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버린 아내가 그룹 회장이었다: Chapter 81 - Chapter 90

112 Chapters

제81화 — 목줄을 쥔 손

결국, 서이든이 먼저 움직였다.강윤서의 자금이 열흘 넘게 감감무소식이 되자, 그는 더 버틸 수가 없었다. 금융 당국의 조사가 조여 오는 지금, 지분 방어에 들어갈 실탄이 말라 가고 있었다. 실무진을 통한 독촉은 번번이 흐지부지 되돌아왔다. 답은 하나뿐이었다. 그가, 직접 가는 것.강윤서는, 그 만남을 일부러 이틀이나 미뤘다. 선약이 있다는 핑계였지만, 서이든은 그것이 핑계라는 것을 알았고, 강윤서는 그가 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 게임의 규칙이었다.이틀 뒤, 서이든은 강윤서가 지정한 갤러리 라운지에 앉아 있었다. 강윤서는 약속 시간에서 이십 분이 지나서야, 느긋한 걸음으로 나타났다."어머, 오래 기다리셨어요? 요즘 제가 좀 바빠서.""…괜찮습니다."서이든이,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나 그 담담함을 유지하는 데, 그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힘을 쓰고 있었다."자금 이야기라면, 앉아서 천천히 하죠. 저 그림 어때요? 지난주에 들여온 건데."강윤서는, 한참이나 그림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서이든이 무엇 때문에 왔는지 뻔히 알면서도, 정작 그 이야기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목마른 쪽이 먼저 우물을 파게 만드는 것. 그녀는 그 순간을, 향이 좋은 차를 음미하듯 즐기고 있었다."…강윤서 씨."마침내, 서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약속하신 자금이, 열흘째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시점에 자금이 마르면, 우리 쪽 지분 방어선이 무너집니다. 그건 강윤서 씨에게도 손해일 텐데요.""어머, 그랬나요? 요즘 시장이 워낙 뒤숭숭해서, 우리 쪽 자금 집행이 다 늦어지고 있거든요."강윤서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방긋 웃었다."그래도 서 회장님이 이렇게 직접 와 주셨으니, 제가 신경 써 볼게요. 일단 절반만 먼저 보내 드리죠. 나머지는, 상황 봐서."절반. 그리고 상황 봐서. 서이든은, 그 말속에 든 뜻을 정확히 읽었다. 앞으로도 이 목줄을 놓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필요한 만큼이 아니라, 그녀가 주고 싶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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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 참회의 값

강민호가 마음을 정한 것은, 어느 새벽이었다.그날도 그는, 빈 술병 옆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었다. 창밖이 희끄무레하게 밝아 올 무렵, 그는 문득 오래된 휴대폰 하나를 꺼내 들었다. 서이든의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그가 남몰래 지녀 온 물건이었다.그 안에는, 그의 '보험'이 잠들어 있었다.서이든과 단둘이 만났던 날들의 녹음. 주가를 어떻게 움직일지, 자금을 어떤 경로로 돌릴지. 그 담담하고 낮은 목소리가 직접 지시하는 내용들이었다. 차명 계좌의 흐름을 정리해 둔 메모도 있었다. 언젠가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역설적으로 그에게 이것들을 남기게 했다. 밑바닥 인생을 살며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큰 사람들은 절대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작은 사람은, 스스로 살길을 챙겨 둬야 한다는 것이었다.강민호는, 그 휴대폰을 오래 내려다보았다.식탁 위에는, 며칠 전 우연히 발견한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이삿짐 정리 중에 상자 밑바닥에서 나온, 서아의 돌 사진이었다. 아이를 안고 어색하게 웃고 있는 젊은 자신과, 그 곁에서 환하게 웃던 서지안. 그 시절의 그는, 이 초라한 행복이 부끄럽다고 생각했었다. 더 크고 번쩍이는 것들을 곁에 두면, 자신도 큰 사람이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이 사진 속의 모든 것을, 제 손으로 부수고 팔아넘겼다.'…크긴 뭐가 커. 이 사진 찍던 날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나은 게 하나라도 있나.'이것을 서이든에게 가져가면, 그는 한동안 안전할지도 몰랐다. 협박의 패로 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서영애의 곁에서, 그리고 서이든의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그런 패를 쥔 작은 인간이 어떤 최후를 맞는지를. 오태식이라는 남자가, 어떻게 사라졌는지를.그리고 무엇보다. 그 새벽 그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협박도 거래도 아닌 다른 것이었다.서지안의 말이었다. 서아에게 부끄러운 아빠를 주고 싶지 않다던, 그 말.'…부끄럽지 않은 아빠라.'강민호는, 마른 웃음을 흘렸다.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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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 닫힌 지갑

다음 날, 서지안 측은 준비한 모든 것을 금융 당국과 검찰에 제출했다.최과장의 녹취. 강민호가 넘긴 서이든의 육성 지시 녹음과 차명 계좌 메모. 그리고 강민호 본인의 자수와 진술. 세 개의 칼날이, 한 방향을 향해 동시에 내리꽂혔다.파장은, 즉각적이었다.주가 조작의 몸통이 외국계 투자회사 회장 서이든이라는 보도가, 저녁 뉴스를 타고 일제히 터져 나왔다. 서영애의 양자라는 사실, 그가 접수한 회사가 서영애의 해외 비자금에서 자라난 곳이라는 정황까지. 언론은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 검찰의 소환 조사가 임박했다는 속보가 이어졌고, 서이든 측 회사가 손댄 종목들은 하한가로 곤두박질쳤다.서이든의 판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그를 따르던 이들이 먼저 등을 돌렸다. 어제까지 그의 말 한마디에 움직이던 임원들은 앞다투어 변호사를 선임했고, 함께 지분을 모으던 우군들은 밤사이 연락이 끊겼다. 그가 머무는 호텔 앞에는 취재진이 진을 쳤다. 권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빨리 식는지를, 서이든은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놀랍지는 않았다. 그 자신이, 남들에게 늘 그렇게 해 왔으니까."…강민호. 결국, 그쪽으로 갔군."보고를 받은 서이든은, 의외로 담담했다. 배신감 같은 것은 없었다. 애초에 사람을 믿은 적이 없으니, 배신당할 일도 없는 것이다. 다만 계산이 하나 어긋났을 뿐이었다. 그는 강민호라는 인간이 끝까지 겁에 질려 웅크리고 있을 거라 보았다. 그 겁쟁이를 일으켜 세운 것이 무엇인지, 서이든으로서는 끝내 계산할 수 없었다.문제는, 당장의 방어전이었다.소환은 피할 수 없다 해도, 지분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주가가 무너진 지금이 오히려 우호 지분을 늘릴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즉시 움직일 수 있는 대규모 자금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의 금고 열쇠는, 지금 단 한 사람의 손에 들려 있었다.서이든은, 강윤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약속하신 잔금이, 오늘 안에 필요합니다. 가능하다면, 추가 집행도."전화기 너머에서, 나른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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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 사냥개의 뿌리

소환 조사를 앞둔 그 밤, 서이든은 홀로 집무실에 남아 있었다.불도 켜지 않은 방 안에서, 그는 품속의 낡은 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진을 바라보는 사이, 기억은 그를 아주 먼 곳으로 데려갔다.다섯 살의 겨울이었다.그가 자란 보육원은, 언덕 위의 낡은 이층 건물이었다. 겨울이면 연탄 냄새가 복도 끝까지 배어들었고, 창틀 틈으로 새어 든 바람이 밤새 문풍지를 울렸다. 아이들은 한 방에 여섯씩 잤다. 담요는 얇았고, 늘 한 장이 모자랐다. 담요를 차지하지 못한 밤이면, 그는 무릎을 끌어안고 벽에 등을 붙인 채 잠들었다. 벽이 그나마, 바람보다는 덜 차가웠기 때문이다.보육원의 아이들은, 저마다 무언가 하나씩을 쥐고 잠들었다. 부모가 두고 갔다는 손수건, 낡은 곰 인형, 반쪽짜리 사진. 그러나 그의 손에는, 쥘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이름도, 물건도 없이 어느 새벽 보육원 문 앞에 놓여 있었다고 했다. 아이들은 그런 그를 '아무것도 없는 애'라고 불렀다.그러나 그에게도, 꼭 하나. 이름 대신 지닌 기억이 있었다.보육원에 오기 전. 아주 어렴풋한, 세 살인지 네 살인지도 모를 무렵의 기억. 따뜻한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감촉. 낮게 흥얼거리던 자장가의 몇 소절. 그리고 옷깃에서 나던, 희미하고 부드러운 향기.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 손과, 그 노래와, 그 향기만이. 그가 세상 어딘가에서 시작된 사람이라는 유일한 증거였다. 연탄 냄새가 스며든 차가운 밤마다, 그는 그 기억을 담요 대신 끌어안고 잠들었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 겨울들을 건너오지 못했을 것이다.서영애를 처음 본 것은, 여섯 살이 되던 해였다.값비싼 향수 냄새를 풍기는 모피 코트의 여자였다. 여자가 오는 날이면 원장은 아침부터 아이들을 씻겼고, 뒤따라온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었다. 여자는 카메라가 켜져 있을 때만 아이들을 안아 주었고, 셔터 소리가 멎으면 곧바로 손수건으로 손을 닦았다.아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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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 그가 돌아온 진짜 이유

서이든의 소환 조사는, 온 나라의 시선 속에서 진행되었다.포토라인에 선 그는, 끝까지 담담했다. 혐의를 인정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도, 그는 짧게 답했을 뿐이었다.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습니다. 그 한마디뿐이었다. 몰락을 앞둔 사람의 얼굴이라기에는,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얼굴이었다.조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강민호의 육성 녹음과 진술 앞에서, 서이든 측 변호인단도 뾰족한 수를 내지 못했다. 구속영장이 청구될 것이라는 관측이, 기정사실처럼 흘러나왔다.한편 강민호는, 담담하게 제 몫의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자수와 협조를 인정받았다 해도,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변호사에게 선처를 구걸하지 않았다. 다만 조사실을 나서던 날, 하늘을 오래 올려다보았을 뿐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어느 때보다 발밑이 단단하게 느껴졌다. 난생처음, 제 발로 선 땅이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강윤서는, 그 모든 소식을 갤러리에서 들었다."…볼장 다 봤네, 서이든."그녀는, 미련 없이 잔을 내려놓았다. HW의 자금은 그날로 완전히 회수 절차에 들어갔다. 애초에 서이든이라는 패는, 서지안을 흔들기 위한 오락이었을 뿐. 침몰하는 배에 정을 둘 이유는 없었다.'덕분에 재미는 충분히 봤고. 자, 그럼 이제.'강윤서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사진 한 장으로 향했다. 어느 시찰 현장에서 찍힌, 강도현의 사진이었다.'본게임을 시작해 볼까. 도현 씨.'그녀의 입가에, 새 사냥을 앞둔 사냥꾼의 미소가 번졌다. 서이든이라는 소란이 걷히고 나면, 서지안의 곁에는 빈틈이 생길 터였다. 사람은, 큰 싸움에서 이긴 직후에 가장 방심하는 법이니까.그리고 며칠 뒤. 서지안에게, 뜻밖의 면담 요청이 들어왔다.서이든이었다. 구속영장 심사를 앞둔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서지안에게 독대를 청한 것이다. 한무현은 당연히 반대했다. 궁지에 몰린 자의 마지막 발악일 수 있다고. 무슨 함정을 파 놓았을지 모른다고. 그러나 서지안은, 고개를 저었다."…아뇨. 만나야 해요."이유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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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 삼십오 년 전의 여름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죠."서지안의 목소리는, 스스로도 낯설 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서이든은, 봉투에서 서류 몇 장을 마저 꺼내 사진 곁에 나란히 놓았다. 로펌의 직인이 찍힌, 유전자 대조 감정서였다."저는 오랫동안, 제가 누구인지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출생 기록도, 이름도 없이 버려진 아이였으니까요. 단서는 이 사진과, 서영애의 금고에서 나온 낡은 위임 서류 한 장뿐이었죠. 그런데 얼마 전에야, 생각이 미쳤습니다. 대조할 피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걸."그가, 감정서의 한 줄을 손끝으로 짚었다."서영애. 저를 사냥개로 기른 그 여자와 저 사이에, 피가 섞여 있었습니다. 남남이 아니었어요. 고모와 조카. …그 여자의 하나뿐인 오라버니가 누구인지는, 회장님이 저보다 잘 아시겠죠."서지안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서영애의 오라버니. 그것이 가리키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저는, 서 회장님의 아들입니다. 회장님에게는… 이복오빠가 되는 셈이고요."접견실 안이, 물속처럼 고요해졌다. 서지안은 반박할 말을 찾으려 했다. 조작이라고, 궁지에 몰린 자의 마지막 수작이라고. 그러나 그녀의 눈은, 자꾸만 테이블 위의 사진으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자물쇠 달린 앨범 속, 그 얼굴로."…이 여인이, 그럼.""제 어머니입니다. 민혜란. 로펌이 반년을 추적해서, 겨우 이름을 찾아냈습니다."서이든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담담하게, 남의 이야기를 하듯 그 삶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로펌의 조사관들이 낡은 호적과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건져 올린, 한 여자의 이야기였다.삼십오 년 전. 민혜란은, 바닷가 소읍에서 제일 예쁜 처녀였다.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야망도 남달랐다. 그녀는 제 미모가 이 좁은 읍내에서 썩기엔 아깝다는 것을 잘 알았고, 언젠가 반드시 서울로 올라가 화려하게 살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남자를 보는 눈도 정확했다. 얼굴이 아니라, 주머니와 앞날을 보았다.그런 그녀가 딱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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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 금고 속의 아이

"서영애가 저를 찾아낸 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서이든이, 낡은 위임 서류를 서지안 앞으로 밀어 놓았다. 반쯤 삭아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 어느 법률사무소의 이름과 민혜란이라는 서명이 남아 있었다."제가 열 살이 되던 해였다고 합니다. 민혜란이, 다시 나타났어요. 재취로 들어갔던 사업가가 부도를 맞아 빈털터리가 됐고, 그 무렵 우연히 신문에서 옛 남자의 얼굴을 본 겁니다. 창업주가 세상을 떠나고 새 회장이 취임했다는 기사였죠. 그 사진 속 얼굴이, 별 볼 일 없다고 버린 그 군인이었으니까요."민혜란은, 법률사무소를 끼고 JL에 접근했다. 회장에게 직접 전할 서신이 있다고 했다. 당신의 아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조용히 해결하고 싶으면 성의를 보이라는 것.그러나 그 서신은, 끝내 서 회장의 책상에 닿지 못했다."당시 회장 주변의 '시끄러운 일'들을 도맡아 치우던 사람이, 서영애였습니다. 서신은 그 여자의 손에서 멈췄죠. 서영애는 민혜란을 직접 만났고, 거액을 쥐여 주는 대신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위임 서류에 서명을 받았습니다. 두 번 다시 이 나라에 나타나지 않는 조건으로요. 민혜란은, 그 돈을 받고 떠났습니다. 아들의 존재를, 두 번째로 판 셈이죠."서지안은, 서류 위의 서명을 내려다보았다. 흘려 쓴 글씨에서마저, 어딘가 서두른 기색이 느껴졌다. 아들의 존재를 지우는 종이 위에, 이 여자는 단 일 분도 머뭇거리지 않았던 것이다. 한 번은 새벽 보육원 앞에서, 한 번은 법률사무소의 책상 위에서. 같은 아이가, 같은 어미의 손에 두 번 버려졌다."…그럼, 아버지는.""모르셨습니다. 끝까지."서이든이, 담담하게 답했다."그분은 제가 세상에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에게 민혜란은, 그저 어느 여름에 소식이 끊긴 첫사랑이었겠죠. …원망하려 해도, 원망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게 어떤 건지 아십니까, 회장님. 저는 평생, 얼굴도 모르는 그분을 미워하는 데 실패해 왔습니다."서지안의 가슴이, 뻐근하게 조여 왔다. 그러나 아직, 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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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는 거짓말

구치소의 면회실은, 지난번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투명한 아크릴 칸막이 너머, 수의를 입은 서영애가 앉아 있었다. 다만 지난번보다 야위었고, 머리에는 손대지 않은 흰 뿌리가 길게 올라와 있었다. 그럼에도 그 눈빛만은, 여전히 사람을 재는 저울처럼 서늘했다."…또 왔구나, 조카님. 이번엔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서영애가, 나른하게 웃었다. 서지안은, 준비해 온 것을 먼저 아크릴 앞에 세워 보였다. 낡은 사진 한 장이었다.민혜란의 얼굴을 알아본 순간. 서영애의 웃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그것으로 충분했다. 십오 년을 그룹의 살얼음판에서 버틴 여자였다. 그 여자의 얼굴에서 감정이 한 박자 늦게 돌아온다는 것은, 준비되지 않은 곳을 맞았다는 뜻이었다."…그 사진을, 어디서.""당신 금고에서요. 정확히는, 당신이 기른 개가 물어 온 거죠."서지안이, 담담하게 답했다."지난번에 저한테 그러셨죠. 서이든을 보육원에서 데려온 건 눈빛이 마음에 들어서였다고. 다른 아이들처럼 울지도 매달리지도 않는, 계산하는 눈이 어린 시절의 당신 같아서였다고."그녀가, 아크릴 너머의 여자를 똑바로 보았다."…절반만 말씀하셨더군요. 눈빛이 마음에 들었던 건 사실이겠죠. 하지만 그 아이를 집으로 데려간 이유는, 그게 아니었잖아요. 당신은 그 아이가 누구의 핏줄인지 알고 나서야, 손을 뻗었어요."면회실 안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그리고 서영애는,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를 죽인 채 어깨만 흔드는, 기묘한 웃음이었다."…그 애가, 결국 거기까지 갔구나. 하긴, 내가 그렇게 기른 애니까.""인정하시는 거군요.""인정 못 할 게 뭐 있니. 이제 와서."서영애가, 아크릴에 등을 기댔다. 그 얼굴에는, 오랜만에 마주한 옛 무용담을 꺼내는 사람의 나른함이 어렸다."삼십 년 전이었지. 어느 날 웬 여자가 법률사무소를 끼고 회사에 서신을 넣었어. 회장에게 직접 전할 말이 있다고. 그 시절 오라버니 주변의 지저분한 일은, 전부 내 손을 거쳤거든. 그래서 내가 먼저 뜯어봤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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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 아버지의 산

영장 실질 심사를 하루 앞둔 아침이었다.서지안은, 서이든에게 짧은 연락을 넣었다. 내일 아침 여덟 시. 선산에서 뵙겠습니다. 그것이 전부였다.강도현은 끝까지 반대했다. 상속 분쟁의 불씨를 제 손으로 안고 들어가는 짓이라고. 한무현 역시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서지안의 결심은 서 있었다."…아버지라면, 그렇게 하셨을 거예요."그 한마디에, 강도현은 더 말리지 못했다. 다만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했고, 서지안은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이튿날 아침, 산에는 옅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늦여름의 선산은 아직 푸르렀다. 이슬을 머금은 풀이 발목을 적셨고, 이따금 들리는 새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서지안이 도착했을 때, 서이든은 이미 묘역 아래 서 있었다.수행원도, 변호인도 없었다. 늘 완벽하던 짙은 색 정장 차림 그대로였지만, 구두는 이슬에 젖어 있었다. 얼마나 일찍 와서 서 있었는지 알 만했다. 손에는, 흰 국화 한 다발이 들려 있었다.서지안과 눈이 마주치기 직전, 서이든의 시선이 산 아래 능선 쪽으로 아주 잠깐 스쳤다. 그때 서지안은, 그것이 무엇을 확인하는 눈길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올라가시죠."서지안이 먼저 말했다. 서이든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두 사람은 말없이 돌계단을 올랐다. 그 뒤를, 강도현이 조금 떨어져 따랐다.계단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서이든에게 그 길은, 삼십오 년을 돌아온 끝의 마지막 몇 걸음이었다. 그는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아주 잠깐씩 숨을 골랐다. 감정을 지운 채 살아온 사람이 감정을 감추는 방식이었다.묘 앞에 이르자, 서이든의 걸음이 멈췄다.비석에는 이름 석 자와 생몰년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한참을 그 글자만 바라보았다.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는 사람. 서른다섯 해를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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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 사냥꾼이 남긴 유언

산을 내려온 두 사람은, 근처의 한적한 찻집에 마주 앉았다.서이든은, 식은 찻잔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강윤서 씨는, 제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다루기 쉬운 상대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가장 위험한 상대이기도 합니다.""…다루기 쉽다면서, 위험하다고요.""원하는 게 단순해서 쉬웠고, 그 단순한 걸 위해서라면 뭐든 하기 때문에 위험합니다."서이든이, 담담하게 말했다."그 여자가 원하는 건 돈도 회사도 아닙니다. 자기 손안에서 사람이 몸부림치는 걸 보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 저에게 자금을 대준 것도 JL이 탐나서가 아니라, 제가 회장님을 흔드는 구경이 재미있어서였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저를 굶겼다가 먹였다가 하면서, 제가 애타는 얼굴을 하는 걸 즐겼죠."그의 입가에, 자조 어린 미소가 스쳤다."그러니 제가 무너진 지금, 그 여자의 구경거리는 끝났습니다. 그럼 다음 오락을 찾겠죠. 그리고 그 여자가 애초부터 갖고 싶어 한 건, 딱 하나뿐입니다."서지안의 표정이, 굳었다."…도현 선배....""예. 다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 여자는 강도현 씨를 사랑해서 원하는 게 아닙니다."서이든이, 고개를 저었다."강윤서 씨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원하는 걸 가지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 파혼당한 남자가 있었죠. 그 남자가 하필, 자기가 우습게 보던 여자를 택했고요. 그건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자존심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이익으로 움직이는 사람보다 백 배쯤 집요합니다.""그래서, 그 사람이 어떻게 나올 거라고 보세요?""정면으로는 오지 않을 겁니다."서이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제가 파악한 바로, 강윤서 씨는 지난 몇 달간 HW를 통해 JL 협력사 두 곳의 지분을 조용히 사들였습니다. 저에게 돈을 대주면서, 동시에요. 표면적으로는 단순 투자지만, 그중 하나는 강도현 씨가 직접 관할하는 사업부의 핵심 협력사입니다."서지안의 눈이, 커졌다."…설마.""강도현 씨를 곤란하게 만들 판을 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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