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당신이 사랑한 왕비는 내가 아니다 : Chapter 41 - Chapter 50

65 Chapters

제41화. 형을 버리게 해

“바이렌을 죽이지 마라.”검은 백합 봉인을 뜯자 라디온의 명령이 첫 줄에서 피처럼 번졌다.“유렌을 왕으로 세워 형제가 서로를 의심하게 해.”에이슬라는 편지를 내려놓지 않았다.지난 명령은 왕의 독살이었다.이번에는 왕을 살려 둔 채 왕실을 둘로 찢으라는 뜻이었다.편지 아래에는 왕궁 내부에서만 쓰는 시간표가 붙어 있었다.유렌의 집무 시간.근위 교대 시각.바이렌이 혼자 검을 점검하는 새벽까지 적혀 있었다.“이 편지는 누구 손으로 들어왔죠?”메브라가 봉투 안쪽의 밀랍을 살폈다.“왕비궁 세탁물 사이에 끼워져 있었습니다.”“출입 명부에는요?”“새로 들어온 사람은 없습니다.”새 사람이 아니라 오래 있던 사람이 전달했다.에이슬라는 바이렌에게 편지를 숨기지 않았다.그는 끝까지 읽은 뒤 유렌의 이름에서 손을 멈췄다.“동생을 미끼로 쓰려는군.”“미끼로 만들지는 않을 겁니다.”“그럼 어떻게 답하지?”“전하께 먼저 물어야죠.”유렌은 호출을 받고도 의자보다 창문부터 확인했다.“도망칠 길을 찾는 겁니까?”“형수님이 저를 왕으로 만들겠다니, 창문 정도는 봐 둬야지요.”에이슬라는 편지를 탁자 위에 펼쳤다.“라디온은 전하가 폐하에게 버림받았다고 믿게 만들려 합니다.”“제가 버림받은 표정은 잘 짓습니다.”“이번에는 농담으로 결정하지 마세요.”유렌의 손가락에서 돌던 인장이 멎었다.에이슬라는 그가 편지를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전하의 이름을 역정보에 써도 됩니까?”“무엇을 흘릴 생각이십니까?”“전하가 왕위에 관심을 보였고, 국경 사절 둘이 전하 편으로 돌아섰다고요.”“반역자로 보이겠군요.”“그래서 허락을 묻는 겁니다.”유렌은 인장을 손바닥 안에 감췄다.“제가 거절하면요?”“다른 방법을 찾겠습니다.”“형은 뭐라고 했습니까?”바이렌이 대답했다.“네가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유렌은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웃음이 사라진 얼굴은 형과 더 닮아 있었다.“허락하겠습니다.”그는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렸다.“대신 제가 고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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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넌 내 동생이 아니야

에이슬라의 왼손이 먼저 정답을 썼다.[ 어머니의 눈. ]그녀는 오른손으로 펜을 빼앗아 종이를 뒤집었다.“내 기억도 아닌데 정답처럼 쓰지 마요.”네르시아는 대답을 재촉하듯 손가락을 한 번 굽혔다.라디온의 질문 아래에서는 자정까지 남은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다.열세 살 겨울, 네가 내 손에서 훔쳐 숨긴 것은 무엇이지?틀리면 네가 내 동생이 아니라는 뜻이다.바이렌은 뒤집힌 종이를 보지 않았다.“손이 쓴 답을 보낼 건가.”“아니요.”“왜.”“몸이 기억한다는 이유로 네르시아의 기억을 제 것처럼 쓰고 싶지 않아요.”유렌이 굴리던 인장을 멈췄다.“틀리면 라디온이 바로 알아챕니다.”“그래도 확인하겠습니다.”에이슬라는 메브라에게 왕비의 어린 시절 기록을 요청했다.돌아온 것은 일기장이 아니라 불에 그슬린 장부 한 권이었다.“아가씨께서 열네 살에 직접 태우셨습니다.”“전부 탔나요?”“보여 주고 싶지 않은 것만 태우셨습니다.”장부의 열세 살 겨울 부분에는 두 장이 뜯겨 있었다.앞장에는 한 줄만 남아 있었다.[ 오라버니의 손에서 어머니를 훔쳤다. ]에이슬라는 뜯긴 자리 아래에 얇은 종이를 대고 숯가루를 문질렀다.눌린 글씨가 천천히 떠올랐다.[ 초록빛 눈은 흙 속에서만 나를 보았다. ]“보석입니다.” 바이렌이 물었다.“어디에 숨겼지.”에이슬라의 왼손이 창가의 검은 백합 화분을 향했다.그녀는 손을 따라가지 않고 메브라를 봤다.“화분을 옮겨도 될까요?”허락을 받은 뒤 흙을 걷어 내자 검은 천에 싸인 반지가 나왔다.초록 보석 안에는 아벨룬의 문장이 거꾸로 새겨져 있었다.메브라의 얼굴이 굳었다.“대공비의 인장 반지입니다.”“왜 라디온이 가지고 있었죠?”“아가씨의 후견권을 성교회에 넘기는 문서에 찍으려 했습니다.”반지 안쪽에는 오래된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열세 살의 네르시아는 자신을 가문의 실험실로 넘길 인장을 빼앗다가 손을 베었다.에이슬라는 반지를 집지 않았다.“답은 반지가 아니에요.”유렌이 고개를 기울였다.“물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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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자정에 네 몸을 돌려줘

왕비궁의 문이 열렸지만 라디온은 문턱을 넘지 않았다.그는 계단 아래에서 에이슬라의 얼굴이 아니라 왼손부터 바라봤다.북부 사절 셋이 마차 곁에 서 있었고, 왕비궁의 시종들은 열린 문 안쪽에 줄지어 섰다.오늘의 면담은 처음부터 둘만의 자리가 아니었다.“들어가도 되겠느냐, 네르시아.”에이슬라는 문을 더 활짝 열었다.“왕비에게 면담을 청한 분이 왜 허락은 네르시아에게 구하죠?”라디온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잠시 멎었다.“이름 하나 바꾼다고 사람이 달라지지는 않아.”“그럼 들어오세요, 아벨룬 대공.”그녀가 먼저 응접실로 향했다.양쪽 문은 모두 열린 채였고, 유렌은 사절들이 볼 수 있는 자리에 기록지를 펼쳤다.바이렌은 약속대로 에이슬라의 뒤가 아니라 오른편에 섰다.라디온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그의 시선이 흙이 흐트러진 검은 백합 화분에 닿았다.“어머니의 눈을 찾았구나.”에이슬라는 검은 천에 싼 반지를 탁자 위에 올렸다.“열세 살 아이를 성교회로 넘기려던 인장도 함께 찾았어요.”사절들의 표정이 달라졌다.라디온은 반지에 손대지 않았다.“네르시아의 피가 필요했다.”“그래서 치료라는 이름으로 후견권을 넘겼나요?”“그 아이가 아니면 어머니를 살릴 수 없었으니까.”에이슬라는 반지 안쪽에 말라붙은 피를 사절들에게 보였다.“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딸을 죽이려 했다는 뜻으로 기록하면 되겠네요.”유렌의 펜이 종이 위를 달렸다.라디온이 그제야 기록지를 돌아봤다.“말을 골라라.”“대공이 고를 말은 이미 끝났어요.”에이슬라는 자신의 왼손을 탁자 위에 펼쳤다.“이 피가 누구 것인지 대답하세요.”라디온의 시선이 손바닥의 흉터에 박혔다.“네르시아의 것이다.”“왜 생겼죠?”“그 아이가 제 운명을 거부했으니까.”“운명이 아니라 대공의 명령이겠죠.”라디온이 한 걸음 다가왔다.에이슬라의 왼손 손가락이 저절로 접혔다.그는 사절들이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도록 옆으로 비켜섰다.“보셨습니까.”“내 동생의 몸은 아직 나를 기억합니다.”에이슬라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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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네가 먼저 사라져

피로 쓴 두 글자 아래에서 에이슬라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죽여. ]라디온은 그 문장을 확인한 뒤 처음으로 숨을 멈췄다.그러나 놀란 기색은 오래가지 않았다.그는 북부 사절들이 문장을 보도록 몸을 비켰다.“보셨습니까. 내 동생이 침입자를 거부하고 있습니다.”에이슬라는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눌렀다.“누구를 죽이라는 건지 대공이 왜 정하죠?”“가족은 안다.”“가족이라서 넘겼고, 가족이라서 가뒀고, 이제는 가족이라서 죽일 사람까지 대신 고르네요.”유렌의 펜이 멈추지 않았다.라디온이 기록지로 손을 뻗자 바이렌이 그 앞을 막았다.“왕비가 허락하지 않았다.”“폐하께서 끼어들 일이 아닙니다.”“그 판단도 왕비가 한다.”에이슬라의 왼손 검지가 피를 길게 끌었다.두 글자 뒤에 다시 글자가 붙었다.[ 죽여. 나를. ]메브라가 의자 등받이를 붙잡았다.북부 사절 가운데 한 명이 한 걸음 물러섰다.라디온만 움직이지 않았다.“속임수다.”에이슬라는 그 말보다 그의 손을 봤다.그는 유리병을 되찾으려 하면서도 병마개에는 손대지 못했다.“대공은 이 병을 열지 못하네요.”“내가 열 이유가 없으니까.”“아니요. 안에 든 것이 네르시아가 아니라는 걸 아니까요.”라디온의 손가락이 천천히 접혔다.에이슬라는 병을 등잔 가까이 들어 올렸다.검붉은 피 아래에 은빛 가루가 가라앉아 있었다.머리카락처럼 보였던 것은 가느다란 은실이었고,마개 안쪽에는 잘게 부순 거울 조각이 박혀 있었다.피와 거울과 공명하는 몸.영혼을 붙잡는 매개체였다.“이건 보존병이 아니에요.”에이슬라는 병 바닥에 새겨진 날짜를 읽었다.네르시아가 반지를 훔치다 손을 베었던 열세 살 겨울이었다.“그날의 기억만 잘라서 가둔 거예요.”메브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그날 이후 아가씨는 오라버니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라디온이 메브라를 돌아봤다.“입을 다물어.”“왜요?”에이슬라가 그의 말을 잘랐다.“그날 네르시아가 무엇을 봤는지 들키면 곤란한가요?”라디온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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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그 독은 당신 것이 아니야

에이슬라의 손이 바이렌의 검을 제 심장 쪽으로 밀었다.“지금 찌르지 않으면 자정 뒤에는 둘 다 사라져요.”바이렌은 검을 놓지 않았다.대신 맨손으로 칼날을 감싸 쥐었다.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렀지만 검끝은 더 들어가지 못했다.“누가 시킨 말이지.”“내가.”“아니요.”같은 입술에서 두 대답이 겹쳤다.에이슬라의 오른손은 검을 밀었고, 왼손은 손잡이를 옆으로 틀었다.서로 다른 의지가 한 몸을 잡아당길 때마다 심장이 엇갈려 뛰었다.목 아래의 검은 독맥도 두 갈래로 벌어졌다.한 줄은 왼쪽 쇄골로, 다른 한 줄은 심장 한가운데로 내려갔다.메브라가 약상자를 열려 하자 바이렌이 손짓으로 멈췄다.지금 약을 먹이는 결정조차 어느 쪽의 허락인지 알 수 없었다.바이렌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지 않았다.검만 바닥에 내려놓은 뒤 한 걸음 물러났다.“내가 어느 쪽도 죽이지 않는다.”문밖에서 라디온이 문짝을 두드렸다.“폐하, 선택하지 않으면 둘 다 잃습니다!”바이렌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의 시선은 에이슬라의 얼굴이 아니라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두 손에 머물렀다.“살고 싶은 사람은 대답해.”에이슬라의 입에서 숨이 끊겨 나왔다.“저요.”잠시 뒤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나도.”두 번째 대답이 떨어지자 몸을 뒤틀던 힘이 잠깐 멎었다.에이슬라는 탁자 모서리를 붙잡고 겨우 서 있었다.심장은 여전히 두 번 뛰었지만 어느 한쪽이 다른 박동을 밀어내지는 않았다.바이렌이 물었다.“서로 죽이지 않고 남을 수 있나.”왼손이 피 묻은 종이 위로 움직였다.[ 저 여자가 허락하면. ]오른손이 펜을 빼앗았다.[ 무엇을 하려고요. ][ 말할 거야. ][ 누구에게요. ]왼손이 문밖을 가리켰다가 바이렌을 향했다.[ 둘 다. ]오른손이 종이 아래에 선을 그었다.[ 한 문장만. ]왼손이 곧바로 숫자 셋을 적었다.오른손은 셋을 지우고 둘을 남겼다.유렌이 펜을 든 채 두 손의 협상을 지켜봤다.“두 문장으로 합의한 겁니까?”오른손이 한 번 두드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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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화. 죽은 네가 왜 여기 있어

뒤집힌 종이 위에 네르시아의 문장이 남아 있었다.[ 그날 독은 당신 잔이 아니라 내 몸에 있었어. ]에이슬라의 왼손이 종이에서 떨어지는 순간 몸 전체의 힘도 함께 풀렸다.바이렌은 그녀가 바닥에 닿기 전에 어깨를 받쳤다.“침대로 옮겨도 되나.”에이슬라의 오른손이 그의 소매를 한 번 움켜쥐었다.그는 그 짧은 허락을 확인한 뒤에야 그녀를 안아 들었다.문밖에 남아 있던 라디온이 따라붙었다.“내 동생에게서 손을 떼십시오.”바이렌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네가 부른 것은 동생이 아니라 네 명령을 기억하는 몸이었다.”“폐하는 저 안의 것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그래서 본인에게 묻고 있다.”침실 문이 닫히자 라디온의 손이 문짝을 거세게 두드렸다.타론이 근위대를 배치했고, 유렌은 북부 사절들의 서명이 끝날 때까지 응접실에 남았다.메브라가 약상자를 펼쳤다.에이슬라는 열에 젖은 눈을 뜨고 병의 봉인부터 살폈다.“해열액 두 숟갈만요.”바이렌이 잔을 들었다.“내가 먹여도 되나.”“제가 들게요.”그는 잔을 건넸다.에이슬라의 손이 떨리자 잔 아래에 손바닥만 받쳤다.입술이나 손목에는 닿지 않았다.약을 삼킨 에이슬라가 숨을 고른 뒤 탁자를 가리켰다.“첫 독살 기록을 가져와 주세요.”“새벽까지 미뤄도 된다.”“기록이 사라지는 데는 새벽까지도 필요 없어요.”바이렌은 유렌에게 봉인된 원본을 가져오게 했다.도착한 기록은 왕의 피해만 적힌 여섯 장이었다.에이슬라는 제본 안쪽의 구멍을 세었다.“열두 장이 뜯겼어요.”유렌이 마지막 장 위에 얇은 종이를 대고 숯가루를 문질렀다.사라진 장에 눌렸던 글씨가 조각난 채 떠올랐다.[ 왕비 출혈 지속. ]그 아래에는 절반만 남은 문장이 있었다.[ 태아의 맥…… 소실. ]바이렌의 손이 기록 위에서 멈췄다.“아이였나.”메브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내 아이였나.”“아가씨는 폐하께 알리지 않으셨습니다.”“왜.”“폐하께서 원하지 않는다는 서신을 받으셨으니까요.”바이렌이 유렌을 봤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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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네가 죽기를 기다렸어

“내가 불렀어.”네르시아의 왼손이 바이렌의 손목을 놓았다.오른손은 이불을 움켜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바이렌은 사망기록을 접지 않았다.“에이슬라 모렌을 불렀다는 뜻인가.”“그래.”“허락은 받았나.”네르시아의 시선이 침대 곁 물잔으로 옮겨갔다.그 짧은 침묵 사이 에이슬라의 오른손이 검지 마디를 세 번 문질렀다.“받지 않았어.”에이슬라의 숨이 한순간 멎었다.“다시 말해요.”“지금은 몸부터...”“제 허락을 받았냐고 물었어요.”오른손이 왼쪽 손목을 붙잡았다.한 몸의 두 손이 서로를 떼어 내려는 동안 심장이 엇갈려 뛰었다.“받지 않았어.”“제가 죽는 건 언제 알았죠?”네르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에이슬라는 침대 옆 기록지를 끌어당겼다.“날짜로 말해요.”“흰 황혼이 약제원에 들어온 날.”“제 죽기 사흘 전이네요.”에이슬라는 반입일과 자신의 사망일을 나란히 적었다.“그동안 뭘 했죠?”“거울을 준비했어.”“저한테 알리는 대신요?”“알리면 네가 달아났을 테니까.”“도망칠 권리는 제게 있었어요.”네르시아의 왼손이 목의 맥박을 확인했다.“난 살고 싶었어.”“저도요.”두 대답이 부딪치자 물잔 표면이 넘칠 듯 흔들렸다.바이렌은 어느 손도 붙잡지 않았다.그는 침대에서 한 걸음 물러나 열린 문 옆에 섰다.“나가 있을까.”에이슬라의 오른손이 그의 소매 끝을 잡았다.“문만 열어 두세요.”“알겠다.”에이슬라는 날짜 아래 질문을 적었다.[ 왜 하필 나였는가. ]“공명 혈통이었고 흰 황혼을 알아봤으니까.”“그건 제가 필요했던 조건이에요.”에이슬라는 펜을 내려놓았다.“왜 제 선택을 없애도 된다고 생각했죠?”네르시아가 입술을 다물었다.“나는 널 살렸어.”“아니요.”에이슬라의 오른손이 왼손을 이불 위에 눌러 놓았다.“당신은 제 죽음을 당신의 문으로 썼어요.”네르시아의 손가락이 움찔했다.“살아남았잖아.”“살아남았다는 결과가 허락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우진 않아요.”바이렌의 시선이 에이슬라가 적은 날짜에 머물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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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처음부터 너였어

“왜 죽은 네 손이 이 몸에서 움직이지?”바이렌의 질문이 떨어진 뒤에도 에이슬라는 은제 약숟가락을 놓지 못했다.손잡이 끝의 흠집은 열아홉 살 겨울 약제원 계단에서 떨어뜨렸을 때 생긴 것이었다.눈금보다 반 숟갈 적게 뜨는 버릇도,엄지로 손잡이를 두 번 두드리는 습관도 네르시아의 몸이 아니라 자신이 기억하고 있었다.“제 손이니까요.”그 말이 방 안에 놓이자 네르시아의 왼손이 천천히 오므라들었다.바이렌은 사망기록과 그녀의 오른손을 번갈아 봤다.“왕비가 다시 눈을 뜬 날부터였나.”에이슬라는 찻잔 가장자리로 시선을 내리려다 멈췄다.이번에도 숨기면 그가 아니라 자신이 대답을 빼앗는 사람이 된다.“네.”“첫날 내 검 앞에 있던 사람도.”“저였어요.”“독을 알아보고 잔을 쳐낸 사람도.”“저였고요.”“목욕실에서 타론을 살린 사람도.”“저예요.”바이렌의 손가락이 기록 위의 날짜를 하나씩 짚었다.의심했던 날.문을 잠갔던 날.미량의 독을 먹여 반응을 살폈던 날.네르시아에게 돌려준다고 믿었던 모든 상처를 다른 사람이 대신 받았다.“나는 네가 아닌 사람의 죄로 너를 벌했다.”“모르고 한 일이었어요.”“모른다는 이유로 없어지지는 않는다.”그는 변명 없이 고개를 숙였다.“미안하다.”에이슬라는 숟가락을 상자 안에 내려놓았다.“그 사과는 네르시아에게도 해야 해요.”왼손이 유렌의 기록지 위로 움직였다.[ 늦었어. ]바이렌은 그 글자를 끝까지 읽었다.“그래도 하겠다.”왼손은 더 쓰지 않았다.에이슬라는 그의 손가락 사이에 말라붙은 피를 보았다.자신의 심장 앞에서 칼날을 막다가 생긴 상처였다.“제가 누구인지 알았는데도 경비를 부르지 않네요.”“부를 이유가 있나.”“죽은 평민이 왕비의 몸을 쓰고 있어요.”“네가 빼앗았다는 증거는 없다.”“그래도 왕비는 제가 아니에요.”“그 판단은 네르시아와 네가 한다.”바이렌은 열린 문을 가리켰다.“나가고 싶다면 막지 않겠다.”에이슬라의 손이 상자 가장자리에서 멈췄다.왕실의 체면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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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화. 왕비를 죽여 달래

바이렌은 은제 약숟가락을 상자 안에 되돌려 놓았다.“오늘 들은 이름은 이 방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에이슬라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왜요?”“네가 말하지 않은 것을 내가 먼저 밝힐 권리는 없으니까.”그는 사망기록만 접어 들고 문을 열었다.복도에는 유렌과 메브라가 기다리고 있었다.바이렌은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았다.다만 왕비궁의 출입 기록을 봉인하고, 에이슬라 모렌의 유품 상자를 다시 가져가지 말라고 명했다.그 침묵이 해명보다 빠르게 궁 안을 돌았다.왕비궁 주방의 빈 접시와 약상자까지 소문의 증거가 되었다.아침 식탁에 쿠키가 놓이기도 전에 첫 번째 소문이 도착했다.[ 왕비가 죽은 약제사의 숟가락으로 국왕에게 정체불명의 약을 먹였다. ]에이슬라는 쪽지를 두 번 읽었다.“저는 폐하께 약을 먹인 적이 없는데요.”바이렌이 찻잔을 들었다.“내가 밤새 왕비궁에 있었다는 사실이 붙었겠지.”“그건 제가 열이 났기 때문이고요.”“설명하면 믿을 것 같나.”에이슬라는 곧바로 시녀들을 불렀다.“어젯밤 폐하께서 드신 건 차뿐이었다고 알려 주세요.”메브라가 망설였다.“차를 드셨다는 부분은 빼는 편이 좋겠습니다.”“왜요?”두 번째 쪽지가 문틈으로 들어왔다.[ 왕비가 매일 다른 차로 왕의 정신을 길들이고 있다. ]에이슬라는 쪽지를 뒤집었다.“누가 이런 걸 쓰죠?”유렌이 종이 냄새를 맡지 않고 가장자리의 압인부터 확인했다.“궁 안에서 만든 겁니다. 하인용 기록지예요.”“그럼 직접 설명하겠습니다.”에이슬라는 점심 배식 시간에 왕비궁의 시녀와 시종들을 한자리에 모았다.바이렌은 따라오지 않았다.그가 곁에 있으면 협박으로 보일 수 있다는 에이슬라의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폐하께 약을 먹이거나 정신을 흐리게 한 적은 없습니다.”사람들은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쿠키도 협박이 아니고요.”누군가 쟁반을 떨어뜨렸다.“웃는 것도 살해 전조가 아닙니다.”이번에는 맨 뒤에 있던 시종이 무릎을 꿇었다.“용서해 주십시오, 왕비 전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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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오늘 밤 여섯이 죽어요

“아이의 입에서 왕비 전하께서 쓰시던 독 냄새가 납니다.”에이슬라는 계단 아래에 쓰러진 아이 곁에 무릎을 꿇었다.입술과 혀에는 독이 닿은 흔적이 없었다.단내는 아이의 숨이 아니라 젖은 소매 끝에서 올라왔다.그녀가 천을 뒤집자 말라붙은 약액이 안감까지 번져 있었다.“먹은 게 아니에요. 약병을 안고 있었던 것 같아요.”바이렌이 두 걸음 뒤에서 멈췄다.“옮겨도 되나.”“목이 꺾이지 않게 받쳐 주세요.”그는 아이의 어깨와 무릎 아래에 손을 넣었다.에이슬라는 사용하지 않던 응접실의 긴 의자를 비우게 했다.“문은 열어 둬요.”“사람이 몰릴 수 있다.”“눈을 떴을 때 갇혔다고 느끼는 것보다는 나아요.”바이렌은 근위대를 문에서 물렸다.메브라는 뜨거운 물과 마른 천을 가져왔고,유렌은 아이가 쥐고 있던 그림과 봉투를 따로 펼쳤다.에이슬라는 아이의 젖은 겉옷을 벗기기 전에 매듭부터 풀었다.목덜미에는 열이 올랐고 손끝은 창백했다.며칠 굶은 몸으로 비를 맞으며 걸어온 탓이었다.그녀는 묽은 보리물에 소금을 조금 풀어 한 모금씩 입술에 적셨다.아이의 맥은 약했지만 일정했다.에이슬라는 소매 안쪽의 약액을 천 조각에 따로 묻혀 봉투에 넣었다.“버리지 마세요. 같은 냄새가 다시 나오면 대조해야 해요.”“독이 아닙니까?”“지금 확인되는 건 열과 탈수예요. 냄새만으로 독을 정하면 필요한 치료를 놓칩니다.”유렌이 그 말을 기록지 첫 줄에 적었다.아이의 숨이 차츰 고르게 돌아오는 동안 문밖에는 손을 덴 요리사와 기침을 참던 시녀가 섰다.왕비에게 약을 받으면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는 소문을 믿으면서도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었다.에이슬라는 빈 의자 두 개를 더 들이게 했다.“치료받는 조건은 하나뿐이에요.”사람들의 손이 옷자락 아래로 숨었다.“아픈 곳을 감추지 않는 것.”요리사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맹세는 안 해도 됩니까?”“약을 먹는데 왜 맹세가 필요하죠?”메브라는 찻잔을 치우고 붕대와 약병을 순서대로 놓았다.유렌은 환자의 이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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