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 Chapter 61 - Chapter 70

220 Chapters

61화 : 엇갈린 선 #1

눈을 뜨자마자 느껴지는 건 지독한 적막이었다. 독립한 지 3년, 이 정적에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오늘따라 오피스텔의 흰 벽지가 유독 차갑게 살을 파고들었다. 어젯밤, 상수가 준 숙면 향수를 베개 끝에 한 방울 떨어뜨린 덕분에 깊은 잠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깨어난 뒤의 마음은 진흙탕을 걸어온 듯 무거웠다.'내가 너무 날이 서 있었지.'혜연은 화장대 앞에 앉아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며 거울 속 자신을 가만히 응시했다. 지난 주말, 본가 근처에서 상수를 마주쳤을 때 내뱉었던 차가운 거절들이 가시처럼 가슴에 박혀 있었다. 그는 그저 걱정했을 뿐인데, 마치 죄를 짓다 들킨 사람처럼 그를 밀어냈던 제 모습이 못내 미안했다. 오늘은 프로젝트 '블루밍'의 핵심 클라이언트와 오찬 미팅이 있는 날. 혜연은 입술을 굳게 다물며 다짐했다. '오늘은 적당히 예의를 갖추자. 선만 넘지 않으면, 굳이 그에게 상처 줄 필요는 없으니까.'같은 시각, 상수는 작업실에서 미팅에 사용할 향료 샘플들을 챙기고 있었다. 평소 무던하던 그의 손길이 오늘따라 유독 신중했다.'내가 너무 앞서갔구나.'상수는 혜연이 그어놓은 선을 떠올렸다. 그녀가 느꼈을 불편함과 당혹감을 뒤늦게 곱씹으며, 상수는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혜연 씨가 원치 않는다면, 철저히 파트너로서의 자리만 지키자고.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라고 생각하며, 상수는 덤덤하게 셔츠 단추를 채웠다. 거울 속 상수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두 사람은 미팅 장소인 호텔 식당 로비에서 마주쳤다. 혜연이 먼저 미안함 섞인 목례를 건네려던 찰나, 상수가 한발 앞서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오셨습니까, 혜연 씨. 들어가시죠."늘 부르던 호칭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온도가 180도 달라져 있었다. 이전의 '혜연 씨'가 다정하고 뭉근한 잔향을 남겼다면, 오늘의 목소리는 잘 마른 서류 봉투처럼 건조하고 딱딱했다. 혜연은 순간 발걸음을 멈칫했다. 상수의 눈빛은 이전보다 서늘했고,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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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 엇갈린 선 #2

같은 시각, 혜연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동네의 한 거실. 20년 지기인 혜연 엄마와 소영 엄마가 마주 앉아 과일을 깎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오늘 화제의 시작은 소영 엄마였다."아니, 언니! 내 말 좀 들어봐."소영 엄마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눈을 반짝였다."내가 며칠 전에 우리 동네 카페 근처를 지나가는데 말이야. 글쎄, 혜연이가 웬 젊은 청년이랑 카페에 있더라고. 혜연이는 안에서 차 마시고 있고, 그 청년은 막 나오는데... 어머! 뒷모습만 봐도 키가 훤칠하니 아주 인물이 훤하더라니까?""어머, 진짜? 우리 혜연이가 누구랑?"혜연 모가 눈을 크게 뜨며 반색했다."나야 뭐 길 건너라 멀어서 대화는 못 해봤지. 근데 그 청년이 카페 문을 열고 나오는데, 뒷모습만 봐도 아주 듬직해. 훤칠하고 키도 크더라고. 요즘 애들 같지 않게 풍채가 좋아서 눈에 확 띄더라고."혜연 모는 신이 나서 말을 보탰다. "아유, 그 조향사 청년인가 보네! 나도 지난번에 마주쳤는데 사람이 아주 무던하고 진국이더라고.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혜연이가 통 말을 안 하네."하지만 소영 엄마의 표정은 어딘가 묘하게 일그러졌다. 상수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느꼈던 그 지독한 기시감. 8년 동안 제 사위처럼 보아왔던 그 익숙한 실루엣이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조향사라... 소영이 만날 때 그 친구도 회사 퇴사하고 나서 조향사 한다고 안 했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 듬직한 어깨와 특유의 무던한 걸음걸이가 자꾸만 소영의 전 남친을 떠올리게 했다.그날 밤, 소영의 집. 소영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소영 모가 방 안으로 쓱 들어와 앉으며 전화를 걸었다."소영아, 너 혜연이가 요새 같이 일한다는 그 조향사 말이야... 혹시 그... 누구냐. 네 전에 만나던... 그래. 강상수, 걔 아니니?"소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올 것이 왔다는 직감이 들었다."엄마, 그걸 어떻게 알았어?""오늘 혜연 엄마랑 얘기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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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 잔향의 역습 #1

눈을 뜨자마자 손을 뻗어 확인한 휴대폰 액정에는 아무런 알람도 떠 있지 않았다.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시간쯤이면 '좋은 아침이에요', '출근길 조심해요' 같은, 무던하지만 다정한 상수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곤 했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던진 말들—"작가님과 저 사이엔 선이 필요해요", "부담스러워요"—은 상수를 완벽하게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는 내 요청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치 정교하게 세팅된 기계처럼 수행하고 있었다.화장대 앞에 앉아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며 혜연은 거울 속 자신을 가만히 응시했다. 상수가 준 숙면 향수 덕분에 잠은 깊게 잤지만, 깨어난 뒤의 마음은 오히려 그 향기의 무게만큼 무거웠다.'내가 원한 거잖아. 이게 맞는 거잖아.'혜연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평소보다 더 짙은 메이크업으로 창백한 안색을 감췄다. 어제 클라이언트 미팅에서 보여준 그의 유능하고 정중한 태도를 떠올리며, 오늘은 그에게 사과하고 다시 '건강한 파트너'로 돌아가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 다짐은 회사 로비를 밟는 순간부터 산산조각이 났다.사무실의 공기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모든 것이 혜연을 비껴갔다. 오전 내내 상수는 혜연의 사무실을 방문하지 않았다. 프로젝트 '블루밍'의 세부 조율을 위해 그가 들를 법한 시간이었지만, 상수는 대신 팀장님과 직접 통화를 하거나 민지에게 메신저로 자료를 보냈다."어? 혜연아, 강 작가님 방금 다녀가셨는데. 너 잠깐 탕비실 갔을 때."자리로 돌아온 혜연에게 민지가 커피 잔을 들며 툭 던진 말에 혜연은 서류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방금? 나 방금 나갔는데. 나한테는 연락 없으셨어?""그러게. 팀장님이랑 안쪽 회의실에서 한참 얘기 나누시더라고. 그러더니 나한테 오셔서 이번 주 샘플 리스트만 전달해달라고 하시더라. 엄청 바빠 보이시던데? 너한테는 따로 메일로 남겨두겠다고 하셨어."민지의 말은 혜연의 가슴에 납덩이를 매단 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상수는 혜연의 동선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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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 잔향의 역습 #2

혜연은 소영의 말을 들으며 맥주만 들이켰다. 소영이 아는 '지루하고 피곤한 전 남친'과 자신이 아는 '서늘하고 깊은 향을 풍기는 파트너'. 그 사이의 간극이 혜연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모르는 상수의 8년을 소영은 너무나 가볍게 부정하고 있었고, 그 부정당한 시간조차 혜연은 질투하고 있었다. 맥주집을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길.가로등 불빛 아래 상수의 모습이 보였다. 김 팀장과 길었던 미팅을 끝내고 팀장과 김민지과장과 함께 건물 밖으로 나오던 길이었다. 상수의 걸음이 멈췄다. 그의 시선이 혜연을 지나 옆에 선 소영에게 닿았다. 5년 만의 공식적인 재회였다."......오랜만이네. 상수 오빠."소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빠'라는 호칭이 공기 중에 흩어질 때, 혜연은 심장이 죄어드는 통증을 느꼈다. 상수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은 소영이 말했던 '우유부단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하게 정제된 타인을 대하는 선명한 거절의 시간이었다."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소영아."상수의 입에서 나온 '소영아'라는 이름. 그 다정한 호칭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눈빛은 지독하리만치 건조했다. 상수는 소영에게 한 걸음도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타인에게 건네는 예우를 갖춘 목례를 보냈을 뿐이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혜연을 바라봤다. 상수는 혜연에게 짧게 고개만 까닥하고는, 마치 낯선 행인을 지나치듯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그가 스쳐 지나갈 때, 차가운 샌달우드 향이 혜연의 뺨을 스쳤다. 상수가 떠난 뒤, 두 여자 사이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소영은 상수가 사라진 어둠 속을 한참이나 멍하니 응시하다 낮게 읊조렸다."분위기가... 너무 낯설네. 네 말을 듣고 사람이 좀 바뀐 거 같다 생각은 했지만, 막상 직접 보니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네."소영의 목소리엔 당혹감을 넘어선 생경한 상실감이 서려 있었다. 8년이라는 세월 동안 자신이 완벽하게 통제하고 이해한다고 믿었던 '강상수'라는 세계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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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 선명해지는 경계 #1

어둠 속에 잠긴 방 안, 휴대폰 액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빛이 혜연의 창백한 얼굴을 비췄다. 소영에게서 온 카톡은 혜연의 예상을 비웃듯 경쾌하고도 잔인하게 이어졌다.[혜연아, 아까 상수 오빠 보니까... 예전이랑 많이 다르더라. 나 왜 자꾸 마음이 뒤숭숭하지? 다시 연락해 봐도 될까?]혜연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자판을 눌렀다. 한 글자 한 글자가 가시 돋친 듯 무거웠다.[혜연]: 그때 그 소개팅한 분이랑은 잘 안된 거야?[소영]: 아니. 아직 잘 만나긴 하지.[혜연]: 그런데 상수 씨한테 연락한다고? 그분 정리하게?[소영]: 아니. 뭐 어차피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굳이 뭘 그래.혜연은 답을 차마 보내지 못한 채 멈췄다. 상수가 소영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취급받는 것에 대한 분노인지, 아니면 상수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침범당하는 것에 대한 공포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소영의 다음 메시지는 혜연의 인내심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소영]: 그냥 예전의 향수도 다시 불러일으키면서도 바뀐 상수 오빠가 궁금하기도 하고. 게다가 나 지금 술도 한잔했고... 전남친에게 연락은 약간 국룰 아냐? 하하하하![혜연]: 그건 두 분 모두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보낸 메시지였다. 하지만 돌아온 소영의 반응은 가볍기 그지없었다.[소영]: 에이~ 뭘 또 그렇게 진지하게 그래. 그냥 농담으로 말한 거야.[혜연]: 아 그렇구나. 혼자 괜히 진지했네.[소영]: 근데 상수 오빠가 궁금한 건 맞아.그 마지막 문장으로 대화는 끝났다. 혜연은 차마 그 문장에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궁금하다'는 그 흔하고 가벼운 단어가 혜연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았다. 8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냈으면서도 상수의 진면목을 '지루함'으로 치부했던 소영이, 이제 와서 그가 뿜어내는 낯선 향기에 매료되어 손을 뻗으려 하고 있었다.혜연은 휴대폰을 엎어버리고 침대에 몸을 묻었다. 혜연은 자신의 마음이 이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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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 선명해지는 경계 #2

혜연은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오직 업무에 대해서만 쏟아내기 시작했다."3차 샘플 피드백입니다. 우디 계열의 잔향이 너무 강해서 탑 노트의 싱그러움이 죽는다는 의견이 많아요. 그리고 패키지 시안도 확인하셔야..."상수는 혜연의 말을 끊지 않고 경청했다. 노트 위에 꼼꼼하게 메모를 남기는 그의 손길은 지독하게도 사무적이었다.약 20분간의 업무 이야기가 끝났다. 서류를 다시 가방에 넣는 혜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상수는 펜을 내려놓으며 짧게 목례했다."잘 알겠습니다. 수정안은 내일 오전 중으로 메일 발송하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그게 끝이었다.다시 '메일'이라는 단어로 선을 긋는 그의 태도에 혜연의 인내심이 임계점을 넘었다."상수 씨. 왜 저를 피하세요?"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상수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 채 덤덤하게 답했다."피한다기보단, 혜연 씨가 원하신 대로 '공적인 파트너'로서의 예의를 다하고 있을 뿐입니다.""제가 바란 건 저를 피하고 없는 사람 취급하라는 게 아니잖아요."혜연의 목소리에 물기가 맺혔다. 상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혜연을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엔 일렁이는 감정이 없었다. 그저 깊은 정적뿐이었다."혜연 씨가 저에게 '불편하다'고 하셨을 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 다정함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혜연 씨가 그어둔 선 밖으로 물러난 것뿐입니다."상수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그것은 혜연이 어제 그에게 던졌던 거절에 대한 가장 충실한 답변이었다. "그 배려, 지금 저한테는 고문 같아요. 제가 선을 지켜 달라 한 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저를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달란 건 아니었단 말이에요."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상수는 대답 대신 혜연의 시선을 피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숨 막히게 무거워지던 그때였다. 상수의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 진동이 정적을 깼다.징- 징-작업실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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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 폭풍전야 #1

회의실의 공기는 정오의 햇살 아래서도 기이할 정도로 서늘했다. 혜연은 일부러 상수의 시선이 비껴가는 대각선 끝자리에 앉아 태블릿 PC의 하얀 화면만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상수는 평소보다 더 꼿꼿한 자세로 서류를 넘기며, 혜연의 존재를 지워버린 듯 오로지 수치와 텍스트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베이스 노트를 조금 더 정제해서, 잔향이 너무 무겁지 않게... 이 부분 수정 가능할까요?"혜연의 목소리는 메마른 낙엽처럼 건조했다. 상수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만년필 끝을 놀렸다. 사각거리는 종이 소리가 정적을 찢는 비명처럼 들렸다. 상수의 손등 위로 툭 튀어나온 뼈마디가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혜연은 그 손마디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돌렸다."네. 수정하겠습니다. 패키징 폰트 크기는 이대로 확정이죠?""네. 더 수정할 거 없으면 일어나겠습니다."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날카로운 얼음 파편 같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김 팀장은 들고 있던 종이컵이 구겨질 정도로 긴장한 채 민지의 눈치만 살폈다."어우... 김과장. 나만 추워? 여기 에어컨 누가 18도로 맞췄나?"민지가 입모양으로 쏘아붙였다."팀장님, 제발 눈치 좀 챙기세요. 지금 저 두 분 기싸움에 사무실 결로 현상 생기게 생겼잖아요."상수는 대답 대신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혜연 역시 "수고하셨습니다"라는 한 마디를 허공에 던지듯 내뱉고는 도망치듯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복도를 걸어가는 상수의 뒷모습이 멀어질수록 혜연의 가슴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이 차올랐다.시간은 지독하게도 느리게 흘렀다. 회의가 끝난 직후부터 시작된 야근의 굴레 속에서 혜연은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다. 상수의 향기가 배어든 어제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그녀는 스스로를 서류의 산속에 파묻었다. 저녁 식사 시간도 잊은 채 모니터만 노려보는 혜연의 등 뒤로 민지의 안쓰러운 시선이 꽂혔지만, 혜연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순간 상수의 그 서늘한 눈빛이 다시 떠오를 것 같았으니까.같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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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 폭풍전야 #2

다음 날 오전, 혜연은 블루밍 현장을 찾았다. 공사 소음과 자재 냄새가 진동하는 현장 한복판에서, 그녀는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마주했다."어... 상수 씨?"집기 위치를 확인하던 상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혜연만큼이나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혜연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어제 야근의 피로가 묻어나는 얼굴이 그에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였다.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질 틈도 없이 상수의 시선이 혜연에게 꽂혔다.상수는 멈춰 선 혜연을 보며 숨을 참았다. 그녀의 눈가에 맺힌 피로와 살짝 튼 입술이 칼날처럼 가슴을 후볐다. 어제 그렇게 차갑게 밀어냈으면서, 정작 마주하니 달려가 붙잡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그는 대신 들고 있던 줄자를 꽉 쥐었다. 금속의 서늘한 감촉이 손바닥을 파고들 때마다 그는 이성을 붙잡았다."일찍 오셨네요."상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혜연 역시 어제 작업실에서의 그 격정적인 대치를 떠올리며 얼굴이 화끈거렸다."예... 동선 체크 좀 미리 하려고요. 작가님도... 직접 오실 줄은 몰랐네요.""중요한 현장이니까요."두 사람은 짧은 공무적인 대화만 나누고 서둘러 각자의 업무로 흩어졌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기는 점차 밀도가 높아졌다. 혜연은 벽면에 시안을 대보면서도 상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온몸의 감각으로 쫓고 있었다. 상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발소리, 옷깃이 스치는 미세한 소리까지도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한 시간 뒤, 대략적인 점검을 마친 두 사람이 우연히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아직 정식 가동 전인 화물용 엘리베이터였다. 상수가 먼저 버튼을 눌렀고, 혜연은 주저하다 그 뒤를 따랐다.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이 억겁의 세월처럼 느껴졌다. 혜연은 자신의 구두 끝만 내려다보았고, 상수는 층수 표시판의 빨간 숫자를 뚫어지게 응시했다.'왜 하필 지금 같이 있는 거지.'상수는 미칠 것 같았다. 옆에 서 있는 혜연에게서 느껴지는 미세한 온기가 그를 자극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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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 틈새로 스며든 진심 #1

암흑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덜컥거리는 기괴한 금속음과 함께 멈춰 선 엘리베이터 안에는 오직 비상등의 희미한 주황색 불빛만이 유령처럼 떠돌았다. 방금까지 혜연을 지탱하던 상수의 단단한 팔에 묵직한 힘이 들어갔다. 폐쇄된 사각형의 공간, 서로의 심장 박동이 옷감을 뚫고 고스란히 전해지는 거리. 혜연은 상수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금방이라도 바닥이 꺼져 내릴 것 같은 공포가 발끝에서부터 차갑게 올라와 전신을 휘감았다."미안해요. 이런 상황까지 오게 해서."상수의 낮은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 한마디는 혜연이 밤새 독하게 쌓아 올린 방어벽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고립되었다는 근원적인 공포에, 그동안 상수의 차가운 외면 때문에 속으로 곪아 터졌던 서러움이 일순간에 터져 나왔다."흐으... 윽... 으앙! 흐어어..."혜연의 어깨가 크게 들썩이며 아이 같은 울음소리가 좁은 철제 상자를 가득 채웠다. 상수는 당황했다. 조향대 앞에서는 수만 가지 향료의 미세한 함량 차이도 귀신같이 읽어내던 그였지만, 품 안에서 서럽게 무너져 내리는 여자의 눈물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혜연을 안은 팔을 어찌할 바 몰라 공중에서 잠시 멈칫거리다, 이내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등을 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토닥이기 시작했다."저... 울지 마세요.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사실... 이게 다 제 탓이에요.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혜연은 대답 대신 그의 셔츠 깃을 더 꽉 쥐고 울음을 쏟아냈다. 상수는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를 달래기 위해 횡설수설 아무 말이나 내뱉기 시작했다. 평소의 논리 정연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그러니까... 제가 굳이 이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타자고 해서 그렇습니다. 그냥 계단으로 가자고 할걸. 10층 정도는 운동 삼아 걸어 올라가는 게 제 평소 지론인데 오늘따라 제가 게으름을 피웠네요. 아니면... 아, 제가 오늘 아침에 밥을 너무 많이 먹었나 봐요. 어제 잠을 못 자서 허기가 지길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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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 틈새로 스며든 진심 #2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멈춘 엘리베이터 바닥에 등을 기대고 나란히 주저앉았다. 상수는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내면을 한 꺼풀 더 벗겨냈다."사실... 전 되게 수동적인 사람이에요. 지금도 그렇고, 살아오면서 늘 그랬어요. 누군가 정해준 길을 걷거나, 시키는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것만이 제가 아는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죠. 감정도 그래요. 먼저 다가가는 법을 몰라서, 상대가 멀어지면 그저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만 보는 게 전부였거든요. 소영이 때도 그랬고... 전 늘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기만 하는 겁쟁이였던 것 같아요."혜연은 그의 고백에 가슴 한구석이 찡해졌다. 늘 당당하고 주도적이었던 그가 가진 의외의 결핍. 상수가 풍기는 그 깊은 향기 뒤에 숨겨진 외로움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그건 수동적인 게 아니라, 신중한 거 아닐까요? 작가님은 상대의 속도에 맞춰주려고 묵묵히 기다리는 거잖아요. 전 그게 작가님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향을 다룰 때처럼, 사람을 대할 때도 함부로 침범하지 않고 그 고유의 영역을 존중해주시는 거니까요. 전 그 배려가... 정말 좋았거든요. 그래서 자꾸 기대고 싶었나 봐요."상수는 예상치 못한 혜연의 해석에 숨을 멈췄다. 평생 자신을 갉아먹던 콤플렉스가 그녀의 입술을 통해 '가장 아름다운 존중'이라는 근사한 옷을 입고 돌아왔다. 상수는 어둠 속에서 혜연의 손을 잡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혜연 역시 잠시 망설이다 자신의 비밀스러운 민낯을 꺼내 보였다."누구나 자신이 싫어하는 모습이 있는 거잖아요. 전 사실... 늘 밝은 척하지만, 실은 타인의 시선에 병적으로 예민해요. 누군가 나를 싫어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그래서 자꾸 오버해서 웃고 떠들죠. 그 시선이 무서워서 늘 실수 없는 모범생으로만 살아왔어요. 늘 착하고, 공부 잘하고.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좋은 길을 그대로 따라 걸어왔고, 지금도 걷고 있죠. 그게 가끔은 제 영혼을 너무 소모하게 만들어요. 어제도 작가님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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