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마음이 식어버린 후궁이 도망쳤다: Chapter 11 - Chapter 20

32 Chapters

제11화

건원전 안은 불빛으로 환했다.이준은 상소문을 펼쳐 들고 주필을 움직이고 있었다. 붉은 붓끝이 종이 위를 스치며 사각거리는 미세한 소리를 냈다.전각 안에는 향 연기가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고,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었다.그때 전각 밖에서 다급하고 어수선한 발소리가 들려오며 그 적막을 깨뜨렸다.이윽고 이석호가 거의 기어들듯 급히 뛰어 들어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그대로 바닥에 엎드렸다.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폐... 폐하! 큰일 났사옵니다! 경성 외곽... 황실 사찰에... 어젯밤 불이 났사옵니다! 헌데 불길이 너무 거세어... 혜비 마마께서는... 혜비 마마께서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셨사옵니다...!”붓끝이 갑자기 멈췄다.짙은 먹물 한 방울이 상소문 위로 떨어져, 순식간에 얼룩이 번졌다.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미간은 깊이 찌푸려졌고, 눈에는 숨길 수 없는 당혹감과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방금... 뭐라고 했느냐?”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낮게 가라앉아 있었으며, 거역할 수 없는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다시 말해 보거라.”“폐하... 사실이옵니다! 사찰의 주지 스님께서 급히 사람을 보냈사옵니다... 혜비 마마께서 머무시던 선방이... 가장 심하게 불탔고.... 진화가 끝났을 때는... 이미... 이미....”이석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떨었다.“허튼소리!”이준이 갑자기 주필을 용상 앞 탁자 위로 내던졌다. 둔탁한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멀쩡히 사찰에서 수행 중이던 사람이, 어찌 이유도 없이 불에 타 죽는단 말이냐? 분명 너희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경계를 소홀히 한 탓이다! 그런 주제에 감히 허튼소리를 지껄이며 후궁을 모욕하다니!”이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닥에 꿇어앉은 암위수령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목소리는 서리처럼 차가웠다. “무명! 네가 직접 사람을 이끌고 즉시 조사하라. 살아 있으면 반드시 찾아오고, 죽었으면 시신을 가져오너라. 허나 진상을 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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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이준은 그 은비녀를 알아보았다.신나정은 화려한 장신구를 즐기지 않았고, 그중에서도 이 소박한 은비녀는 유독 오래 곁에 두던 물건이었다.냉궁에 있던 시절에도 늘 그것으로 머리를 올렸고, 후궁이 된 뒤 더 좋은 장식들이 생겼음에도 이상하게도 이 비녀만은 자주 사용하곤 했다.예전에 그가 무심코 물은 적이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오래된 비녀만 고집하느냐고.그때 그녀는 뭐라고 대답했던가?그때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귀끝을 붉히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었다. “익숙해서... 손에 익은 탓이옵니다.”하지만 지금, 손에 익었다던 그 비녀가 처참한 모습으로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마치 마지막 말 없는 호소이자, 차갑게 찍힌 마침표 같았다.이준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이준은 손을 뻗어 그 은비녀를 더듬으려 했다.그러나 차가운 금속에 닿기 직전, 손끝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려왔다.등골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치밀어 오르며 온몸을 한순간에 휘감았다.이준은 급히 손을 거두어 등 뒤로 숨기고, 주먹을 꽉 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마디가 창백하게 질렸다. “확실하냐.... 정녕... 그곳에서 찾은 것이냐?”그의 목소리는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그렇습니다, 폐하. 침상 자리가 있던... 재더미 속에서 발견하였사옵니다.”무명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전각 안은 깊은 적막에 잠겼다.오직 이준의 숨소리만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그는 천천히 용상으로 돌아가 앉았다.무명은 비녀를 용상 앞 탁자 한쪽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아무 소리 없이 물러났다.이준은 텅 빈 전각에 홀로 남아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새벽빛이 창살 사이로 스며들어 용상 앞 탁자를 비추었고, 그 위에는 흉하게 일그러진 은비녀가 놓여 있었다.그 빛은 또한 이준의 얼굴까지 번져, 한순간 예고 없이 무너져 내린 마음의 흔적까지도 비추고 있었다.그날 밤, 이준은 마치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소양전으로 향했다.전각 안은 그녀가 떠날 때의 모습 그대로였으나,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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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이유는 충분했다.낡은 선방, 오래된 등촉과 심지, 거센 밤바람.불꽃이 휘장에 옮겨붙으며 불길은 순식간에 번졌고, 혜비는 이미 잠든 상태였기에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이었다.모든 증거가 하나의 고리처럼 맞아떨어졌고, 관련자들의 진술 또한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당시 당직을 서던 두 명의 늙은 금군과 승려들 역시 심문 내내 벌벌 떨었지만, 진술은 세부적인 차이를 제외하면 거의 같았다.한 사람은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했고, 다른 사람은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고 했다.하지만 그 정도 차이는 혼란스러운 밤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할 만했다.너무 완벽했다.완벽해서... 오히려 수상할 정도였다.이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어서방에 앉아 산더미처럼 쌓인 흡사한 조사 보고를 내려다보았다.제왕의 직감이 미묘한 이상함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었다.분명 어딘가 잘못되었다.분명 이 뒤에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그는 답답함에 자리에서 일어나 모든 사람을 물린 뒤 홀로 궁 안을 정처 없이 걸었다.그러다 어느새 궁궐의 가장 외진 구석인 냉궁 별원에 다다랐다.이곳은 그가 태자 자리에서 폐위된 뒤 신나정과 함께 3년을 보낸 곳이었다.낡은 문을 밀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한 것이 황량함만이 가득했다.그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몹시 추웠던 낮고 초라한 정실 안으로 들어갔다.방 안의 살림살이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만, 곳곳에는 지난날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벽 모퉁이의 낡은 화로, 그 아이는 숯을 아끼려고 자신은 손발에 동상까지 걸리면서도 좋은 것은 모두 그에게 남겨 두었다.창가의 삐걱거리는 책상,그 아이는 어두운 등불 아래서 서툰 손으로 손가락이 바늘에 찔려 피가 맺혀도 전혀 개의치 않고 그의 해진 소매를 꿰매였다.그리고 뜰 한가운데의 높은 돌계단...이준의 시선이 가장 높은 계단에 멈췄다.순간 기억이 둑이 무너지듯 밀려왔다.그해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선왕이 보낸 태감들은 일부러 트집을 잡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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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김하연은 어느새 이곳까지 찾아와 등롱을 들고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이곳은 음습하고 허름합니다. 폐하의 옥체가 우선이니 어서 궁으로 돌아가시지요.”그녀는 앞으로 다가와 그의 팔을 살며시 감으며 부드럽게 위로했다.“혜비의 일은... 신첩 역시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일이 이미 이렇게 된 이상, 폐하께서는 옥체를 보중하셔야 합니다. 어쩌면... 혜비는 지난 일들로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 한순간 비관한 끝에...”그녀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그러나 뜻은 충분히 분명했다.신나정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이었다.“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이준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김하연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그의 눈에 번뜩인 매서운 기색에 김하연은 흠칫 놀라더니, 그의 팔을 감싸고 있던 손이 살짝 굳어졌다.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신첩도... 그저 짐작한 것뿐입니다. 혜비는 지극히 가까운 가족을 잃기도 했고... 또... 삶에 미련이 없다고 여겼을 수도 있으니까요.”삶에 미련이 없다고...마음이 무너졌다고...그 몇 마디가 마치 열쇠처럼 이준의 기억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그는 마지막으로 신나정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텅 비어 죽음처럼 고요하던 그녀의 눈동자. 수없이 되풀이되던 그 한마디.‘소첩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가족의 유골이 능욕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무너질 대로 무너졌으면서도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던 그 절망스러운 모습.만약... 만약 그녀가 정녕...아니! 그럴 리가 없다!이준은 갑자기 김하연의 손을 뿌리쳤다.가슴을 거칠게 들썩이는 그의 눈에는 거센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그는 진실을 알아야 했다.지금 당장. 반드시.“무명!.”어서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이준은 곧바로 암위수령을 불러들였다.그의 목소리는 한 점의 온기도 없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짐이 명한다. 모든 힘을 동원해서 공식적인 조사 경로는 전부 우회하고, 그날 밤 관련된 자들을 다시 심문하라. 승려든, 금군이든, 절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는 자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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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이준은 급기야 주먹을 움켜쥐고 단단한 탁자를 향해 세차게 내리쳤다.손등이 순식간에 터져 피가 흘러내렸다.그러나 그 육체의 고통은 가슴속 아픔의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다.건원전에는 지룡(地龍)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어 온기가 가득했지만, 이준의 온몸을 감싼 한기는 좀처럼 흩어질 줄을 몰랐다.그는 용좌에 앉아 있었다.탁자 위에 펼쳐진 것은 더 이상 상소문이 아닌, 핏자국과 먹물이 얼룩진 진술서들이었다.차가운 바닥 아래에는 초라한 몰골의 죄인들이 무릎을 꿇은 채 겁에 질려 몸을 떨고 있었다.신씨 가문의 형을 집행했던 망나니, 신나정의 오라비가 ‘불순한 마음을 품었다’고 증언했던 궁인, 그리고 장춘궁에서 눈에 띄지도 않던 허드렛일 태감들이었다.그들은 모두 암위들의 가차 없는 수사 끝에 각지에서 끌려온 자들이었다.이준은 그들을 보지 않았고, 시선은 오직 맨 위에 펼쳐진 진술서에만 머물러 있었다.그 위에는 사건의 진실이 명백히 적혀 있었다.그날 신나정의 오라비가 어떻게 ‘실수로’ 황후의 가마 행렬과 부딪혔는지, 이어 김하연 곁의 이 상궁에게 호된 질책을 받은 뒤 두려움에 떨며 황급히 죄를 청한 정황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었다.그리고 이른바 ‘불순한 마음’, ‘음탕한 눈빛’은 전부 김하연의 지시에 따라 이 상궁이 몇몇 어린 태감들을 협박하고 회유해 꾸며 낸 위증이었다.심지어 신씨 가문이 몰살당한 뒤에도 김하연은 분이 풀리지 않아, 몰래 옥졸들에게 신씨 가문의 사내들을 특별히 ‘보살펴 주라’고 지시했던 일까지 낱낱이 적혀 있었다.“진실을 고하라.”이준의 나직하고 갈라진 목소리가 고요한 대전에 울려 퍼졌는데, 그 속에는 폭풍 전야와 같은 압박감이 서려 있었다.“짐은 너희 입으로 직접 듣고 싶다.”“폐, 폐하! 목숨만은 살려 주시옵소서!”늙은 망나니가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이... 이 상궁이... 소인에게 은자를 쥐여 주며... 형을 집행할 때 깔끔하게 하지 말고... 신중태 나리께서 좀 더 고통을 받게 하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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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이준은 용상 앞 탁자 위에 놓여 있던 공술서와 상소문, 붓과 먹, 종이와 벼루까지 모조리 바닥으로 쓸어 떨어뜨렸다.와장창!요란한 소리가 전각 안을 뒤흔들자 죄수는 겁에 질려 그대로 주저앉더니, 대소변까지 지리고 말았다.이준의 가슴은 거칠게 들썩였다. 두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그 안에는 세상을 무너뜨릴 듯한 분노와 끝없는 고통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김하연!”그는 이를 악문 채 이름 석 자를 내뱉었는데, 한 글자 한 글자마다 피비린내가 배어 있는 듯했다.이 순간의 그는 마치 격노한 맹수 같았다.그는 홱 몸을 돌려 가장 중요한 공술서 몇 장을 움켜쥔 뒤, 건원전을 박차고 나가 장춘궁으로 곧장 향했다.“쾅!”장춘궁의 전각문이 이준의 발길질에 거칠게 열려 젖혀졌다.엄청난 소리에 안에서 거울을 보며 단장하던 김하연은 깜짤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온몸에 살기를 품고 눈까지 붉게 충혈된 이준을 본 순간 그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재빨리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폐하, 이 시간에 어인 일이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혹 조정에 무슨 근심거리라도...”짝!이준은 두툼한 공초를 냉정히 내던졌고, 그것은 김하연이 공들여 꾸민 얼굴 위로 그대로 떨어졌다.종이는 사방으로 흩어지고, 김하연은 얼이 빠졌다.그녀는 얼얼한 볼을 감싸 쥔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준을 바라보았다.“폐하! 어찌...!”“직접 보아라.”이준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가득한 것이 뼛속까지 시릴 만큼 차가웠다.“네가 저지른 짓을 똑똑히 보아라.”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공술서 한 장을 집어 들던 김하연은, 곧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아, 아닙니다! 폐하! 신첩의 말을 들어 주십시오! 모두 모함입니다! 누군가 신첩을 해치려는 것이란 말입니다!”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들어 이준의 소매를 붙잡으려 했다.눈물은 순식간에 쏟아져 내렸고, 꽃잎에 빗물이 맺힌 듯 처연한 모습이었다.“혜비 짓일 겁니다! 신첩이 폐하를 차지한 것이 원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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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사흘 뒤, 조정을 뒤흔든 죄기조(罪己詔)와 평반조서(平反詔書)가 동시에 천하에 반포되었다.조서에서 황제 이준은 자신의 과오를 깊이 참회하며, 자신이 편파적인 말만 믿은 탓에 혜비 신나정과 신씨 가문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초를 겪다 끝내 비명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음을 인정했다.아울러 신씨 가문의 누명을 모두 벗기고 명예를 회복시킬 것을 선포했다.또한 혜비의 부친이신 신중태를 충용공(忠勇公)으로 추봉하고, 친왕의 예에 따라 신씨 가문의 유골을 경성 외곽의 명당에 성대히 다시 안장하도록 명했다.동시에 이미 세상을 떠난 혜비 신나정을 의정황후(懿貞皇后)로 추봉했다. 그 시호에는 아름답고 곧으며 충정이 깊다는 뜻이 담겼고, 후세의 제향을 받도록 하였다.이 조서가 내려지자 천하는 크게 술렁였다.하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명예 회복이 아니었다. 황제가 이토록 극진한 애도와 영예로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보상하려는 것이었다.신씨 가문의 새 묘가 완성된 날, 이준은 모든 의장 행렬을 물리치고 소수의 측근 호위만 거느린 채 평복 차림으로 궁을 나섰다.그는 홀로 새로 조성된 합장묘 앞에 섰다. 웅장하고 위엄 있었지만, 한없이 차갑고 적막한 무덤이었다.비석에는 신씨 가문 다섯 식구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쓸쓸한 가을바람이 불어와 누렇게 마른 낙엽을 휘감아 올렸고, 낙엽은 빙글빙글 돌다 그의 용포 위로 내려앉았다.천하를 굽어보던 황제는 좌우를 모두 물린 채 무덤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그리고 이윽고, 멀리 떨어져 있던 금군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릴 만큼 누구도 믿기 어려운 행동을 했다.그는 용포 자락을 걷어 올리고, 천천히, 엄숙하게 무릎을 꿇었다.곧 두 무릎이 차가운 흙바닥 깊숙이 박혔다.“나정아...”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심하게 쉬어 있었고, 억누를 수 없는 떨림이 묻어 있었다.“짐이... 잘못하였다.”마침내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그의 눈가를 타고 흘러내리더니 곧장 흙 속으로 스며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짐이 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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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신씨 가문의 묘소에서 돌아온 뒤, 이준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그는 거의 스스로를 학대하는 수준으로 이전보다 더욱 정사에 매달렸다.매일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조정에 나갔고, 깊은 밤까지 상소문을 살폈으며, 마치 피로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직접 챙겼다.그러나 후궁은 완전히 비어 버렸다.그는 더 이상 어떤 후궁도 찾지 않았고, 후궁들이 머무는 궁역에는 좀처럼 발길조차 들이지 않았다.건원전의 용상도 더는 편히 잠들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린 듯했다.그는 밤마다 이미 폐허로 변해 버린 소양전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잿더미 속을 대강 정리해 마련한 작은 편전 하나만 남아 있었다.궁인들은 두려움에 떨며 새 침구를 깔아 두었지만, 그는 늘 그들을 물렸다.그리고 홀로, 폐허 속에서 찾아낸 낡은 궁복을 품에 안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누웠다.수없이 세척해 색이 바래 있었고, 아직도 희미한 그을음 냄새가 남아 있는, 신나정이 생전에 자주 입던 평상복인 듯했다.그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야 했을 그녀의 체취를 조금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처럼, 얼굴을 그 옷에 묻어야만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그는 어린 황자 이정을 건원전으로 데려와 직접 키웠다.아이의 식사와 생활을 몸소 챙겼고, 글을 가르치고 책을 읽히는 일도 직접 했다.하지만 아이의 맑고 또렷한 눈을 볼 때마다, 그것이 점점 신나정을 닮아 갈 때마다 그는 더욱 깊은 침묵과 고통 속으로 빠져들었다.그에게 이 아이는 너무도 복잡한 존재였다.어떤 때는 글자 하나를 잘못 읽었다는 이유로 호되게 꾸짖었다.가혹할 만큼 엄격했고, 인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그러다가도 어떤 밤에는 잠든 아이를 품에 안고 몇 번이고 괴롭게 중얼거리곤 했다.“정아... 네 어미는... 우리를 버리고 떠나 버렸구나...”“이 아비가 못났다... 아비가 네 어미를 잃어버렸구나...”아이의 존재는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자, 자신의 죄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가장 날카로운 가시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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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세월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3년이 지났다.조정에서 이준은 여전히 위엄 있고 냉엄하며, 지나치다 싶을 만큼 정사에 힘쓰는 황제였다.다만 그의 미간에 서린 음울함과 눈동자 깊은 곳에 감춰진 적막은 날이 갈수록 짙어져, 마치 결코 지워지지 않을 먹물처럼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그날 조회, 남쪽 심양부(潯陽府)에서 올라온 긴급 상소문이 어전에 올려졌다.상소문의 내용은 나라의 중대사가 아니었지만, 이를 보고하는 관리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그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폐하, 최근 심양부에서 한 여인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의술이 매우 뛰어나며, 특히 난치병 치료에 능하여 수많은 사람을 살렸다고 하옵니다. 현지 백성들은 그녀를 ‘살아 있는 관세음보살’이라 부른다 하는데... 다만...”관리의 말끝이 흐려졌다.그는 슬쩍 황제의 안색을 살핀 뒤, 이를 악물고 다시 입을 열었다.“다만 들리는 말로는... 그 여인의 용모가... 이미 세상을 떠난... 의정황후와 몹시 닮았다고 하옵니다...”마지막 몇 마디는 거의 입속에 삼키듯 작게 내뱉었다.숨소리조차 들릴 만큼 고요한 금란전에서 그 말은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이준의 귀에 들어갔다.상소문을 쥔 그의 손이 미세하게 굳어졌고, 조정에는 순식간에 적막이 내려앉았다.대신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고개를 숙이고 감히 작은 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의정황후’라는 말은 황제의 역린이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지난 3년 동안 이와 비슷한 ‘선황후를 닮은 여인’에 대한 소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처음에는 황제도 사람을 보내 조사하게 했지만, 매번 허탕으로 끝났다.심지어 한 번은 지방 관리가 황제의 환심을 사려고 눈매가 약간 비슷한 여인을 경성으로 보냈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적도 있었다.그 후로는 감히 이 일을 입에 올리는 사람조차 없었다.이준은 애써 담담한 얼굴로 상소문을 한쪽에 내려놓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알았다. 이만들 물러가거라.”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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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이준은 소수의 정예 금군만 거느린 채 황제의 의장 행렬을 모두 버렸다.나그네처럼 위장한 그는 천 리 밖 심양부를 향해 비바람을 맞으며, 길 위에서 끼니를 때워가며 밤낮을 달렸다.암위가 전한 정보에 따르면, 선황후를 닮았다는 그 여인은 심양성 아래 청계라는 이름의 한적한 마을에서 작은 의관 하나를 열고 있었다.이름은 제세당(濟世堂).청계의 소박한 거리에 선 이준은, 문득 고향을 앞두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그는 호위들을 멀리 물린 뒤 홀로 은은한 약초 향을 따라, ‘제세당’이라 적힌 소박한 현판이 걸린 의관으로 향했다.의관 문은 열려 있었다.안은 환했고, 몇몇 백성들이 줄을 서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이준은 의관 밖 골목 어귀에 걸음을 멈추었다.그리고 일정한 거리를 둔 채, 탐욕스럽고도 조심스러운 눈길로 안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그는 그녀를 보았다.신나정.그녀는 달빛처럼 옅은 흰빛이 도는 거친 베옷을 입고 있었다.분도 바르지 않았고, 머리도 가장 소박한 나무 비녀 하나로 느슨하게 틀어 올린 채였다.그녀는 낡은 나무 탁자 뒤에 앉아 한 노파의 맥을 짚고 있었다.오후의 햇살 아래 비친 옆모습은 유난히 고요하고 부드러웠다.손가락은 노파의 손목 위에 가만히 얹혀 있었고, 그녀는 가끔 낮은 목소리로 몇 마디를 물었다.느리고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힘이 담겨 있었다.그의 기억 속 신나정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늘 소심하고 슬픔을 품고 있던 그녀, 그리고 나중에는 무감각과 절망만 남아 버렸던 그녀, 눈앞의 신나정은 그런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마치 모든 화장을 씻어 내고, 궁중의 흔적을 모두 벗어 던진 듯했다.그녀에게 남은 것은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평온함과 담담함뿐이었다.이 삼 년의 민간 생활이 그녀를 다시 살려 내어, 또 다른 생기를 피워 낸 듯했다.이준의 가슴은 무언가에 세게 얻어맞은 듯 욱신거렸다.시큰하고 아팠다.그러면서도 잃었다 되찾은 듯한 거대한 기쁨이 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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