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못다 핀 사랑을 다시 피우리라 : Chapter 131 - Chapter 140

169 Chapters

131. 지키고 싶은 사람

백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십 발의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피잉―! 피잉―!“방패를 들어라!”타닥! 퍽!화살이 방패에 연달아 박히는 순간, 수양대군의 군사들이 칼을 들고 앞으로 뛰쳐나갔다.이내 마을 한복판에서 거센 칼부림이 시작되었다.챙―!챙!“크악!”백윤 역시 칼을 움켜쥐고 앞으로 나섰다.조금 전까지 흔들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굳은 얼굴로 눈앞의 상대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챙―!백윤의 칼과 마을 청년의 칼이 거칠게 맞부딪쳤다.한 번.두 번.백윤은 상대의 칼을 쳐낸 뒤 그대로 몸을 파고들었다.하지만 칼날이 청년의 목을 향하던 순간—백윤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멈칫했다.그러나 멈칫한 것도 잠시였다.백윤의 표정이 다시 차갑게 굳었다.서걱―결국 백윤의 칼날이 청년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커헉…….”청년이 힘없이 쓰러지며 튀어 오른 피가 백윤의 얼굴에 묻었다.“…….”백윤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소매로 얼굴에 묻은 피를 천천히 닦아냈다.그리고 다시 앞으로 걸었다.한 걸음.또 한 걸음.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은 채.그때 누군가 백윤의 앞을 가로막았다.“그만해라.”백윤의 걸음이 멈췄다.“……형님.”백현이었다.백윤은 피 묻은 칼을 쥔 채 형을 바라보았다.“왜요.”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왜 또 막으시는 겁니까?”백현은 아무 말 없이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몰라서 묻는 것이냐?”“…….”“네 얼굴이 이미 말해주고 있지 않느냐.”백윤의 입술이 떨렸다.“아뇨.”“백윤아.”“전 모릅니다.”백윤이 이를 악물며 칼을 다시 움켜쥐었다.“그러니까 비키십시오.”백현은 움직이지 않았다.“비키시라고요!”백윤이 한 발 내딛는 순간, 백현이 빠르게 파고들었다.퍽―!목덜미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형…….”백윤의 손에서 칼이 떨어졌다.챙그랑―그대로 무너지는 백윤을 백현이 붙잡았다.백현은 정신을 잃은 동생을 한동안 말없이 내려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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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지워지지 않는 피

흙벽으로 둘러싸인 방 한편에 백윤이 정신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백현은 그런 동생을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았다.일단 데려오기는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중전마마 일행이 백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무엇보다 백윤을 이곳으로 데려와 눕히던 중 발견한 상처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어깨와 가슴 위쪽에는 급하게 치료한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백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자신과 떨어져 있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을 겪으며 살아온 것인지.그리고 무엇이 제 동생을 이토록 변하게 만든 것인지.백현은 한동안 백윤을 바라보다 낮게 중얼거렸다.“……이러려고 그리 떠난 것이냐.”대답은 없었다.백현은 씁쓸한 얼굴로 동생의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해주었다.“차라리 네가 떠나겠다 했을 때…… 말릴 것을 그랬구나.”그때 붙잡았더라면 달라졌을까.’‘내가 함께 가주었더라면…….’백현은 떠오른 생각을 애써 떨쳐냈다.이미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으음…….”백윤이 곧 잠에서 깨어날 듯 신음소리를 흘리자 백현은 동생을 잠시 바라보았다.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백현은 조용히 방을 나와 약초를 손질하는 곳으로 향했다.백현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백윤의 눈꺼풀이 천천히 움직였다.“…….”눈을 뜨자 가장 먼저 낡은 흙벽이 눈에 들어왔다.백윤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흙벽을 바라보았다.낯설지 않았다.오히려 너무나 익숙했다.“……결국 다시 돌아왔군.”백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그는 한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그 순간—“윽…….”어깨에서 올라온 통증에 백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백윤은 반사적으로 상처 부위를 움켜쥐었다.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왜 이곳에 누워 있는지 기억하기 시작했다.형의 얼굴.자신의 손에서 떨어지던 칼.그리고—자신의 얼굴에 튀었던 피.백윤의 움직임이 멈췄다.백윤은 천천히 자신의 뺨을 만졌다.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형이 닦아준 탓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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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두려워하는 자

-강녕전 집무실-수양대군은 아침 일찍 궁으로 들어와 일전에 지시해둔 일들을 보고받고 있었다.보고를 모두 들은 수양대군이 손에 들고 있던 서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결국 일이 그렇게 되었구나.”“어찌할까요?”앞에 서 있던 사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제 생각에는 그 형이라는 자를 없애는 편이 더 깔끔할 것 같습니다만.”“깔끔하다라…….”수양대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아니. 죽이지 말거라.”“하지만 대군마마.”“백윤 그자는 제 형에게 칼을 겨누면서도 끝내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 하지 않았느냐.”수양대군의 손가락이 천천히 탁자를 두드렸다.“그런 자에게 제 형이 죽었다는 소식까지 들려준다면…….”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흔들리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자칫하면 아예 내 손을 벗어날 수도 있어.”“그럼 백현이라는 자는 어찌하시겠습니까?”“그대로 두어라.”“……예?”“죽이는 것만이 사람을 이용하는 방법은 아니지 않느냐.”수양대군이 천천히 몸을 의자에 기댔다.“오히려 살아 있는 편이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지.”“무슨 말씀이신지…….”“백윤에게 형은 약점이다.”수양대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약점은 없애는 것보다 쥐고 있는 편이 더 쓸모 있는 법이지.”그 말에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수양대군의 다음 명을 기다렸다.수양대군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가볍게 고갯짓했다.“물러가거라.”“예, 대군마마.”사내는 고개를 숙인 뒤 조심스럽게 방문을 나섰다.수양대군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이윽고 방 안에 적막이 내려앉자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문득 며칠 전 단종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왕좌는 빼앗을 수 있을지 모르나…… 백성의 마음까지 칼로 빼앗을 수 있을지는 두고 보아야겠군요.’그때만 해도 왕좌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는 어린 왕의 치기 어린 말이라 여겼다.힘도 없이 마음만을 말하는 어린 왕의 이상론이라 생각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수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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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두 번째 화살

“아니면 숙부를 두려워하는 것이오?”단종의 말에도 수양대군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단종은 그런 수양대군을 한동안 바라보다 조용히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애써 감추고 있던 불안이 단종의 눈빛 위로 번졌다.‘중전이 있는 곳을 알아냈다…….’수양대군의 말이 다시 머릿속을 맴돌았다.분명 세 사람이 숨어 있는 곳을 알아냈다고 했다.하지만 그 말을 꺼내던 수양대군의 표정에서는 좀처럼 그 의중을 읽어낼 수 없었다.정말로 그들의 위치를 알아낸 것인지.아니면 자신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던진 말에 불과한 것인지.거기에 중전의 폐비까지 거론하고 나니 마음 한구석에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조선의 왕께서 너무 조바심을 내는 것 아니오?”단종이 가만히 뒤를 돌아보자 족장이 빙그레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오셨소?”“약속은 약속이니 와야 하지 않겠소.”족장의 말에 단종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이내 곁에 서 있던 상선을 바라보자 상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춤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 단종에게 건넸다.“제가 알아본 바로는 오시 무렵에는 이쪽을 순찰하는 군사들이 드문 듯하옵니다. 그때를 이용하시면 될 듯하옵니다.”“알겠다.”단종은 열쇠를 받아 쥐며 상선을 바라보았다.“넌 지금부터 강녕전 침실에 들어가 있거라. 혹여 무슨 낌새라도 보이면 그 즉시 내게알려야 한다.”예, 전하.”상선의 말이 끝나자 단종은 급히 미리 준비해둔 도포를 걸쳤다.평소와 달리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빛깔의 도포였다.이내 족장과 함께 조용히 강녕전을 빠져나갔다.-경복궁 후원, 활터-오시 무렵.사람의 발길이 뜸한 활터에 단종과 족장이 나란히 서 있었다.“그래서, 활은 잡아본 적 있소?”그 말에 단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있었소. 언젠가 금성대군이 선왕의 명을 받고 내게 활을 가르쳐주려 한 적이 있소.”“그렇소?”“그때 딱 한 번 잡아보았소.”족장의 얼굴에 조금이나마 다행이라는 기색이 떠올랐다.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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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마음을 얻는 자, 마음을 쥔 자

단종이 족장에게 활 쏘는 법을 배우고 있던 그 시각, 중전은 북방 마을의 청년들에게배식을 돕고 있었다.처음 청년들은 중전의 모습을 그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왕비라는 사람이 저러는 것도 며칠뿐이겠지.’대부분 그렇게 생각했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중전은 하루 이틀이 지나도 빠지지 않고 나와 직접 음식을 나르고 배식을 도왔다.처음에는 중전을 어려워하며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했던 청년들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는지 가벼운 농까지 건네며 음식을 받아갔다.“중전마마, 오늘은 어제보다 고기를 조금 더 주시는 것 같습니다?”“어제 그대가 두 번이나 더 달라 하지 않았습니까.”“그걸 기억하고 계셨습니까?”지우가 국자를 든 채 피식 웃었다.“그러니 오늘은 처음부터 많이 드리는 겁니다. 대신 또 달라고 하시면 없습니다.”주변 청년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그럼 오늘은 아껴 먹어야겠군.”“그건 그대 마음대로 하시고요.”중전이 청년들과 농을 주고받으며 음식을 나눠주는 모습을 금성대군과 김종서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바라보았다.“대감, 중전마마 말이오. 참 희한한 재주가 있는 것 같소.”“희한한 재주라…….”김종서는 잠시 지우를 바라보다 이내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그렇소?”“예. 중전마마께서는 사람을 대할 때 거리낌이 없으십니다.”김종서의 시선이 다시 지우에게 향했다.“신분이 높든 낮든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네시니…… 처음에는 경계하던 이들도 어느새 스스럼없이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이지요.”금성대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 보니 그렇군.”“저것도 어쩌면 중전마마께서 가진 힘일지 모르겠습니다.”“사실 처음 선왕께서 돌아가시고 전하께서 급히 혼례를 치르게 되셨을 때는 걱정을 좀 했소.”금성대군은 여전히 중전을 바라본 채 말을 이었다.“혹여 그 혼례가 전하의 발목을 잡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오.”“이제는 달리 생각하시는 겁니까?”“그렇소.”금성대군의 입가에 옅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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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움직일 때

-북방 마을, 공터-“방패를 들어라!”김종서의 우렁찬 목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졌다.그의 명령과 동시에 앞줄에 선 청년들이 일제히 방패를 들어 올렸다.아니, 정확히는 일제히 들어 올리려 했다.누군가는 한 박자 빨랐고, 누군가는 옆 사람보다 뒤늦게 방패를 들었다.서로의 간격도 제각각이었다.“붙어! 옆 사람과 틈을 만들지 마라!”김종서가 목소리를 높였다.청년들이 황급히 서로에게 붙었다.그러나 이번에는 너무 가까이 붙은 탓에 방패끼리 부딪쳤다.탁! 타닥!“아, 잠깐! 내 발 밟았잖아!”“네가 늦게 움직였잖아!”“내가 언제!”순식간에 대열이 흐트러지자 김종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명회가 팔짱을 낀 채 피식 웃었다.“대감께서 생각하신 것보다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김종서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땅에 놓아두었던 나무 막대기를 집어 들고 청년들에게 다가갔다.“모두 방패를 내려라.”웅성거리던 청년들이 하나둘 방패를 내렸다.김종서는 그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너희들 하나하나의 무예가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몇몇 청년의 얼굴에 은근한 자신감이 떠올랐다.“허나 전장에서는 그것만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그 말에 청년들의 표정이 조금씩 진지해졌다.김종서는 앞줄에 서 있던 청년 하나의 방패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혼자 싸울 때는 네 앞만 보면 된다. 하지만 군사가 되어 싸울 때는 다르다.”이번에는 그 옆 청년의 어깨를 가리켰다.“네가 한 걸음 잘못 움직이면 옆 사람이 죽는다. 옆 사람이 자리를 비우면 이번에는 네가 죽는다.”공터가 조용해졌다.“칼을 잘 휘두르는 법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다. 활을 잘 쏘는 법을 가르치려는 것도 아니야.”김종서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그건 이미 너희가 나보다 잘 아는 부분도 있을 테니.”그러고는 손에 든 막대기로 흐트러진 대열을 가리켰다.“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남는 법이다.”청년들의 얼굴에서 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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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빌린 입

-강녕전 침실- 단종은 자신의 앞에 놓인 상소들을 바라보며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상선이 곁에서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상선.” “예, 전하.” 단종은 상소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것들…… 어제 올라온 상소가 아니라 오늘 새로 올라온 것이 맞소?” “예. 그러하옵니다.” 상선의 대답을 들은 단종의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허…….” 단종은 손에 든 상소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오늘 올라온 것이라 하기에는 어제와 내용이 너무도 똑같구려.” “…….”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같은 말을 하도록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오.” 단종은 다시 상소 하나를 펼쳤다. 중전께서 정사에 지나치게 관여하시어 조정의 기강을 흐리고 있으며……. 다른 상소를 펼쳤다. 중전께서 종친과 대신의 일에 관여하시니 국모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단종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글을 올린 사람은 달랐다. 문장도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하고자 하는 말은 하나같이 같았다. “중전을 폐하라…….” 단종이 낮게 중얼거렸다. “어제도 오늘도, 모두 같은 말뿐이군.” “전하…….” “숙부겠지.” 상선의 눈이 조금 커졌다. “대군마마께서 말씀이옵니까?” “확신할 수는 없소.” 단종은 상소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허나 이 많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똑같은 생각을 품었다고 믿는 것보다는…….” 그의 손이 상소 한 장 위에서 멈췄다.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입을 빌리고 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지 않겠소?” “전하…… 실은 오늘 올라온 것이 이 상소들만은 아니옵니다.” 단종이 상선에게 시선을 돌렸다. “또 무엇이 있소?” “종친들이 뜻을 모아 올린 상소가 하나 더 있사옵니다.” “내용은?” 상선이 잠시 머뭇거렸다. “……역시 중전마마에 관한 것이옵니다.” 단종의 표정이 굳었다. “해서 종친들까지 중전을 폐해야 한다고 올렸소?” “예, 전하.” “…….”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청하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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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내일, 움직인다

지우는 자신이 머무는 방에 한명회와 금성대군을 앉혀놓고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지우가 찻잔을 입에 가져가 한 모금 마시더니 눈을 조금 크게 떴다.“음…… 이게 뭐죠? 되게 구수한데?”지우의 물음에 금성대군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저도 이곳에 와서 처음 마셔본 차입니다. 인근 산에서 나는 풀과 열매를 채취해 말려두었다가 함께 달여 마시는 것이라더군요.”“풀하고 열매를요?”“예. 이곳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렇게 마셔왔다고 합니다.”지우는 신기하다는 듯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그래서 그런가…… 우리가 궁에서 마시던 차하고는 맛이 완전히 다르네요.”그러자 옆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던 한명회가 찻잔을 내려놓았다.“아무래도 이곳에서는 궁에서 마시는 찻잎을 구하기 어려울 테니,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것으로 대신하기 시작한 것이겠지요.”“그래도 맛있는데요? 구수하고.”지우는 찻잔을 내려다보며 작게 웃었다.“그런데 중전마마.”“네?”“아까 대군마마와 나누시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지우가 찻잔을 내려놓았다.“……전하를 궁 밖으로 모셔내는 일 말인가요?”“예.”한명회의 표정에서 조금 전까지의 여유가 사라졌다.“그 일이라면 제가 한 가지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무슨 방법을 찾았군요?”담담한 표정을 짓던 지우는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한명회를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그래서 방법이 무엇입니까?”지우의 물음에 한명회가 특유의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우선 궁에 잠입하는 것은 내일로 정해 주시지요.”“내일이요?”“예.”한명회는 자신 있다는 듯 찻잔을 내려놓았다.“그리고 이 마을에서 발이 가장 빠르고 몸놀림이 날랜 자 두 명을 골라두십시오.”금성대군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날랜 자를 무엇에 쓰려고 그러시오?”한명회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궁에 들어가 먼저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으니까요.”“먼저 해야 할 일이요?”“불을 지르는 겁니다.”지우의 눈이 커졌다.“……뭐라고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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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왕을 훔치다

-다음 날, 한양 저잣거리-백현은 멀리 보이는 경복궁의 담장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멀리서 보아도 궁의 담장은 제법 높아 보였다.‘백현 의원님. 또다시 힘든 부탁을 드리게 됐네요.’문득 전날 지우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저희를 대신해 먼저 궁으로 가 전하를 모시고 나와 주시겠어요?’백현은 한동안 말없이 궁궐 쪽을 바라보았다.이윽고 깊게 눌러쓴 삿갓을 한 번 고쳐 쓰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목적지는 경복궁이었다.경복궁에 도착한 백현은 인적이 드문 뒤편으로 돌아가 담장 앞에 멈춰 섰다.고개를 들어 높이를 가늠하던 백현은 이내 삿갓을 벗어 등에 걸었다.그리고 아무 말 없이 담장을 타기 시작했다.‘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익혀두거라.’그때는 그저 자신을 지키는 데나 쓸 줄 알았다.백현은 담장 아래를 훑어보다 돌출된 돌 틈을 발견했다.그곳에 발을 걸고 몸을 밀어 올린 뒤 담장 위에 손을 걸었다.‘설마 궁궐 담을 넘는 데 쓰게 될 줄은 몰랐군.’몇 번의 동작 끝에 담장 위로 올라선 백현은 곧바로 몸을 낮췄다.곧바로 담장 뒤편에 몸을 숨긴 백현은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바로 그때였다.강녕전 쪽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희뿌연 연기가 천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백현이 그쪽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시작됐군.”한명회의 예상대로 연기가 피어오르자 강녕전 주변의 궁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군사들 역시 그런 궁인들을 통제하느라 여간 바쁜 것이 아니었다.그 모습을 확인한 백현은 곧장 발걸음을 재촉해 강녕전으로 향했다.그런데 강녕전 가까이 다가섰을 때였다.“잠깐. 거기 누구요?”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백현의 걸음이 멈췄다.‘……들킨 건가.’백현은 천천히 손을 품 안으로 가져가며 뒤를 돌아보았다.“누구시오?”그곳에는 강녕전을 지키던 군사 하나가 서 있었다.군사는 백현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천천히 다가왔다.“처음 보는 얼굴인데……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오?”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군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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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연기가 걷히기 전에

다가오는 군사들을 유심히 살피던 백현은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다행히도 그들 사이에는 조금 전 자신을 강녕전으로 들여보내 준 군사가 섞여 있었다.‘잘만 하면 넘어갈 수 있겠군.’백현은 품 안에서 기다란 천 세 장을 꺼내 뒤에 서 있던 단종과 상선, 소하에게 하나씩건넸다.“세 분 모두 이 천으로 얼굴을 가리십시오.”단종이 천을 받아 들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얼굴을 가리라고?”“예. 제가 어떻게든 둘러대 보겠습니다.”백현은 다시 한번 다가오는 군사들을 바라보았다.“무슨 일이 있어도 먼저 말씀하지 마십시오.”그리고 백현은 다가오는 군사들을 향해 태연하게 미소를 지었다.“아, 아까 강녕전 안으로 들어간 의원 아니오?”“그렇소.”군사는 백현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벌써 진찰이 끝난 것이오?”“아 오늘은 간단한 치료만 한것이고 본격적인 치료는 내일 다시 와 할 참이요.”그때 군사의 시선이 백현 뒤에 서 있는 세 사람에게 향했다.“헌데 뒤의 사람들은 누구요?”“아, 전하를 모시던 궁인들이오.”“궁인들?”“그렇소. 아까부터 연기가 심하지 않소. 연기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인지 하나같이 기침을 해대기에 잠시 데리고 나가는 길이오.”군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세 사람을 유심히 살폈다.특히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그렇다 해도 얼굴을 저리 가릴 필요가 있소?”백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연기를 더 마시지 말라고 내가 가리게 했소.”“…….”군사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이윽고 세 사람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미안하지만 얼굴을 한번 확인해야겠소.”백현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요 며칠 강녕전의 출입을 엄히 살피라는 명이 내려와서 말이오.”“잠깐.”“왜 그러시오?”“그리 가까이 다가가도 괜찮겠소?”“무슨 뜻이오?”백현이 목소리를 낮췄다.“이들이 보이는 증세가 단순히 연기 때문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소.”“뭣이오?”백현이 목소리를 낮췄다.“처음에는 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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