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끊어진 실은 다시 얽힌다: Chapter 61 - Chapter 70

100 Chapters

제61화

로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근데 이렇게 잘해주지 않아도 돼요... 이모부... 유빈이 아빠잖아요...”원래도 발음이 또렷하지 않은 로아는 한바탕 울고 난 뒤라 코맹맹이 소리까지 섞여 있었다.이헌의 손이 멈췄다. 눈 깊은 곳에 어떤 감정이 스쳤지만 금세 자취를 감췄다.곁에서 로아의 말을 들은 아림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서둘러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손으로 로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로아야, 방에 들어가서 ‘구구’랑 조금 놀고 있을래?”로아는 눈가가 발갛게 부은 채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에서 내려와 방으로 들어갔다.이헌은 로아가 사라진 쪽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표정은 다시 평소처럼 차분하고 냉담해졌다.하지만 로아가 한 말은 여전히 귓가에 남아 있었다. 이헌의 오른손 검지 옆에는 로아의 피가 조금 묻어 있었다.아림은 숨을 고른 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은 고마워. 이제 그만 가 봐.”이헌은 정신을 차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쇼핑백을 바라봤다.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이건 로아에게 주려고 가져온 거야.”아림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이헌은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갔다. 마음 한구석에는 설명하기 힘든 서운함이 남았다.문이 닫히자 아림은 등에 문을 기댔다. 두 손이 저도 모르게 가늘게 떨렸다.‘앞으로는 로아가 그 사람과 너무 자주 마주치지 않게 해야겠어...’밤 8시가 조금 넘은 시각.목욕을 마친 로아는 핑크색 토끼 잠옷을 입고 919번을 끌어안은 채 침대에 웅크리고 있었다.919번은 은은한 수면등 모드를 켠 채 낮은 기계음을 냈다. 꼭 잠을 재워 주는 전자 반려동물 같았다.아림은 옆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고 침실 안에는 잔잔한 정적이 흘렀다.로아는 베개 위에 엎드려 두 손으로 919의 둥근 머리를 감쌌다. 촉촉한 큰 눈으로 한참 로봇을 바라봤다.“구구야.”“주인님, 부르셨습니까?”“나는... 왜 유빈이 아빠를 좋아하는 거야?”로아의 목소리는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궁금하고 이해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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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화

다음 날, 로아정신건강의학과의원.지희는 상담실의 아이보리색 가죽 소파에 앉아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오늘은 크림색 터틀넥 니트를 입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어깨 위로 늘어뜨린 차림이었다. 겉보기에는 온순하고 얌전해 보였다.아림이 갑자기 중등도 PTSD 내담자를 맡게 되는 바람에, 오늘 백요한 교수를 보조하는 일은 아림의 비서인 세영이 대신하고 있었다.심층 치료가 막 끝난 참이었다. 지희의 호흡은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안정되어 있었다.백요한은 안경을 벗고 진료 기록을 적으며 설명했다. “이번 반응은 지난번보다 훨씬 좋습니다. 최근에는 정서 안정도도 많이 올라왔고요. 지금 정도의 치료 빈도를 유지하면서 서너 차례 더 진행하면...”“교수님.” 지희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기록을 잠깐 봐도 될까요?”백요한은 별다른 의심 없이 기록지를 건넸다.지희가 시선을 내리자 기록에는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 효과가 뚜렷하며 핵심 증상이 완화됨. 정서 상태, 수면, 스트레스 반응 모두 이전보다 현저히 호전되었고 전반적인 상태가 안정되는 추세.][외상성 스트레스 상태 역시 양호하게 개선됨. 과각성, 회피, 공황 반응이 크게 감소했으며 심리적 기능이 점차 정상 범위로 회복되고 있음.]지희는 기록에서 시선을 떼고 눈을 내리깔았다. 표정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먼저 가 볼게요.”병원을 나온 지희는 차에 타자마자 이헌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는 금세 연결됐다. 이헌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치료 결과는 어때?]“오빠...” 지희의 목소리에는 불안과 서러움이 잔뜩 묻어났다. “교수님이... 별로 달라진 게 없대. 치료 효과도 잘 안 보인다고 하고. 나, 평생 이렇게 사는 건 아니겠지?”수화기 너머가 몇 초 동안 조용해졌다. 곧 감정을 읽기 힘든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다.[천천히 하면 돼. 조급해하지 마.]“응. 오빠 말 들을게...”전화를 끊은 지희는 미간을 잔뜩 좁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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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화

아림은 걸음을 조금 늦췄다. 맑은 눈빛으로 대답했다. “노라는 먼저 자기 자신이죠.”창현은 눈썹을 살짝 들더니 웃었다.무언가 더 말하려던 창현의 시선에 길가에 세워진 익숙한 마이바흐가 들어왔다.아림도 그 차를 알아봤다.차 문이 열리고 먼저 내린 사람은 지희였다.지희는 연보라색 울 코트에 베이지색 스카프를 두른 차림이었다. 차에서 부축받아 내리며 행복한 듯 옅게 웃고 있었다.지희의 손을 잡아 준 사람은 짙은 네이비색 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이헌이었다. 큰 키와 곧은 체격, 선명한 옆얼굴이 차가운 인상을 더했다.아림은 두 사람을 잠깐 바라보다 곧 시선을 돌렸다.창현은 아림의 시선이 잠시 멈춘 걸 알아차리고 자연스럽게 아림의 앞을 가려 섰다. 다른 방향을 가리키며 웃었다. “이쪽이에요. 차를 동문 쪽에 세워 뒀습니다.”창현의 배려를 모를 리 없었지만 아림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열 걸음 남짓 걸은 뒤 창현이 조용히 말했다. “아림 씨, 이제는 곁에 있는 사람도 조금 더 봐 주세요.”아림은 고개를 돌려 창현의 웃는 눈과 마주쳤다.아림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창현은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더 밀어붙이지 않고 아림과 보폭을 맞춰 걸었다.그 무렵, 극장 입구.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가운데 이헌은 문득 시선을 들었다. 지희의 어깨 너머, 길 건너편으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눈에 걸렸다.짧은 회색 코트와 검은 원피스. 그 곁에는... 연한 파란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지희는 이헌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이헌의 팔을 살짝 흔들며 물었다. “오빠, 뭐 봐?”이헌은 시선을 거두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야. 가자.”...아림이 집에 돌아왔을 때 로아는 이미 가사도우미가 재워 둔 뒤였다.919번은 로아의 곁에 누워 있었고, 상태 표시등이 사람의 호흡처럼 천천히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아림은 로아의 이불을 잘 덮어주고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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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화

“안 그러셔. 네 사정도 다 알고 계셔.”이헌의 말투는 담담했고 걸음도 멈추지 않았다.거실에는 이헌의 부모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이헌의 어머니 송서연은 쉰을 조금 넘겼지만 관리를 잘해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오늘은 짙은 초록색 실크 블라우스에 진주 귀걸이를 하고 머리를 단정하게 올렸다. 차분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왔다.두 사람이 들어오자 송서연은 지희를 한 번 훑어본 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 준비됐어. 들어와서 앉아라.”식사가 시작된 뒤에도 분위기는 그다지 화기애애하지 않았다. 지희가 계속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굴고, 마치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상처받을 사람처럼 행동하는 모습은 송서연의 마음에 더 들지 않았다.송서연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갑자기 식욕이 사라졌다.“돌아온 지도 제법 됐으니 아림이는 만나 봤겠지?”지희는 반찬을 집던 손을 멈췄다. 눈 깊은 곳에 질투가 빠르게 번졌다.‘최아림은 이 집에서 떠난 지 5년이나 됐는데...’‘저 늙은 여자는 왜 아직도 최아림을 챙기는 거야!’송서연은 두 사람이 불편해하는 기색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말을 이어 갔다.“예전에 아림이 이 집에 있을 때는 아무리 바빠도 내가 몸이 안 좋다고 하면 직접 보양식을 챙겨 왔었다.”“비 오는 날 무릎이 아픈 것도 기억해 뒀다가 해외에서 괜찮다는 연고를 구해 오곤 했고. 네 아버지한테도...”지희의 표정이 굳었다. 손에서 젓가락이 떨어져 식탁 위에 가볍게 부딪쳤다.지희는 당황한 듯 고개를 숙였다. 속눈썹이 떨렸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어머님, 저... 제가 언니만큼 잘하지 못하는 건 알아요. 그래도 이 집 며느리로서 정말 노력하고 있어요. 저는...”송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식사할 때는 조용히 먹어요.” 이헌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낮게 말했다. “어머니, 식사부터 하세요.”송서연은 눈시울을 붉힌 지희를 한 번 보고, 답답하다는 듯 이헌에게 눈을 흘겼다.그리고 속은 답답했지만 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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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화

송서연은 한참을 잔소리했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아림을 걱정하는 말이었다.그 말을 듣고 있자니 아림은 코끝이 시큰해졌다. 이헌과 함께했던 1년의 결혼생활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그때 송서연은 아림에게 정말 잘해 줬다. 친딸처럼 아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아림이 살아오며 가족에게서 따뜻한 정을 느껴본 경험은 많지 않았고, 송서연이 준 정은 그 몇 안 되는 좋은 기억 중 하나였다.아림은 그 마음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하지만 많은 것이 달라진 지금, 다시 만난 송서연을 아림은 ‘여사님’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네 친엄마도 참 답답하다. 이렇게 괜찮은 딸을 옆에 두고도 귀한 줄 모르고, 친딸보다 키운 딸만 싸고돌잖아!”송서연은 말할수록 속이 상했다. 이헌이 지희의 가족과 계속 얽혀 있지만 않았다면 직접 찾아가 아림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한마디하고 싶을 정도였다.“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부모님이 지희를 거의 20년 동안 키우셨어요. 그동안 쌓인 정은 누구도 쉽게 대신할 수 없는 거잖아요.”아림의 목소리는 차분했다.아림이 담담할수록 송서연은 더 마음이 아팠다.“아림아, 오늘 저녁에 집에 와서 밥 먹고 가.”아림의 손이 미세하게 굳었다. “저는...”“거절하지 마. 들어오기 전에 네 비서한테 물어봤어. 오늘 오후에는 별일 없다며.” 송서연이 아림의 말을 잘랐다.“너 예전에 영순 아줌마가 끓여 주는 능이버섯 닭백숙 좋아했잖아. 오늘 모처럼 직접 해 준다는데 네가 안 오면 영순 씨도 섭섭해할 거야. 엄마도... 아니, 나도 안 보고 싶었어?”아림은 입을 열었다가 끝내 거절하지 못했다.이헌은 워낙 바빴고, 결혼한 1년 동안에도 본가에 자주 들르지 않았다. 오늘 역시 마주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그렇게 생각하고 아림은 초대를 받아들였다.아림이 고개를 끄덕이자 송서연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그래, 잘 생각했어. 그럼 일 방해 안 하고 갈게. 퇴근할 때 집에서 차 보낼 테니까 타고 와.”“괜찮아요. 퇴근하고 제가 택시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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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화

아림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눈앞에는 식탁이 가득 찰 만큼 음식이 차려져 있었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예전에 이 집에서 지낼 때 자주 먹던 것들이었다.능이버섯 닭백숙에서는 뽀얀 김이 오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돼지갈비찜과 꽈리고추볶음, 부드러운 계란찜, 아림이 예전에 한번 맛있다고 했던 새알심이 든 단호박죽까지 놓여 있었다.목이 잠깐 메었다. 아림은 시선을 내리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가슴으로 치밀어 오르는 시큰함을 조용히 눌러 삼켰다.“아버님은요?”“신경 쓰지 마. 너도 알잖아. 이헌이랑 똑같아서 이 시간에도 회의 중이래.”아림은 옅게 웃다가 다시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근데... 둘이 먹기엔 너무 많이 차리신 거 아니에요?”“많긴 뭐가 많아. 네가 너무 말라서 이것도 부족해 보여.” 송서연은 직접 국그릇에 백숙 국물을 떠 아림 앞으로 밀어주었다. “식기 전에 먹어라.”아림은 얼른 두 손으로 그릇을 받아 들고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진하고 담백한 국물에 능이버섯의 좋은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기억 속에서 먹던 맛 그대로였다.아림이 무슨 말을 하려던 때, 현관 쪽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국물을 마시던 아림의 손이 멈췄다. 눈동자가 미세하게 커졌다.곧 짙은 회색 더블 트렌치코트 안에 검은색 캐시미어 터틀넥을 입은 이헌이 다이닝룸에 모습을 드러냈다.이헌 역시 이곳에서 아림을 마주칠 줄은 몰랐는지 걸음이 놀라서 아주 잠깐 끊겼다. 하지만 금세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코트를 벗어 주영순에게 건넨 뒤, 식탁으로 다가와 의자를 당겨 앉았다.“어머니.”“웬일이니? 오늘은 여길 다 오고.” 송서연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말투는 썩 반갑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았다.평소에는 집에 한번 들어오라고 해도 바쁘다는 말만 하던 아들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제 발로 찾아왔다.이헌은 대꾸하지 않았다. 눈길만 한번 주자 주영순이 알아서 식기 한 벌을 더 가져왔다.이헌은 익숙하게 공용 젓가락을 들어 송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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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아림은 문을 닫자마자 아림은 수도꼭지를 틀었다. 차가운 물을 손끝과 볼에 묻힌 뒤 세면대 가장자리를 두 손으로 짚고 한참 숨을 골랐다. 그제야 어지럽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손의 물기를 닦고 흐트러진 화장을 간단히 손본 뒤 문을 열었다.문밖에는 검은 캐시미어 터틀넥 차림의 이헌이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복도의 큰 조명은 꺼져 있었고 벽에 걸린 등의 따뜻한 빛만 이헌의 옆얼굴을 은은하게 비췄다. 늘 서늘하고 빈틈없던 인상이 한결 부드럽게 보였다.아림은 잠깐 걸음을 멈췄다가 금세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왔다.옆으로 비켜 이헌을 지나쳐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했다.그때 낮고 차분한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권 대표랑 만나지 마.”아림은 제자리에서 멈췄다. 미간이 가늘게 좁혀졌다.몸 옆에 늘어뜨린 손이 천천히 말려 들어갔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자 겨우 진정시켰던 감정이 다시 들끓었다.손바닥에서 시작된 아픔이 팔을 타고 가슴까지 번졌다. 아림은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잠깐 멈춘 뒤 길게 내쉬었다.같은 호흡과 박자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다섯 번째 숨을 내쉬고 나서야 가슴속에서 요동치던 감각이 조금 가라앉았다.“내 사생활이야.” 아림의 표정과 목소리는 차분했다. 다만 여전히 가늘게 떨리는 손끝만이 속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당신은 결혼했어.”“지금 당신 아내는 최지희야. 본인이 지금 어떤 처지인지 잊지 마.”복도에 말소리가 끊겼다.이헌의 깊은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 안으로 복잡한 감정 하나가 빠르게 지나갔다.아림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이헌을 지나 계단 쪽으로 걸었다. 곁을 스쳐 갈 때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남겼다. “앞으로 나한테 선 지켜, 제부.”계단을 밟는 발소리가 한 칸씩 아래로 멀어졌다.이헌은 그대로 서 있었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주머니 안의 오른손이 천천히 주먹으로 말렸고, 손마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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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화

로아의 말이 끝나자 거실이 조용해졌다.아림은 표정을 가다듬고 허리를 곧게 폈다. 말투도 한층 엄해졌다. “로아야. 엄마가 전에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지?”로아는 움찔하며 인형을 품에 더 꼭 안았다.“이모부는 이모부야, 로아 아빠가 될 수 없어.” 아림은 로아를 똑바로 바라봤다. 눈 깊은 곳에 아픈 기색이 스쳤지만 목소리는 또렷했다. “이모부는 결혼했고 자기 가족도, 소중한 네 사촌동생 유빈이도 있어. 앞으로 이런 말은 아무데서나 함부로 하면 안 돼.”로아의 눈가가 금세 붉어지고 코끝도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울음은 꾹 참으며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앞으로 안 그럴게.”어린아이가 서러움을 삼키면서도 말을 잘 듣는 모습에 아림의 마음은 답답해졌다. 주먹을 한번 쥔 뒤 마음을 굳히고 일어났다. “아주머니, 로아를 방으로 데려가 주세요. 저는 씻고 나서 로아랑 같이 잘게요.”곧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도우미 아주머니는 로아를 작은 침대로 데려가 919 로봇을 곁에 놓아주고 조명을 어둡게 조절한 뒤 방을 나갔다.로아는 문밖을 한번 살피고 919번을 끌어안았다. “구구야, 구구야. 이모부한테 전화해 줘.”...마이바흐 뒷좌석에서 이헌은 영문으로 된 인수합병 자료를 읽고 있었다.창밖의 불빛이 스치며 이헌의 옆얼굴을 잠깐씩 밝혔다. 원래도 서늘하고 거리감 있던 선이 어두운 차 안에서는 더 날카롭게 보였다.뚜렷한 눈썹뼈 아래로 얕은 그림자가 졌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서류 모서리를 잡고 있었고 표정은 차갑고 집중돼 있었다.좌석에 놓인 개인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화면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떠 있었다.이헌은 미간을 조금 찌푸리고 전화를 받았지만 발신자는 먼저 말하지 않았다.수화기 너머로 말랑하고 조금 서툰 아이 목소리가 들리고서야 눈빛이 달라졌다. [여보세요, 로아야.]이헌의 손이 멈췄다. 어두웠던 눈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엄마 씻으러 갔어요. 엄마 몰래 전화했어요.] 로아가 코를 훌쩍였다. 아직 울고 난 뒤의 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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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화

이헌은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좁혔다.“주 비서.”“네, 대표님.”“유빈이 먼저 집으로 데려다줘.” 이헌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시선은 벤치에 혼자 앉은 작은 아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기찬은 잠깐 놀랐다가 이헌의 시선을 따라 로아를 발견하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표님.”유빈은 아빠에게 더 안겨 있고 싶은 듯 몸을 비볐지만 이헌의 담담한 시선을 마주치자 얌전히 기찬에게 안겼다.이헌의 인상이 조금 누그러졌다.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벤치 쪽으로 곧장 걸었다.발소리에 로아가 큰 눈을 들어 올렸다. 이헌인 걸 확인하자 반가움이 스쳤다가 금세 조금 가라앉았다. 그래도 얌전히 인사했다. “이모부!”“엄마는?” 이헌은 로아 앞에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엄마 아직 일한대요. 조금 늦게 데리러 온대요.” 로아는 짧은 다리를 흔들며 인형을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이헌은 손목시계를 한번 확인하고 부드러운 눈으로 로아를 바라봤다. “가자. 이모부가 선생님이랑 엄마한테 연락하고 집까지 데려다줄게.”...밤 8시가 넘어서야 아림은 피곤할 틈도 없이 서둘러 아파트로 돌아왔다.문을 열고 들어오자 신발도 벗기 전에 사람을 부르려다가 그대로 멈췄다.거실 매트 위에는 몸에 잘 맞는 셔츠를 입은 이헌이 다리를 접고 앉아 있었다.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서 탄탄한 팔뚝과 익숙한 묵주 팔찌가 드러나 있었다.이헌의 손에는 블록 한 조각이 들려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진지하게 조립하고 있었다.로아는 이헌의 다리 곁에 엎드려 까르르 웃다가 제법 당당하게 지시까지 했다.“이모부, 바보예요. 이거 여기 끼우는 거예요.”평소라면 누가 함부로 말 붙이는 것조차 쉽지 않은 남자는 화를 내기는커녕 로아가 알려 준 자리에 블록을 옮겨 끼웠다.문 열리는 소리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이헌은 깊은 눈으로 아림을 바라보며 손에 든 블록을 내려놓았지만 굳이 일어나지는 않았다.로아는 얼굴 전체가 환해졌다. 작은 손을 연달아 치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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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화

과일을 먹은 뒤에도 로아는 한참 더 이헌과 놀았다.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이헌 곁에서 잠이 들었다.아림은 조심스럽게 로아를 안아 작은 침대로 옮겼다.이불을 잘 덮어주고 인형도 베개 옆에 놓은 뒤에 문을 살며시 닫고 거실로 나왔다.거실에서는 이헌이 이미 일어나 셔츠 소매의 커프스 단추를 잠그고 있었다.연한 회색 셔츠는 매끄러운 소재에 선이 깔끔했고, 소매 끝에는 은은한 무늬가 새겨진 플래티넘 커프 링크스가 달려 있었다.단추를 다 잠근 이헌은 풀어서 소파에 놓아둔 넥타이를 집어 주름을 손으로 편 뒤 반듯하게 접어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흐트러진 곳이 없었다. 지나칠 정도로 반듯하고 자로 잰 듯 정돈된 사람이었다.아림은 시선을 거두고 조용히 말했다. “오늘은 고마웠어.”“오는 길이었어.”“늦었으니까, 내가 집 앞까지...”아림은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현관 쪽으로 걸어가 이헌을 배웅하려 했다.언제부터인지 창밖에는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세차게 두드릴 만큼 비가 거셌다.“주 비서가 차 가져갔어.”뒤에서 이헌의 낮고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아림은 바로 답하지 못한 채 손을 몸 옆에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잠깐의 정적 뒤에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이헌이 핸드폰을 꺼내고 있었다.“괜찮아. 택시 불러서 가면 돼.”이헌은 아무렇지 않게 화면을 켰지만 그 뒤로는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았다.비는 더 세차게 내렸고 끊임없는 빗소리가 아림의 마음을 흔들었다.조금 망설인 아림이 이헌을 돌아봤다. 시선이 어색하게 흔들렸다. “소파에서... 오늘 하루만 자고 가.”“거실 욕실 수납장에 새 칫솔 있어. 수건이랑 샤워 타월은 왼쪽 위 두 번째 칸에 있고, 전부 새거야.”말을 마친 아림은 이헌을 더 보지 않고 곧장 안방으로 돌아갔다.이헌은 핸드폰을 쥔 채 멈춰 있다가 화면을 껐다....아림은 샤워를 마치고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머리를 반쯤 말렸을 때 오늘 자해를 시도했던 내담자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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