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 Chapter 81 - Chapter 90

220 Chapters

81화 : 잔향이 남긴 것 #1

[2주전 토요일 : 혜연의 본가 식탁] 소영의 부모님이 혜연의 본가를 찾았다. 겉으로는 정기적인 부부 동반 식사 자리였지만, 식탁 위에 정갈하게 차려진 갈비찜과 각종 전이 무색할 만큼 그날의 공기는 날카로운 파열음으로 가득했다.식사가 중반에 접어들 무렵, 평소 조용하던 소영 모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고, 눈동자는 분노와 배신감이 뒤섞인 채 번뜩이고 있었다."글쎄, 그놈이 소영이 전남친이라니까! 8년이나 만나놓고 그렇게 한순간에 매몰차게 헤어진 바로 그놈 말이야!"소영 엄마의 목소리는 상기되다 못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혜연 엄마는 들고 있던 찻잔을 멈춘 채 눈을 커다랗게 떴다. 찻잔 속의 찻물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파문을 그려냈다."뭐라고? 소영이가 몇 년을 밤낮으로 울며 불며 힘들어하던 그때 그놈인가? 그 대기업 다니다 그만 뒀다는... 성격이 아주 차갑다던?""그래! 그 천하의 썩을 놈이 혜연이네 회사 프로젝트에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어. 세상천지에 남자가 없어서 하필이면 그놈이랑 엮이느냐고! 소영이가 그놈 때문에 몸져누웠던 걸 생각하면 난 아직도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소영 엄마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물컵을 단숨에 비워냈다. 옆에서 묵묵히 밥을 먹던 소영 아빠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여보, 그만 좀 해. 그거 근데 소영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던 거 아니었나? 애들 싸움에 부모가 너무 깊이 관여하는 거 아니야? 벌써 몇 년 전 일인데.""아니, 그렇다고 한 번을 안 붙잡고 그렇게 모질게 떠나는 게 사람이야? 8년 정이 무겁지도 않느냐고! 우리 소영이가 얼마나 자존심 다 버리고 다시 매달렸는데,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뒤돌아선 놈이야. 그런 놈은 아주 상종을 말아야 해!"소영 엄마의 분기탱천한 반응에 혜연 모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불과 얼마 전, 엘리베이터 사고 소식을 듣고 상수를 '생명의 은인'이라 부르며 혜연과 잘해보라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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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 잔향이 남긴 것 #2

그녀는 최대한 건조하고 사무적인 목소리를 골라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당연히 알았지. 근데 엄마, 회사에서 프로젝트 파트너로 결정해서 내려보낸 사람인데 내가 무슨 힘이 있어? 일은 일일 뿐이야. 내가 공과 사도 구별 못 할까 봐?""일은 무슨 일! 세상에 남자가 그놈 하나뿐이야? 왜 하필 소영이 전남친이랑 붙어서 주말에 이 동네까지 와서 실실거리고 있어!""데이트 아니야. 업무상 필요한 재료 찾으러 간 거야.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나 소영이 친구야. 내가 그런 상도덕 없는 애인 줄 알아? 나 박혜연이야, 엄마."혜연의 단호하다 못해 서늘한 태도에 엄마의 서슬 퍼런 기세가 아주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했다. 그때 방 안에서 나오던 아빠가 혜연의 편을 들며 끼어들었다."아휴,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 혜연이가 애야? 혜연이 짝은 혜연이가 알아서 하는 거야. 소영이 일은 소영이 일이고, 혜연이는 지금 자기 일 열심히 하고 있는 건데 당신이 왜 중간에서 훼방을 놔? 혜연아, 고생 많았다. 들어와서 좀 쉬어.""당신은 몰라서 그래! 이게 얼마나 복잡한 문제인지! 내 얼굴이 뭐가 되겠느냐고!""복잡하긴 뭐가 복잡해. 다 지난 일이고, 혜연이는 성인이야. 당신이 걱정 안 해도 알아서 선 긋고 잘할 애니까 그만 좀 볶아. 자, 혜연아. 얼른 들와아라. 당신은 저녁 안할꺼야? 오랫만에 온 혜연이 굶겨보내게?"아빠의 중재 덕분에 엄마는 구시렁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혜연은 부모님의 시선을 피해 제 방으로 도망치듯 들어왔다. 방문을 잠그고 어둠 속에 몸을 던지는 순간, 빳빳하게 세우고 있던 긴장의 끈이 툭 끊어졌다. 등 뒤로 느껴지는 차가운 목재 문의 질감이 비로소 그녀를 지탱해 주었다. 혜연은 무너져 내리듯 문틀을 타고 주저앉았다.침대에 걸터앉은 혜연은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에 숨을 몰아쉬었다.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내뱉었던 말들—'일은 일일 뿐이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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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 열병의 잔상 #1

일요일 오후 1시. 강상수의 본가 거실은 시간이 끈적하게 박제된 것처럼 고요했다. 창밖으로 비치는 가을 햇살은 겉보기엔 따스했으나, 두꺼운 이중창을 통과해 거실 안으로 침투하는 순간 실내의 차가운 공기에 부딪혀 날카로운 유리 파편처럼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다.거실 한복판을 위압적으로 차지한 묵직한 마호가니 식탁. 그 위에는 정갈하게 끓여낸 북어국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 그리고 정갈하게 담긴 밑반찬 몇 가지가 놓여 있었다. 평범한 가정의 점심 식탁이어야 할 그곳은, 상수에게는 매번 자신의 영혼이 난도질당하는 처형대와 다름없었다.달그락.상수가 떨리는 손으로 젓가락을 움직이다가 사기 그릇의 모서리를 아주 살짝 건드렸다. 찰나의 마찰음이었지만, 그 소리는 고요한 성당 안에서 울려 퍼지는 거대한 종소리처럼 증폭되어 상수의 귓가를 때렸다. 상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맞은편에 앉은 아버지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형 재현만이 이 숨 막히는 적막을 어떻게든 걷어내 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아버지, 요즘 이 집 북어국이 유독 시원하네요. 줄 서서 사온 보람이 있네요. 주방 아주머니 솜씨가 늘었어요. 엄마는 혼자 여행가면서 국 하나라도 끓여놓고 가지. 상수야, 너도 좀 많이 먹어라. 작업실에서 맨날 라면이나 때우고 부실하게 지내는 거 아니야? 너 볼에 살이 쏙 빠져서 얼굴이 반쪽 됐다."재현의 목소리가 허공을 둥둥 떠다녔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버지의 묵직한 침묵뿐이었다. 아버지는 대답 대신 멸치 조림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서른 번은 족히 넘게 들리는 그 규칙적인 저작 소리가 거실에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상수는 고개를 숙인 채 밥알을 씹었다. 입안이 모래를 씹는 것처럼 깔깔했다. 식탁 밑으로 감춘 상수의 발가락이 경직되어 뒤틀렸다.이 집의 공기는 늘 산소가 부족했다. 아버지가 내뿜는 거대한 권위의 그늘 아래서 상수는 서른 중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숨을 헐떡이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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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 열병의 잔상 #2

열이 40도에 육박하자 현실의 해상도가 무너졌다. 천장의 하얀 얼룩은 기묘하게 출렁이며 상수의 얼굴로 변했다가, 이내 어머니의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흩어졌다. 벽지는 끈적한 액체처럼 흘러내려 침대를 집어삼키려 했고, 방 안의 가구들은 기괴하게 몸을 뒤틀며 혜연의 숨통을 압박해왔다. 혜연은 신음하며 몸을 뒤척였지만, 움직일 때마다 관절 마디마디에 박힌 유리 조각들이 신경을 긁어대는 감각에 전신이 경련했다.입안은 사막처럼 바짝 말라붙어 침 한 번 삼키는 것조차 녹슨 칼날을 삼키는 고통이었다. 혜연은 꿈과 현실의 경계, 그 아슬아슬한 절벽 끝에서 허우적거렸다. 꿈속의 그녀는 다시 그날의 멈춰버린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곁에 상수가 없었다. 완전한 어둠, 그리고 폐쇄된 공간의 압도적인 공포 속에 홀로 남겨진 그녀의 코끝에 소영의 향기가 스쳤다.질투와 미안함, 그리고 들키고 싶지 않은 욕망이 뒤섞인 기괴한 향기가 혜연의 목을 조여왔다. 저 멀리서 상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아무리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도 그의 온기는 닿지 않았다. 그는 점점 멀어지며 오직 희미하고 시린 나무 향만을 남긴 채 심연의 나락으로 사라져갔다."가지 마요... 제발, 상수 씨... 내가 잘못했어요..."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 잠옷을 축축하게 적셨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안위를 위해 부정했다는 사실이, 그를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로 낙인찍었다는 자책이 육체적인 통증보다 수만 배는 더 날카롭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혜연은 자신의 심장이 독에 중독되어 시커멓게 썩어가는 과정을 뜬눈으로 지켜보는 것 같은 공포 속에서 다시 깊은 무의식의 수렁으로 추락했다.월요일 아침 7시. 상수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작업실에 출근했다. 하지만 정작 조향대 앞에 앉은 그의 손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토요일의 그 강렬한 결별 이후, 혜연의 휴대폰은 죽은 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수백 번을 확인해도 보낸 메시지의 '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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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 향기의 처방전 #1

월요일 오후의 태양은 냉소적일 만큼 눈부셨다. 작업실 창을 뚫고 들어오는 빛줄기 속에서 먼지들이 느릿하게 춤을 추었지만, 상수의 시선은 오직 조향대 위의 빈 유리병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몸은 이곳에 있었으나, 영혼은 이미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어느 낡은 빌라의 굳게 닫힌 문 앞을 망령처럼 서성이고 있었다.김민지 과장과의 통화 이후, 상수의 머릿속엔 '40도의 고열'과 '나오지 않는 목소리'라는 단어만이 파편처럼 박혀 떠다녔다.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러 숨을 쉴 때마다 폐부가 따끔거렸다. 상수는 떨리는 손으로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수만 번 반복해온 익숙한 동작이었건만, 오늘따라 손가락 마디마디가 남의 것처럼 낯설고 경직되어 있었다.그는 혜연을 위한 향기를 '처방'하기로 했다. 이것은 누군가에게 평가받기 위한 작품도, 시장의 논리에 따른 상업적 결과물도 아니었다. 오직 단 한 사람, 자책이라는 깊은 심해에서 산소 부족으로 허우적거리고 있을 혜연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위한 유일하고도 절박한 밧줄이었다.상수는 눈을 감고 혜연의 창백해진 안색을 그려보았다. 열에 들떠 거칠게 몰아쉬던 숨소리, 바짝 마른 입술, 그리고 마지막 순간 자신을 밀어내며 형언할 수 없는 슬픔으로 젖어있던 그 눈동자. 상수는 그 고통의 질감을 하나하나 향기로 치환해나갔다.'너무 강하면 안 돼. 지금 그녀의 모든 감각은 날 선 유리 조각처럼 예민해져 있을 테니까.'상수는 가장 먼저 베르가못 에센셜 오일을 꺼냈다. 갓 짜낸 귤껍질의 싱그러움과 이른 아침의 햇살을 농축해 담은 듯한 향. 그는 스포이드를 통해 단 세 방울만을 조심스럽게 떨어뜨렸다. 혜연이 고통 속에 눈을 떴을 때, 커튼이 처진 어두운 방 안이 아주 잠깐이라도 찰나의 빛으로 환해지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뒤이어 유칼립투스를 섞었다. 코끝을 톡 쏘는 청량함이 그녀의 막힌 폐부를 시원하게 뚫어주고, 혈관 속에 독처럼 쌓인 죄책감을 낱낱이 정화해주길 간절히 기도하며 방울 수를 세었다.베이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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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 향기의 처방전 #2

퇴근 후, 민지는 혜연의 자취방 문을 열고 들어섰다. 현관을 넘어서자마자 느껴지는 것은 비릿한 열기와 산소가 결핍된 정체된 공기였다. 혜연은 식은땀에 젖은 채 침대 위에 종잇장처럼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야, 박혜연. 정신 좀 들어? 나야, 민지."민지는 혜연의 타들어 가는 이마를 짚으며 혀를 찼다. 그리고 식탁 위에 상수가 맡긴 봉투들을 하나씩 거칠게, 하지만 속으로는 조심스럽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혜연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며 초점 없는 눈으로 민지를 바라봤다."민지야... 이게 다 뭐야? 편의점을 사 온 거야?""이거? 네 '프로젝트 파트너' 강 상수가 조공 바치고 가신 거다. 너 아프다니까 약국을 통째로 털어 오셨더라? 몸살약에, 목 감기약에, 무슨 열 패치는 제조사별로 다 사 왔어. 야, 너 입맛 없을까 봐 푸딩에 배 음료까지 사 온 거 봐. 이 정성이면 병이 안 낫는 게 기적이다."민지는 혜연의 침대 맡에 털썩 걸터앉아 상수의 봉투에서 약상자 하나를 툭 던지듯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너 아까 강 작가님 얼굴을 직접 봤어야 해. 로비에서 나 기다리는데, 무슨 대역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벌벌 떨고 있더라? 내가 집 주소 알려줄 테니까 제발 직접 가보라고 등 떠밀었더니, 자지러지면서 도망가더라니까. 네가 불편해할까 봐, 자기 얼굴 보면 네 열이 더 오를까 봐 겁나서 근처도 못 가겠대. 야, 박혜연. 너 대체 걔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애를 저렇게 쫄보로 만들어 놨냐?"혜연이 갈라진 목소리로, 쇳소리를 내며 힘겹게 물었다. "...그 사람, 정말 직접 왔었어?""말도 마. 이 무거운 걸 양손에 들고 그 핼쑥한 얼굴로 서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쳐다보더라. 근데 더 기가 막힌 건 뭔 줄 알아?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었더니 끝까지 '프로젝트 마무리가 중요한데 혜연 씨 역할이 크잖아요'라더라. 누가 봐도 '나 지금 당신 걱정돼서 죽을 것 같아요'라고 이마에 써 붙여놓고는, 끝까지 일 핑계 대면서 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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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 텍스트의 온도 #1

민지가 폭풍처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취방은 다시 깊은 고요에 잠겼다. 하지만 불과 몇 시간 전, 죽음 같은 공포와 오한이 지배하던 고요와는 그 질감이 전혀 달랐다. 끈적하고 불쾌하게 몸을 짓누르던 고열의 잔재 대신, 상수가 보내온 유칼립투스의 서늘한 청량함과 샌달우드의 묵직한 잔향이 방 안의 미세한 먼지들 사이사이에 촘촘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마치 상수가 방 안 어디에선가 숨죽여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로 생생한 향기였다.혜연은 민지가 반강제로 먹이고 간 죽 덕분인지, 아니면 머리맡에 성벽처럼 수북이 쌓인 약봉지들 덕분인지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이마에 붙인 쿨패치의 서늘함이 뇌 속까지 맑게 씻어내 주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몸의 회복보다 더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은 마음이었다. 혜연의 시선은 자꾸만 침대 시트 위,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던져진 휴대폰으로 향했다.검게 죽어 있는 액정 속에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말들이 가득 차 있는 듯했다. 혜연은 몇 번이나 전원 버튼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였다.'먼저 연락해도 될까? 상수 씨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혹시 나 때문에 아직도 작업실에서 자책하며 밤을 지새우고 있는 건 아닐까?'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식어버린 열기를 대신해 혜연의 뺨을 발갛게 물들였다. 마침내 결심한 듯 그녀가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켰다. 카카오톡 대화방 리스트 가장 상단에 자리 잡은 이름, [강상수 작가님].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는 토요일 밤, 그 비릿하고 차가운 빗줄기 속에서 멈춰 있었다. 혜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자판을 눌렀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마치 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혜연] 작가님, 민지한테 전해 들었어요. 보내주신 약이랑... 직접 만드신 향기,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정신이 좀 들어요.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혜연은 비명을 지르듯 휴대폰을 뒤집어 이불 속에 파묻어버렸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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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 텍스트의 온도 #2

무뚝뚝하고 정제된 단어만 쓰던 상수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는 어떤 미사여구보다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혜연은 당황해서 침대 위를 굴렀다. 발가락 끝이 오글거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혜연] (입력 중...) [혜연] 아... 당황해서 오타 났나 봐요. 창피해라. 잊어주세요.[상수] 아니요, 진짜 귀여워요. 혜연 씨 이런 모습 처음 봐서. 더 보고 싶네요. 상수는 자신이 내뱉은 말의 무게에 놀라 침대 위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너무 앞서 나간 건 아닐까, 아픈 사람에게 실례는 아닐까 걱정이 태산이었다. 하지만 혜연의 반응은 상상을 뛰어넘었다.[혜연] 저도... 작가님의 이런 모습 처음 봐요. 의외로 다정해서. 낯설면서도 좋아요.[상수] 아, 제가 실언했나요? 환자분 잠 못 자게 방해하는 것 같네. 이제 그만 주무세요. 혜연 씨 잠들 때까지 카톡 안 보낼게요.[혜연] 작가님은요? 안 잘 거예요?[상수] 전 조금만 더 정리하다 잘게요. 오늘 달이 너무 밝아서 잠이 안 오네요. 창밖을 계속 보게 돼요.[혜연] 저도 아까 달 봤어요. 작가님 덕분에. 같은 달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묘해요.[상수] 보고 싶네요. [혜연] (입력 중...)[상수] 아, 달이요. 달이 보고 싶다고요. 제가 문장을 생략했네요. [혜연] ㅋㅋㅋ 알아요. 저도요. 다음 날 아침.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살은 어제의 우울을 모두 씻어낸 듯 찬란했다. 혜연은 거짓말처럼 가벼워진 몸으로 눈을 떴다. 상수가 보낸 향기가 여전히 손목 끝에서 은은하게 맴돌며 그녀를 응원하고 있었다. 출근 준비를 하는 내내 혜연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어제보다 훨씬 생기 있어 보였다.[혜연] 작가님, 저 완쾌해서 출근 중이에요! 어제 진짜 잘 잤어요. 향기 덕분인가 봐요.[상수] (1초 만에 확인) 오, 정말요? 다행이다! 안 그래도 아침에 눈 뜨자마자 카톡 보낼까 말까 오백 번 고민 중이었는데. 혹시 깨울까 봐 참았어요. [혜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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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 고백의 잔해 #1

작업실의 공기는 기묘하게 정체되어 있었다. 상수는 소영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한 잔을 내려놓았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가 좋아하는 온도와 원두의 취향을 외우고 살았던 손길은 무의식적으로 정중했지만, 그 너머의 눈빛은 한없이 건조했다. 34살의 상수는 이제 더 이상 소영의 기색을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던 예전의 그 남자가 아니었다.딸랑거리는 얼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상수는 물끄러미 소영을 응시했다. 그녀는 예전과 다름없이 완벽하게 세팅된 모습이었으나, 상수의 눈에는 그 화려함 뒤에 가려진 불안이 보였다. 상수가 먼저 무겁게 입을 뗐다."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소영은 대답 대신 커피잔을 감싸 쥐지도 않은 채 상수의 작업실 구석구석을 오만한 시선으로 훑었다. 빈틈없이 정리된 시약병들과 은은한 베이스 노트의 향취가 낯설게 그녀를 압박했다. 그녀가 기억하던 강상수는 늘 낡은 후드티를 입고 꿈이라는 이름의 구름 위를 걷던 불안정한 남자였으나, 지금 눈앞의 상수는 자신의 세계를 견고하게 구축한 전문가의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그 낯선 괴리감이 소영의 자존심을 날카롭게 긁었다."혜연이랑 같이 일하는 사실 알고 수소문했어. 혜연이한테 물어봤는데, 프로젝트에 영향 있다고 끝까지 안 알려주더라고. 걔는 학생 때나 지금이나 과제니 일이니, 그런 거에 영향 있는 꼴은 죽어도 못 보나 봐. 친구보다 일이 먼저인 건 여전하더라고."소영의 목소리엔 혜연을 향한 미묘한 열등감과 질투가 섞여 있었다. 상수는 그 비아냥거림에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짧고 차갑게 본론으로 들어갔다."무슨 일이야? 네가 여기까지 직접 찾아올 정도로 우리가 할 말이 남았었나?""그냥. 지난번에 우연히 봐서 반갑기도 했고, 오빠 어떻게 사나 궁금하기도 해서 왔어. 생각보다... 사람답게 잘 지내는 것 같네?"상수는 픽, 짧은 실소를 흘렸다. 그 비웃음은 소영을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과거 그녀의 독설 한마디에 세상을 잃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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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 고백의 잔해 #2

하지만 소영이라는 거대한 과거를 완전히 도려내기 위해서는 가장 날카로운 진실의 칼날이 필요했다. 그것은 혜연을 방패 삼는 비겁함인 동시에, 자신을 돌이킬 수 없는 벼랑 끝으로 모는 결단이었다. 상수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작업실 가득 찬 유칼립투스의 잔향이 머리를 찌릿하게 울렸다.상수의 침묵에 소영은 불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설마… 아니지?”"맞아. 네가 생각하는 그 사람. 박혜연 씨.""......오빠 미쳤어?! 하, 진짜 어이가 없네? 걔가 누구인지 잊었어? 내 20년 지기 절친이야!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내 모든 걸 다 아는 애라고! 어쩜 나한테 이래? 혜연이도 알아? 둘이 이미 내 등 뒤에서 사귀기라도 하는 거야?"소영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향대 위의 유리병들을 잘게 울렸다. 8년의 세월을 바쳤던 남자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아니야. 혜연 씨는 몰라. 혜연 씨에게 난 여전히 이 프로젝트의 파트너이자, 네 전 남친이라는 불편한 꼬리표를 단 동행자일 뿐이야. 혜연 씨는 나를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아.""그래서, 짝사랑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강상수, 너 진짜 가엽다. 걔가 어떤 애인지 몰라? 박혜연은 완벽주의자야. 자기 커리어에 흠집 나는 거 제일 싫어한다고. 네가 고백하는 순간 걔는 너 경멸하면서 프로젝트 엎어버릴걸? 내 친구가 네 고백을 받고 감동할 거라 생각했어?"상수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니. 그냥 혼자만 좋아하고 말 거야. 혜연 씨에게 내 마음이 짐이 되게 할 순 없으니까. 아무도 모르게 무덤까지 가져갈 생각이었어. 그런데 너한테 지금 말하는 건, 정말 이젠 너한테 단 1퍼센트의 미련도 없다는 걸 확실히 말해주고 싶어서야. 네가 하자는 대로 휘둘리고, 네 기분 맞추려고 내 꿈까지 포기하던 예전의 강상수는 5년 전에 죽었어."소영은 숨이 막히는 듯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녀에게 상수의 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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