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은 남편의 아버지가 프러포즈를 해왔다: Chapter 101 - Chapter 110

114 Chapters

101화

은진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풋.”얼어붙어 있던 회복실의 정적을 단숨에 녹이는 청량한 웃음소리였다.은진은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못하는 서한준의 턱을 톡 건드리며 눈을 흘겼다.“뭘 그렇게 겁을 먹어요? 내가 잡아먹기라도 한대요?”“그, 그게 아니라……”“가서 문 잠그고 와요.”예상치 못한 여왕의 명령에 한준의 눈이 커졌다.그는 홀린 사람처럼 서둘러 걸어가 회복실 문을 안쪽에서 걸어 잠갔다.딸깍하는 잠금음과 함께 뒤를 돌아보자, 은진은 이미 환자복 상의의 단추를 완전히 풀어 헤치고 있었다.얇은 환자복이 어깨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출산 직후 젖이 차올라 터질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풍만한 젖가슴.붉게 도드라진 유두 끝에 하얀 유즙이 방울져 맺혀 있었다.그 비현실적인 관능미에 서한준은 숨을 들이켜며 제자리에 굳어버렸다.“뭐 해요? 옷 다 벗고 이리 와요.”은진의 그 목소리 조차 관능적이었다. 서한준은 떨리는 손으로 수트 재킷과 넥타이, 셔츠를 벗어 던졌다.단 1초의 지체도 없이 알몸이 된 사내가 침상 곁으로 다가서자, 은진이 자신의 무릎을 가볍게 두드렸다.“누워요.”한준이 은진의 부드러운 허벅지 위에 머리를 뉘이자, 달콤하고 살 냄새가 온몸을 감쌌다.젖이 차오른 여자의 몸에서 나는 향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요염하고 관능적인 체취였다. 은진은 두 손으로 가슴 한쪽을 받쳐 올려, 서한준의 입술 틈으로 팽팽한 젖꼭지를 밀어 넣었다.“마셔요. 날 위해 고생한 강아지에게 주는 상이에요.”한준은 당황한 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가 여왕의 자비로운 하사에 주저 없이 젖을 빨기 시작했다.은진보다 훨씬 키가 크고 덩치도 큰 남성이 어린 아이처럼 웅크리고 누워 여인의 젖을 빠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주종관계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었다. 단단했던 유선이 사내의 뜨거운 혀끝에 풀리며 비릿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모유가 입안 가득 왈칵 쏟아져 들어왔다.한준이 젖을 빠는 소리만 회복실 안에 가득했다. 남자로서는 결코 닿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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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서울 성북동, 도창수의 저택.굵은 주삿바늘이 도창수의 굳은 목덜미에 꽂혔다.“으으윽…!”그의 이빨 사이로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다.약물이 혈관을 타고 들어가자 전신의 신경이 불에 타는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일본 나고야에서 불러들인 의료진의 손길이 분주하게 움직였다.주치의가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일본어로 설명했다.그의 설명이 끝나자 그 옆에 서 있던 키가 작은 여직원이 의사의 말을 통역하여 도창수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도 회장님, 신경계를 강제로 각성시키는 이 특수 약물 요법은 위험합니다. 일시적으로 마비를 풀 수는 있어도, 심혈관과 뇌신경에 돌이킬 수 없는 부작용이 따릅니다. 여기서 더 강도를 높이면 뇌출혈이 다시 올 수도 있습니다.”“사, 상관없어! 흐, 흑룡을 잃어버리고... 그년에게... 보, 복수할 수 없다면... 사, 살아서 무엇하겠느냐!”도창수가 충혈된 눈을 치뜨며 주치의의 손목을 강하게 쥐었다.“나, 난...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사, 살면 된다...”노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긁히듯 탁했지만, 그 안에 담긴 살기는 형형했다.“죽, 죽어도 상관없다... 저, 저 계집의... 목을 비, 비틀기 전까진... 내 심장은... 아, 안 멈춰. 야, 약을 더... 넣어라! 약을 더, 더 넣으란 말이다!”주치의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약물의 용량을 올렸다.지옥 같은 통증이 동반되었지만 약물 덕분인지 굳어 있던 손가락이 천천히 오므려졌다 펴졌다.그는 부작용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독한 광기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치료가 끝난 늦은 오후, 저택의 응접실.휠체어에 앉은 도창수의 앞에는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는 거물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한때 도창수의 검은 비자금을 받아 국회에 입성한 중진 정치인, 그리고 위기 당시 도창수가 흑룡의 자금을 밀어주지 않았더라면 부도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10대 그룹의 총수였다.도창수가 반쯤 마비된 입술을 비틀며 찻잔을 내려놓았다.적막한 응접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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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오전 7시, 서울 시내 호텔 그랜드 볼룸.‘미래 경제 조찬 포럼’이라는 대형 현수막 아래, 수십 명의 정재계 인사들이 테이블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겉보기에는 국가 경제의 신성장 동력을 논하는 번듯한 학술 행사였지만, 장내를 감도는 공기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참석자들의 눈길은 자연스레 헤드 테이블에 앉은 도상만에게 쏠렸다.도상만은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사방을 둘러보았다.식사를 나누며 대화를 섞는 척, 참석자들의 표정과 태도를 하나하나 뜯어보았다.눈치를 보며 어정쩡하게 발을 걸치려는 자, 상황을 관망하며 계산기를 두드리는 자들은 가차 없이 마음속 장부에서 지워나갔다.포럼이 끝날 무렵, 도상만의 눈에 최종 낙점된 다섯 명의 거물에게만 은밀한 접촉이 이루어졌다.도창수의 비자금으로 정치 생명을 이어온 박 의원과 부도 위기를 넘겼던 최 회장을 비롯해, 주요 시중은행장과 검찰 출신 유력 법조인이었다.도상만의 비서가 그들의 손바닥 안으로 작은 검은색 봉투를 밀어 넣었다.“오늘 밤, 회장님 저택에서 조용히 약주 한잔 나누길 원하십니다.”거부할 수 없는 호출이었다.초대장을 받은 순간부터 이미 도창수가 쳐놓은 덫 안으로 들어선 것이나 다름없었다.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성북동 도창수의 저택 별채.헤드라이트를 끈 고급 세단들이 어둠을 틈타 굳게 닫힌 철문을 통과했다.차에서 내린 인사들은 도상만의 안내를 받아 두꺼운 방음벽 뒤에 숨겨진 별채 안으로 발을 들였다.고즈넉한 한옥 외관과 달리, 실내는 몽환적인 붉은 조명과 농밀한 사향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홀 중앙에는 은은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온수 자쿠지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 주변으로 푹신한 벨벳 소파와 독립된 침실들이 어둠 속에 미로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미리 선별된 모델이나 아이돌 출신의 여성들이 매혹적인 자태로 인사들의 곁에 바짝 밀착했다.속이 훤히 비치는 얇은 실크 드레스를 걸친 여인들이 요염한 눈웃음을 흘리며 권력자들의 재킷을 벗겨냈다.“오랜만에 모셨으니 편하게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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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며칠 후 늦은 저녁, VIP 산부인과 회복실.하루 일과를 마친 서한준이 흐트러짐 옷 차림으로 병실에 들어섰다.퇴근 무렵 직장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고된 업무의 흔적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몸에 정밀하게 맞춰진 짙은 차콜 수트 위로 흐트러짐 없이 각 잡힌 넥타이와 반듯한 셔츠 깃, 다부진 체격을 타고 곧게 뻗은 어깨선이 사내 특유의 서늘하고 절제된 기품을 고스란히 드러냈다.날렵하게 벼려진 턱선 위에 얹힌 은테 안경 너머, 깊고 묵직한 눈빛은 피로 대신 차분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단정하게 정돈된 흑발과 옅은 우디 향이 감도는 단정한 실루엣.밤새 권력의 암투를 헤치고 온 사냥개라기엔 지나치게 정갈하고, 숨이 멎을 만큼 매혹적인 자태였다.은진은 편안한 가운을 걸친 채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그를 맞이했다.반듯하게 차려입은 사내의 서늘하고 우아한 자태를 훑어내리는 은진의 눈빛이 미세하게 짙어졌다.분만의 피로가 아직 가시지 않은 산욕기의 몸이었지만, 완벽하게 정돈된 남자의 숨결을 마주하자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원초적인 감각이 일순간 고개를 쳐들었다.아이를 낳은 뒤 한층 예민해진 신경망을 타고 욕망의 열기가 은밀하게 번져 나갔다.팽팽하게 차오른 가슴 끝이 저릿하게 당겨왔고, 하복부 안쪽에서부터 음습하고 뜨거운 충동이 왈칵 솟구쳤다.저 빈틈없는 수트를 거칠게 벗겨내고, 제 발치에 엎드려 온전히 복종하는 사내의 단단한 육체를 갈증 나도록 탐하고 싶다는 욕망.순간적으로 치솟은 짙은 갈증에 은진의 숨결이 가늘게 떨려 나왔다.은밀한 눈빛을 주고 받으며 회사의 동향, 아기와 은진의 회복 상태를 묻고 답하며 두 사람의 대화가 깊어질 무렵, 분위기를 깨며 한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최 비서실장이었다.서한준이 전화를 받자 최대한 차분하게 절제하고 있는, 억눌린 음성이 흘러나왔다.“서 총괄님, 방금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룹의 주거래 은행인 한강은행에서 흑룡물산의 단기 여신 만기 연장을 전격 거부했습니다. 흑룡물산은 건설 부분의 수입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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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오전 9시 30분, 여의도 증권가 메신저를 통해 짧은 지라시 한 편이 퍼져 나갔다.‘[단독/속보] 흑룡그룹 핵심 계열사 흑룡물산, 주거래 한강은행으로부터 단기 여신 800억 원 만기 연장 최종 거부 통보 받아. 그룹 전반 유동성 위기 확산 조짐.’찌라시가 도는 속도는 순식간이었다.장 시작과 동시에 흑룡물산의 주가 창에 파란불이 켜지더니, 불과 30분 만에 하한가 근처까지 곤두박질쳤다.공포는 들불처럼 번져 지주사인 흑룡그룹 본사의 주가마저 8% 이상 급락시켰다.시장에는 투매 물량이 쏟아졌고, 본사 재무팀과 홍보팀 전화선은 사실 확인을 요구하는 기관 투자자들의 항의로 빗발쳤다.본사 대회의실은 숨 막히는 침묵과 분주함이 뒤엉켜 있었다.“제2금융권 브릿지 론과 타 시중은행 대환 대출 라인을 전부 열어 놔. 흑룡물산이 발행한 단기 채권 만기일 전까지 어떻게든 결제 대금을 맞춰야 해.”서한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회장 직무대행인 서한준의 지휘 아래 최 비서실장과 그룹 재무전략실 핵심 인력들이 일제히 비상 체제에 돌입했다.여의도 증권가와 을지로 금융가를 잇는 핫라인에는 쉴 새 없이 불이 들어왔다.서한준은 직접 주요 시중은행의 여신 담당 부행장들에게 전화를 걸어 흑룡물산이 보유한 수도권 물류센터 부지와 우량 상장사 주식을 추가 담보로 제공하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당장 돌아오는 단기 기업어음을 막아내기 위해 대형 증권사 본부장들과의 긴급 대환 발행 미팅도 줄줄이 잡았다.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이상할 만큼 싸늘했다.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흑룡그룹의 눈에 들기 위해 로비까지 마다치 않던 시중은행 여신심사역들이 일제히 낯빛을 바꾸고 몸을 사렸다.“서 총괄님, 흑룡의 신용도야 익히 알지만 본점 리스크관리위원회에서 최근 물류·하청 업종에 대한 여신 할당량을 전면 축소하라는 내부 지침이 내려왔습니다.”“하필 이번 주부터 금융감독원 현장 검사가 예정되어 있어서 당분간 신규 여신 공여는 물론, 기존 차입금 한도 연장도 제 전결권 밖입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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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아닙니다, 회장님.”서한준은 반사적으로 턱을 치켜들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내일 오전 국세청 조사관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법무팀을 통해 압수수색 영장 집행정지 가처분을 신청할 계획입니다. 한강은행의 일방적인 여신 회수 통보 역시 금융감독원에 불공정 여신 거래로 긴급 분쟁조정을 접수해 시간을 벌겠습니다.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습니다.”언제나처럼 빈틈없고 완벽한 최고운영책임자의 보고였다.그러나 은진은 아무런 대꾸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가장자리로 걸어 나왔다.가느다란 손길이 서한준의 은테 안경을 천천히 벗겨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안경을 벗겨내자 사내의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거짓말.”은진의 나직한 한마디가 사내의 가슴을 서늘하게 후벼 팠다.그 순간, 팽팽하게 버티고 있던 사내의 끈이 힘없이 끊어져 나갔다.“…회장님.”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거구의 사내의 어깨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은진은 그에게 다가가 따듯하게 안아주었다. 한준의 억누르고 있던 절망과 자책감이 굵은 어깨를 타고 잘게 떨려 나왔다.냉혹한 기업 사냥꾼도, 흑룡그룹의 회장 대행역도 아닌, 주인 앞에서 패배를 인정하는 지친 사냥개의 모습이었다.은진은 그런 사내를 밀어내지 않았다.가느다란 두 팔로 그의 단단한 머통과 넓은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고개 들어요.”한준이 붉어진 눈으로 올려다보자, 은진의 붉은 입술이 사내의 마른 입술을 부드럽게 삼켰다.달콤하고 비릿한 모유의 향과 은진의 뜨거운 숨결이 사내의 입안 가득 밀려들었다.은진은 혀끝으로 사내의 떨리는 입술 안쪽을 부드럽게 훑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셔츠 단추를 아래로 뜯어내듯 풀었다.그녀의 섬세한 손길이 사내의 단단한 가슴팍과 팽팽하게 굳은 승모근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고통과 자책으로 얼룩져 있던 사내의 피부 위로 짜릿한 열락이 번져갔다.은진은 사내의 귓불을 잘근 베어 물며, 폐부를 찌르는 나직한 음성을 흘려보냈다.“당신은 나의 대행 역할을 하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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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어둠이 짙게 깔린 VIP 산후조리원 회복실.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던 은진이 조용히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화면 속에는 곤히 잠들어 있는 갓 태어난 사내아이의 얼굴이 떠 있었다.작고 붉은 손을 쥐고 있는 아이의 이목구비는 은진과 어딘가 모르게 닮아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독히도 낯익은 핏줄의 굴레를 품고 있었다.은진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화면을 두드렸다.사진을 첨부하고, 단 한 줄의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아버님의 아기에요. 보고 싶지 않으세요?]전송 버튼을 누른 뒤, 은진은 휴대전화를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적막 속에 잠긴 방 안에서, 은진의 입술 끝에 냉소가 어렸다.어떤 짐승이라도 제 새끼에 대한 집착은 어쩔 수가 없다. 몇 시간 뒤, 깊은 새벽.적막하던 산후조리원 VIP 병동 복도에 구두 굽 소리와 함께 휠체어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울렸다. 도상만과 검은 정장을 입은 건장한 경호원들이 사방을 경계하며 앞장섰다.그리고 그 뒤 중심에는 휠체어에 몸을 실은 도창수가 있었다.약물 투여로 억지로 신경을 각성시킨 노인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지만, 두 눈만큼은 형형한 광기로 번뜩이고 있었다.은진의 문자를 받은 순간부터 노인은 주위의 모든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곳으로 달려왔다.도창수의 손짓 한 번에 일행이 멈춰 섰다.노인이 향한 곳은 은진의 병실이 아닌, VIP 신생아실의 유리벽 앞이었다.유리벽 너머, 은은한 조명 아래 하얀 배냇저고리를 입은 갓난아이가 고요히 숨을 쉬고 있었다.조그만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모습에 도창수의 시선이 못 박히듯 멈췄다.노인의 굳어 있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평생을 피와 암투, 배신 속에서 살아온 냉혈한이었다.친아들마저 가차 없이 내쳤던 잔혹한 독재자였지만, 유리벽 너머에 누워 숨 쉬는 자신의 유일하게 남은 핏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노인의 충혈된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마비된 턱이 잘게 떨리더니, 메마르고 주름진 볼을 타고 굵은 눈물 한 줄기가 소리 없이 흘러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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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지훈은 흑룡건설에 입사한 직후부터 오랜 관습처럼 굳어 있던 현장의 부실 시공과 비리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마치 그 일을 위해 입사한 사람 같았다. 처음엔 회사 윗선에 수차례 건의서를 올렸으나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묵살뿐이었다.위에서부터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훈은 밑바닥 현장으로 내려갔다.인부들과 뒤섞여 자재 검수부터 공정 하나하나를 직접 뜯어보던 그는, 끝내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말았다.하청업체들의 자재 빼돌리기와 부실 공사로 남긴 막대한 차액이 도창수와 친인척 이사들의 비자금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훈은 물러서지 않고 서류와 장부를 차곡차곡 모아 나갔다.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었다.그 움직임은 결국 도상만 이사의 레이더에 걸려들었다.도상만을 비롯한 친인척 이사들은 매일같이 도창수의 집무실로 몰려와 난리를 피웠다.저놈을 가만두면 흑룡 일가 전체가 흔들릴 것이라며 들볶았다.도창수는 지훈을 불러 수차례 경고하고 회유하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아들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그 무렵 지훈은 은진과 결혼식을 올렸다.가정이 생기고 처자식이 생기면 칼을 내려놓을 것이라 믿었던 도창수의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지훈은 마지막 결전이라도 치르듯 비자금 자료를 들고 사정기관으로 향할 채비를 마쳐가고 있었다.결국 도창수는 건너서는 안 될 강을 건넜다.지훈이 직접 점검을 맡고 있던 고층 건설 현장의 안전 준수 규정을 느슨하게 풀도록 지시한 것이다.추락 방지용 안전망을 보수 핑계로 철거하게 만들었고, 안전고리 체결 규정을 무시하게 했다.도창수가 직접 난간 아래로 아들의 등을 떠밀지는 않았다.하지만 높은 난간 위에서 아들이 발을 헛디뎠을 때,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유일한 생명줄을 제 손으로 걷어내 버린 채 차갑게 죽음을 방관했다.피 묻은 제국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친아들을 제물로 바친, 명백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었다.“흑, 흑룡을… 그룹을 지키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지훈이 그놈 하나 때문에 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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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오전 11시, 흑룡그룹 본사 28층 대회의실.숨이 막힐 듯한 침묵 속에 프로젝터 팬 돌아가는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스크린 위에는 붉은색으로 깜빡이는 결제 시한과 자금 수지 현황이 떠 있었다.가장 상석에 앉아있는 서한준의 얼굴엔 긴장감이 가득했다. 여느때와 같이 깔끔한 옷차림에 단정한 헤어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닥친 상황에 대한 긴장감마저 없애지는 못했다. “오늘 오후 3시까지 300억을 막지 못하면 기업어음이 부도 처리됩니다.”재무담당 전무가 땀으로 젖은 이마를 닦으며 목소리를 떨었다.“그게 끝이 아니에요. 그 소식이 금융권에 퍼지는 순간, 다른 어음들도 일제히 상환 요구가 들어올 겁니다. 당장 전 금융권에서 도미노처럼 크레딧 라인을 회수하면… 오늘 안에 그룹 전 계열사가 멈춰 섭니다.”회의실 안은 짙은 공포로 가득 찼다.임원들은 사색이 된 채 서로 눈치만 살폈다.어젯밤부터 여의도와 을지로의 모든 인맥을 동원했던 서한준 역시 잘 알고 있었다.도창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은행들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는 한, 합법적인 방법으로 300억을 조달할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초침 소리가 마치 사형 선고의 카운트다운처럼 회의실 벽을 울리고 있었다.같은 시각, 은진의 회복실. 본사의 피 말리는 소용돌이와 비교해, 은진의 회복실은 고요했다.그녀의 시선은 협탁 위에 놓인 휴대전화에 닿아 있었다.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화면을 눌렀다.연결음이 서너 번 울린 끝에, 거친 숨소리와 함께 전화가 연결되었다.도창수였다.상대방이 입을 떼기도 전에, 은진의 낮은 음성이 수화기를 타고 흘러들었다.“온전한 흑룡그룹 전체가 아니면 저에게는 의미가 없어요.”수화기 건너편에서 노인의 숨이 턱 멎는 소리가 들려왔다.은진의 목소리는 지독할 정도로 투명하고 차가웠다. “온전한 흑룡그룹을 물려줄 게 아니라면 우리 아이가 존재해야 할 이유도 없어요.”“은, 은진아… 그게…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도창수의 거친 목소리가 수화기를 흔들었다.하지만 은진은 하던 말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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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흑룡그룹 본사 대회의실.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도상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로는 도창수 일가에 줄을 섰던 친인척 이사들이 당당한 걸음으로 들이닥쳤다. 도상만의 입가에는 오만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아직도 여기서 헛고생들을 하고 계시나?” 도상만은 회의실 중앙으로 걸어와 팔짱을 끼며 서한준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더니 탁자 위에 서류 한 뭉치를 내던지며 목소리를 높였다. “더 이상의 유예는 없어. 흑룡물산은 즉각 법정관리를 신청할 거고, 이사회를 긴급 소집해 자격 미달인 서한준 직무대행의 해임안을 표결에 부칠 겁니다. 다들 동의하시죠?” 도상만의 뒤에 선 친인척 이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하지만 상석에 앉은 서한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은테 안경 너머의 도도한 눈빛이 도상만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아직 시간이 남았습니다. 벌써 법정관리에 들어간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설마 흑룡그룹이 법정관리에 들어가길 바라시고 계시는건 아니시죠?” “허, 아니 이 사람, 무슨 소릴 하는거야? 난 그저... 아니 우리는 다 흑룡그룹이 걱정되어서 그러는거지.” 도상만이 비열하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대표이사 대행이라는 사람이 회사 자금 조달도 제대로 못하고 말이야. 그냥 그렇게 버틴다고 하늘에서 300억이 뚝 떨어질 것 같나? 현실을 직시해!” 안타깝게도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도 시간은 잔인하게 흘러가고 있었고, 벼랑 끝에 몰린 어음 결재 마감 시한은 코앞이었다. 그 시각, 서한준의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발신인은 도창수의 최측근이었다. [회장님이 사경을 헤매고 계십니다. 잠깐 정신이 드셨을 때 사모님을 애타게 찾으셨습니다. 지금 바로 성북동 저택으로 와주십시오.] 메시지를 확인한 서한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말처럼 자리만 지킨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도상만의 비웃음을 뒤로한 채 대회의실을 빠져나온 한준은 차를 몰고 은진이 있는 산후 조리 병원으로 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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