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당신이 사랑한 왕비는 내가 아니다 : Chapter 11 - Chapter 20

42 Chapters

제11화. 살아남는 손

아벨룬 인장을 꺼낸 순간, 암살자의 입에서 검은 거품이 솟았다.멎은 줄 알았던 몸이 크게 뒤틀리며 에이슬라의 손목을 움켜쥐었다.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에이슬라는 손을 뿌리치지 않고 그의 목부터 짚었다.세 번을 기다린 끝에 미약한 맥 하나가 손끝을 쳤다.“검을 거두세요. 아직 살아 있어요.”뒤늦게 목욕실로 들이닥친 타론이 피 묻은 바닥을 훑었다.쓰러진 시녀 둘, 부러진 단검, 왕비의 손에 들린 아벨룬 인장,그리고 왕비의 손목을 붙든 암살자까지.검이 검집을 벗어났다.“친정의 인장을 문 자입니다. 즉결하겠습니다.”“살아 있는 입을 죽이면 배후를 심문하는 게 아니라 도와주는 겁니다.”“저자를 살리면 전하께서 공모자라는 의심도 함께 살아납니다.”타론의 검끝이 암살자의 목에 닿았다.에이슬라는 망설이지 않고 그 사이로 손바닥을 밀어 넣었다.칼날이 살을 얕게 가르며 피가 흘렀다.“그 의심은 제가 감당하죠. 이 사람의 숨까지 대신 결정하지는 마세요.”“전하를 죽이려 했습니다.”“그래서 죄를 물을 겁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타론의 눈이 서늘하게 굳었다.왕비가 자신을 죽이러 온 자를 감싸고 있었다.그에게는 치료보다 입막음을 막는 연극처럼 보일 터였다.에이슬라는 암살자의 턱을 들어 입안을 확인했다.혀 밑 점막이 검게 부풀어 있었고,조금 전 꺼낸 인장 가장자리에는 바늘구멍이 뚫려 있었다.인장 안에 든 독이 침에 녹아 흘러나온 것이다.들키면 자결하라는 명령이 아니라,붙잡히는 순간 주인의 비밀까지 함께 죽이라는 장치였다.“메브라, 가는 은관과 숯가루, 푸른 병을 가져와요.”메브라가 창백한 얼굴로 암살자를 보았다.“전하, 정말 살리실 수 있습니까?”에이슬라는 엄지로 검지 마디를 한 번 문질렀다.두 번.세 번.“살릴 수 있는 동안은요.”메브라가 달려 나가자 에이슬라는 남자의 기도를 열고 가슴을 눌렀다.하나, 둘, 셋.네르시아의 몸은 손바닥 아래의 급소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목을 어느 각도로 꺾으면 끝나는지,갈비뼈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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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이름을 아는 시체

“스승님이 빈 그릇을 돌려달라십니다.”암살자는 그 말을 남긴 뒤 웃었다.에이슬라가 살려 낸 입에서 나온 첫 문장은 감사도, 변명도 아니었다.자신을 죽인 사람만 알고 있을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당신, 나를 본 적 있나요.”“없습니다.”대답이 너무 빨라 타론의 검이 먼저 움직였다.검끝이 남자의 목을 눌렀다.“왕비 전하 앞에서 거짓을 말하면 두 번째 숨은 없다.”“거짓이 아닙니다. 에이슬라 모렌의 얼굴은 오늘도 못 봤습니다.”남자의 시선이 네르시아의 얼굴을 지나 에이슬라의 손에 멈췄다.“얼굴을 보지 말라고 했으니까.”에이슬라의 엄지가 검지 마디에서 떨어졌다.바이렌은 그 작은 움직임부터 보았다.“누가 무엇을 보지 말라고 했지.”“죽은 왕비가 다시 숨을 쉬면 손을 보라고 했습니다.”“무엇을 확인하라고 했습니까.”에이슬라가 묻자 남자는 피 묻은 이를 드러냈다.“왕비라면 나를 죽일 테고, 약제사라면 살릴 거라고 했습니다.”의무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타론의 검날이 남자의 피부를 갈랐다.“처음부터 전하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말인가.”“죽일 수 있으면 죽이고, 실패하면 더 정확해지니 손해가 없었지요.”“무엇이 정확해집니까.”“그 몸 안에 누가 있는지.”바이렌의 시선이 천천히 에이슬라에게 옮겨왔다.에이슬라는 침상 곁 물잔만 바라보았다.거짓말할 때마다 시선이 머무는 자리라는 사실을 그가 아직 모르기를 바랐다.“에이슬라 모렌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들었죠.”“장막 뒤의 목소리에게서.”“남자였나요.”“목소리는 바꿨습니다.”“언제였습니까.”“왕비가 죽기 전날.”그날은 에이슬라가 오스테론의 장부를 발견하기 전날이었다.우연히 죽은 두 사람이 아니었다.누군가는 두 죽음의 시간과, 어느 몸에서 누가 깨어날지까지 알고 있었다.“찾았다는 걸 누구에게 전할 예정이었죠.”“전할 필요가 없습니다.”“왜요.”남자가 혀끝으로 깨진 입술의 피를 핥았다.“내 입이 닫히면, 다음에는 손을 보게 될 테니까.”에이슬라가 그의 왼손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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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오라버니의 편지

시체의 손바닥에서 ‘모렌’이 드러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같은 인장을 찍은 편지가 왕비궁에 도착했다.“아벨룬 공작께서 보내셨습니다.”메브라는 은쟁반을 문턱 안으로 들이지 못했다.봉인에는 암살자의 혀 밑에서 독을 흘리던 검은 늑대가 찍혀 있었다.편지를 가져온 전령은 왕비가 직접 봉인을 뜯는 모습을확인하기 전에는 돌아가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에이슬라는 편지보다 날짜를 먼저 확인했다.자신과 네르시아가 죽기 전날이었다.그런데 겉봉에는 답신을 재촉하는 붉은 점이 두 개 찍혀 있었다.라디온은 동생의 죽음을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죽은 뒤에도 답장을 받을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이었다.“전령을 붙잡아 두세요. 출발 시각, 중간에 만난 사람, 먹은 것까지 전부 기록하게 하고요.”메브라가 나가자 에이슬라는 장갑을 낀 채 봉인을 살폈다.밀랍 가장자리에는 눈으로 겨우 보이는 홈이 세 줄 나 있었다.손을 대기도 전에 왼손 검지가 늑대의 오른쪽 눈을 세 번 눌렀다.딸깍.봉인 안쪽의 걸쇠가 풀렸다.네르시아의 몸은 오라버니의 편지를 여는 법을 기억하고 있었다.에이슬라는 움직인 왼손을 오른손으로 붙잡았다.“내가 모르는 명령을 네가 기억하고 있구나.”첫 문장은 다정했다.‘네가 집을 너무 오래 비웠구나.’어린 시절의 겨울 정원과 포도절임, 은잔과 흰 꽃 세 송이 이야기가 이어졌다.남매의 추억처럼 보였지만 약제사에게는 조제 순서였다.포도 당액으로 쓴맛을 덮고, 겨울풀로 향을 누른 뒤,은잔에 흰 황혼 세 방울을 넣으라는 명령이었다.세 번째 종이 울린 뒤에는 왕의 침실을 지키는 근위대가 교대되고,바이렌은 누구의 시중도 받지 않은 채 혼자 차를 마신다.라디온은 왕의 습관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대상은 마지막 문장에 적혀 있었다.‘그분의 긴 밤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너라.’왕을 죽이라는 뜻이었다.그 아래에는 더 짧은 문장이 붙어 있었다.‘열세 살 겨울, 온실에서 내 손을 잡고 한 약속을 잊지 마라.’에이슬라는 그 약속을 알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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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재를 본 왕

“손을 펴.”바이렌의 명령이 떨어졌지만 에이슬라는 주먹을 풀지 않았다.손바닥 안에서 은빛 문장이 살과 함께 타들어 가고 있었다.[ 몸은 잘 맞느냐. ]왕이 그 문장을 읽으면 친정의 암호보다 먼저 왕비의 몸 안에 든 사람을 의심할 것이다.감추면 왕을 죽이라는 편지를 태운 공모자가 된다.보여 주면 에이슬라 모렌이 살아 있다는 사실부터 설명해야 한다.“마지막이다.”바이렌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힘은 거칠지 않았지만 물러날 틈도 없었다.에이슬라는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검게 눌어붙은 재와 물집 잡힌 살만 남아 있었다.은빛 글자는 마지막 획까지 부서진 뒤였다.바이렌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서 화로로 옮겨 갔다.불 속에는 아벨룬의 검은 늑대 봉인이 절반쯤 녹아 있었다.“무엇을 태웠지.”“친정에서 온 편지입니다.”“발신인은.”“라디온 아벨룬 공작입니다.”“내용은.”에이슬라는 소매 안에 감춘 필사본을 느꼈다.은잔, 세 번째 종, 북문, 흰 황혼 세 방울.그것을 내놓으면 왕을 죽이라는 명령은 증명할 수 있었다.그러나 기억을 잃었다던 왕비가 비밀 봉인을 열고 암호를 해독했으며,네르시아의 손으로 독살을 승낙하는 답장까지 썼다는 사실도 남는다.“말할 수 없습니다.”바이렌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말할 수 없는 건가, 말하면 당신이 죽는 건가.”“둘 다일 수 있습니다.”“그럼 나도 죽나.”그는 화로 앞에 무릎을 굽혀 검은 장갑으로 재를 헤쳤다.“암살자의 혀 밑에서는 아벨룬의 인장이 나왔다.”검은 장갑 끝에 붉은 밀랍이 묻었다.“그자의 손바닥에는 죽은 약제사의 성이 있었고.”그가 타다 남은 봉투 모서리를 뒤집었다.“그 직후 같은 인장의 편지가 왔는데, 왕비는 내가 들어오자 태웠다.”바이렌이 천천히 일어섰다.“당신이 아니라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사람은 누구지.”에이슬라의 심장이 내려앉았다.그러나 그의 질문은 정체를 알아낸 사람의 확신이 아니라, 거짓의 범위를 재는 의심이었다.“지금은 저를 믿지 마세요.”타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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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잠긴 왕비궁

세 번째 종이 벽 안에서 울리자, 바이렌이 잠근 네 개의 문이 동시에 떨렸다.빗장은 풀리지 않았다.대신 에이슬라의 침대 머리맡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한 번 더 났다.“벽을 뜯어라.”타론이 근위병들에게 명령하자 에이슬라가 곧장 막았다.“잠깐만요. 안에 독이나 불씨가 연결돼 있으면 벽을 부수는 순간 증거도 같이 사라집니다.”“증거를 태운 분이 할 말은 아닙니다.”타론의 말이 날카롭게 돌아왔다.에이슬라는 반박하지 않고 촛불 하나만 남기게 했다.침실의 불이 차례로 꺼지자 마지막 불꽃이 금빛 백합 장식 쪽으로 길게 휘었다.벽이 바람을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방 안의 공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에이슬라는 침대 끝에서 창문까지 걸음을 셌다.열두 걸음이었다.왕비궁 도면에는 아홉 걸음으로 기록돼 있었다.“세 걸음이 벽 속에서 사라졌어요.”바이렌이 도면을 접었다.“문을 찾아.”“제가요?”“편지를 연 손도, 태운 손도 당신 것이었다. 이 벽이 무엇을 숨겼는지도 당신 손이 먼저 알겠지.”에이슬라는 백합 장식 앞에 섰다.자신은 처음 보는 문양인데 왼손 손목의 오래된 흉터가 뜨겁게 뛰었다.검지가 세 번째 꽃잎을 한 번 눌렀다.다음에는 가장 작은 꽃잎을 두 번 눌렀다.마지막으로 줄기 장식을 반 바퀴 비틀었다.찰칵.침대 머리맡의 돌판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안으로 밀렸다.타론의 검끝이 에이슬라의 목에 닿았다.“기억을 잃었다는 분이 여는 순서는 정확히 기억하셨군요.”“제가 기억한 게 아닙니다.”“그 손도 전하의 몸에 붙어 있습니다.”“그러니까 더 무서운 겁니다.”바이렌이 타론의 검을 내렸다.“다른지는 내가 판단한다. 문부터 열어.”돌판을 밀자 사람 하나가 옆으로 겨우 지나갈 틈이 나타났다.차갑고 쓴 공기 속에 말린 월광초와 소독용 주정 냄새가 섞여 있었다.에이슬라의 심장이 세게 뛰었다.자신이 죽기 전까지 매일 맡던 약제원의 냄새였다.바이렌이 등불을 들고 먼저 들어가려 하자 에이슬라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앞에는 제가 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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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왕비의 약제실

왕비의 비밀 약제실에는 왕을 죽일 수 있는 독이 열두 병 있었다.그리고 열두 병 모두 같은 경고를 달고 있었다.“왕에게 쓰지 말 것.”에이슬라는 첫 번째 병의 라벨을 읽고 곧장 두 번째 병을 확인했다.흰 황혼을 묽게 만든 용액과 심장을 늦추는 월하근 추출액,기억을 흐리는 회색 수액까지 문장은 한 글자도 다르지 않았다.“전부 네르시아 왕비의 필체입니다.”메브라가 등불을 가까이 들었다.타론은 검집에 손을 얹은 채 선반을 훑었다.“왕에게 쓸 병만 따로 치웠을 수도 있습니다.”“그렇다면 빈자리가 있어야 해요.”에이슬라는 병의 밑바닥과 선반에 남은 먼지 자국을 차례로 확인했다.열두 병과 열두 개의 둥근 자국이 정확히 맞았다.적어도 눈에 보이는 선반에는 사라진 병이 없었다.바이렌이 푸른 실로 묶인 종이 뭉치를 들어 올렸다.“죽은 약제사의 연구를 훔쳐 독을 만들고, 내게 쓰지 말라고 적었다.”“보호인지 분류인지는 아직 모릅니다.”에이슬라는 첫 장을 펼쳤다.흰 황혼의 해독 비율과 실패한 투약량,영혼 혼탁 환자의 맥박 변화가 자신의 필체로 적혀 있었다.공개 보고서에서 뺀 수치와 오스테론에게도 보여 주지 않은 가설까지 그대로였다.종이 가장자리에는 네르시아의 글씨가 빼곡했다.‘서쪽 창문, 두 번째 종 이후 혼자 남음.’‘푸른 리본을 맨 날 셋째 줄.’‘오스테론이 자리를 비운 시간, 일곱 분.’에이슬라의 몸이 순간 굳었다.네르시아는 연구만 가져간 것이 아니었다.그녀가 어느 창문을 열었고, 언제 혼자 남았으며,무엇을 머리에 맸는지까지 오래 지켜보고 있었다.“왕비가 약제사를 감시했습니다.”타론이 단정했다.“죽일 사람의 습관을 외운 거겠지요.”에이슬라는 다음 장을 넘겼다.자신이 여섯을 잘못 적고 긁어낸 뒤 아홉으로 고친 자리 옆에 굵은 문장이 남아 있었다.‘이 양이면 왕의 맥이 멎는다.’그 아래에는 종이를 찢을 듯 깊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사용 금지.’바이렌의 시선이 그 글자에 오래 머물렀다.“나를 살리려 했다는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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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몸이 기억한 칼

타론이 검은 병을 증거함에 넣는 순간,에이슬라의 왼손은 그의 목뼈가 꺾일 방향부터 기억했다.생각이 아니라 근육의 기억이었다.손가락이 움직이기 전에 에이슬라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붙잡았다.“그 병은 여기서 검사해야 합니다.”“불가합니다.”타론은 증거함의 뚜껑을 닫았다.“왕비 전하의 밀실에서 발견됐고, 대상은 왕비 자신이며,사용량은 치사량입니다. 용의자에게 증거를 맡길 수 없습니다.”“이동 중 침전물이 섞이면 성분이 달라져요. 마개 안쪽의 피도 먼저 채취해야 합니다.”“왕실의가 판단합니다.”타론의 엄지가 금이 간 검집을 한 번 눌렀다.감정을 숨길 때마다 반복하는 동작이었다.에이슬라는 그 습관을 처음 봤는데도, 이 몸은 이미 다음 움직임까지 알고 있었다.오른쪽 어깨가 내려가면 돌아선다.왼발이 반 치 물러나면 검을 뽑는다.그보다 먼저 팔꿈치를 누르면 손목이 열린다.낯선 계산이 너무 자연스러워 소름이 돋았다.“증거함을 내려놓으세요.”“거부합니다.”타론이 돌아섰다.그 순간 약초 냄새가 끊기고 차가운 냄새가 혀끝까지 번졌다.왼손이 타론의 팔꿈치 안쪽을 눌렀고, 발끝이 그의 뒤꿈치 앞을 막았다.타론의 균형이 무너졌지만 그는 증거함을 놓치지 않았다.“물러서십시오.”그가 어깨로 에이슬라를 밀어냈다.에이슬라는 뒤로 가려 했다.몸은 오히려 검이 나올 자리 안쪽으로 파고들었다.타론의 엄지가 검집의 금을 눌렀다.다음 순간 검날이 절반쯤 드러났다.에이슬라의 손바닥이 칼등을 쳤다.검이 선반을 스치며 유리병 열두 개를 한꺼번에 울렸다.“전하!”메브라의 비명이 터졌다.근위병들이 통로 입구를 막자 바이렌이 손을 들었다.“아무도 움직이지 마라.”타론은 증거함을 바닥에 내려놓고 검을 완전히 뽑았다.“왕비 전하, 마지막 경고입니다.”에이슬라의 시야가 흐려졌다.칼끝이 아니라 손목을 보고, 어깨가 아니라 무릎을 보는 시선이었다.“저는 싸우려는 게 아니에요.”“몸은 다르게 보고합니다.”타론이 검면으로 그녀를 밀어내려 했다.에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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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처음 터진 웃음

타론의 피가 검끝을 타고 떨어지자, 에이슬라가 웃었다.방 안의 모든 검이 동시에 그녀를 향했다.에이슬라는 자신이 낸 소리를 알아듣지 못한 채 입을 틀어막았다.웃음은 멎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타론의 목을 베려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고,심장은 아직 한 박자씩 늦게 뛰고 있었다.그런데 타론은 목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바닥에 놓인 증거함부터 확인했다.“병, 파손 없습니다.”그 짧은 보고가 끝나는 순간 에이슬라의 어깨가 다시 들썩였다.너무 끔찍해서 웃음이 났다.죽었다 살아난 뒤 처음으로 터진 웃음이,사람을 죽일 뻔한 자리에서 나왔다는 사실까지 우스워졌다.“왕비.”바이렌은 검을 뽑지 않았지만 손은 검자루 위에 있었다.“무엇이 우습지.”“모르겠어요.”에이슬라는 웃음 사이로 겨우 숨을 들이켰다.“아무것도 안 우스운데, 멈추지가 않아요.”메브라가 창백해진 얼굴로 한 걸음 물러났다.“전하께서 웃으시면 늘 누군가 벌을 받았습니다.”통로 입구의 근위병들이 일제히 자세를 낮췄다.타론마저 피가 흐르는 목을 누른 채 에이슬라와 검 사이를 살폈다.웃음 하나가 칼을 뽑게 하는 방이었다.에이슬라는 입가를 손등으로 눌렀다.“아무도 벌하지 않아요.”그 말에 메브라는 오히려 무릎을 꿇었다.“누구부터 나가야 합니까.”“나가지 마세요. 아니, 나가고 싶으면 나가도 되고요.”시녀들의 얼굴이 더 겁에 질렸다.네르시아는 선택권을 준 적이 없었기에, 허락조차 새로운 함정으로 들리는 모양이었다.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발끝으로 멀리 밀었다.“타론 경의 상처부터 씻어야 합니다.”“불필요합니다.”“목에 칼이 닿았어요.”“얕습니다.”“깊이를 정하는 건 다친 사람의 자존심이 아니라 피의 양이에요.”타론은 대답 대신 목을 누른 손을 내렸다.상처는 길었고, 검날이 한 치만 더 들어갔다면 목맥을 건드렸을 자리였다.에이슬라는 한 걸음 다가가다 멈췄다.“상처를 봐도 됩니까.”타론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왕비가 허락을 구하는 상황을 계산하지 못한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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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잠들지 않는 왕

거울 속 여자가 사라진 자리에 바이렌의 검이 꽂혔다.칼끝이 은빛 표면을 긁으며 길고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에이슬라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지만,바이렌은 깨진 금 위에 검을 댄 채 움직이지 않았다.“누가 네 뒤에 있었지.”“저도 모릅니다.”“방금 웃고 있었다.”“울고 있었어요.”두 사람의 대답이 엇갈린 순간,바이렌의 눈이 거울 속 빈자리와 현실의 에이슬라 사이를 헤맸다.그는 분명히 보고도 무엇을 보았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에이슬라는 검보다 그의 동공을 먼저 살폈다.촛불이 흔들린 뒤에도 동공이 줄어들지 않았고,오른손 엄지는 검집이 아닌 허공을 세 번 눌렀다.“폐하, 마지막으로 주무신 게 언제죠.”“질문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다.”“사흘은 넘었군요.”부정하지 않는 것으로 답은 충분했다.에이슬라는 탁자 위에 놓인 찻잔 네 개를 확인했다.잔 바닥마다 잠을 쫓는 흑수피가 검게 눌어붙어 있었다.“이 양이면 사람과 그림자를 헷갈립니다.”“내가 본 것을 환각으로 만들고 싶나.”“아니요. 폐하가 본 것을 정확히 판단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하는 겁니다.”“당신에게는 편리한 진단이군.”바이렌이 검을 거두려다 손잡이를 한 번 놓쳤다.금속이 검집 가장자리에 부딪쳤다.방 안의 누구도 그 실수를 보지 못한 척했다.에이슬라는 약상자를 열어 수면초 한 조각과 푸른 솔잎 두 조각을 꺼냈다.“마시지 않아도 됩니다. 향만 피우면 긴장이 조금 내려가요.”“정신을 흐리게 한 뒤 무엇을 할 생각이지.”“아무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그 말을 믿으라고?”“아니요. 성분과 양을 타론 경이 기록하고,향로는 폐하께서 직접 놓으세요. 문은 열어 두고 저는 침대에서 다섯 걸음 떨어져 있겠습니다.”타론이 약초를 받아 냄새를 확인했다.“통상적인 진정 배합입니다.”“통상적인 독살도 처음에는 약 냄새가 나지.”바이렌의 대답은 단호했다.“거절한다.”에이슬라는 곧장 약초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향로 안의 재까지 털어 밀폐함에 담고 메브라에게 건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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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한 침실의 거리

바이렌은 잠든 채 에이슬라의 목에 검을 겨눴다.타론이 의자에서 그를 옮기려고 어깨에 손을 댄 순간,눈도 뜨지 않은 왕의 검이 검집을 빠져나왔다.칼끝은 타론이 아니라 다섯 걸음 밖에 서 있던 에이슬라를 정확히 찾았다.“폐하, 문은 열려 있습니다. 아무도 안에 갇히지 않았어요.”에이슬라가 조심스레 말하자 검날이 한 치 내려갔다.타론이 손을 떼고 물러서자 바이렌은 다시 잠들었지만, 검자루를 쥔 손은 풀리지 않았다.“옮길 수 없습니다.”에이슬라는 그의 호흡과 동공을 확인했다.“지금 깨우면 다시 잠들지 못해요.”“왕비궁은 안전하지 않습니다.”“왕의 침실은 오늘 밤 암살 장소로 지목됐고요.”타론은 침대 뒤의 비밀 통로와 잠든 왕을 번갈아 보았다.안전하다고 부를 수 있는 방은 없었다.그때 바이렌의 눈이 열렸다.시선은 열린 문, 손에 든 검, 에이슬라의 순서로 움직였다.“얼마나 잤지.”“14분입니다.”“충분하다.”그가 일어나려다 의자에 무릎을 부딪쳤다.검집을 바닥에 짚지 않았다면 그대로 쓰러졌을 것이다.에이슬라는 침대 맞은편의 긴 소파를 가리켰다.“오늘 밤은 여기 계세요.”“타론의 목에 검을 댄 왕비와 같은 침실에서 자라는 말인가.”“저도 그 점이 가장 걱정됩니다.”“그런데 남으라고?”“폐하를 옮길 수도 없고, 왕의 침실로 돌려보낼 수도 없으니까요.”바이렌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검을 뽑아 침대와 소파 사이에 내려놓았다.곧은 칼날이 방을 둘로 갈랐다.“이 선을 넘는 쪽이 먼저 검을 잡는다.”“제가 넘으면 망설이지 마세요.”“내 판단까지 대신 정하지 마라.”“부탁입니다.”“그때 내가 결정한다.”에이슬라는 더 말하지 않았다.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택을 미리 빼앗지 않겠다는 뜻이었다.문은 활짝 열어 두고 타론과 근위병 넷이 복도에 섰다.메브라는 침구를 정리하다 바닥의 검을 내려다봤다.“두 분을 한 방에 모시는 것이 정말 안전합니까.”타론이 대답했다.“따로 두면 두 곳을 지켜야 합니다.”“함께 두면 한 곳에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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