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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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화. 내 이름으로 서명해

거울 속 왕비가 에이슬라의 왼손을 빼앗았다.“내 몸을 돌려줘.”네르시아가 유리 안쪽에서 손바닥을 눌렀다.“그리고 그 남자에게는 말하지 마.”에이슬라는 붙잡힌 듯 움직이지 않는 손을 내려다봤다.“왜 숨겨야 하죠?”“왕은 모르는 것을 가두고, 오라버니는 잃을 것을 죽여.”“폐하는 달라지고 있어요.”“내 얼굴을 보면서도 그렇게 믿을 수 있나?”문밖에서 발소리가 멈췄다.“왕비.”바이렌이었다.거울 속 손이 사라지자 에이슬라의 손바닥이 유리에서 떨어졌다.그녀는 조제표를 소매 안에 넣었다.바이렌은 열린 문 너머에 선 채 들어오지 않았다.“누구와 말했지.”“혼잣말입니다.”“거울이 대답했나?”에이슬라의 엄지가 검지 마디를 세 번 문질렀다.바이렌의 시선이 그 손에 닿았다.그는 거짓말을 알아봤지만 방 안으로 한 걸음도 들어오지 않았다.“협정 첫날부터 숨기는군.”“확인되지 않은 것은 아직 증거가 아닙니다.”“확인되면 말하나?”“제가 말해도 되는 일인지 알게 되면요.”바이렌은 잠시 침묵하다 문을 더 열었다.“그럼 감시 방식을 바꾼다.”“협정을 깨시겠다는 건가요?”“빈틈을 줄이겠다는 뜻이다.”그는 탁자 위 협정서를 펼쳤다.[ 왕과 왕비는 식사, 이동, 진료 시간을 서로 공유한다. ]에이슬라는 그 아래 한 줄을 적었다.[ 상대가 거절하면 이유를 묻되 강제로 동행하지 않는다. ]“거절부터 준비하는군.”“폐하께서 따라올 명분부터 만드셨으니까요.”“감시다.”“세 끼를 함께 먹는 감시는 처음 듣습니다.”문밖의 타론이 고개를 돌렸다.바이렌은 펜을 내려놓았다.“내 잔에서 독을 찾은 사람이니 효율적이다.”“독물 검사관을 식탁에 앉히세요.”“그자는 네가 웃으면 해독제부터 삼킨다.”아침 식탁에서 바이렌은 빵보다 에이슬라의 손을 먼저 살폈다.그녀가 잼 병을 들자 근위병 둘이 동시에 자세를 고쳤다.“독이 없습니다.”“그 말을 믿고 마셨다가 연회가 끝났다.”“살아 계시잖아요.”“네가 쓰러졌지.”에이슬라는 대답 대신 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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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그 웃음, 나만 봐

‘네’의 두 번째 획이 내려오기 전에 에이슬라는 펜을 꺾었다.부러진 펜촉이 협정서 위를 긁으며 검은 선을 남겼다.왼손은 멈추지 않았다.손가락이 부러진 자루를 움켜쥔 채 네르시아의 이름을 끝까지 쓰려 했다.에이슬라는 오른손으로 손목을 눌러 탁자에 박았다.“내 손에서 나가요.”바이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누구에게 하는 말이지.”거울 속 네르시아가 손바닥을 유리 안쪽에 붙였다.'내 이름을 써.'에이슬라는 서명란을 찢어 촛불에 던졌다.‘네’ 한 글자가 불길 속에서 검게 오그라들었다.왼손의 힘도 그제야 풀렸다.“방금 네가 움직인 게 아니군.”“제 손이었습니다.”“네 손이 네 말을 듣지 않았지.”에이슬라는 손가락에 묻은 잉크를 소매로 닦았다.“아직 설명할 수 없습니다.”“거울 때문인가.”그녀의 시선이 순간 거울로 향했다.바이렌은 대답을 얻은 사람처럼 천을 들어 유리 위에 덮었다.“보이지 않으면 멈추나.”“모르겠어요.”“그럼 모르는 동안은 가려 둔다.”그는 찢어진 협정서를 회수했지만 에이슬라의 손을 잡지는 않았다.“다시 쓸 수 있겠나.”“제가 원할 때요.”“그때까지 기다리지.”다음 날 아침, 에이슬라는 거울을 보지 않고 옷을 입었다.메브라가 높은 옷깃으로 검은 독맥을 가려 주는 동안 문밖에서 시녀들의 발이 엉켰다.바이렌이 아침 식사와 함께 들어왔다.“오늘은 왜 왕비궁에서 드십니까?”“감시 계약의 첫 일정이다.”“계약서는 불탔습니다.”“네가 다시 쓰겠다고 했다.”“식사까지 포함한다고는 안 했어요.”바이렌은 맞은편 의자를 당겼다.“지금 추가하지.”에이슬라가 차를 들자 시녀 하나가 해독제 병부터 꺼냈다.“그건 넣어 두세요.”에이슬라가 웃으며 말하자 병마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시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무릎을 꿇었다.“죽을죄를 지었습니다.”“웃었을 뿐인데 왜 죽으려고 해요?”“전하께서 웃으신 뒤에는 늘 누군가 사라졌습니다.”에이슬라에게는 가벼운 미소였지만 이 방의 사람들에게는 처벌을 고르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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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그 독, 내일도 가져와

“그 남자는 단것을 싫어해.”은쟁반에 비친 네르시아가 먼저 말했다.에이슬라는 버터를 자르던 칼을 멈추지 않았다.“그래서 직접 만들 거예요.”“싫어하는 걸 먹여서 무엇을 확인하려고?”“폐하가 보는 게 당신의 얼굴인지, 제가 건넨 것인지요.”왕비궁 주방의 요리사들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그들에게 보인 것은 왕비가 빈 쟁반을 향해 혼잣말하는 모습뿐이었다.막내 요리사가 밀가루 자루 뒤로 숨었다.“오늘은 아무도 벌하지 않아요.”그 말에 다른 요리사까지 칼을 내려놓았다.에이슬라는 한숨 대신 계량 숟가락을 들었다.밀가루 열두 숟갈.버터 여섯 숟갈.설탕은 셋.말린 귤껍질은 손톱만큼.약제원에서 밤을 새울 때 만들던 자신의 배합이었다.네르시아의 입맛도, 왕실 조리법도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왼손이 설탕 그릇 위에서 멎었다.쟁반 속 네르시아가 웃었다.“그는 네가 만든 것을 먹는 게 아니야.”“그럼 누구의 것을 먹죠?”“내 얼굴이 내민 것을 먹겠지.”에이슬라는 설탕을 한 숟갈 덜어 냈다.“그것도 확인하면 됩니다.”반죽을 눌러 모양을 잡고 철판을 꺼내던 순간 검지 끝이 뜨거운 가장자리에 닿았다.메브라가 곧장 다가왔다.“제가 하겠습니다.”“마지막 판만요.”“허락하시는 겁니까?”에이슬라는 잠시 멈췄다가 집게를 건넸다.“네. 부탁할게요.”자신이 시작했다는 이유로 끝까지 혼자 다칠 필요는 없었다.구워진 쿠키에서는 옅은 귤 향이 났다.에이슬라는 가장 못생긴 것을 골라 먼저 먹었다.독이 없다는 증명이 아니라, 이 맛이 정말 자신의 선택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바이렌의 집무실에 접시를 내려놓자 그는 서류보다 천으로 감싼 손가락부터 봤다.“다쳤나.”“쿠키를 굽다가요.”“왜 직접 했지.”“제가 만든 것을 드리고 싶어서요.”바이렌의 손이 접시 앞에서 멈췄다.“독물 검사관을 불러.”“그렇게까지 의심스러우면 안 드셔도 됩니다.”“안 먹겠다고 한 적은 없다.”검사관은 불려 오자마자 은침과 시약을 꺼냈다.쿠키를 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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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이 칼, 왜 아직 갖고 있죠

왕비가 단검을 내미는 순간, 왕의 근위대가 일제히 칼을 뽑았다.쿠키 접시를 들고 있던 메브라만 한숨을 삼켰다.“선물입니다.”타론이 에이슬라와 단검을 번갈아 봤다.“어느 쪽이 말입니까?”“둘 다요.”“전하, 왕비가 배우자에게 단검을 주는 건 결투 신청입니다.”에이슬라는 포장끈을 쥔 채 굳었다.“왜 아무도 미리 말하지 않았죠?”“제가 세 번 말씀드렸습니다.”메브라가 쿠키 접시를 탁자에 내려놓았다.“장인들이 겁먹어서 지어낸 풍습인 줄 알았어요.”“그 풍습 때문에 겁먹은 겁니다.”바이렌은 검을 뽑지 않았다.그는 집무실 문 앞에 선 에이슬라를 보며 물었다.“오늘은 독 다음에 칼인가.”“폐하의 칼집이 갈라졌잖아요.”어제 마지막 쿠키를 나눠 줄 때 낡은 가죽끈이 탁자 모서리에 걸렸었다.돌문을 부순 손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상처였다.“그래서 날 찌를 칼부터 바꿨나.”“구하러 오실 때 손을 다치지 말라는 뜻입니다.”말이 끝나자 근위대의 검끝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바이렌의 시선은 내려가지 않았다.“내 손을 봤나.”“피가 났으니까요.”“그걸 기억했고.”“다친 사람의 상처를 기억하는 건 약제사의 일이에요.”에이슬라는 곧 잘못을 깨닫고 찻잔 테두리를 바라봤다.왕비가 왜 약제사의 일을 자기 것처럼 말하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바이렌은 그 빈틈을 짚지 않았다.대신 손을 내밀기 전에 물었다.“열어 봐도 되나.”에이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포장을 풀고 단검을 들었다.검은 나무 손잡이와 월계 잎이 새겨진 칼집이었다.날은 사람을 베기 어렵게 다듬었고, 끝은 봉인끈을 끊을 만큼만 살아 있었다.“무딘 칼을 준 건가.”“왕을 지키는 칼이 꼭 사람부터 베어야 합니까?”“나를 죽일 생각은 없다는 증명인가.”“제가 폐하를 죽이려 했다면 쿠키부터 끊었겠죠.”타론이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닫았다.바이렌은 단검을 허리에 대 봤다.낡은 칼집보다 손에 잘 맞았지만 곧 차지 않았다.“손잡이 끝은 왜 돌아가지.”“열어 보세요.”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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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당신을 기억한 건 내가 아니야

왕의 칼이 숨긴 지도는 오늘 밤 바이렌과 춤춰야 할 자리에서 끊겨 있었다.에이슬라는 대연회장 도면 위에 지도 조각을 겹쳤다.찢긴 선의 끝은 무도회장 중앙의 검은 백합 문양과 정확히 맞았다.“무도회를 취소하면 안 됩니까?”바이렌은 지도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취소하는 순간 누군가 우리가 길을 찾았다고 안다.”“그럼 춤추면서 바닥을 조사해야겠네요.”“춤출 수 있나?”에이슬라는 침묵했다.맥박은 셀 수 있었고 독은 냄새만으로 가려낼 수 있었다.그러나 사람의 허리에 손을 얹고 넘어지지 않는 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걷다가 방향을 바꾸는 정도라면요.”“그건 도주다.”바이렌이 손을 내밀었다.“연습은 네가 정해.”그의 뒤에는 열린 문이 남아 있었다.에이슬라는 퇴로를 확인한 뒤 손을 올렸다.“한 번만 하겠습니다.”“멈추고 싶으면 말해.”손바닥이 맞닿는 순간 왼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엄지는 바이렌 손등의 흉터를 피했고 손가락은 익숙한 자리를 찾아 끼워졌다.에이슬라는 곧장 손을 뺐다.“제가 잡은 게 아니에요.”바이렌은 다시 손을 내밀지 않았다.“오늘 밤에는 네가 먼저 잡아.”그날 밤, 국경 사절단장은 첫 곡이 끝나자 잔을 들어 올렸다.“왕과 왕비의 서약무를 볼 수 있다면 국경의 의심도 사라질 것입니다.”연회장의 시선이 한꺼번에 에이슬라에게 꽂혔다.바이렌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앞에 섰다.“거절해도 된다.”“그러면 저들이 더 의심하겠죠.”“그 의심은 내가 감당한다.”“오늘은 저도 나누겠습니다.”에이슬라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바이렌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 뒤에야 손을 잡았다.음악이 시작됐다.첫 박자에 에이슬라는 오른발을 내딛으려 했다.그러나 몸은 왼쪽으로 미끄러졌다.두 번째 박자에는 바이렌의 손이 허리에 닿기 전부터 중심을 기울였다.세 번째 회전에서는 그가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까지 알고 있다는 듯 발끝이 길을 열었다.에이슬라는 춤을 몰랐다.그런데 네르시아의 몸은 바이렌이 어느 박자에서 왼쪽 무릎을 아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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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이번엔 놓지 마요

“이번에는 끝까지 찔러.”거울 속 네르시아가 명령했다.에이슬라의 왼손이 단검을 뽑았다.칼끝은 곧장 바이렌의 심장으로 향했다.그는 검을 잡지 않았다.한 걸음 물러설 수도 있었지만 에이슬라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네가 멈출 때까지 기다린다.”그 말이 왼손보다 먼저 에이슬라를 움직였다.그녀는 오른손으로 손목을 내리눌러 칼의 방향을 꺾었다.단검이 바이렌의 가슴을 스치고 검은 백합 상자의 자물쇠에 박혔다.딱딱한 파열음과 함께 잠금장치가 갈라졌다.동시에 거울 속 네르시아의 얼굴에도 금이 번졌다.“내가 고른 거예요.”에이슬라는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놓았다.“당신이 아니라 상자를 찌르기로.”바이렌이 다가오려 하자 그녀는 손바닥을 들었다.“아직 가까이 오지 마세요.”그는 바로 멈췄다.열린 상자 안에는 시신도 문서도 없었다.바닥에는 사람의 심장 모양으로 눌린 검은 백합과 푸른 실을 감은 가느다란 철사만 남아 있었다.철사의 한쪽은 잘려 있었고 다른 쪽은 상자 바닥의 작은 구멍으로 이어졌다.에이슬라는 손수건으로 철사를 감아 살짝 당겼다.무도회장 아래에서 톱니가 한 번 돌아갔다.그 순간 드레스 안쪽에서 무언가 발목을 스치고 지나갔다.“손대지 마세요.”바이렌이 즉시 멈췄다.에이슬라는 치맛단을 들지 않은 채 안감의 무게만 확인했다.방금까지 없던 당김이 생겨 있었다.상자는 비어 있는 게 아니었다.춤을 춘 사람의 옷에 다음 함정을 심는 장치였다.“누가 먼저 비웠군.”“아니요.”에이슬라는 상자 안쪽의 긁힌 자국을 살폈다.철사를 최근에 빼냈다가 다시 연결한 흔적이었다.“우리가 이걸 열도록 기다린 거예요.”“왜.”“다음 죽음을 시작하려고요.”그 말이 끝나자 검은 백합 타일의 틈이 닫혔다.연회장은 다시 음악과 박수로 가득 찼다.국경 사절들은 왕비가 왕을 찌르려 했다는 사실도,바닥 아래 장치가 움직였다는 사실도 보지 못했다.바이렌은 단검을 칼집에 넣고 손잡이를 에이슬라에게 보였다.“돌려줘도 되나.”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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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형을 버리고 나랑 가요

“형수님, 형을 버리고 저랑 도망치시죠.”봉쇄된 대계단 위 왕실 전용 회랑에서 낯선 남자가 인장을 튕기며 내려왔다.근위병들이 길을 막자 그는 웃으며 손바닥을 보였다.“칼은 없습니다. 오늘은 형수님만 훔치러 왔거든요.”“유렌 전하.”타론의 부름에 에이슬라는 남자를 다시 봤다.바이렌과 닮은 눈매.그러나 위협을 웃음으로 덮는 방식은 전혀 달랐다.유렌 칼드로.왕의 이복동생이자 왕위를 원하지 않는다고 떠들수록 반역 소문이 커지는 왕자였다.그는 계단 아래 놓인 복제 구두 앞에서 멈췄다.“왕비궁 물건은 아니네요.”“만져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십니까?”“뒤축이 두 겹입니다. 왕실 극장에서 신장을 바꿀 때 쓰는 구두죠.”유렌은 손대지 않은 채 밑창을 살폈다.“걸음까지 왕비처럼 보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에이슬라는 구두 안쪽의 문장을 다시 읽었다.두 번째 왕비는 네가 아니다.“전하는 두 번째 왕비가 누군지 압니까?”“안다면 벌써 도망쳤겠죠.”“혼자서요?”“형수님과 가면 덜 심심할 것 같아서요.”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인장이 쉬지 않고 돌았다.농담은 가벼웠지만 손끝은 불안할 만큼 빨랐다.에이슬라는 구두의 뒤축에 묻은 검은 기름을 가리켰다.“왕실 극장과 북쪽 지하 통로가 연결돼 있습니까?”유렌의 인장이 한순간 멈췄다.“공연용 승강기가 오래된 피난로와 맞닿아 있습니다.”“그 길을 아는 사람은요?”“왕가와 극장 감독관, 그리고 몰래 궁을 빠져나가 본 왕자 정도겠죠.”타론의 시선이 즉시 유렌에게 꽂혔다.그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품에서 장부 조각을 꺼냈다.“어젯밤 극장에서 사라진 물품입니다.”왕비용 푸른 구두 한 켤레.검은 백합 장식 두 개.변장용 어깨틀 하나.반출 승인란에는 네르시아 아벨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제 이름을 쓴 사람이 또 있군요.”“형수님의 이름은 궁에서 가장 편리한 흉기니까요.”에이슬라는 종이를 직접 받지 않았다.“난간 위에 놓아 주세요.”“독이 묻었을까 봐요?”“전하가 쥔 물건은 독보다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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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내 손에 입 맞추면 죽어요

“형수님께 형을 버리고 저와 도망치자고 했습니다.”유렌의 대답이 협상장 문 앞까지 퍼졌다.바이렌은 동생을 보지 않았다.“왕비의 대답은.”“지금 하겠습니다.”에이슬라는 유렌을 향해 돌아섰다.“폐하를 버리지 않습니다.”귀족들 사이에서 탄식이 번졌다.“전하와 도망칠 생각도 없고요.”유렌은 가슴을 누르며 웃었다.“두 번 차이면 정말 아픕니다.”“다음부터는 미끼가 되기 전에 상대의 허락부터 받으세요.”그 말에 유렌의 손가락 사이를 돌던 인장이 멎었다.바이렌은 에이슬라의 어깨와 발목을 확인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다쳤는데도 협상장에 들어갈 건가.”“제가 빠지면 저들이 왕실이 갈라졌다고 믿을 겁니다.”“그 의심은 내가 감당한다.”“저를 빼고 제 혼인을 설명하게 두지 않겠습니다.”바이렌은 잠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네가 정해.”협상장 안에서는 북부 사절단이 재서명 보류 문서를 펼쳐 놓고 있었다.첫 줄에는 왕실 혼인의 불안정.둘째 줄에는 둘째 왕자의 계승 가능성.셋째 줄에는 왕비의 생존 여부가 적혀 있었다.에이슬라는 마지막 문장을 손끝으로 짚었다.“제가 살아 있는지 협정 조건으로 확인하겠다는 겁니까?”사절단장이 잔을 들어 올렸다.“왕비 전하께서 어느 왕자와 뜻을 함께하시는지 묻는 것입니다.”“제 뜻은 제 입으로 말하겠습니다.”“말은 바뀔 수 있지요.”그의 시선이 바이렌에게 향했다.“왕께서 증명해 주신다면 믿겠습니다.”사절단의 서기관이 오래된 혼인 의례서를 펼쳤다.공식 석상에서 왕이 왕비의 손등에 입을 맞추면 혼인 동맹을 재확인한다는 조항이었다.너무 정확한 준비였다.도주 소문이 퍼지고, 협상 보류 문서가 도착하고,입맞춤 관례가 제시되기까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누군가는 이 순간을 미리 짜 놓았다.에이슬라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바이렌도 움직이지 않았다.“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그의 대답에 사절단장이 웃었다.“왕비의 손조차 잡지 못하는 혼인이군요.”유렌이 뒤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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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내 등에 누가 썼죠

“두 번째 왕비가 기다리고 있어.”베일 쓴 여자가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에이슬라가 뒤따르려는 순간 바이렌의 손이 앞을 막았다.그는 그녀를 붙잡지 않고 통로 바닥을 가리켰다.푸른 구두 자국 사이로 투명한 액체가 가늘게 번지고 있었다.“흰 황혼입니다.”에이슬라는 숨을 멈추고 손바닥으로 바이렌의 입을 가리려다 손을 거뒀다.“소매로 입과 코를 막으세요.”타론이 근위병들을 물렸고 유렌은 바닥에 떨어뜨린 인장을 주웠다.통로 끝에서 베일이 한 번 흔들렸다.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네 몸부터 확인해, 약제사.”곧 돌문이 닫혔다.저 여자는 왕비의 얼굴만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몸 안에 든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바이렌이 물었다.“무슨 뜻이지.”“지금은 독부터 처리해야 합니다.”에이슬라는 해독제 병을 확인했다.바이렌의 입술에 생긴 열쇠 모양 반점은 더 번지지 않았지만,자신의 손등은 붉게 부어오르고 있었다.“왕비궁으로 돌아가겠습니다.”“혼자 가나.”“메브라와요.”“나는.”“폐하는 여기 남아 통로를 봉쇄해 주세요.”바이렌은 대답하기 전 열린 퇴로를 확인했다.“돌아오겠다고 약속할 수 있나.”“오늘 안에요.”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기다린다.”왕비궁 욕실에 들어서자 메브라는 문을 잠그고 커튼까지 내렸다.에이슬라는 손등의 독막부터 씻어 냈다.쓴 향은 사라졌지만 목 아래의 검은 독맥이 어깨 쪽으로 갈라져 있었다.“등을 봐야겠습니다.”“독이 번졌나요?”“그것만은 아닙니다.”메브라는 옷깃을 풀기 전에 물었다.“벗겨도 되겠습니까?”에이슬라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어깨까지만요.”메브라의 손이 멈췄다.“등 전체를 봐야 합니다.”“이유부터 말해 주세요.”“전하의 몸에는 원래 있던 상처가 많습니다.”에이슬라는 거울을 보지 않았다.“얼마나요?”“제가 처음 모시기 시작했을 때 이미 세지 못할 만큼이었습니다.”에이슬라는 허락한 뒤 천천히 등을 돌렸다.드레스가 내려가자 찬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메브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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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당신이 본 왕비는 가짜였어요

“왕을 처음 독살한 날, 네르시아는 왕궁에 없었습니다.”에이슬라의 말에 바이렌의 손이 장부 위에서 멎었다.마엘라 유모는 닫힌 기록고 문 앞에 서서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얼굴로 대답했다.“제가 직접 북문을 나가는 마차를 봤습니다.”“왕비가 타고 있었나.”“얼굴까지 확인했습니다.”바이렌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그런데 사흘 뒤 나는 네르시아를 봤다.”“얼굴을 보셨습니까?”에이슬라가 물었다.“검은 베일을 쓰고 있었다.”“목소리는요?”“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왼손은 보셨나요?”바이렌은 대답하지 못했다.그날 왕비의 옷을 입은 사람은 술잔을 건넨 뒤 고개만 숙였다.바이렌이 잔을 내려놓자 곧장 방을 나갔다.왕비답지 않게 웃지도, 비웃지도 않았다.그 침묵을 증오라고 믿었고 독이 발견된 뒤에는 자백이라고 여겼다.“확인하지 않은 얼굴에 네르시아의 죄를 씌운 겁니다.”에이슬라의 말이 기록고 안에 남았다.바이렌은 변명하지 않았다.“그렇다.”마엘라는 품에서 날짜만 수놓은 아마포를 펼쳤다.검은 실은 네르시아가 기억을 잃고 돌아온 날이었다.자주색 실은 누군가 다치거나 쫓겨난 날이었다.푸른 실은 왕비의 이름으로 명령서가 발급된 날이었다.세 색의 매듭은 항상 같은 순서로 이어졌다.기억 상실.왕비의 죄.아벨룬 가문의 명령.“사건이 일어난 날을 기록한 게 아니군요.”에이슬라가 말했다.“사건이 시작된 날입니다.”마엘라가 마지막 매듭을 풀었다.안쪽에는 피로 굳은 작은 열쇠가 꿰매져 있었다.“왕비 전하께서는 기억을 잃을 때마다 같은 말을 하셨습니다.”“무슨 말이죠?”“이번에는 며칠을 빼앗겼느냐고요.”에이슬라는 천 위의 날짜를 세었다.처음에는 하루.다음에는 이틀.왕실 혼담 뒤에는 사흘.왕을 독살한 사건 직전에는 닷새가 비어 있었다.네르시아는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누군가에게 몸을 빼앗겼다 돌려받고 있었다.등에 새겨진 회수 표식은 도망친 죄인의 낙인이 아니었다.몸을 다시 찾아가겠다는 소유권 표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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