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 Chapter 91 - Chapter 100

220 Chapters

91화 : 고백의 잔해 #3

소영의 마지막 말이 독화살이 되어 상수의 심장에 박혔다. '혜연이는 너 경멸할 거야.' '나 때문에 억지로 참아주는 거야.' 그 말들은 상수가 가장 두려워하던 내면의 공포와 정확히 일치했다. 만약 혜연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친구의 전 남친이 자신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혜연의 표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상수는 구역질이 났다.그녀에게 자신의 진심은 이제 위로가 아닌 '민폐'였고, 사랑은 '오물'이었다. 혜연이 가진 고결함과 완벽한 일상에 자신이 이 지저분한 삼각관계의 진흙을 튀기고 있었다. 상수는 작업실 벽에 걸린 혜연과 함께 찍은 프로젝트 스케줄표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방금 전까지 혜연과 나눴던 달콤한 카톡 대화창을 열어보았다.[혜연: 저도 기분 개좋음요! 이따 작업실에서 봐요. 맛있는 거 사갈게요.]화면 속 혜연은 저렇게 맑게 웃으며 자신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 깨끗한 웃음에 방금 소영과의 대화에서 튄 더러운 파편들을 묻힐 수는 없었다. 지금 이 떨리는 손으로 그녀를 맞이하고, 그녀가 가져온 음식을 먹으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을 자격이 자신에게는 없었다. 상수는 자신이 혜연의 빛을 갉아먹는 어두운 그림자처럼 느껴졌다.상수의 손가락이 미친 듯이 떨렸다. 혜연을 보고 싶은 갈망과, 그녀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공포가 격렬하게 충돌하며 뇌를 헤집었다. 혜연의 발소리가 복도 끝에서 들려올 것만 같은 환청에 상수는 비명을 지르듯 휴대폰을 낚아챘다. 결국 그는 가장 비겁하고도 유일한 선택지를 골랐다.[혜연 씨, 정말 미안해요. 갑자기 다른 업체와 급한 미팅이 잡혀서 지금 당장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오늘 작업실 오시기로 한 건 취소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미안해요. 다음에 연락드릴게요.]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상수는 휴대폰을 책상 밑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불도 켜지 않은 채 조향대 앞 어둠 속에 몸을 웅크렸다.얼굴을 감싸 쥔 그의 손끝에서 소영의 향수 냄새와 자신이 방금 조향하던 시트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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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 오염된 진실의 잔해 #1

상수가 증발했다.그가 사라진 사흘은 혜연에게 영겁과도 같았다. 언제나 혜연이 지켜온 철저한 자기 통제력은 상수의 부재 앞에서 맥없이 바스러졌다. 업무 보고서를 작성하다가도 문득 멈춰 서서 휴대폰 액정을 확인하는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와 나누었던 그 달콤했던 카톡, ‘기분 개좋음요!’라며 아이처럼 웃던 상수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부재는 존재보다 강렬했다. 그가 머물던 자리마다 베여있는 옅은 시트러스 향이 오히려 혜연의 숨통을 조여왔다.혜연은 업무 중 짬이 날 때마다 ‘외근’이라는 비겁한 핑계를 대고 상수의 흔적을 쫓았다. 오직 두 사람이 함께 발을 들이며 온기를 나누고, 서로의 눈빛이 교차했던 장소들뿐이었다.가장 먼저 향한 곳은 상수의 작업실이었다. 불과 며칠 전 그가 오직 혜연만을 위해 향을 조향해 주었을 공간. 굳게 잠긴 철문 앞에 서자 사방을 메운 정적이 혜연을 덮쳤다. 열정적으로 향료를 배합하던 상수의 뒷모습, 시약병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공기 중에 떠다니던 알싸한 향료의 냄새까지 생생한데 문고리는 냉정할 정도로 차가웠다. 혜연은 차가운 문손잡이를 조심스레 돌려보았다. 끼익, 하는 작은 마찰음조차 들리지 않는 완벽한 단절. 혜연은 그 문에 이마를 기댄 채 나지막이 이름을 내뱉었다. “상수씨…?” 대답 대신 돌아오는 건 자신의 떨리는 숨소리뿐이었다. 문고리를 쥔 손바닥에 맺힌 식은땀이 금속의 냉기와 섞여 불쾌한 소름을 돋게 했다. 혜연은 그곳에서 그가 남긴 향기의 잔상과 자신의 초라한 기대를 동시에 확인해야 했다.이어 달려간 곳은 블루밍 현장이었다. 두 사람이 어둠 속에 갇혔던 그 좁고 숨 막히던 엘리베이터. 폐쇄된 공간 속에서 서로의 체온과 심장 소리에 의지했던 그 짧고도 길었던 시간이 혜연의 뇌리를 스쳤다. 전원이 꺼진 엘리베이터 앞을 서성이며 혜연은 그때의 그 막막한 공포보다 지금 상수가 없는 이 광활한 공사 현장의 공포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흙먼지 날리는 소음 속에서 혜연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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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 오염된 진실의 잔해 #2

카페 안, 에스프레소 머신의 거친 스팀 소음이 혜연의 고막을 긁었다. 주변 테이블에서 터져 나오는 가벼운 웃음소리가 혜연에게는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날아와 꽂히는 기분이었다. 소영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혜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낮게 읊조렸다.“너 알고 있었지? 상수 오빠랑 너, 무슨 사이야?”혜연은 피로 섞인 한숨을 내쉬며 잡힌 팔을 뿌리쳤다. 테이블 아래에서 혜연의 손가락이 코트 자락을 파고들었다. 손톱이 손바닥 살점을 짓누르는 고통이 느껴졌지만, 오히려 그 감각이 현실을 붙잡게 했다.“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랑 강 작가님은 프로젝트 파트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했잖아.”소영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혜연의 결백을 믿고 싶어 하는 간절함과, 그럼에도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비틀린 독기가 섞여 있었다. 소영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거짓말하지 마. 나 며칠전에 오빠 작업실 갔었어. 오빠가 그러더라. 너 좋아한다고. 너 때문에 나랑 다시 시작 안 하는 거라고.”혜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좋아한다’는 말. 며칠을 찾아 헤맨 남자의 진심이 이런 식으로 전달될 줄은 몰랐다. 혜연의 사고 회로가 일순간 정지했다. 당혹감과 알 수 없는 희열, 그리고 거대한 죄책감이 뒤섞여 혜연의 안을 헤집어 놓았다. 입안이 바싹 타들어가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는 것 같았다. 소영은 혜연의 미세하게 떨리는 눈동자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혜연의 내면을 낱낱이 파헤치듯 떠보기 시작했다.“정말 아니라고? 네 그 깨끗한 얼굴을 보니까 내가 더 비참해지네.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구나?”소영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칼날은 예리했다. 혜연은 대답 대신 테이블 위의 종이 냅킨만 만지작거렸다. 냅킨이 혜연의 손끝에서 형편없이 구겨졌다.“아니야... 정말 그런 사이 아니야. 지금 나도 너무 당황스러워서 너한테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어.”“아무런 낌새도 없었다고? 정말로?”혜연은 주저했다. 카톡들, 엘리베이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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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 비겁함이라는 이름의 다정 #1

서울의 공기는 건조하고 무거웠다. 혜연은 출근한 지 세 시간이 지나도록 모니터의 하얀 화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숙련된 손가락은 오늘따라 납처럼 무거워 엑셀 칸 하나를 채우지 못했다. 깜빡이는 커서는 마치 상수가 사라진 뒤 혜연의 심장 박동처럼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소영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사무실의 공조기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그 인간은 비겁해. 널 이용하는 거야.'옆자리 민지는 혜연의 창백한 옆얼굴을 힐끗거렸다. 평소라면 농담이라도 던졌을 텐데, 혜연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텅 비어 있는 것을 보자 민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단순히 싸운 게 아니다. 영혼이 깎여나가는 중이다.’ 민지는 결심한 듯 휴대폰을 들어 재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어? 재현 씨! 네, 지금요? 상수 씨가 심난할 때마다 가는 시골 마을이 있다고요? 거기가 어디라고요? 아,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선도리?”민지의 목소리가 정적 흐르는 사무실에 과장되게 울려 퍼졌다. 재현의 당황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새어 나왔다. “어? 민지 씨, 왜 그래요? 어제 다 가르쳐줬는데 왜 또... 귀 아파요! 갑자기 왜 소리를...” 민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혜연이 들을 수 있도록 지명을 한 번 더 또박또박 읊조렸다.“어디라고요?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선도리?”그 순간, 박제된 것처럼 굳어 있던 혜연의 어깨가 떨렸다. 그녀는 자석에 이끌리듯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어디 가, 박 과장!” 팀장의 호통이 뒤따랐지만, 혜연은 돌아보지 않았다. 민지가 순발력 있게 앞을 막아섰다. “팀장님, 지금 블루밍 현장 긴급 레이아웃 검토 가시는 거예요. 아까 결재 올리신 거 잊으셨어요? 아니 지금 그것도 안 하시고 다른 거 신경 쓰실 때입니까!”서천군 선도리의 석양은 잔인할 만큼 아름다웠다.서울을 벗어나 달리는 내내 혜연의 시야는 붉게 물들어갔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좁은 국도를 달릴 때마다 코끝으로 스미는 짠 기운이 상수의 체취처럼 느껴져 혜연은 자꾸만 가속 페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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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 비겁함이라는 이름의 다정 #2

그는 평상 위로 손을 뻗어 조향병 하나를 꽉 쥐었다. 손등의 핏줄이 불거질 정도의 힘이었다. 상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혜연 씨에게 더 이상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내가 당신 곁에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요. 나란 존재가... 내 지독하게 얽힌 소영과의 8년이, 당신의 그 평온하고 완벽한 세상을 얼마나 처참하게 부숴버릴지 왜 미처 몰랐을까요.”상수의 목소리가 젖은 모래처럼 가라앉았다.“당신에게 소영이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압니다. 20년... 당신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한 가장 소중한 친구죠. 그런데 내가 당신 손을 잡는 순간, 당신은 그 친구를 잃게 됩니다. 아니, 친구뿐만 아니라 당신이 공들여 쌓아온 그 반듯한 일상과 주변의 시선들까지 전부 나라는 인간 때문에 오염될 거예요. 나 하나 때문에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뺏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 욕심이, 내 가벼웠던 고백이 당신을 얼마나 벼랑 끝으로 밀어 넣고 있는지 자각하는 순간... 정말 숨이 쉬어지지 않았어요.”상수는 쥐고 있던 조향 병을 평상 위에 내려놓았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듯 무겁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미안합니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그 마음 하나가, 당신의 세상을 무너뜨리는 무기가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서 도망쳤습니다. 내가 당신 곁에서 사라지는 게, 당신의 그 소중한 세상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으니까요.”혜연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것은 상수가 내린 결론이 너무나 합리적이어서, 그래서 더 반박할 수 없는 잔인한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는 식상한 변명이 이토록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찌를 줄은 몰랐다. 상수는 혜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버렸고, 혜연은 상수를 찾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두 사람의 진심은 같은 곳을 향하면서도 서로를 할퀴고 있었다.“미안하면 다예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내 마음이 찢어지는 걸 다 보상할 수 있다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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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 무취(無臭)의 시간 #1

서천의 그 잔인하도록 아름다웠던 노을 아래 상수를 버려두고 온 지, 어느덧 3주가 흘렀다.서울의 공기는 서천의 그것보다 훨씬 건조하고 무거웠다. 박혜연 과장은 다시 회사와 프로젝트의 정밀한 부품이 되어 있었다. 매일 아침 8시 30분, 그녀는 흐트러짐 없는 감색 정장의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녀 어깨 위에 얹힌 책임감은 그녀가 사적인 슬픔에 잠길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혜연 스스로가 그 틈을 허락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혹사시키고 있었다.사무실 내 유일한 그녀의 숨구멍인 민지 과장조차 혜연의 그 지독한 평정심 앞에서는 혀를 내둘렀다. 점심시간, 회사 근처 식당에서 민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혜연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혜연아, 너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칼 같냐, 무섭게. 너 요즘 잠은 자는 거야?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왔어.”“일 안 해? 민지 과장님, 동기라고 봐주는 거 오늘까지야. 오후 브리핑 자료 다 검토했어?”혜연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민지의 걱정을 쳐냈다. 혜연의 눈앞에는 설렁탕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상수의 하얀 셔츠 소매처럼 아른거렸지만, 그녀는 강박적으로 숟가락을 놀렸다. 음식이 입안에서 모래알처럼 씹혔다. 맛도, 향도 느껴지지 않는 ‘무취의 식사’였다. 그녀는 미각을 잃은 사람처럼 꾸역꾸역 식사를 마쳤다. 상수가 없는 서울은 혜연에게 어떤 자극도 주지 못하는 무채색의 공간일 뿐이었다.혜연의 메일함은 매일 아침 상수가 보낸 기록들로 채워졌다. 상수는 철저하게 메일로 보내는 컨셉 제안서와 퀵서비스 향료로만 존재를 알렸다. 현대 문물의 편리함은 그의 부재가 프로젝트에 단 1%의 지장도 주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목소리 한 번, 문자 한 통 없는 이 완벽한 비즈니스는 혜연을 서서히 질식시켰다.메일을 열 때마다 혜연의 손가락은 마우스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혹시나 메일 하단에 ‘잘 지내나요?’ 혹은 ‘미안합니다’ 같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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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 무취(無臭)의 시간 #2

그녀는 미친 듯이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지난 3주간 상수가 보낸 메일 발송 시간과 퀵서비스 수령증들을 대조하기 시작했다. 오전 9시 15분, 오후 1시, 저녁 6시 30분. 상수가 물건을 보낸 시간은 혜연이 출근하고, 밥을 먹으러 가고, 퇴근하는 시간과 단 1분도 어긋나지 않게 설계되어 있었다. 그는 혜연의 눈앞에서 사라졌을 뿐, 그녀의 등 뒤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그녀를 보좌하고 보호하고 있었다. 상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회사 내에서 구설에 오르거나, 소영의 의심을 사는 날에는 혜연이 그녀의 삶의 많은 부분이 부정당하고 한순간에 '치정극'으로 추락할 것임을. 상수는 비겁하게 도망친 게 아니었다. 그는 혜연의 세상을 지키기 위해, 그녀의 완벽한 일상을 보존해 주기 위해 스스로를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취의 유령’으로 자처하며 자신을 말려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혜연은 그가 보낸 시향지 한 장 한 장에 묻은 보이지 않는 눈물의 농도를 이제야 맡을 수 있었다."이 바보 같은 사람이... 겨우 나 하나 안 다치게 하겠다고... 지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었던 거야?"심장 밑바닥에서 뜨거운 열기가 울컥 치밀어 올라 혜연의 목을 할퀴었다. 소영이 쏟아냈던 '비겁하다'는 독설은 상수가 혜연을 지키기 위해 뒤집어쓴 가장 무겁고 아픈 방패였다. 그가 보낸 무취의 시간들은 방관이 아니라, 혜연의 세상을 지키기 위해 그가 감내한 가장 고통스러운 '침묵의 헌신'이었다.혜연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텅 빈 전시장 한복판에서 신음했다. 지금껏 체면도, 차가운 포커페이스도 흐려지는 시야 속으로 처참하게 녹아내렸다. 그녀는 소영의 독설에 휘둘려 그를 의심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상수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자신의 '평온한 일상'이, 사실은 그가 없는 지옥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혜연은 주차장으로 질주했다.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칠 때마다 비명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차 문을 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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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 질문의 무게 #1

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은 지독하게 길었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야경은 혜연과 함께 보았던 그 찬란한 노을과는 달리 차갑고 건조했다. 형제의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상수는 무거운 여행가방을 거실 한복판에 내팽개치듯 내려놓았다.텅 빈 집안에는 정적만이 가득했다. 늘 수다스러운 농담으로 공기를 데워놓던 형 재현이 부재한 공간은 상수의 처지와 닮아 있었다. 상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앉았다. 어둠 속에서 상수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수백 번의 실험과 수천 번의 조향 끝에 남은 건, 향기조차 잃어버린 듯한 무취의 고독뿐이었다.‘혜연 씨의 세상은 이제 평온해졌을까.’자신을 '유령'으로 박제하며 보낸 지난 3주. 상수는 그것이 사랑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배려의 끝에서 상수가 마주한 건,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거대한 질식감이었다. 그때였다. 묵직한 초인종 소리가 적막을 깼다. 상수는 재현인 줄 알고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아니, 무슨 집에 초인종을 눌러.. 술을 얼마나 쳐먹은......”하지만 문을 열었을 때, 상수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형 재현의 장난기 어린 얼굴 대신, 거기엔 산처럼 거대하고 바위처럼 단단한 실루엣이 서 있었다. 수십 년간 군복을 입고 전방을 호령하던, 상수의 평생 트라우마이자 거울이었던 아버지였다.“...아버지? 여긴 어떻게...”상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버지는 대답 대신 상수의 초췌한 몰골을 묵묵히 훑어보더니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섰다. 재현이 없는 집안은 더욱 어색했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수만 킬로미터의 전선이 깔린 듯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아버지는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일은 잘하고 있냐? 그... 향 만드는 거, 네 적성에는 맞고?”그 한마디였다. 평생 상수를 옥죄어온 그 질문. 상수의 귓가에는 아버지가 조향을 '장난'처럼 취급한다는 환청이 들려왔다. 지난 3주간의 억눌림, 혜연을 향한 미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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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 질문의 무게 #2

그 손의 떨림은 수십 년간 참아온 참회와 사랑이었다.“하지만 이거 하나는 진심이다. 상수야, 늘 네가 원하는 걸 찾아라. 아버지는 네가 나처럼 누군가의 명령에, 혹은 세상의 시선에 갇혀 살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아비는 그것만 확인되면 된다.”평생 듣고 싶었던, 그러나 결코 듣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그 한마디가 상수의 가슴을 관통했다. 상수는 거울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아버지의 딱딱한 언어가 사랑의 오해를 불렀듯, 자신의 '유령' 같은 침묵 또한 혜연에게는 또 다른 폭력이었음을 깨달았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위한다는 핑계를 대며 정작 자신의 진심을 숨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아버지가 가장 경계했던 '세상의 시선에 갇힌 삶'이었다.그리고 그 순간 상수는 깨달었다. 상수가 진짜 원하는 것. 그것은 혜연의 세상을 보존해 주는 것이 아니라, 혜연의 세상 안에서 그녀와 함께 숨 쉬는 것이었다. 그녀의 우정을 깨뜨릴까 두려워 숨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곁에서 모든 폭풍을 함께 견뎌내는 것이었다. 상수는 이제야 혜연의 눈물 섞인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비겁하다'는 그 말은, 제발 함께 싸워달라는 간절한 구조 신호였다.“...아버지.”“그래.”“죄송해요. 저 지금... 진짜 제가 원하는 걸 찾으러 급히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안 그러면 평생 제 자신을 용서 못 할 것 같아요. 혜연 씨... 그 사람 없으면 전 다시 숨을 못 쉴 것 같아요.”상수는 짐도 풀지 않은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인자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들의 눈동자에서 본 것은 예전의 소심한 소년이 아닌, 사랑을 위해 전쟁터로 나가는 한 남자의 투지였다.“가라. 늦지 않게 가서 잡아라. 네가 찾은 그 사람이 네 전부라면, 아비는 네 뒤에서 산이 되어주마.”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던 상수의 발길이 돌연 멈춰 섰다. 차가운 복도 공기가 밀려 들어왔지만, 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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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 재점화(再點火) #1

서천에서 서울로 향하는 서해안 고속도로 위, 혜연의 차는 밤의 어둠을 찢으며 질주하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이 혜연의 창백한 얼굴 위로 날카로운 파편처럼 흩어졌다. 혜연은 떨리는 손으로 상수의 번호를 다시 눌렀다.연결음조차 들리지 않는 지독한 정적. 3주간 그가 메일함에 심어놓았던 그 정교하고도 잔인한 ‘무취의 알리바이’들이 이제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혜연의 가슴을 후벼 팠다.‘아직도 나를 피하는 걸까. 내 진심을 확인하기도 전에 그가 영영 숨어버린 걸까.’불안이 해일처럼 밀려왔지만 혜연은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힘들게 버텨온 그녀의 시간들이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지게 둘 순 없었다.“상관없어. 당신이 숨으면 내가 찾아낼 거니까. 지구 끝까지라도 가서 당신 그 비겁한 배려, 내 손으로 다 찢어놓을 테니까.”같은 시각, 서울의 밤거리. 상수는 핸드폰을 집에 두고 나온 것도 잊은 채 혜연이 있을 ‘블루밍’ 행사장으로 차를 몰았다. 뒤늦게 주머니가 가벼운 것을 깨달았지만 차를 돌릴 1분 1초가 아까웠다. 아버지와의 대면 이후, 상수의 안에서 죽어있던 무언가가 뜨겁게 맥동하고 있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통신 신호가 아니라 혜연의 실체였다.행사장은 이미 화려한 조명이 꺼지고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상수는 숨을 헐떡이며 전시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곳엔 마지막 비품을 정리하던 민지가 남아 있었다.“상수 씨? 아니, 상수 씨 왜 이제야 왔어요?”“민지 씨! 혜연 씨... 박 과장님 어디 있어요? 아직 여기 있죠?”“혜연이요? 못 만났어요? 아까 차 몰고 미친 듯이 나갔는데... 어디 급하게 갈 데가 있다고... 둘이 연락 안 됐어요?”상수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민지씨, 죄송한데 핸드폰 좀 빌려주실 수 있으세요?”상수는 민지의 핸드폰을 빌려 혜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엔 혜연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혜연의 핸드폰은 서천의 찬바람을 맞으며 차 조수석에서 외롭게 울리고 있었다. 두 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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