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애걸복걸 첫사랑 구출기: Chapter 111 - Chapter 120

134 Chapters

EP 111. 완벽한 증발

혜선이 쏟아내는 표독스러운 폭언에, 거친 숨소리가 사방으로 튀었다.그때 유진의 시선에, 악에 받쳐 일그러진 혜선의 안면과 그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는 윤선호의 실루엣이 교차했다.숨을 가쁘게 조여오는 혜선의 독설 속에서,오랫동안 자긴의 눈을 가리고 있던 파명의 퍼즐 조각들이 단숨에 맞춰졌다.이 파국 속에서.자신의 베스트 프랜드가 자신의 난도질당한 상처보다 김문기가 얼마나 미쳐 날뛸지를 먼저 걱정한다고?선호가 자신과 함께 미국으로 떠난다는 그 단 한 마디에 이토록 무너져 내릴 일인가?의문은 이내 추악한 확신으로 변했다.“……너였구나, 혜선.”유진의 갈라진 쇳소리 같은 음성이 고요한 병실 바닥 위로 서늘하게 침전했다.“뭐? 내가 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건데!”“문기 오빠의 뒤에서, 내가 밤마다 누구를 만나고 은밀하게 다 일러바치던 오빠의 스파이…… 그게 바로 너였어.”유진의 서늘한 일침이 공기를 가르는 순간, 혜선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유진은 힘겹게 하얀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자신의 말을 느릿하게 이어 나갔다.“그리고 이제야 명확하게 보이네. 네가 왜 이렇게까지 나한테 사납게 악을 쓰며 미쳐 날뛰는지.”유진의 목소리가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다.“너…… 선호 좋아하지?”쿵—.거대한 성벽이 무너지는 충격과 함께, 혜선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그제서야 모든 기괴한 그림의 전말이 완벽하게 드러났다.“넌 문기 오빠 때문에 분한 게 아니야. 짝사랑하던 윤선호가 나와 미국을 간다니까…… 그게 미치도록 견딜 수가 없는 거잖아?”VIP 병실 안에 잔인한 진실의 민낯이 낱낱이 까발려졌다.두 포식자의 무차별적인 유린 속에서도,유일하게 제 편이라 믿었던 가장 친한 친구에게 당한 지독한 육체적·정신적 배신감.김문기의 폭압적인 침범과 류 요스케가 채워놓은 사슬 속에서도,간신히 버텨내던 유진의 마지막 정신적 성역이었던 친구들의 경계선마저 완벽하게 붕괴했다.그중에서도 가장 믿었던 혜선이 가장 잔인한 칼날이 되어, 유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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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12. 이혼

모래성처럼 바스러진 영혼의 파편이 흩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마침내. 지독하리만치 잔인했고, 숨 막히도록 가학적이었던 3개월의 계약 연애가 그 무거운 종착지에 닿았다.두 마리 포식자의 무차별적인 탐닉.낮과 밤의 경계를 지워버린 채 유진의 하얀 살결을 뜯어발기던 정욕의 분할 점령.그 파멸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유진은 오직 껍데기만 남은 채 메말라갔다.비극의 수레바퀴를 사정없이 굴리던 12주 차의 마지막 일요일 아침.창백한 새벽안개를 뚫고 핏기 없는 햇살이 비쳐 들었을 때,유진은 비로소 제 목을 조르고 있던 묵직한 무쇠 사슬을 제 손으로 완전히 끊어냈다.단 한 자락의 미련도 남아있지 않았다.가장 믿었던 소꿉친구 혜선이 남긴 추악한 배신감의 파편도,야수처럼 울부짖던 김문기의 핏빛 절규도,제 심장을 통째로 꺼내 들고 매달리던 류 요스케의 눈물겨운 청혼도.영혼이 통째로 거세되어 투명하게 죽어버린 유진의 성역 안에서는,그 어떤 유예도, 자비도 얻지 못했다.외과 의국 책상과 짐들을 정리하고 유진은 그 길로 바로 병원 최고층, 이사장실로 향했다.“우리 이혼해요.”서늘하게 가라앉은 유진의 목소리.감정의 고저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한 줄의 문장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요스케의 심장은 그대로 얼어붙었다.뚝, 하고 그의 세계가 멈췄다.“이혼은 안 돼. 네가 원한다면…… 별거를 하면서 감정을 추스르는 방향으로…….”요스케가 제대로 말을 맺지도 못한 채 커다란 손을 내뻗었으나, 유진은 칼같이 그의 음성을 베어냈다.“소용없어요. 나, 당신에게 안 돌아가요.”“그럼…… 김문기한테 가려고 이러는 건가?”요스케의 짙은 회색 눈동자가 불안감으로 잘게 떨렸다.유진은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메마른 표정을 지었다.“아니요. 문기 오빠에게도 가지 않을 거예요. 기만은 한 번으로 족하니까, 걱정 말아요.”요스케는 한참을 망설였다.190cm가 넘는 거대한 체구의 포식자가, 유진의 한마디에 사지가 묶인 짐승처럼 어떤 단어 하나 고르지 못하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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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13. 영원한 사랑

딩동ㅡ.지독한 정적의 심연을 깨부수며, 영혼을 흔들어 대는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김문기는 소파 아래로 볼품없이 축 처져 있던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혜선에게 전해 들은 유진의 사직과 유학 소식,그리고 낮 시간 동안 류 요스케와 법원을 거치며 완전히 합법적인 남남이 되어버렸다는 소문까지.그의 전신을 지옥의 불길로 난도질한 후였다.초점을 잃고 핏발이 선 눈동자가 현관을 향해 유령처럼 움직였다.철컥.도어락이 해제되고 서늘한 새벽바람을 옷자락에 감은 여자가 마침내 자신의 영토 안으로 들어왔다.유진, 그녀가 돌아왔다.순간, 문기의 죽어 있던 시선에 번쩍 생기가 돌았다.유진이라는 단 하나의 우주가 다시 켜지는 찰나였다.그러나 생명의 감각과 함께 찾아온 것은 가슴뼈 안쪽을 통째로 으스러뜨리는 압도적인 통증이었다.숨조차 쉬지 못할 만큼 목이 조여왔다.“유진아…….”문기는 짓씹은 입술 사이로 신음 같은 비명을 삼키며 유진을 향해 돌진했다.그리고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단단하고 거대한 그의 품 안에 가녀린 그녀가 그대로 완전히 파묻혔다.문기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뱉지 못했다.오직 마디마디 뼈가 하얗게 드러날 만큼, 그녀를 안고, 또 안을 뿐이었다.지독한 시가 연기와 독한 위스키 향이 유진의 살결에서 풍기는 맑은 살취와 뒤섞여 위태로운 궤적을 그렸다.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이렇게 그녀를 안고 있을 수만 있다면.그제서야 막혀 있던 기도가 뚫린 듯, 비로소 숨이 쉬어졌다.그저 자신의 인생의 유일한 신앙인 그녀만 곁에 있다면, 무엇도 상관없었다.“왜 이렇게…… 엉망이야. 오빠답지 않게.”유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문기의 귓가를 서늘하게 간지럽혔다.자신을 걱정하듯, 미세한 온기를 담아 건네는 가벼운 질책.그 서글픈 다정함에, 문기는 마침내 늪바닥에서 탈출한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이제서야,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돌아와 준 거지? 이제…… 다 끝내고 내 곁에 영원히 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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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14. 영원한 안녕

“오빠…….”유진이 문기의 단단한 뺨을 쓸어내렸다.그리고 자신의 몸을 넓게 벌려, 그의 묵직한 골반을 깊숙이 이끌었다.이내, 두 사람은 다시 한번 뜨겁게 뒤엉키며 완벽한 하나가 되었다.“퍽ㅡ! … 윽.”외설적인 파열음과 함께,문기의 거대한 중심이 유진의 가장 은밀하고 눅진하게 젖어든 성역의 내벽을 단숨에 꿰뚫고 가차 없이 진입했다.“아……! 읏…… 오빠……!”유진의 입술 사이로, 애달프고도 야릇한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그리고 무자비하리만큼 거칠게 문기의 허리가 반동하며, 유진의 하반신을 마비시키듯 거세게 들이쳤다.둘의 호흡은 순식간에 하나로 엉켰고,육체는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서로의 촉각을 원했다.숨이 막힌 듯 하얗게 질린 채 파르르 떨리는 유진의 가슴 위로, 문기의 뜨거운 땀방울들이 핏물처럼 툭, 툭 떨어져 내렸다.데일 듯이 뜨겁게 끓어오른 밀실의 공기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욕정에 불타버린 거친 호흡과, 쾌락과 슬픔이 뒤섞인 애틋한 신음소리가 사방의 벽면에 반사되어 질척하고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문기는 유진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자신의 손가락에 겹쳤다.그리고 절대로 놓치지않겠다는 듯 결박하듯 손에 깍지를 꼈다.그리고 그녀의 골반을 부서질 듯 치받으며, 그녀의 궁 안쪽 끝까지 자신의 전부를 남김없이 밀어 넣었다.거듭되는 거친 결합 속에, 두 사람은 서로의 타액과 정액을 서로의 몸 안에 가득 쏟아부으며, 완벽한 극치의 절정을 향해 질주했다.이것이 마지막 축제이자,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정욕의 전장임을 온몸의 세포가 기억하고 있었다.“아……! 유진아……! 사랑해, 사랑해……”“아앗……! 오빠……! 흑, 오빠…… 나도…… 나도 사랑해요…… 아……!”뇌가 녹아내릴 듯한 오르가즘의 정점에서. 두 사람은 모든 에너지를 몸의 중심을 통해 쏟아냈다.영혼이 통째로 탈탈 털려 나간 채로, 그대로 깊은 암전의 심연 속으로 함께 추락했다.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소름끼치는 정적이 찾아온 침실 안,지독한 정사의 열망에서 빠져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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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15. 새 시작

화아아아악ㅡ!지독하게 메마른 열풍이 사정없이 불어와 뺨을 후려쳤다.피부가 바싹 가라앉다 못해 찢어질 것 같은 감각.두 마리 포식자가 벌이던 광포한 영토 전쟁.축축하고 가학적이었던 그 숨 막히는 정욕의 분할 점령이 파국으로 막을 내린 지도, 어느덧 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다.섭씨 40도를 웃도는 장대하고 황량한 붉은 사막.수단 카살라 주의 난민구제 기구(NGO) 의료 캠프에 유진이 서 있었다.그녀의 새로운 세계.웅, 웅, 콰아아앙ㅡ!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무거운 포격 소리가 대지를 잘게 흔들었다.자욱한 황토색 흙먼지를 일으키며, 떼를 지어 밀려드는 난민들의 비명과 통곡 소리가 귀를 찔렀다.땀과 누런 먼지로 얼룩진 푸른색 국제 구호 기구 조끼와 방탄조끼를 바짝 조여 입은 유진의 손놀림은 기계처럼 정교하게 움직였다.슥, 스윽.밀려드는 영양실조 아동들의 마른 피부를 더듬고, 반군들의 무차별적인 총격에 살점이 헤집어진 환자들의 붉은 상처를 실로 꿰매어 나갔다.지독한 소독약 냄새조차 이곳에서는 사치에 불과했다.오직 끈적한 선혈의 비린내와, 타들어 가는 흙먼지 냄새, 그리고 생(生)과 사(死)의 날것의 경계만이 존재할 뿐인 잔인한 지옥의 땅.유진은 땀방울이 눈가로 흘러내려 시야를 흐려놓을 때마다, 조끼 소매로 거칠게 이마를 훔쳐냈다.이곳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참혹한 인류의 비극을 직접 목격하며,유진은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지독한 흉터로 박혀 있던 지난날의 기억들을 매 순간 완전히 새로 써 내려가고 있었다.[내가 겪었던 그 지옥 같은 삼각관계는…… 이 거대한 생존의 절벽 앞에서는 얼마나 사치스럽고 하찮은 방황이었나.]두 남자의 집착에 사로잡혀 육체를 난도질당하던 나날들.스스로를 향한 극도의 혐오와 모멸감에 휩싸여 밤마다 피를 흘리던 자신의 기억들.하지만 당장 내일 아침 눈을 뜰 수 있을지조차 기약할 수 없는 수단의 아이들을 품에 안고, 땀에 젖어 미끄러지는 인공호흡기를 필사적으로 누를 때마다 유진은 절실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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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16. 새로운 설렘

화아아악ㅡ!창백하게 탈색된 모래먼지가 시야를 가차 없이 짓눌렀다.섭씨 40도를 가뿐히 넘어서는 수단 카살라 주의 대지는 매 순간 생을 시험하는 용광로와도 같았다.그러나 서유진의 곁을 지킨 것은 비단 살점이 타들어 갈 듯한 혹독한 열풍과,매일같이 마주하는 기아와 총상의 잔혹한 비극만이 아니었다.서울에서의 그 지독했던 삼각관계를 완벽하게 지워냈듯.유진이 지난 2년 동안 매일같이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가장 의지했던 인물은 난민구제 NGO 기구의 총괄 팀 리더이자 영국인 의사인 마크(Mark).옥스퍼드 출신의 명망 높은 외과의였던 마크는,180cm의 키에 단단하고 넓은 어깨에,사막의 붉은 열기마저 가라앉힐 만큼 깊고 서늘하면서도 다정한 푸른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그리고 이 지옥 같은 분쟁 지역의 오지 속에서, 그는 늘 유진의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탕, 타아앙ㅡ!검은 장막이 내려앉은 어느 목요일 밤.평화롭던 캠프의 정적을 깨부수며, 반군들의 무차별적인 기습 포격과 총성이 고막을 찢어발겼다.얇은 천막으로 간신히 세워둔 간이 진료소의 천이 사정없이 흔들리며 매연과 흙먼지가 사방으로 들이쳤다.“주저앉지 마! 환자 압박해!”이성이 마비될 것 같은 공포 속에서도,유진은 흙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복부 총상을 입고 피를 뿜어내는 난민의 상처를 양손으로 악착같이 짓누르고 있었다.단 한 자락의 지혈대조차 부족한 극한의 상황.그때, 유진의 머리 위로 거대한 굉음과 함께 텐트의 철제 지지대가 무너져 내렸다.앗ㅡ.유진이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찰나, 그녀의 시야를 암전시키며 묵직하고 따뜻한 거구가 위에서 아래로 사정없이 덮쳐왔다.쿵!“윽…….”낮은 신음과 함께, 마크가 유진의 가녀린 전신을 완벽하게 아래에 깔고 엎드린 채, 유진을 보호하듯 완전히 감싸 안았다.그는 자신의 단단한 척추와 거대한 몸집을 방패 삼아 무너지는 구조물과 파편들을 온몸으로 받아냈다.티셔츠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유진의 등 뒤로 마크의 묵직하고 단단한 대흉근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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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17. 피곤함이 불러온 착각

치열했던 주간 진료가 간신히 끝난 늦은 오후,붉은 지평선이 길게 그림자를 늘릴 때였다.탁.마크가 NGO 보급 창고에서 일부러 유진의 몫으로 따로 숨겨두었던 얼음처럼 차가운 생수 한 병을 유진의 살결 볼 위로 슬쩍 가져다 댔다.“아……! 차가워.”유진이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리며 황금빛 눈동자를 크게 뜨자.마크가 낮게 맑은 웃음을 터뜨리며, 생수병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송골송골 맺힌 투명한 물방울들이 유진의 타들어 가던 하얀 손가락 끝을 타고 흘러내렸다.“What a day, uh?”(진짜 대단한 하루였어.)마크가 긴 다리를 뻗어 낡은 목제 벤치에 걸터앉으며 사막의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유진은 그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차가운 생수를 한 모금 머금었다.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짜릿한 청량감에 지친 기색이 옅은 미소와 함께 베어 나왔다.유진이 아무런 말도 없이 멍하니 사막의 끝, 붉게 물들어가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마크는 그녀의 침묵을 굳이 깨부수려 하지 않았다.대신 제 넓고 든든한 오른쪽 어깨를 가만히 밀어 넣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힘들면 기대도 괜찮아.”“진짜 힘들면, 그럴 게요. 아직은 견딜만 해요.”마크가 짐짓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푸른 눈동자를 은근하게 빛냈다.장난기가 가득 섞인 그의 시선이 유진의 탐스런 입술 주위를 맴돌았다.“이번 휴가 때, 뭐 할 거야? 혹시 계획 있어?”“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그냥 침대 속에 파묻혀서 있을 거예요. 시체처럼.”유진의 무던한 대답에 마크가 상체를 슬쩍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그의 묵직한 체온이 노을빛 바람을 타고 유진의 살결을 부드럽게 간지럽혔다.“그럼…… 나랑 두바이에서 같이 있을래?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을 예약해 둘 테니까, 거기서 하루 종일 시체처럼 자든 말든 내가 완벽하게 케어해 줄 수 있는데.”숨이 멎을 듯 아찔한 제안이었다.노골적이지 않지만, 사내로서의 은밀한 구애가 듬뿍 담긴 뇌쇄적인 제안.그러나 유진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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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18. 비상사태

“왜 그래? 아직 몸살 기운이 있는 거야?”마크가 잔뜩 걱정이 담긴 시선으로 유진의 안색을 확인했다.“아니에요. 괜찮았는데… 요즘 며칠 잠을 좀 못 자서 그런가. 면역이 확실히 떨어진 것 같기도 하고.”유진이 창백하게 질린 입술을 겨우 늘리며 의연하게 미소 지었다.마크는 그녀의 이마로 뻗어내리려던 손을 간신히 멈추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그러지 말고, 검사를 받아볼래?”“아니에요. 그 정도 아니에요.”사정없이 내리쬐는 사막의 태양이 대지를 벌갛게 달구어버린 수단의 외곽 오지.사흘 전부터 유진의 신체는 안쪽에서부터 서서히, 그리고 아주 치명적인 속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과로와 몸살인 줄로만 알았다.장시간의 수술과 덮쳐오는 흙먼지 속에서 온몸의 뼈마디가 으스러질 듯 쑤셔왔을 때,유진은 상비약 상자에서 기계적으로 감기약 몇 알을 꺼내어 삼켰을 뿐이었다.약기운 덕에 일시적으로 오한이 가라앉고 열이 내리자, 유진은 제 정직한 육체가 보내는 경고를 완벽하게 간과해 버렸다.여태 굳건히 버텼던 정신력이었기에, 이 정도의 피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 탓이었다.의사로서의 과신이 화를 불렀다.약 몇 알로 증상을 억누른 채, 유진은 또다시 반군 활동이 치열한 최전방 외곽 부락으로 무모하게 의료 봉사를 나갔다.그리고 그곳에서, 억눌려 있던 바이러스가 기어이 유진의 목숨을 통째로 앗아갈 듯 폭발했다.스르륵, 쿵ㅡ.이동식 진료소의 차트를 쥐고 있던 유진의 두 손이 사정없이 떨리더니, 시야가 암전되며 그대로 흙바닥 위로 꺾여 무너져 내렸다.“유진ㅡ!”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유진의 불덩이 같은 몸을 품 안으로 안아 든 마크의 푸른 눈동자가 극도의 공포로 잘게 흔들렸다.유진의 체온은 이미 40도를 훌쩍 웃돌고 있었다.급히 그녀를 들쳐업고 NGO 본부 캠프의 수술실로 폭주하듯 차량을 몰아붙인 마크의 손에 땀이 흥건히 고였다.이윽고 나온 혈액 검사의 결과는 절망적이었다.유진을 쓰러뜨린 것은 단순한 열사병도, 독감도 아닌 열대열 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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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19. 불가항력

스르륵.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 안쪽으로 찌르는 듯한 백색 조명이 망막을 뚫고 들어왔다.유진은 신음조차 내뱉지 못한 채 힙겹게 눈을 억지로 떴다.흐릿하게 깨어나는 시야 끝에 가장 먼저 걸려든 것은 투명한 링거병,그리고 규칙적으로 툭, 툭 떨어지는 수액 방울이었다.‘아…… 나, 병원이구나.’수단의 모래바람 속에서 끊어졌던 의식이 차츰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기 시작했다.첫 감각이 깨어남과 동시에,온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수술 부위의 둔탁한 통증이 몰려왔다.그리고 병원의 그 특유의 공기를 가르고.코끝을 스치는 것은 사막의 흙먼지가 아닌 은밀하고도 서늘한 라벤더 향취였다.유진의 황금빛 눈동자가 흐린 초점으로 주위를 살핀 바로 그 순간,침대 곁에 딱 붙어 앉아 있던 한 남자의 실루엣이 시야에 잔인하리만치 선명하게 박혀들었다.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한층 더 깊어진 눈매. 자신의 전 남편. 류 요스케였다순간, 유진의 의식이 번쩍 깨어나며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순간,그의 깊은 회색빛 눈동자가 유진의 시선에 정면으로 부딪쳤다.2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을 단숨에 파쇄해 버리는 충격.“여기…… 어떻게…….”마른 입술 새로 새어 나오는 유진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찢어지고 갈라져 있었다.요스케의 거구가 움찔했다.“깼어? 두통은 어때? 속은…… 속은 좀 어때? 메스껍거나 하지는 않아?”요스케가 성큼 다가오며 유진의 안색을 살폈다.유진을 내려다보는 그의 회색 눈동자는 걱정으로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유진은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잠깐만……. 간호사 불러올게.”잠시 후, 간호사가 다가와 유진의 이곳저곳을 체크하고 떠났다.“담당의 오실 거예요. 잠시만 기다리세요.”다시 둘 만 병실에 남았다.이내, 2년 전의 광기와 집착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그녀의 흐려진 황금빛 눈동자 위로 서늘한 경계와 의심의 빛이 날카롭게 들어찼다.유진의 그 불안하고 방어적인 눈초리를 읽어낸 순간.요스케는 심장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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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20. 간호

서늘한 백색 조명이 내리쬐는 병실 안,요스케는 입고 있던 화이트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 위까지 거칠게 접어 걷어 올렸다.우람하고 탄탄한 팔 근육이 유진을 위해 바삐 움직였다.전신 마취와 복부 수술의 여파로 움직임이 불편한 유진을 대신해, 그는 그녀의 손발이 되었다.그리고 커다랗고 투박한 손으로 따뜻한 물수건을 정교하게 짜냈다.스윽ㅡ.요스케가 침대 가에 걸터앉아 상체를 숙였다.셔츠 깃 사이로 풍겨오는 깊은 라벤더 향취와 사내의 뜨거운 온기가 유진의 얼굴 위로 아늑하게 쏟아져 내렸다.“입 안이 많이 마를 텐데. 입술부터 이걸로 물기 좀 축여.”요스케의 두터운 손가락 끝이 물수건을 감싼 채 유진의 얇은 입술 위로 조심스럽게 와닿았다.부드러운 천 자락을 타고 스며드는 촉촉한 물기가 짓구겨져 있던 유진의 입술 살결을 적셨다.그 찰나의 촉각적인 밀착 속에서, 유진의 전신이 소름 돋게 떨려왔다.요스케의 손가락이 입술을 지나 연약한 턱끝과 목덜미의 하얀 살결을 부드럽게 훔쳐낼 때마다, 옷감 안쪽의 세포들이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다.물수건이 닿는 쇄골 부근,과거 그가 독점욕의 타액을 흘리며 물어뜯었던 은백색의 미세한 흔적들이 달아오르는 열기과 함께 찌르르하게 마비되는 듯했다.역시 2년이라는 세월은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었다.그때 새겨진 정욕의 족쇄와 아찔했던 잔상을 온전히 망각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영혼의 안쪽까지 박혀버린 낙인이 너무도 깊고 선명했다.유진은 매 순간 느껴지는 그의 집요한 시선과 살갗을 스치는 묵직한 손길을 받아내며, 과거에 흔들리지 않으려 숨을 참았다.그리고 일주일을 간신히 버텨냈다.일주일 후, 마침내 퇴원 수속을 밟는 날이 밝았다.병원 로비 앞,사막의 이글거리는 주황빛 태양 아래, 유진은 자신의 곁에 선 요스케를 돌아보았다.여전히 그의 회색 눈동자는 자신을 갈구하고 있었다.유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이런 남자 앞에서 조금이라도 미련을 보일 수 없었다.그를 위해서라도.하지만 꼭 할 얘기가 있다고 했으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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