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 맹목의 늪과 붉은 전야여의도 에바 홀딩스 특별 통제실을 가득 채웠던 환호성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대리석 바닥의 서늘한 한기 속으로 가라앉았다. 수십 개의 모니터 스크린 위로 스위스 결제 연합의 5조 원이 청산되어 들어오는 황금빛 숫자들이 어지럽게 명멸했지만, 그 숫자들이 내뿜는 광채조차 실내를 지배하는 묘한 긴장감을 완벽하게 걷어내지는 못했다.창밖의 서울 도심은 어느새 장대비가 완전히 그치고 눅눅한 잿빛 안개에 잠겨 있었다. 고층 빌딩숲 사이로 흘러드는 흐릿한 새벽녘의 잔광이 통제실의 두꺼운 방탄 유리창을 타고 완만하게 굴절되어, 은설아가 서 있는 단상 아래로 길고 검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가습기에서 뿜어지는 습한 장미 향은 여전히 공기 중에 남아 있었지만, 서버 컴퓨터들이 쉴 새 없이 뱉어내는 뜨겁고 알싸한 오존 냄새와 뒤섞여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을 답답하게 짓눌렀다.은설아는 소파 가죽 깊숙이 몸을 묻은 채, 가늘고 하얀 손가락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순백의 실크 원피스 자락이 대리석 바닥 위로 길게 흘러내려 있었고, 그녀의 백옥 같은 피부는 흐릿한 푸른빛을 받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군주로서의 위엄을 자아내고 있었다. 25조 원이라는 전무후무한 자본의 성채를 그러쥐며 대한민국과 월가, 그리고 유럽의 포식자들까지 차례로 도살해 낸 여왕. 눈가에는 여전히 슬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듯한 가련한 피해자의 가면을 완벽하게 띄우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 깊은 곳에서 정밀하게 연산되는 회로는 이미 인간의 지능을 초월한 지독한 악귀의 본형이었다.설아 씨. 에바.단상 아래, 차가운 한기가 감도는 설아의 구두발 밑에는 대성 인베스트먼트 대표 백현재가 무릎을 꿇은 채 납작 엎드려 있었다.와이셔츠 단추는 몇 개 풀어헤쳐진 채 그의 가슴팍은 거친 숨결로 요동치고 있었고, 핏빛 넥타이는 진흙과 핏자국이 얼룩진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
Last Updated : 2026-08-15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