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로아정신건강의학과의원.지희는 상담실의 아이보리색 가죽 소파에 앉아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오늘은 크림색 터틀넥 니트를 입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어깨 위로 늘어뜨린 차림이었다. 겉보기에는 온순하고 얌전해 보였다.아림이 갑자기 중등도 PTSD 내담자를 맡게 되는 바람에, 오늘 백요한 교수를 보조하는 일은 아림의 비서인 세영이 대신하고 있었다.심층 치료가 막 끝난 참이었다. 지희의 호흡은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안정되어 있었다.백요한은 안경을 벗고 진료 기록을 적으며 설명했다. “이번 반응은 지난번보다 훨씬 좋습니다. 최근에는 정서 안정도도 많이 올라왔고요. 지금 정도의 치료 빈도를 유지하면서 서너 차례 더 진행하면...”“교수님.” 지희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기록을 잠깐 봐도 될까요?”백요한은 별다른 의심 없이 기록지를 건넸다.지희가 시선을 내리자 기록에는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 효과가 뚜렷하며 핵심 증상이 완화됨. 정서 상태, 수면, 스트레스 반응 모두 이전보다 현저히 호전되었고 전반적인 상태가 안정되는 추세.][외상성 스트레스 상태 역시 양호하게 개선됨. 과각성, 회피, 공황 반응이 크게 감소했으며 심리적 기능이 점차 정상 범위로 회복되고 있음.]지희는 기록에서 시선을 떼고 눈을 내리깔았다. 표정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먼저 가 볼게요.”병원을 나온 지희는 차에 타자마자 이헌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는 금세 연결됐다. 이헌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치료 결과는 어때?]“오빠...” 지희의 목소리에는 불안과 서러움이 잔뜩 묻어났다. “교수님이... 별로 달라진 게 없대. 치료 효과도 잘 안 보인다고 하고. 나, 평생 이렇게 사는 건 아니겠지?”수화기 너머가 몇 초 동안 조용해졌다. 곧 감정을 읽기 힘든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다.[천천히 하면 돼. 조급해하지 마.]“응. 오빠 말 들을게...”전화를 끊은 지희는 미간을 잔뜩 좁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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