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 Chapter 71 - Chapter 80

220 Chapters

71화 : 잔향의 거리 #1

육중한 철제 문이 완전히 열리고, 쏟아지는 외부의 형광등 빛이 두 사람의 망막을 찔렀다. 혜연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으며 상수의 가슴팍에 얼굴을 더 깊이 묻었다. 10층 높이의 고립감에서 해방되었다는 안도감보다, 지금 자신을 감싸고 있는 이 남자의 온기가 사라질까 봐 겁이 났다."괜찮으십니까? 다친 데는 없으세요?"현장 소장과 인부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상수는 혜연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천천히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혜연의 다리가 휘청거리자,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받쳐 들었다. 타인들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상수의 신경은 오로지 제 품 안에서 떨고 있는 혜연의 숨소리에만 쏠려 있었다."전 괜찮습니다. 여기 여자분이 충격이 좀 커서요. 잠시 안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혜연은 상수의 말을 경청하려 애썼지만, 사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전문 용어들은 어느 순간부터 배경음악처럼 흐릿해졌다. 상수는 혜연을 인근 벤치에 조심스럽게 앉히고는, 자신에게 다가온 현장 소장과 대화를 나누었다. 현장 소장이 연신 허리를 굽히며 사과를 늘어놓았다. 상수는 소장의 사과를 예의를 갖추어 대하고 있었다. 그의 예의 바른 모습이 방금 전 어둠 속에서 "미안하다"고 속삭이던 목소리와 겹쳐지며 혜연의 심장을 기묘하게 흔들었다.그 사이, 혜연은 떨리는 손으로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가 몇 통 와 있었다. 김 팀장이었다. 혜연은 호흡을 가다듬고 전화를 걸었다."네, 팀장님... 아, 네. 사고가 좀 있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엘리베이터에 잠깐 갇혔었거든요. 강작가님이랑 같이요. 아뇨, 다친 데는 없어요. 그냥 좀 놀란 정도라... 네?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네, 그럼 저 바로 퇴근해서 쉴게요. 월요일에 뵙겠습니다."김 팀장은 혜연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피로를 읽었는지, 사무실에 들르지 말고 바로 퇴근해 월요일까지 푹 쉬라는 배려를 건넸다. 통화를 마친 혜연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내려놓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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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 잔향의 거리 #2

혜연은 상수의 말을 경청하려 애썼지만, 사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전문 용어들은 어느 순간부터 배경음악처럼 흐릿해졌다. 대신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열정적으로 입술을 움직이며 조잘거리는 상수의 모습이었다.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이는 그의 갈색 눈동자, 향기의 비율을 설명할 때마다 섬세하게 움직이는 긴 손가락,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대해 말할 때 묻어나는 그 천진난만한 열의. 차가운 얼음 성벽 같던 남자가 오직 향기 이야기 하나에 아이처럼 들떠 있는 모습이 혜연에게는 그 어떤 세련된 유혹보다 강렬하게 다가왔다.'진짜... 이런 면이 있었네.'혜연은 턱을 괴고 옆으로 몸을 틀어 상수를 빤히 바라봤다. 상수는 그것도 모른 채 "아, 그리고 스트레스 완화에는 역시 로즈 제라늄이..."라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혜연의 시선은 상수의 매끄러운 콧날을 타고 내려와 그가 말할 때마다 달싹이는 입술에 머물렀다. 그가 설명하는 향기가 실제로 코끝에 닿는 착각이 들었다. 따뜻하고, 포근하며,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에 와 있는 듯한 향기. 혜연은 그 향기를 상수의 존재 자체에서 느끼고 있었다."상수씨.""네? 아, 제라늄 향이 너무 강할 것 같나요? 그럼 비율을 좀 조정해서..."상수가 혜연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다 멈칫했다. 혜연이 자신을 너무나 다정한, 그리고 깊은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수의 목소리가 작게 잦아들었다."왜... 왜 그렇게 보세요? 제가 너무 전문적인 이야기만 했나요?""그냥요. 작가님이 향기 이야기할 때, 되게 좋아 보여서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상수는 방금 전까지 하려던 '로즈 제라늄의 화학적 성분'에 대한 이야기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는 급히 핸들을 꽉 쥐고 전방을 주시했지만, 귀 끝까지 붉어진 모습은 숨길 수 없었다.혜연의 빌라 앞에 차가 멈췄다. 5시가 조금 넘은 시간, 노을이 지기 시작한 낡은 골목길에 상수의 검은색 세단이 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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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 지독한 잔향의 주말 #1

현장의 매캐한 먼지 냄새와 엘리베이터의 소름 끼치는 금속성 마찰음은 이제 현실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혜연의 좁은 자취방 안에는 여전히 상수가 남기고 간 '무언가'가 밀도 높게 들어차 있었다. 그것은 형태도 없고 무게도 없었으나, 혜연의 숨통을 기분 좋게, 그리고 아주 지독하게 조여왔다.금요일 밤 11시. 집으로 돌아온 혜연은 현관 전등조차 켜지 않은 채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신발도 벗지 못한 채 어둠 속에 잠긴 그녀의 실루엣은 마치 방전된 기계 같았다. 평소라면 현장 점검 보고서를 칼같이 작성하고 메일함의 안 읽은 메시지까지 모두 비웠을 그녀였다. '박혜연'이라는 이름 뒤에 붙은 '완벽주의자'라는 수식어는 그녀의 자부심이자 생존 전략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창밖 가로등 불빛이 거실 바닥에 길게 드리워졌고, 먼지가 소리 없이 내려앉는 정적 속에서 혜연은 가만히 자신의 손등을 만져보았다. 좁고 어두운 엘리베이터 안, 상수의 엄지손가락이 스치듯 쓸어내렸던 그 자리가 여전히 화끈거리는 착각이 들었다. 피부 위로 남은 그의 지문이 마치 낙인처럼 찍혀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상수 씨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집에 잘 들어갔을까?'혜연은 휴대폰을 들었다 놓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액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빛이 그녀의 퀭한 눈가를 비췄다. 평소의 그녀라면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월요일 회의 때 뵙겠습니다"라고 아주 공적이고 깔끔한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 그것은 파트너에 대한 예의이자, 선을 지키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묘한 기류 속에서는 그 간단한 문장조차 너무나 무거운 고백처럼 느껴졌다."이건 사고 후유증이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비슷한 거라고. 그러니까 자꾸 그때 같이 있던 사람이 떠오르는 거지, 다른 이유는 없어. 박혜연, 정신 차려. 너는 프로야."혜연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중얼거렸지만, 심장은 정직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상수의 체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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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 지독한 잔향의 주말 #2

오후 4시, 민지에게서 전화가 왔다."야, 박혜연. 너 오늘 뭐 해? 강 작가님이랑 프로젝트 때문에 죽어나는 거 아니지? 술이나 한잔할까?"혜연은 평소라면 반갑게 응했을 민지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아니, 나 오늘 좀 피곤해. 집에서 쉴래.""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왜 그래? 너 혹시... 강상수 씨랑 뭐 있냐?""뭐?! 그런 거 아니야! 끊어!"민지의 날카로운 직감이 무서워 혜연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찬물로 세수를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내일이면 다시 사무실에서 상수를 마주해야 한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어둠 속의 포옹은 사고였을 뿐이라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거울 속의 혜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은 더 이상 '사고 전'의 박혜연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밤 10시가 되자 작업실의 상수는 결심했다. 조향사가 향기로 말하듯, 남자로서도 정직하게 물어야 한다고. 그는 휴대폰을 쥐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렸다. 마치 폭탄의 안전핀을 뽑듯, 그는 눈을 감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상수]: 잘 쉬고 계신가요? 어제오늘, 계속 생각이 나서요.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상수는 휴대폰을 침대 밑으로 발로 차버렸다. '생각이 났다'는 말은 조향사로서의 이성적인 판단을 완전히 벗어난 발언이었다. 그것은 명백한 항복 선언이었다.한편, 혜연은 월요일 출근복을 다림질하고 있었다. 스팀다리미의 열기보다 그녀의 얼굴이 더 뜨거웠다. 그때, 책상 위에서 '카톡' 소리가 울렸다. 혜연은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휴대폰을 낚아챘다. 문장을 읽는 순간, 다리미를 든 그녀의 손이 굳어버렸다.[상수 작가님: 잘 쉬고 계신가요? 어제오늘, 계속 생각이 나서요.]'생각이 났다'는 그 직설적이고도 무거운 표현이 그녀의 완벽한 논리 체계를 박살 냈다. 혜연은 다리미를 얼른 내려놓고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혜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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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 월요일의 이상기류 #1

월요일 아침 8시 45분. 강남 한복판의 오피스 빌딩 로비는 지옥철에서 막 탈출한 직장인들의 출근 전쟁으로 아수라장이었다. 쏟아지는 인파와 신경질적인 구두 소리, 커피 향 섞인 한숨이 뒤섞인 그 혼잡한 풍경 속에서도 유독 이질적인 존재가 하나 있었다. 평소라면 전투복 같은 무채색 정장에 머리를 단 1mm의 오차도 없이 뒤로 넘겼을 '얼음 마녀' 박혜연 과장이었다.오늘의 혜연은 결정적으로 달랐다. 목선이 부드럽게 드러나는 살구빛 블라우스에 자연스럽게 어깨 위로 내린 머리칼,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얼굴에 서린 기이한 '훈풍'이 문제였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혜연은 입가에 자꾸만 번지는 미소를 황급히 지우려 애썼지만, 눈동자에 서린 생기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주말 내내 상수의 카톡 메시지를 곱씹으며 뒤척였던 흔적은 다행히 정성스러운 화장 아래 감춰져 있었다."어머, 박 과장? 오늘 무슨 날이야? 소개팅이라도 있어? 얼굴에서 아주 빛이 나네, 빛이 나!"옆에 서 있던 김 팀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팀 내에서 혜연을 '과장'이라 부르는 몇 안 되는 인물인 김 팀장은, 평소 독사 같은 업무 처리로 팀원들을 벌벌 떨게 하던 혜연의 이런 화사한 변화가 못내 신기하면서도 두려운 모양이었다."아, 네. 주말에 잠을 좀 잘 자서 그런가 봐요, 팀장님. 날씨도 좋고 해서 좀 가볍게 입어봤어요."혜연이 평소답지 않게 사근사근하고 나긋나긋하게 대답하자, 김 팀장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옆에 서 있던 민지를 돌아보았다."민지 과장, 봤어? 박 과장 저러는 거? 지난번 엘리베이터 사고 때 어디 머리를 크게 다쳤나... 사람이 아주 딴사람이 됐어. 저렇게 웃으면서 대답하니까 내가 결재 서류 내밀기가 더 무서워, 허허. 폭풍 전야 같은 거 아니야?"혜연의 입사 동기이자 유일한 '오피스 베프'인 김민지 과장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깊게 빨아 올리며 특유의 시니컬한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혜연의 블라우스 단추부터 귀걸이의 각도까지 스캔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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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 월요일의 이상기류 #2

오후 2시. 점심 식사 후 나른한 식곤증이 감돌던 사무실의 공기가 일순간 팽팽하게 당겨졌다. 자동문이 열리고, 낮고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안녕하세요. 수고 많으십니다."상수였다. 그는 평소보다 조금 더 짙은 네이비색 코트 깃을 세운 채 사무실로 들어섰다. 주말 동안 혜연을 향한 문자를 썼다 지우며 고뇌했던 흔적인지, 눈가에는 미세한 피로가 서려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정갈하게 정돈된 모습이었다.순간, 혜연은 완벽하게 '뚝딱이'가 되어버렸다. 마시려던 종이컵을 엎지를 뻔하고, 키보드 자판을 엉뚱하게 두드려 화면에 경고 창을 대여섯 개나 띄웠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애써 모니터 속 엑셀 숫자들만 노려보았다. '절대 먼저 아는 척하지 말자. 어제 그 카톡은 프로젝트를 위한 비즈니스였던 거야.'상수는 김 팀장과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혜연의 자리 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그림자가 혜연의 하얀 책상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혜연은 심장 소리가 상수의 귀에까지 들릴까 봐 숨을 참았다.상수는 회의실로 가는 길에 혜연의 자리 옆을 지나갔다. 그는 짐짓 무표정하게 정면을 보고 있었지만, 혜연의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선인장 화분 옆에 쪽지 한 장을 툭 떨어뜨리고 갔다.혜연이 가슴을 졸이며 펼친 쪽지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딱 한 줄이 적혀 있었다.[점심은 잘 챙겨 먹었나요? 안색이 어제보다 좋아 보여서 다행입니다.]지극히 평범한 안부 인사였지만, 혜연에게는 그 어떤 화려한 수식어보다 달콤하게 읽혔다. 그녀는 쪽지를 다이어리 깊숙한 곳에 숨기며, 자꾸만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볼 안쪽 살을 꽉 깨물어야 했다.회의실에서 팀장과 회의를 마친 상수는 다시 혜연의 자리로 다가왔다."혜연 씨, 일전에 말씀드린... 그 '블루밍' 프로젝트 수정 시안, 지금 바로 검토 가능할까요?"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정중한 호칭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혜연 씨'라는 발음이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혜연은 고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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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 초침이 머무는 자리 #1

월요일 오후 4시. 강남 한복판, 통유리로 둘러싸인 사무실은 거대한 기계 장치처럼 정교하고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전화벨 소리는 끊임없이 고막을 두드렸고, 복사기가 뱉어내는 매캐한 종이 냄새와 사람들의 날 선 타이핑 소리가 뒤섞여 공중에 부유했다. 하지만 그 소란스러운 풍경 한가운데 위치한 제1회의실만은 예외였다.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바깥세상은 4배속 재생을 한 것처럼 분주했지만, 회의실 안의 공기는 점성이 강한 꿀 속에 잠긴 듯 끈적이고 무거웠다. 그 정적을 깬 것은 김 팀장의 넌스레 섞인 목소리였다.“아니, 강 작가님. 이번 ‘블루밍’ 프로젝트 시안 말이야. 이거 아주 물건인데? 우리 박 과장이 원래는 내가 결재 서류만 가져가도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던 사람인데, 요즘은 아주 봄날의 햇살이야. 이거 다 지난번 엘리베이터 사고 때 작가님이 심폐소생술이라도 제대로 해준 덕분인가? 사람이 아주 딴사람이 됐어, 허허!”김 팀장의 농담에 혜연은 애써 펜대를 굴리며 무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옆자리에 앉은 민지는 이미 사냥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민지는 들고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빨대를 소리 나게 빨아 올린 뒤, 툭 던지듯 말을 얹었다.“팀장님, 그건 단순한 심폐소생술이 아니죠. ‘호흡의 공유’ 같은 거랄까? 작가님, 안 그래요? 두 분 사고 이후로 업무 협조가 광섬유급이던데. 이게 순수한 업무 열정인지, 아니면 폐쇄된 공간에서 발효된 사적인 잔향인지 내 코가 아주 근질근질하네요.”민지의 날카로운 직격타에 상수는 찻잔을 들다 말고 멈칫했다. 상수는 평소처럼 정갈한 목소리로 답하려 했으나, 찰나의 순간 그가 내뱉은 단어는 회의실의 공기를 단숨에 얼려버렸다.“글쎄요. 저는 그저 우리 혜연 씨가…… 아니, 박 과장님이 워낙 섬세하게 챙겨주셔서 결과가 잘 나온 것 같습니다.”순간, 정적이 흘렀다. 상수는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입술을 굳게 다물었지만, 이미 뱉어낸 ‘우리 혜연 씨’라는 다정한 음절은 공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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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 초침이 머무는 자리 #2

그때부터였다. 혜연에게 이 공간의 시간이 기묘하게 뒤틀리기 시작한 것은. 유리벽 너머 사무실 직원들은 여전히 배속 재생을 한 것처럼 소란스럽게 움직였다.누군가는 전화기를 붙잡고 소리를 질렀고, 누군가는 서류 뭉치를 들고 뛰어다녔다. 하지만 그 모든 소음은 두꺼운 유리벽에 부딪혀 혜연의 세계로 진입하지 못했다. 혜연에게 이 공간의 시간은 마치 점성이 강한 늪 속에 던져진 금속 초침처럼 느릿하게 움직였다.혜연은 노트북 우측 하단의 시계를 보았다. 4시 40분. 아까 확인했을 때도 분명 4시 40분이었다. 시계 바늘이 1분을 이동하기 위해 억겁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것만 같았다. 1초라는 물리적 단위가 이토록 잔인하게 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처음 알았다. 상수의 숨소리가 들릴 때마다 공간의 밀도가 달라지는 기분이었다.‘시간이…… 나를 벌하고 있는 걸까.’아니었다. 고장 난 것은 시간이 아니라 혜연의 감각이었다. 퇴근 후에 그와 단둘이 마주 앉아 ‘향기 이야기’를 마저 하겠다는 그 무언의 약속이, 현실의 물리적인 시간을 강제로 늘려놓고 있었다. 기다림은 미학적일 만큼 지독했다. 상수가 조향 노트를 넘기는 ‘스윽’ 하는 마찰음은 영겁의 시간 동안 들리는 듯했고, 그가 내뱉는 낮은 숨소리는 공간 전체를 장악하는 거대한 파동이 되었다. 혜연은 제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상수에게 들릴까 봐 자꾸만 헛기침을 삼켰다.창가로 스며든 오후의 햇살이 먼지 입자를 투과하며 두 사람 사이의 허공을 갈랐다. 그 빛의 각도가 아주 미세하게 기울어지는 과정이 혜연의 눈에는 선명한 궤적으로 읽혔다. 상수의 셔츠 깃이 움직이는 찰나, 펜을 쥔 그의 손가락 마디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 그리고 자신을 향해 아주 천천히 돌아오는 그의 눈동자. 그 모든 것이 혜연의 감각 세포 하나하나에 고해상도 슬로우 모션으로 각인되었다.상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혜연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횟수를 셀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묘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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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 예상치 못한 잔향 #1

회의실의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무실의 풍경이 보였지만, 안쪽의 공기는 완전히 차단된 다른 행성 같았다. 상수는 조향대 대신 회의 탁자 위에 각종 향료 샘플과 기획안, 시향지들을 어지럽게 늘어놓았고, 혜연은 그 옆에서 수정된 예산안과 공간 도면을 검토하고 있었다.겉으로는 지극히 사무적이고 건조한 풍경이었으나, 두 사람 사이를 흐르는 공기는 입자가 굵은 모래알처럼 까슬거리고 뜨거웠다. 혜연이 도면을 넘길 때마다 발생하는 미세한 바람에도 상수의 짙은 우디 향이 섞여 들었고, 상수가 펜을 내려놓는 작은 소리에도 혜연의 어깨는 미세하게 움찔거렸다.중간중간 민지 과장이 결재 서류를 핑계로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에게서 한 뼘씩 거리를 두었다. 민지는 쟁반 위에 커피와 간식을 내어놓으며 두 사람 사이의 묘한 정적을 유심히 살폈다. 혜연은 괜히 잉크도 나오지 않는 펜대를 만지작거리며 모니터만 응시했고, 상수는 무언가 골똘히 메모하는 척 고개를 숙였다."자, 여기 당 충전 좀 하시고! 두 분, 회의실 에어컨이 고장 났나? 왜 이렇게 공기가 뜨거워요? 밖은 추워 죽겠는데 여기만 한여름이네."민지가 툭 던진 말에 혜연의 목덜미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민지는 상수의 옆자리에 살짝 엉덩이를 걸치고는, 혜연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상수 씨, 우리 혜연 과장 어때요? 일할 땐 정말 날 선 칼 같은 사람인데, 요즘 보면 그 칼날이 좀 무뎌진 것 같아서요. 전보다 훨씬...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달까? 작가님이 보시기에도 박 과장님 분위기 좀 달라진 거 느껴지시죠?"민지의 질문은 노골적이지 않았지만, 그 은근한 관찰이 오히려 두 사람의 숨을 막히게 했다. 상수는 당황한 기색을 지우려 식어버린 찻잔을 만지작거리다 나지막이 입을 뗐다."글쎄요... 전 혜연 씨가 늘 최선을 다해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분위기라면... 프로젝트에 대한 애정 때문 아닐까요?""애정이라... 좋네요, 그 단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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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 예상치 못한 잔향 #2

상수는 진열대 가장 높은 곳에 놓인 작은 청색 병 하나를 가리켰다."저게 이번에 들어온 침향 베이스예요. 혜연 씨가 한번 향을 봐줄래요?"상수가 혜연의 등 뒤에서 손을 뻗었다. 그의 팔이 혜연의 어깨를 감싸는 듯한 자세가 되었다. 혜연은 마치 상수의 품 안에 완전히 갇힌 것 같은 기분에 숨을 죽였다. 상수의 셔츠 깃에서 풍기는 정갈한 세제 향과, 그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체취가 가게 안의 묵직한 향료 냄새와 섞여 혜연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혜연은 떨리는 손으로 병을 받아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상수의 코끝에 조심스럽게 가져다주었다."어때요...?"향을 맡기 위해 상수가 고개를 숙였고, 두 사람의 얼굴 거리는 한 뼘도 채 되지 않았다. 상수의 긴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상수는 향을 맡는 대신, 혜연의 눈동자를 아주 오랫동안 응시했다."좋네요.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선명해요."그가 말하는 것이 침향의 향기인지,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의 공기인지 알 수 없었다. 혜연은 병을 쥔 손가락 끝이 저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좁은 가게 안의 정적은 수백 가지 향기보다 더 짙게 두 사람을 옭아매고 있었다. 재료를 사고 나온 두 사람은 노을이 지기 시작한 골목길을 나란히 걸었다. 혜연이 어릴 적 뛰어놀던 오래된 초등학교 담벼락을 지날 때, 상수는 혜연의 느린 보폭에 맞춰 아주 천천히 발을 옮겼다."여기서 살았을 때 혜연 씨는 어떤 아이였나요?"혜연은 발끝으로 돌멩이를 툭 차며 미소 지었다."그냥... 고집 센 꼬마였죠.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저 담벼락도 매일 기어오르다 무릎이 성할 날이 없었어요.""지금이랑 똑같네요. 목표가 생기면 무섭게 돌진하는 것도, 상처 입으면서도 멈추지 않는 것도."상수가 멈춰 서서 혜연을 바라봤다. 담벼락 너머로 핀 이름 모를 분홍빛 꽃들이 바람에 흔들렸고, 그 꽃잎 하나가 혜연의 머리카락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상수는 망설임 없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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