적으로 했다. 브레이크 쪽은 손대지 않았다.조사관은 더 묻지 않았다. 차량 감정서에 이상 소견이 없었으므로 물을 이유가 없었다.서지안은 그 두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말이 길어진다. 묻지 않은 것까지 설명한다. 이 사람은 그러지 않았다. 물어본 것만 답하고 입을 닫았다.말을 아끼는 법을 미리 배운 사람의 답이었다."찾았습니다."한정우가 회장실로 들어온 것은 사흘 뒤였다."사망했거나 종적이 없을 거라고 보셨는데, 아닙니다.""…어디 있죠.""같은 자리에 있습니다."서지안이 고개를 들었다."십오 년 전 그 정비소,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간판만 두 번 바뀌었습니다."한정우가 사진 한 장을 내려놓았다. 낡은 셔터, 기름때 묻은 시멘트 바닥, 벽에 붙은 정비 요금표. 어디에나 있는 동네 정비소였다."직원 둘, 매출은 근처 시세대로입니다. 세금도 밀린 적이 없습니다.""가족은요.""혼자 삽니다. 십사 년 전에 이혼했고, 아들이 하나 있는데 연락이 없다고 합니다. 동네에서는 말수가 적고 일 잘한다는 평입니다.""…술은요.""거의 안 마신다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많이 마셨는데 어느 해부터 끊었다고요."서지안은 그 사진을 오래 봤다.2,400만 원. 십오 년이면 3억 6천만 원이다. 큰돈이지만, 사람을 죽인 값으로는 이상하게 적었다.한 번에 받은 돈이라면 그 값이 목숨값이다. 나누어 받는 돈은 다르다. 그건 목숨값이 아니라 사료였다.사람을 죽인 사람이라면 도망갔을 것이다. 아니면 받은 돈을 쓰다가 무너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십오 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남의 차를 고치며 살았다. 매년 한 번씩 자문료를 받으면서.그게 더 무서웠다.한정우가 잠깐 망설이다가 물었다."…회장님. 정비소에는 직접 가 보셨습니까.""어제요."그가 놀란 얼굴을 했다."차를 맡기고 왔어요. 뒷유리 와이퍼가 안 움직인다고요.""…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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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화 — 연습

아흐레 중 이틀은 다른 일에 쓰기로 했다."그날 준비는 제가 다 잡아 두겠습니다. 회장님은 이틀 비우십시오."한정우가 그렇게 말했을 때 서지안은 반대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아흐레 동안 그 날짜만 보고 있으면, 그날 정작 제일 흐린 눈으로 서 있을 것 같았다.한정우는 그 이틀 동안 세 가지를 준비했다. 정비소가 보이는 골목의 주차 자리, 그날 하루 회장 일정을 통째로 비우는 명분, 그리고 만약 그 사람이 도망갈 때 쫓지 말라는 서지안의 지시였다."쫓으면 잡을 수는 있습니다.""잡으면 그 사람은 아무 말도 안 해요. 지금까지 십오 년을 그렇게 살았으니까요."드레스 가게는 조용한 골목에 있었다. 직원이 흰 드레스를 세 벌 걸어 놓았다.서지안은 그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흰색은 좀.""왜요?""두 번째잖아요."말해 놓고 그녀는 자기 목소리가 작았다는 걸 알았다. 스무 명 앞에서 회사를 도려내겠다고 말할 때는 이렇게 작지 않았다.직원은 익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을 처음 듣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러시면 아이보리나 샴페인색으로 보여 드릴까요."직원이 조심스럽게 다른 색을 꺼내려는데, 서아가 먼저 손을 들었다."엄마. 나 이거."아이가 가리킨 것은 세 벌 중에 제일 흰 것이었다."…이게 왜 좋아?""엄마 좋아하는 색이잖아."서아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얼굴로 말했다."엄마 옷장에 흰 거 제일 많아."서지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이는 그 옷장을 여덟 해 동안 봤다."…입어 볼게요."거울 앞에 섰을 때 서지안은 십 년 전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애쓰지 않아도 그날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무슨 옷을 입었는지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그 옷의 감촉도 기억나지 않았다.거울 속 사람은 처음 이 옷을 입는 사람 같았다.십 년 전에는 이 옷이 남의 옷이었다. 시어머니가 골라주었고, 사진에도 시댁 사람들만 가득했다.이번 옷은 딸이 골랐다."엄마 예뻐."거울 앞에 선 엄마를 보고 서아가 말했다. 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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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화 — 초대하지 않은 사람

김 여사가 JL 로비에 온 것은 그 이틀 뒤였다.혼자가 아니었다. 강민호가 반걸음 뒤에 서 있었다."회장님. 아래에서 손님이…""올려 보내세요."한정우가 잠깐 멈칫했다."괜찮으시겠습니까.""여기서 안 만나면 성당으로 갈 사람들이에요."한정우가 더 말하지 않고 나갔다. 서지안은 책상 위 서류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앉은 채로 맞을 생각은 없었다.회장실 문이 열렸다. 김 여사는 들어서면서부터 방을 한 바퀴 둘러봤다. 며느리가 앉아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눈으로 재는 얼굴이었다.십 년 동안 저 눈으로 자기 부엌을 봤던 사람이었다. 냉장고를 열어 보고, 반찬 그릇 수를 세고, 살림을 이렇게 하느냐고 묻던 눈이었다."…앉으세요.""됐다."김 여사가 선 채로 말했다."내가 여기 앉을 사람은 아니지.""그럼 서서 말씀하세요."서지안도 앉지 않았다."결혼한다더구나.""네.""성당에서 한다고.""네.""우리는 안 부르고?"서지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답이었다.김 여사의 얼굴이 붉어졌다."내가 그 애 할미다. 십 년을 손주 기저귀 갈아 준 사람이야. 그런 사람을 자리에도 안 넣는다는 게 사람이 할 짓이냐.""…""서아가 꽃 들고 앞장서서 걸어간다더구나. 그걸 내가 봐야지, 누가 봐.""…""그리고 너도 생각을 좀 해 봐. 그 애가 나중에 커서 우리 할머니는 왜 그때 안 왔느냐고 물으면, 너는 뭐라고 대답할 거야."서지안은 그 말을 끝까지 들었다.이 사람은 미안한 게 없었다. 십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자기가 받을 것이 남아 있다고 믿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받을 것을 요구할 때 늘 아이를 앞에 세웠다."어머니."강민호가 낮게 불렀다. 김 여사가 아들을 노려봤다."너는 가만있어. 네가 물러서서 이 꼴이 된 거야."서지안은 그 광경을 잠깐 봤다. 십 년 동안 저 집에서 저 목소리가 나면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하면 하루가 길어졌고, 길어진 하루의 값은 늘 부엌에 있는 사람이 냈다.그게 이 집의 규칙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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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화 — 11월 20일

그날 밤, 서지안은 서아 방에 앉았다.아이는 이불을 목까지 덮고 누워 있었다.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숨소리가 자는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서아야.""…응.""엄마가 하나만 물어볼게. 화내려고 묻는 거 아니야."아이가 이불 속에서 눈만 떴다."지난주에 아빠 만났을 때, 아기 봤어?"이불이 한 번 크게 움직였다."…엄마가 어떻게 알아?""엄마가 아빠 만나서 알게 됐어."아이는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작게 말했다."…말하면 엄마가 슬퍼할 것 같아서."서지안은 그 말에 잠깐 눈을 감았다.여덟 살이 엿새를 혼자 삼켰다. 그것도 엄마가 슬퍼할까 봐 그랬다고 했다."서아야. 엄마가 슬픈 건, 서아가 혼자 참는 거야. 그게 제일 슬퍼."아이가 이불을 내렸다."엄마 진짜 안 화났어?""안 화났어. 그리고 하나 더 말해 줄게."서지안이 아이 머리를 넘겨 주었다."서아가 그 아기 손 잡아 준 거, 잘한 거야."아이가 눈을 크게 떴다. 야단맞을 줄 알았던 얼굴이었다."그 아기는 아무것도 몰라. 잘못한 것도 없어. 어른들 일은 어른들이 정리하는 거지. 서아는 서아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돼.""…근데 그 아기가 내 동생이래.""서아는 동생이 생겨서 좋아?""…모르겠어. 그런데 너무 귀여웠어. 자꾸 생각나…"서지안은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아이는 그 말을 하고 나서 조금 편해진 얼굴이 됐다. 이불을 다시 목까지 끌어 올리고, 두 번쯤 몸을 뒤척이다가 곧 잠들었다. 엿새 만에 마음을 내려놓은 아이의 숨소리였다.방을 나오는데 거실 불빛 아래에 강도현이 서 있었다."…들었어요?""조금."그가 잠깐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네가 아기 손 잡아 준 거 잘했다고 한 거. 나는 그런 네가 존경스럽다.""…존경이요?""너한테 인내심이 얼마나 있는 건지 가늠이 안 돼. 내 여자, 정말 멋진 여자야."서지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날 처음으로 웃었다.이튿날 오후, 법무팀장이 서류를 들고 왔다."정비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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