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궁의 문이 열렸지만 라디온은 문턱을 넘지 않았다.그는 계단 아래에서 에이슬라의 얼굴이 아니라 왼손부터 바라봤다.북부 사절 셋이 마차 곁에 서 있었고, 왕비궁의 시종들은 열린 문 안쪽에 줄지어 섰다.오늘의 면담은 처음부터 둘만의 자리가 아니었다.“들어가도 되겠느냐, 네르시아.”에이슬라는 문을 더 활짝 열었다.“왕비에게 면담을 청한 분이 왜 허락은 네르시아에게 구하죠?”라디온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잠시 멎었다.“이름 하나 바꾼다고 사람이 달라지지는 않아.”“그럼 들어오세요, 아벨룬 대공.”그녀가 먼저 응접실로 향했다.양쪽 문은 모두 열린 채였고, 유렌은 사절들이 볼 수 있는 자리에 기록지를 펼쳤다.바이렌은 약속대로 에이슬라의 뒤가 아니라 오른편에 섰다.라디온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그의 시선이 흙이 흐트러진 검은 백합 화분에 닿았다.“어머니의 눈을 찾았구나.”에이슬라는 검은 천에 싼 반지를 탁자 위에 올렸다.“열세 살 아이를 성교회로 넘기려던 인장도 함께 찾았어요.”사절들의 표정이 달라졌다.라디온은 반지에 손대지 않았다.“네르시아의 피가 필요했다.”“그래서 치료라는 이름으로 후견권을 넘겼나요?”“그 아이가 아니면 어머니를 살릴 수 없었으니까.”에이슬라는 반지 안쪽에 말라붙은 피를 사절들에게 보였다.“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딸을 죽이려 했다는 뜻으로 기록하면 되겠네요.”유렌의 펜이 종이 위를 달렸다.라디온이 그제야 기록지를 돌아봤다.“말을 골라라.”“대공이 고를 말은 이미 끝났어요.”에이슬라는 자신의 왼손을 탁자 위에 펼쳤다.“이 피가 누구 것인지 대답하세요.”라디온의 시선이 손바닥의 흉터에 박혔다.“네르시아의 것이다.”“왜 생겼죠?”“그 아이가 제 운명을 거부했으니까.”“운명이 아니라 대공의 명령이겠죠.”라디온이 한 걸음 다가왔다.에이슬라의 왼손 손가락이 저절로 접혔다.그는 사절들이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도록 옆으로 비켜섰다.“보셨습니까.”“내 동생의 몸은 아직 나를 기억합니다.”에이슬라는
Last Updated : 2026-07-23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