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을 넘긴 시각, 흑룡그룹 본사 회장 집무실. 어둠이 깔린 방 안에는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의 진동음만이 울리고 있었다. 화면에는 중환자실 담당 교수의 이름이 번쩍이고 있었다. 은진이 전화를 받았다. 아이의 상태가 점점 나빠져 더 위급해졌다는, 예상했던 내용이었다. [아이의 혈소판 수치가 위험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패혈성 쇼크 위험이 임박했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통화가 끊기자, 은진의 시선이 책상 위에 펼쳐진 서류 위에 닿았다. ‘대표이사 사임서.’ ‘흑룡그룹 지분 50% 무상 양도 계약서.’ 그리고 ‘도상만에 대한 형사 고소 취하 합의서 및 이사 복직 결정서’. 도상만이 내건 조건을 빠짐없이 담아낸 서류들이었다. 은진의 핏기 없는 손가락이 만년필을 쥐었다. 손끝이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려 펜촉이 종이를 거칠게 긁어댔다. 서명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물 한 방울이 계약서 위로 툭 떨어지며 잉크를 번지게 만들었다. 국내 재계 서열을 다투는 거대 기업도, 그 기업을 다스리는 회장이라는 자리도 차갑게 식어가는 제 핏덩이의 숨결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때, 문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안쪽에서 문을 걸어 잠근 서한준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단정했던 그의 눈빛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은진은 문 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번진 종이 위로 다시 펜촉을 가져다 댔다. “…지금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나가요, 한준 씨.” 은진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러나 한준은 물러서지 않고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시선이 책상 위에 펼쳐진 서류들에 닿은 순간, 한준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 순간, 한준의 커다란 손이 은진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그녀가 쥐고 있던 만년필을 빼앗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만년필이 바닥을 구르며 검은 잉크를 튀겼다. “이 미친 짓 당장 멈추십시오.” 화를 내는 한준의 음성에 살기가
Last Updated : 2026-09-11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