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카야를 빠져나와 올라탄 택시 안, 혜연은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서울의 야경이 비현실적인 잔상처럼 흩어졌다. 방금 전까지 마주했던 소영의 그 서늘한 눈빛."복숭아 향 밑에 깔린 이 무거운 나무 냄새, 이거 강상수가 옛날에 좋아하던 베이스 노트 같은데" 혼잣말처럼 던진 소영의 그 의문이 여전히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민지가 옆에서 필사적으로 "어제 혜연이가 밀폐된 조향실에서 밤새 샘플들을 확인해서 그렇다"고 방어막을 쳐주지 않았다면, 혜연은 그 자리에서 비명을 지르며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집으로 가야 한다는 이성은 이미 마비된 지 오래였다. 지금 혜연에게 필요한 것은 안락한 자신의 침대가 아니라, 자신을 파멸시키더라도 이 지독한 현실의 의심을 덮어줄 단 하나의 유일한 향기였다.“기사님,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혜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20년 우정의 무게와 직장인으로서 사회적 가면이 한꺼번에 벗겨져 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작업실 도어록 앞에 선 혜연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상수가 알려준 새 비밀번호. 0-3-2-0. 자신의 생일 네 자리를 누르는 순간, 혜연은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된 듯한 기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이 문 안쪽은 소영의 추궁도, 민지의 걱정도 닿지 않는 유일한 성역이었다.문이 닫히기도 전, 어둠 속에서 상수의 커다란 인영이 혜연을 덮쳐왔다. 상수는 아무 말 없이 혜연의 허리를 강하게 감싸 안았다.“...왔네요. 기다렸어요.”상수의 낮은 저음이 혜연의 귓가를 울렸다. 혜연은 대답 대신 상수의 멱살을 잡듯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평소라면 상수의 리드에 몸을 맡기고 수동적으로 반응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혜연은 소영 앞에서 연기하며 쌓인 수치심, 그리고 자신을 속여야만 했던 그 비참함을 상수의 품에 배설하듯 격렬하게 매달렸다.그녀의 손길은 평소보다 급했고, 거칠었다. 상수의 어깨를 움켜쥐는 손끝이 초조하게 떨
Last Updated : 2026-08-01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