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Chapter 71 - Chapter 80

100 Chapters

제71화

아림은 몇 번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엉켜 있던 호흡이 차츰 제자리로 돌아왔다.거실에서 이헌은 여전히 누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담요에서는 세탁세제의 깨끗한 향이 났고, 그 사이로 아림에게서 나던 옅은 백차 향이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익숙한 향이었다.5년 전에도 아림에게서는 같은 향이 났다.이헌은 손을 들어 손가락을 바라봤다. 아림이 실수로 스쳤던 자리에 아직도 아주 조금 체온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눈을 감자 목울대가 낮게 움직였다. 담요 끝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뼈마디가 선명하게 드러났다....다음 날 아침, 아림의 알람이 정확한 시간에 울렸다.아림은 눈을 뜬 채 잠시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습관처럼 먼저 로아의 방에 들렀다. 로아는 이불 속에 웅크린 채 인형을 끌어안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거실로 나왔을 때는 소파가 이미 비어 있었다.담요는 모서리까지 반듯한 네모로 접혀 소파 한쪽에 놓여 있었다.식탁에는 두 사람 몫의 아침이 준비돼 있었다.아림 몫으로 흰죽과 달걀프라이, 토스트, 조그만 그릇에 담은 오이무침이 놓여 있었다. 로아 몫은 단호박죽 한 그릇과 삼각형으로 작게 자른 토스트, 케첩으로 삐뚤빼뚤 웃는 얼굴을 그린 달걀프라이였다.평소 가사도우미가 차려 주던 방식은 아니었다.아림은 웃는 얼굴이 그려진 달걀을 몇 초 바라보다 죽그릇 바깥을 손끝으로 만져 봤다.먹기 알맞게 따뜻했다.이헌이 나간 지 오래되지 않은 모양이었다.생각이 복잡하게 얽히던 때 안방에서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방으로 돌아가 핸드폰을 집어 들자 화면에 ‘이헌’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아림은 잠깐 망설이다 통화를 받았다.[나야.]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맑고 서늘했다. 평소처럼 감정은 거의 묻어나지 않았다.[앞으로 네가 일 때문에 로아 데리러 못 갈 것 같으면 미리 말해. 내가 등하원 시킬 수 있어.]아림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이헌도 잠깐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가는 길이니까.]“잠깐.” 아림은 핸드폰을 쥔 채 낮게 말했다.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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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통통한 얼굴의 유빈은 아림과 로아를 발견하자 창문 가까이 몸을 붙이고 두 손을 마구 흔들었다. “로아 누나! 누나, 타!”로아의 눈이 반짝였다. 아림이 내민 손은 잡지 않고 이헌의 목을 더 꼭 끌어안았다.“가자. 애들 데리고 저녁 먹고 가.” 이헌의 말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표정도 여전히 차분하고 서늘했지만 눈 깊은 곳에는 옅은 웃음이 스쳤다.이헌은 아림을 보지 않은 채 로아를 안고 차 쪽으로 걸었다.아림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거절하려다가 로아의 눈에 가득한 기대를 보았다.로아는 작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엄마만 애타게 바라봤다.유빈도 창문 쪽에서 거들었다. “이모 빨리 타요!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목구멍까지 올라온 거절의 말을 결국 내뱉지 못하고 삼켰다.아림은 차 문을 열고 로아와 함께 뒷좌석에 탔다. 끝까지 이헌 쪽은 거의 바라보지 않았다.이헌도 더 말하지 않고 운전에 집중했다.차 안에는 두 아이가 재잘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헌은 도심의 고급 프라이빗 라운지 앞에 차를 세웠다. 예약해 둔 룸의 넓은 통유리창 너머로는 도심 야경이 멀리까지 내려다보였다.두 아이는 나란히 앉아 먹는 것보다 이야기하는 데 더 바빴다. 서로를 보며 몇 번이나 몸을 뒤로 젖힐 만큼 크게 웃었다.맞은편에 앉은 이헌은 별말이 없었다. 대신 로아가 생선을 먹을 때마다 고개를 숙여 작은 가시를 하나하나 골라냈다.손놀림은 익숙하지 않았지만 늘 차갑고 단정한 이헌이 그렇게 살뜰하게 아이를 챙기는 모습은 묘하게 시선을 끌었다.아림은 옆에서 그 모습을 보다가 젓가락을 잠깐 멈췄다.곧 시선을 내리고 소고기구이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룸 밖에서는 누군가 핸드폰을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였다.지희였다.반쯤 열린 문틈으로 안쪽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자기 ‘남편’인 이헌이 아림의 딸 로아에게 먹을 것을 챙겨 주고 있었다.지희에게는 단 한 번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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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아림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민혜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림아, 너 이헌이랑 대체 뭐 하는 거야?”아림은 텀블러를 쥔 손을 멈췄다.“지희가 어젯밤 내내 울었어. 지금 지희 상태가 자극받으면 안 되는 거 너도 잘 알잖아. 그렇게 어렵게 이헌이랑 여기까지 왔는데...”“저... 그 사람이랑 아무 관계 없어요.”“아무 관계가 없어?” 민혜정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한마디마다 날이 서 있었다. “애까지 데리고 남의 남편이랑 밖에서 밥을 먹고도 아무 관계가 아니라고 해? 아림아, 네가 언제부터 남의 가정에 끼어드는 사람이 됐어?”휴게실 문은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았다.마침 앞을 지나던 직원 두 명이 그 말을 듣고 발걸음을 멈췄다.아림은 그대로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텀블러를 쥔 손끝이 갑자기 조여들며 희게 질렸다.아림은 목소리를 낮췄다. 감정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말씀 다 하셨어요?”“아직 안 끝났어.” 민혜정이 한 걸음 다가왔다. 실망이 짙게 묻어났다. “너도 사람 마음 다루는 일을 하잖아. 엄마는 네가 누구보다 상황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네가 이헌이랑 과거가 있었던 건 알아. 하지만 지금 이헌이는 지희 남편이야. 지희 상태는 네가 제일 잘 알잖아.”“예전에 너희가 어땠든 이미 끝난 일이야. 지금처럼 계속 가까이 지내면 밖에서 뭐라고 하겠어?”“밖에서 뭐라고 하는데요?” 아림이 고개를 들었다. 눈빛은 맑고 차가웠다. “제가 남의 남편을 붙잡고 늘어진다고요?”민혜정은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엄마는 왜 한 번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생각은 안 하세요?” 아림의 말투는 끝까지 차분했다. 다만 컵을 쥔 손과 점점 흐트러지는 호흡만이 아림의 감정을 드러냈다.“무슨 일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민혜정은 가방을 들며 화가 밴 표정을 지었다. “네가 이헌이한테서 떨어져 있으면 돼.”“예전에 너희 이혼시키고 이헌이를 지희한테 돌려보낸 것도 나야. 화가 나면 나한테 화내. 지희 건드리지 말고, 네 것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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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방 안의 공기가 몇 초 동안 무겁게 가라앉았다.민혜정은 가방끈을 움켜쥐었고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입술을 얇게 다문 민혜정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휴게실에는 금세 조용한 공기만 남았다.아림은 손에 들린 닭국물 그릇을 한동안 내려다보기만 했다.송서연은 맞은편에 앉아 아림의 흩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아림아, 먹어라. 내가 직접 끓였어. 대추랑 황기 넣고 푹 끓였으니까.”아림은 고개를 숙이고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이 났다.속까지 따뜻해졌다.아림은 국물을 끝까지 마시고 그릇을 내려놓았다.송서연은 곧 미리 준비해 둔 티슈를 건넸다.송서연은 의자에 편하게 기대 다리를 포개고 앉아 있었다. 코트 앞섶은 자연스럽게 열려 있었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편안하면서도 따뜻했다.“너 오늘 운 좋다. 이거 3시간 넘게 약불로 끓였어. 이헌이는 한 숟가락도 못 먹었어.”입가를 닦던 아림의 손이 잠깐 멈췄다. 낮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따뜻한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마음 깊은 곳까지 데워 주는 것 같았다.“나한테 뭘 그렇게 매번 고마워해.”송서연은 손을 뻗어 다정한 눈으로 아림을 보았다. “혼자 일도 하고 애도 키우는데 몸까지 상하면 어떡해. 아림아...”말하던 송서연이 무언가 떠올린 듯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로아는 요즘 누가 봐 줘?”“로아도 이제 커서 낮에는 유치원에 있어요. 쉬는 날이랑 밤에는 제가 직접 보고요.”“그럼 야간 근무할 때는?” 송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더 안쓰러운 눈을 했다.아림은 잠깐 말을 멈췄다가 가볍게 웃었다. “로아가 워낙 잘 지내요. 집에는 AI로봇도 있고 인형도 있어서 혼자 잠드는 날도 있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제가 많이 피곤해 보이면 가끔 밤까지 남아주시기도 해요.”송서연은 아림의 손을 잡아 손등을 토닥였다. 말투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애 키우는 일을 너 혼자 다 떠안지 마.”“내가 요즘 바쁜 일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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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송서연은 그런 로아가 마냥 예뻤다.아림이 제시간에 데리러 가지 못하는 날이면 송서연이 유치원 앞에 나타나 로아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그 집은 산자락의 조용한 곳에 자리한 넓은 단독 저택이었다. 오래된 집을 현대적으로 손본 건물 앞 정원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었다.로아는 그 나무를 좋아해서 바닥에 떨어진 잎을 주워 모으곤 했다.오늘도 마찬가지였다.일을 마친 아림은 로아가 송서연의 집에 갔다는 말을 듣자 곧바로 택시를 불렀다.차가 집 정문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문 뒤였다.현관 쪽 벽 등의 따뜻한 노란빛이 계단 위의 어른과 아이를 비추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나란히 바닥에 드리웠다.로아와 이헌이었다.로아는 계단에 앉아 예쁜 봉제 인형을 품에 안은 채 고개를 기울이고 앞에 있는 이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이헌은 로아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허리를 숙인 채 신발끈을 묶어 주고 있었다.짙은 남색 캐시미어 니트 안에는 흰 셔츠를 받쳐 입었고, 소매는 팔뚝 중간까지 걷혀 있었다. 손목의 묵주 팔찌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가볍게 흔들렸다.허리는 곧았고 고개만 약간 숙인 채 아이의 신발끈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아림은 5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눈앞의 평온한 풍경을 괜히 깨고 싶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었다.로아가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아림을 발견하자 눈이 환하게 빛났다. “엄마!”신발끈이 다 묶이자 로아는 기다렸다는 듯 계단에서 내려와 짧은 다리로 아림에게 달려왔다.두어 걸음 달리던 로아가 급히 멈췄다. 무언가 떠올랐는지 돌아서서 이헌에게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이모부, 또 봐요!”이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에 묻지도 않은 먼지를 손으로 한번 털었다.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황빛 외투를 입은 어린아이에게 머물러 있었다.아림은 몸을 숙여 로아를 받아 주고, 쪼그려 앉아 외투 지퍼를 끝까지 올려 주었다. 그 뒤에야 몸을 일으켜 이헌을 바라봤다.“고마워. 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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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지희는 요즘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정확히는 이헌이 핸드폰을 자주 확인하기 시작한 뒤부터 편하게 잔 날이 거의 없었다.예전의 이헌은 핸드폰 알림에 관심도 없었고, 업무를 제외한 사적인 연락은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다.그런데 요즘은 알림이 울리지 않아도 문득 핸드폰을 집어 화면을 확인하곤 했다. 보고 난 뒤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핸드폰을 예전보다 가까운 곳에 두고 꽤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지희는 몰래 화면을 보려고 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이헌이 화면을 너무 빨리 잠가 버려 내용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딱 한 번 알림창에 뜬 프로필 사진을 본 적은 있었다. 주황색 토끼를 귀엽게 그린 캐릭터 이미지였다.지희는 딴생각에 빠진 듯한 이헌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굳게 쥐었다.두 사람이 함께한 지 어언 5년이 지났다. 지희의 증상이 가장 심했던 지난 4년 동안에도 이헌은 늘 예의 바르고 세심하고 책임감 있게 지희의 곁을 지켰다. 하지만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않던 이헌이 이제는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며칠 뒤 오후.아림은 하루 일정을 모두 마쳤다.흰 가운을 벗고 베이지색 니트 카디건을 걸쳤다. 머리는 뒤쪽에 느슨하게 포니테일로 묶었고, 캔버스 가방을 메고 건물 밖으로 나섰다.“언니!” 길가에서 택시를 부르려던 때 뒤에서 누군가 아림을 불렀다.아림은 발을 멈추고 돌아봤다.연한 회색 울코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쓴 지희가 건너편 보도에서 아림을 바라보고 있었다.지난번보다... 더 말라 보였다.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볼살이 빠진 모습은 확연히 보였다.광대뼈가 전보다 도드라졌고 기운도 없어 보였다. 전체적으로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롭고 연약한 인상이었다.아림은 몸 옆의 손을 한번 말아 쥐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선글라스 뒤의 눈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지희는 횡단보도를 건너 아림 앞에 선 뒤 선글라스를 벗었다. 눈가는 퉁퉁 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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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화

이헌이 병실에 도착했을 때 지희는 막 눈을 뜬 뒤였다.검은색 롱코트 안에 짙은 회색 터틀넥을 입은 이헌은 침대에 누운 지희를 바라봤다. 말투에는 평소의 서늘함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디 다쳤어? 괜찮아?”이헌을 본 지희의 눈이 바로 붉어졌다.실제 부상은 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희가 강하게 요구해 왼팔에는 붕대를 두껍게 감았고, 무릎도 상처를 소독한 뒤 거즈로 크게 덮어 둔 상태였다.겉으로 보기에는 꽤 크게 다친 것처럼 보였다.“오빠... 이제 왔네.” 지희의 목소리는 심하게 잠겨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뼈는 안 다쳐서 다행이라고 했는데, 여기 봐.”지희는 왼팔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계속 떨렸다. “조금만 달랐으면... 예전에 다쳤던 이 팔을 또 부딪칠 뻔했어...”그 말은 이헌이 가장 민감해하는 지점을 정확히 건드렸다.지희는 몇 년 전 해외에서 익스트림 스포츠를 하다 팔을 크게 다쳤고, 연주자로서의 경력이 끝날 뻔했다.부상 자체는 치료됐지만, 이후 해외 공연에 설 때마다 팔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떨려 실수가 반복됐다. 결국 지희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까지 받았다.그 일은 지희에게 떨쳐 낼 수 없는 악몽이었고, 이헌의 마음에도 오래 남은 상처였다.이헌의 턱선이 단단하게 굳었다. 목소리는 조금 부드러워졌다. “CCTV 확인하게 할게.”“안 해도 돼.” 지희는 속이 뜨끔해 급히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아림 언니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야. 나도 일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냥... 너무 무서웠어.”서러운 목소리를 내던 지희의 호흡이 갑자기 빨라졌다. 이불 끝을 꽉 쥐고 몸을 웅크려 자신을 감싸듯 몸을 둥글게 말았다.PTSD 증상이 올라오기 직전의 반응이었다.이헌은 미간을 좁히며 호출 버튼을 눌렀다. 의료진이 들어와 지희를 돌보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병실 밖으로 나왔다.복도에 한동안 서 있던 이헌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아림이 로아에게 줄 우유를 데우고 있을 때 이헌에게서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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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같은 시각, 팔로워 3만 명이 넘는 지희의 팬 커뮤니티에 익명의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사진 속 지희는 창백한 얼굴로 병상에 누워 있었다. 팔에는 두꺼운 붕대가 감겨 있었고 퉁퉁 부은 눈가도 선명하게 보였다.사진에 붙은 글은 한 줄뿐이었다.[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언니랑 제대로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인데, 왜 저한테 이러는 걸까요...]댓글은 금세 빠른 속도로 늘었다.[누구야? 누가 그랬는데???][언니? 설마 또 그 최아림이라는 여자야? 남의 관계 망쳐 놓은 것도 모자라 5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우리 지희 씨를 못 놔줘? 이번에는 교통사고까지 나게 했다고?][최아림이라는 여자 어디서 일하는지 아는 사람? 찾아가서 가만 안 둘 거야!][...]게시물은 늦은 밤까지 계속 퍼졌고 조회 수는 몇 배씩 뛰었다....다음 날 아림은 연한 카멜색 캐시미어 코트에 머플러를 느슨하게 두르고 캔버스 가방을 멘 채 병원 건물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입구 주변에 이미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아림은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봤다.대부분 나이가 어려 보였다. 누군가는 핸드폰으로 병원 간판을 찍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화면과 주변을 번갈아 보며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했다.진료받으러 온 사람들처럼 보이지는 않았다.그때 핑크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여자가 가장 먼저 달려왔다. 핸드폰 화면과 아림을 번갈아 비교하더니 소리쳤다. “맞아, 이 여자야!”“미친년아! 우리 지희 씨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출근할 생각이 들어? 네가 무슨 낯짝으로 사람 마음을 치료해!”아림은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머릿속에 5년 전의 숨 막히던 기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안색이 하얗게 질렸고 가방 끈을 꽉 쥔 손도 저절로 떨렸다.“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아림은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를 유지하려 했다.또 다른 남자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핸드폰을 아림의 얼굴 가까이에 들이밀며 촬영했다.“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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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선택지는 두 개야. 첫째, 공개 사과문 올려. 질투 나서 일부러 지희 씨를 사고 나게 만든 것 인정하고 지희 씨한테 사과해. 아니면...”남자는 손가락으로 병원의 간판을 가리켰다.“여기 문 닫게 할 거야. 너 같은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사람을 치료해?”아림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거의 사라졌다.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우려고 몸을 숙였지만 고개를 내리자 눈앞이 까매졌다. 현기증이 밀려와 제대로 서 있기도 어려웠다.발끝이 흔들리고 몸이 그대로 앞으로 기울었다.“뭐야! 지금 일부러 넘어지는 거야?”앞에 있던 대학생 차림의 여자가 날카롭게 외치며 자신이 책임을 뒤집어쓰게 될까 봐 급히 옆으로 피했다.아림이 바닥으로 쓰러지기 직전 사람들 사이가 거칠게 갈라졌다. 창현이 빠르게 뛰어들어 아림을 품에 받아 냈다. 반듯하던 정장 재킷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고, 급히 사람을 구하느라 움직임이 컸던 탓에 셔츠도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창현은 굳은 얼굴로 주변을 훑었다. 낮게 가라앉은 기세에 젊은 팬 몇 명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다들 그만하세요!!”창현은 아림을 감싸 보호하며 뒤따라온 비서 두 명에게 차갑게 지시했다. “이 사람들 옆으로 빼주고, 협조 안 하면 바로 경찰 부르고.”비서들은 현장 경비 직원과 함께 빠르게 움직였다. 가장 흥분해 있던 사람들을 곧바로 떼어 놓았다.창현은 더 이상 소란을 신경 쓰지 않고 아림을 차에 태웠다. 그리고 아림이 서 있던 자리로 다시 돌아가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까지 주워 건넸다.핸드폰을 받아 든 아림의 손끝은 아직 떨리고 있었다.입술을 열어 고맙다고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차 문이 닫히자 바깥의 소음이 대부분 차단됐다.창현은 생수 한 병을 아림에게 건넸다.지희의 팬 커뮤니티의 게시물을 본 창현은 바로 이곳으로 달려왔다. 오는 길에 회사 쪽에 연락해 게시물 확산을 막고 실시간 인기 게시물에서도 내려 달라고 요청해 둔 상태였다.다만 상황이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몰랐다.과격한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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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아림은 도우미 진해자에게 전화를 걸어 로아를 대신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유치원으로 가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좋지 않아서 혼자 조금 걷고 싶었다.한참 걸었을 때 뒤쪽에서 거친 발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저 여자야! 지희 씨 사고 나게 한 그 여자!”아림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에도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고개를 숙이고 머플러로 얼굴을 가린 채 걸음을 빠르게 했다.하지만 뒤따라오는 사람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등 뒤에서 두 손으로 아림을 세게 밀었다.강한 힘에 균형을 잃은 아림의 몸이 옆으로 휘청였다. 바로 옆은 차들이 빠르게 달리는 차도였다.그때 옆에서 뻗어 온 팔이 아림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SUV 한 대가 코트 끝자락을 스칠 듯 빠르게 지나갔다.아림의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귀에는 자신을 붙잡은 사람의 거칠어진 숨소리만 들렸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코끝에 익숙한 향이 감돌았다. 차가운 우디 향과 옅은 베르가못 향이 섞인 냄새였다. 희미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을 진정시켰다.“주 비서, 경찰 불러.”아림의 머리 위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온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차가웠다.이헌은 한 팔로 아림을 감싼 채 다른 손으로 자신의 검은 캐시미어 코트를 벗어 아림에게 둘러 주었다.옆에서는 기찬이 밀친 사람을 붙잡은 채 바로 경찰에 신고했다.이헌의 턱선은 팽팽하게 굳어 있었다. 주변 공기까지 무겁게 눌릴 만큼 표정이 차가웠다.코트를 벗은 이헌에게는 짙은 회색 터틀넥 니트만 남아 있었다. 소매가 조금 올라가 익숙한 묵주 팔찌가 드러났다.팔찌의 매끈한 알이 한낮의 태양빛을 받아 싸늘한 광택을 냈다.아림을 민 사람은 교복을 입은 여자애였다. 20살 안팎으로 보일 정도로 어렸다.여자애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겁을 먹은 듯 한동안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여자가 이헌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당신, 당신... 박이헌 대표잖아! 지희 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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